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5 18:07:56

히로시마 평화기념관

원폭돔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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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히로시마 원폭돔1.jpg
사진
파일:attachment/히로시마 평화기념관/원폭돔공식사진2.jpg 파일:attachment/히로시마 평화기념관/자료526.jpg
원폭돔 내부(붕괴되지 않도록 철골을 설치하였다.) 아침 노을의 원폭돔
파일:attachment/히로시마 평화기념관/원폭돔공식사진3.jpg 파일:attachment/히로시마 평화기념관/자료580.jpg
공원쪽에서 바라본 히로시마 평화기념관 전경 반대편에서 바라본 히로시마 평화기념관
유네스코 세계유산
파일:유네스코 세계유산 로고(흰 배경).svg
이름 한국어 히로시마 평화 기념관(원폭 돔)
영어 Hiroshima Peace Memorial
(Genbaku Dome)
일본어 原爆ドーム[1]
프랑스어 Mémorial de la paix d'Hiroshima
(Dôme de Genbaku)
국가·위치 일본 히로시마시
등재유형 문화유산
등재연도 1996년
등재기준 (vi)[2]
지정번호 775

1. 개요2. 역사3. 원폭돔이 무사했던 이유4. 평화기념공원
4.1.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
5. 평화기념관6. 논란
6.1. 문화유산 등록 당시 미국과 일본의 신경전6.2. 잔류 방사능에 대하여
7. 교통, 입장료, 관람시간8. 대중매체에서9.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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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 히로시마시 나카구 나카지마에 위치해 있는 히로시마 평화기념관, 원폭돔 및 평화기념공원 3부분으로 구성된 공원으로 흔히 간단하게 원폭돔으로 불려진다. 원폭돔과 평화기념관은 바로 옆에 있으나, 강이 중간에 흐르며, 다리를 통해서 모두 이어져 있다.

2. 역사

파일:BGBGB.png
원폭 투하 전의 모습. CG로 합성해서 재현.

원래 이 폐허가 된 건물의 정체는 히로시마현 상업전시관(広島県物産陳列館)으로 1910년 히로시마현 시의원회가 히로시마 현 내의 산업 생산을 촉진하기 위해 상업 전시관을 세우기로 결정한 것이 이 건물의 기원이다. 그 후에, 체코의 건축가인 얀 렛트르(Jan Letzel)의 설계에 따라 모토야스 강(元安川)의 동쪽 자리에 건축을 시작하였으며, 이듬해에 완공되었다. 1933년 상업전시관은 히로시마현 산업장려관(広島県産業奨励館)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파일:attachment/히로시마 평화기념관/자료624.jpg
당시 히로시마 물산기념관과 그 주변을 실체화한 모형

히로시마 물산 장려관은 원래 5층으로 된 중심 코어(core)가 있는 3층의 벽돌 건물로서, 구리로 덮인 철골의 타원형 돔이 얹어져 있었다. 면적은 1,023㎡, 높이는 25m에 이르렀고, 물산장려관은 히로시마시의 한 가운데 위치한데다, 구조상 히로시마의 스팟 역할을 하는 건물이 되었다.

1945년 8월 6일 오전 8시 15분 히로시마에 첫 번째 원자폭탄이 투하되었다. 이 원자폭탄과 그 후폭풍인 화염때문에 약 14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런데 이 건물은, 비록 골조뿐이기는 하지만 폭심지(爆心地)인근 지역에서 유일하게 남겨졌다. 폭심지는 1933년 개원한 시마병원(島病院)이 있는데 흔히 폭심지시마병원(爆心地島病院)라고 부른다. 현재 건물은 개원할 당시 건물은 당연히 아니고 현재 병원 옆에는 이 곳이 폭심지였다는 작은 안내판이 있다. 안내판 하나 뿐이긴 하지만 원폭돔에서 가까운 곳에 있다. 당시 히로시마 물산장려관 건물 안에 있었던 사람들은 전원 즉사했다. 건물의 골조가 비교적 무사하게 남았다는 사실 때문에 생존자가 있었을 것이라고 오해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히로시마현의 재건 사업이 시작되면서, 이 건물은 당시의 상태 그대로 보존이 되었으며, 1966년 히로시마 시의회는 원폭 돔을 영구히 보존해야 한다는 결의문을 채택했다. 이 시기를 기점으로 히로시마 평화 기념공원이 1950년에서 1964년 사이에 설계, 조성되었으며, 공원 안에 있는 평화기념 전시관 역시 1955년에 문을 열었다. 1952년 이후로 이 공원은 매년 8월 6일에 히로시마 평화 기념식을 열고있다.

