1. 개요
福島悪魔払い殺人事件1994년에서 1995년에 걸쳐 후쿠시마현 스카가와시(須賀川市)에서 발생한 살인 사건. 사이비 종교가 연관된 살인사건인 데다[1] 내용도 잔혹한 편이지만 비슷한 시기에 일어난 도쿄 지하철 사린 사건 등 옴진리교 관련 사건들의 규모가 워낙 컸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많이 알려지지 않고 묻혔던 사건이다.[2]
2. 상세
1994년 말에서 1995년 6월에 이르는 동안 자칭 '기도사'라는 여성 에토 사치코(江藤幸子)를 주축으로 그녀의 장녀와 2명의 남성 신도가 공모하여 '악령을 쫓는다', '신이 하는 일이다'라며 제령(除霊)을 칭하면서 신도 7명을 무차별적으로 폭행하는 일이 일어났다. 이 7명의 신도들은 에토에게서 '여우의 혼령이 씌었다'는 선고를 받았으며 폭행을 당한 7명 중 6명이 사망하고 여성 신도 1명은 중상을 입게 되었다.그러던 중 스카가와에 거주하던 한 남성이 6월경부터 아들이 집에 돌아오지 않는다며 실종 신고를 제출했고 7월에 중상을 입은 여성 신도가 입원 치료를 받게 된 것을 계기로 경찰에서는 에토의 자택을 수색했다. 그 결과 사망한 신도 6명의 미라화된 시신이 발견되었으며 폭행에 가담한 에토를 포함한 4명의 용의자들은 전원 체포되었고 당시 중상을 입은 피해자도 후에 폭행에 가담한 사실이 드러나 체포되었다.
3. '기도사' 에토 사치코
에토 사치코는 슬하에 1남 3녀를 두고 화장품 방문 판매 일을 하면서 생활하던 평범한 주부였다.[3] 그녀의 남편은 도장공 일을 하고 있었으나 허리를 다쳐 일을 그만둔 후에는 도박에 빠진 끝에 거액의 빚을 갚지 못해 집을 팔아야 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이런 가정환경의 여파로 에토 부부는 기후현에 본거지를 둔 오가미야 라는 종교단체에 가입했지만 종교 활동 도중 무단으로 교단 본부의 이름을 사칭한 사실이 드러나 파문당하고 1992년에는 남편이 실종되었다.에토는 남편이 실종된 후 '기도사'를 자칭하며 서서히 신도들을 모으기 시작했고 1994년 말부터 신도 2가족 10여명을 자신의 집으로 들여 공동생활을 시작했는데 이 시기부터 신도들에게 자신을 '사치코 님'으로 부르게 했고 '악령 퇴치', '신의 뜻'이라는 명목으로 신도들에 대한 폭행이 시작되었다. 당시 그녀를 따르던 신도 중에는 고혈압 등의 지병을 앓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녀는 이들에게 약을 쓴다는 것은 몸에 독을 집어넣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며 약을 모두 끊고 자신에게 안수기도를 받을 것을 권고했고 신도들은 이를 따랐다.
공동생활 중 에토는 21세의 젊은 남성 신도 네모토[4]와 내연 관계가 되었다. 그 와중에 여성 신도 한 명이 네모토를 유혹했다고 생각해서 질투에 사로잡힌 에토는 여성 신도에게 '여우가 씌었다'는 명목으로 폭행을 가했고 자신의 장녀는 물론 심지어 이 여성 신도의 남편에게까지 폭행을 지시한 끝에 결국 사망하게 만들었다. 이후에도 에토와 그녀의 측근들은 차례로 신도들을 폭행, 사망하게 했는데 당시 살해당한 사람들은 모두 에토의 방식에 의문을 품거나 돈을 빌려 달라는 요구를 거절한 사람들이었다고 한다.
4. 재판
1995년 8월 후쿠시마지검은 당초에는 살해 의사가 인정되는 구체적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상해치사죄로 기소했으나 1개월 후인 9월 살인죄로 기소했다.2002년 5월, 후쿠시마 지방법원은 "자기중심적으로 신자들을 차례차례로 구타하여 살해한 행위는 종교적 행위라 할 수 없다. 책임이 너무나 막중하기에 극형에 처함이 마땅하다"며 에토에게 사형, 폭행을 저지른 주범들 중 에토의 장녀[5]와 네모토에게는 무기징역, 다른 45세의 남성 신도에게는 징역 18년을 언도했다.[6] 에토는 판결 당일 즉각 항소했으나 기각되었고 2008년 최고재판소에서 사형이 확정되어[7] 2012년 9월에 사형이 집행되었다.
5. 여담
- 일본의 유명 유튜브 채널인 휴먼버그대학에서도 해당 사건이 소개된 적이 있다.
다만 실제 본명 대신 가명을 사용했는데 그래서인지 주모자의 이름도 에토 사치코에서 스도 키미코로 변경되었다.
- '김전일 37세의 사건부'의 7번째 에피소드 '살인20면상'에서 사이비 종교 집단이 제령을 빙자해 일으킨 집단 살인사건인 '파노라마 왕국 집단 살인사건'이 언급되는데 이 사건에서 모티브를 얻은 것으로 보인다.
[1] 다만 신도가 10여명 안팎의 소규모 집단이었고 구체적인 포교 활동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본격적인 종교 단체로까지 발전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2] 이 사건이 본격적으로 드러난 시기는 1995년 7월경이었고 도쿄 지하철 사린 사건은 4개월 전인 1995년 3월에 일어났다.[3] 당시 사건을 취재했던 지역 신문 기자들도 에토의 인상에 대해 한결같이 '동네 어디에나 있을 법한 평범한 아주머니'였다고 증언했다.[4] 신도 폭행에 가담한 4명 중 한 사람이다.[5] 처음에는 어머니의 행각을 좋지 않게 생각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자신의 위치를 지키기 위해 범행에 가담했다.[6] 이 사람은 에토의 매제로, 자신도 폭행의 대상이 될 지 모른다는 공포로 인해 범행에 가담했을 가능성이 인정되어 이와 같은 판결이 내려졌다고 한다.[7] 전후 일본의 10번째 여성 사형수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