지금의 원폭돔은 말 그대로 폐허이다. 주요 건물들이 폭발 당시 완전히 처참하게 파괴되었다. 외벽이 철강과 시멘트 플라스터로 덮여 있는데, 폭발의 흔적으로 철골이 드러난 부분도 있으며, 툭치면 부서질 것 같은 부분도 존재한다. 특히 평화기념관 안에 있는 일전 물산장려관 사진과 비교해보면 그때 당시의 창문같은 것들은 물론이고 구조 역시 유추하기 어려울 정도로 폐허가 되었다. 그리고 그 내부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안에 여러 돌들이 역시 폭발당시 최대한 그대로 널부러져 있는것을 알 수 있다. 이는 복원사업을 하면서 있는 그대로의 보존을 원했기 때문에 그 맞았던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으며 지금도 일본정부는 이 원폭돔을 2년, 3년 주기로 복원공사를 하면서 그 폭격맞은 원형 그대로 완벽히 보존하고있다.

3. 원폭돔이 무사했던 이유

파일:attachment/히로시마 평화기념관/자료629.jpg

위 사진을 보면 좌측 하단에 빨간 선(흰색 안내카드가 있는 위치) 위 6~700m 상공에서 원자폭탄이 터졌다. 그리고 물산기념관의 위치가 보인다. 원래 미군의 투하조준 지점은 기념관 오른편의 T자 모양으로 생긴 아이오이 다리였다고 한다. 실제로 이 거리에서 정상적인 건물이 남진 않았으므로 원폭돔은 지붕과 마루, 2층 이상의 내벽 대부분이 붕괴되었다. 하지만 그나마 이정도가 남았던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원자폭탄이 터진 위치와 원폭돔이 가까워서였다. 즉 원자폭탄이 터졌을 때, 원자폭탄의 충격파를 측면이 아닌 수직 방향으로 받았기 때문이다.[3] 그래서 돔 아래 건물의 중심부는 비록 골조뿐이기는 하지만 남아 있게 되었다. 물론 그 외에도 몇가지 것들이 남아서 물산장려관의 남쪽에 있는 서양식 정원에 있던 분수의 잔해같은 것들도 남았고 그 모습은 원폭돔처럼 폭발 직후의 형태 그대로다.

4. 평화기념공원

평화기념공원(平和記念公園)은 원폭돔과 평화기념관 그리고 그 주변으로 구성되어 있다.

파일:attachment/히로시마 평화기념관/자료575.jpg

원폭을 맞았을 때, 어머니가 아들을 데리고 피난가는 것을 동상으로 만든것부터(사진), 원폭의 어린이상, 원폭공양탑 등 원폭과 관련되어 무서움과 경각심을 불러 일으키는 동상, 비석을 만들어 놓고 있다. 비교적 잘 보이는 곳에 위치해있다.

이 공원은 '평화'를 중시하는데, 잘 보면 이 주변이 모두 '평화'로 도배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방문객이 접근하는 다리도 '평화대교' 그쪽에 있는 종도 '평화의 종' 기념물로 '평화의 탑'(사진. 각나라말로 '평화'가 적혀 있다. 첫 번째 기념물 우측 하단에는 한국어 '평화'도 있다.). '평화의 샘'. '평화의 시계탑' 등 평화로 도배되어 있다.

공원이 꽤 넓다.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받아먹어서 살이 통통하게 올라 편안하게 대놓고 숙면을 취하는 길 고양이도 있고 저녁즈음이 되면 개들을 데리고 산책오는 사람들이 어느 정도 있다. 특히 대형개인 경우는 산책할 만한 공간이 별로 없다보니 대형견주들이 많이 보인다.

원폭이 투하된 아침 8시 15분에 맞춰서,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차임벨이 매일 1분 동안 울린다.

곳곳에 위령탑이 많이 세워져 있다. 동원학생 위령탑, 사망자 위령비 등이 곳곳에 늘어져 있으며, 히로시마 기념공원이 아니더라도 주위에 잘 찾아보면 1~2개정도 주위에 위치해있다. 그 중에는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가 있다.

4.1.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

파일:히로시마 한인위령비.jpg 파일:attachment/히로시마 평화기념관/자료694.jpg

히로시마 원폭으로 피해를 받은 한국인들을 추모하는 한국인원폭희생자위령비가 있다.

위령비가 완성된 것은 1970년. 비석은 한국산 돌을 사용했고 한국에서 제작되었다. 현재 장소에서부터 서쪽으로 약 100m, 공원 밖의 혼카와교(橋) 건너편이다. 공원 내, 새로운 시설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방침을 시에서 정했기 때문이었다. 그곳은 조선왕족의 후예이자 일본군 제이총군사령부 소속 교육참모로서 피폭당한 왕공족이우가 발견된 장소이기도 하였다. 정면에도 「이우 공 전하 외 이만여 영위(李鍝公殿下外貳萬餘靈位)」가 전서로 새겨져 있다.

하지만 1980년대 들어서 "공원 밖에 있는 것은 민족차별의 상징"이라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비석을 관리하는 민단의 히로시마지방본부와 히로시마 일반 시민들의 강한 요구가 있었고, 1999년에 히로시마 평화기념 공원 내로 이전했다.

조선인 희생자는 대략 히로시마에서 3~4만명 가량으로 추정되는데, 정확한 통계는 없다. 위령비의 희생자 명단에는 약 2,500명 가량이라는데, 이는 물론 신원이 명확하게 밝혀진 희생자의 명단만 넣은 것. 추정 희생자 수에 따르면 이는 히로시마 원폭 전체 희생자의 약 10%에 해당한다. 참고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를 합치면 약 6만에서 최대 7만까지 조선인 원폭 희생자가 있다고 추정된다. 물론 이러한 통계가 모두 맞다고 할 수는 없는것이 히로시마 원폭으로 희생된 사람을 공식적으로 집계한 것이 14만명이라는 것을 가정했을 때, 이는 비약이라는 관점도 있다. 아울러 조선인뿐만 아니라 히로시마에 수감되어 있던 연합군 포로 중에서도 희생자가 나왔다.
파일:KakaoTalk_20230625_220851683.jpg
고려대학교 일어일문학과에서는 교류교 와세다대학과 함께 정기적으로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를 방문하여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고 있다.

5. 평화기념관

평화기념관(広島平和記念資料館) 크게 동관과 본관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동관 1층에서 관람을 시작하며 이렇게 돈을 내고 입장하면 자동적으로 본관까지 연결이 된다. 입장료는 리뉴얼되면서 200엔으로 올랐다. 추가요금(400엔)을 내 음성 설명기를 빌리면 각 전시물에 대한 설명을 들을 수 있다. 물론 한국어 설명기도 있다.

아래 설명은 리뉴얼 이전의 설명이라 2019년 현 시점과는 차이가 있다.

파일:attachment/히로시마 평화기념관/자료592.jpg

먼저 지하에는 조그마한 전시실이 있는데, 히로시마 시민 혹은 어린이들이 그린 원자폭탄 그림, 기획전시들을 하고 있다. 기획전시도 원자폭탄과 관련된 것으로 주로 피폭자의 사연과 그 피폭자의 집, 혹은 사망 위치 근처에서 나온 옷가지, 타지 않는 동전 같은 것들을 전시하고 있다. 그리고 이 지하 전시관으로 가려면 돈을 내지 않고 돈 내기 전에 입구 바로 우측에 보이는 계단을 타고 내려가서 봐야한다. 무료다.

파일:attachment/히로시마 평화기념관/자료627.jpg

그 다음 1층에는 매표소가 있다. 팜플렛도 여기서 나누어주는데, 한국어도 있으니 챙겨두면 관람에 도움이 된다. 음성기기지원도 있다. 이곳을 통해서 들어가면 바로 보이는 동관 1층 전시장은 피폭 전의 히로시마와 피폭 후의 히로시마, 원자폭탄이 개발되어 투하되기까지의 일련의 사건, 사고들을 모형(위에 올려둔 모형. 원폭 돔을 옮겨둔 모형도 있다), 사진, 판넬 등으로 소개하고 있다.

파일:attachment/히로시마 평화기념관/자료630.jpg

다음으로 계단을 타고 올라가면 동관 2~3층 전시장으로 연결 된다. 이 부분은 히로시마 원폭 이후에 히로시마가 어떠한 상황을 겪었으며,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재건되는 일련의 과정들을 사진과 모형, 수기 등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 위의 사진은 원폭이 떨어진 후에 히로시마시의 연표로서 무슨 일이 일어났고, 얼마나 많은 시련을 겪었는지를 자세히 적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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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attachment/히로시마 평화기념관/자료678.jpg

본관은 히로시마의 여러 사진과 피해를 입은 물건들을 들고와서 전시하는 말 그대로 원폭의 무서움을 그대로 전시하고 있다. 특히 유명한 것은 인영의 돌이라는 돌과 사다코의 종이학인데, 인영의 돌은 人影(인간의 그림자), 즉 인간이 있었던 흔적(원폭 그림자)이 남은 돌이라는 뜻이다. 원폭 돔 인근에 있던 스미토모 은행 앞에 어떤 사람이 오픈 시간을 기다리며 앉았는데, 원자폭탄이 떨어지면서 열에 의한 그을음이 그림자처럼 남은 것이다. 사다코의 종이학은 2살 때 피폭된 사사키 사다코가 10년 뒤 백혈병으로 죽어가면서 회복을 간절히 빌며 접은 것인데, 사다코는 결국 회복하지 못하고 1955년에 숨을 거두었다.

이후 사다코의 천 마리 종이학은 평화와 반전 반핵의 상징이 되었다. 여기서는 사다코의 인생과 같이 사진을 보여주면서 원폭의 무서움을 몸서 보여주고 있다. 소녀의 비극을 통해 전쟁의 참상을 고발한다는 점에서, 사다코는 일본판 안네 프랑크로 인식되고 있는 셈. 공원 야외에도 이 종이학을 형상화한 기념 조형물이 전시되어있고, 매년 8월 초 원폭 참사 추모일에 맞춰 각지에서 접은 종이학들이 도착하곤 한다.

또 유명한 전시물로는 신이치의 세발자전거가 있다. 테츠타니 신이치(사망 당시 3세)는 빨간 세발자전거를 타고 노는 것을 매우 좋아하던 아이였다. 당시 일본은 전쟁 때문에 금속을 죄다 압류해갔기에 자전거는 물론 세발자전거는 매우 귀했고, 부모가 군인인 지인을 통해 어렵게 구한 것이었다. 이 테츠타니 신이치는 친구 키미코와 함께 자전거를 타고 놀다가 피폭되었다. 키미코도 신이치와 함께 사망했다. 뒤에 나오는 신이치 남매의 유해 발굴 때에 손뼈가 발굴되었고 가족을 찾을 길이 없어 그녀의 손은 신이치 남매와 같은 곳에 매장되었다.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아버지 테츠타니 노부오는 돌무더기에 깔린 신이치를 가까스로 구했는데, 신이치는 치명상을 입은 상태에 자전거 손잡이를 꼭 쥐고 있었다. 결국 그날 저녁 신이치는 사망했고, 노부오는 그 자리에 아들과 자전거를 함께 묻었다. 약 40년이 지나 1985년, 노부오는 그날 사망한 신이치와 두 누나의 유해를 발굴했고, 그때 묻었던 자전거도 발견하여 여기 기증하게 된다.

이 이야기는 코다마 테츠하루라는 작가가 그림책으로 출간해 일본과 여러 국가에 출시되었는데, 전달하고자 하는 메세지를 매우 강하게 나타냈다는 점에서 상당히 좋은 평가를 받는 반면, 7-11세용 그림책이면서 테마가 무겁고 그림 묘사가 상당히 무서운지라 대상연령이 보기엔 부적절하다는 평이 있다.

6. 논란

6.1. 문화유산 등록 당시 미국과 일본의 신경전

1996년 12월, 히로시마 원폭돔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자, 하시모토 류타로 당시 일본 총리는 "'지금까지 전쟁에 관련된 것이 문화유산으로 한번도 등록되지 않았다는데 이미 등록된 것(아우슈비츠)이 있는 이상 히로시마가 등록되는 것은 마땅하다"'며 환영의사를 표했다. 당시 미국과 중국 등은 일본의 전쟁 책임 때문에 문화유산 등록에 반대의사를 표해 묘한 신경전이 오가기도 했다. (일 원폭돔 세계문화유산 지정, 미국 중국 반성없이 피해강조 우려 한겨레), (일 원폭돔과 전쟁범죄 동아일보)
파일:attachment/히로시마 평화기념관/자료586.jpg 파일:attachment/히로시마 평화기념관/자료615.jpg

히로시마 평화기념관 앞에 가면 핵폭탄이 떨어진지 며칠이 되었고, 핵실험이 언제 가장 마지막에 일어났으며, 마지막으로 그 위치와 장소, 시간을 알려주는 종이와 시계를 둔다. 사진의 표지판은 북한의 3차 핵실험을 표시한 것. 한편 히로시마시 시장의 주 업무중 하나가 핵실험을 하는 나라의 정부에 '항의서한'을 보내는 것으로 진영불문 핵실험이 시행될 때마다 보냈다. (日원폭 피해도시 등 반핵단체, 미국 핵실험 강력 항의 1997 연합뉴스) 사진의 철제판이 이제까지 보낸 항의서한을 새겨둔 것이다.

일본의 민간인 입장에서는 어느날 갑자기 핵폭탄을 맞았으니 피해자라고 주장할 여지도 있을 수 있지만, 원자폭탄이 투하된 것은 일본의 선전포고도 없이 기습으로 시작된 전쟁에서 비롯된 것이다. 2005년에 히로시마 원폭에 살아남은 생존자 대표와 당시 버섯구름을 찍은 해롤드 애그뉴 박사와의 면담이 있었는데 생존자 대표들은 민간인 집단에게 핵을 떨군 것으로 인해 많은 이웃들이 죽었으며 이에 대한 사과를 요구하지만 해롤드는 이를 거부하는 모습과 "나도 니들이 벌인 진주만을 통해 많은 친구를 잃었다. 만약 사과를 요구한다면 당신나라 군대 일본제국군에게 사과를 요구하라"라고 했다. 이들은 인류에게 사용하지 말아야 할 원폭에 관련된 애그뉴씨가 직접 사과해야 먼저 사망한 이들이 편히 잠들지 못 한다며 사과를 요구하자 애그뉴는 오히려 당신이 우리들한테 사과해야 한다며 거부의사를 표하며 당신네들 정부가 또 전쟁을 하려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며 반박했다.영상.

다만 위 사람의 주장처럼 민간인에게도 원폭에 대해 책임이 있다는 식으로 말하는 건 굉장히 위험한데, 그의 발언대로라면 관점에 따라 9.11 테러를 비롯한 모든 민간인의 대한 공격을 정당화 할 수 있기 때문이다.[911]

이 전쟁 기간 동안, 연합군에 의한 일본인 민간인 피해 외에도 일본군에 의한 민간인들 피해도 존재한다는 것 역시 중요한 지점이다. 진주만 공습 당시 피해를 입은 미국의 민간인들 외에도 중국인, 필리핀인 등 아시아인들을 포함해서 계산할 경우 히로시마나 나가사키의 민간인 피해자를 모두 합치더라도 일본군에 의한 민간인 피해는 압도적으로 많다.


위의 비판을 히로시마에서도 인지하여 결국 2019년 대대적인 기념관 리뉴얼 과정에서 어느 정도 수정이 이루어졌다. 이 리뉴얼은 당초 동관부터 시작하던 것을 본관부터 시작하는 동선의 수정을 위시로 하여 그동안 초입에 나오던 인형들을 당사자들의 비판을 존중하여 제거하고 피폭자들의 유품 혹은 피폭자가 당시를 회고하면서 그린 그림 등을 중심으로 한 구성을 강화하여 점차 줄어드는 피폭자들의 증언을 최대한으로 보완하고 시간이 갈수록 관람객들이 이들의 증언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감안하여 이루어진 조치였다.

이 과정에서 그동안 미흡했었던 외국인 피폭자 관련 전시물이 추가되었는데, 2019년 8월 6일 NHK 스페셜 방송에서는 미군 포로의 인식표 및 조선 출신자로 피폭 당시 군인이었던 사람의 사진과 군인수첩이 전시되어 있다. 해당 수첩의 주인공인 곽 모씨의 경우에는 촬영일 기준으로 대한민국에서 생존해 계셨기에 자신의 물건이 전시되었다는 소리를 듣고 해당 박물관에 찾아가서 자신의 물건을 보면서 원폭 피해자가 일본인뿐이 아니라는 걸 알려준 것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장면이 나왔다. 그리고 전시관 도입부의 설명 문구에 강제징용이 있었음을 언급하는 내용과 국가의 잘못된 정책으로 인하여 원폭을 맞았다는 내용이 간략하게나마 언급되어 있다.

6.2. 잔류 방사능에 대하여

결론부터 말하자면 걱정할 필요 없다.

과거에 핵폭탄이 터졌던 바로 그 지점이기 때문에 체르노빌이나 후쿠시마처럼 방사능이 남아 있는 건 아닌가 걱정하는 경우도 있으나,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폭은 비교적 고공에서 폭발했기 때문에 지상에서 폭발한 체르노빌과 같은 낙진을 대량으로 형성하지 않았다. 그에 따라 방사능 살포량 자체도 체르노빌의 1/400 수준에 그쳤다. 실제로 폭격 이후 한동안은 암 등의 발병률이 타 지역 대비 상당히 높았지만, 2주일 정도가 지나자 사람이 문제없이 지나다닐 수 있을 정도로 방사능 수치가 줄었고 현재는 히로시마에 남아 있는 방사능의 양은 자연방사능 수준으로 인체에는 영향이 거의 없다고 한다.

정확히 히로시마시의 방사선량은 보통 세계 평균 자연 방사선량의 1.5~2배 정도로, 이 정도면 굉장히 미미한 편이다. 그러나 폭발 시 완전히 노출되어 있었던 원폭돔 같은 건물의 경우에는 대기보다 상대적으로 좀더 많은 방사선이 검출된다. 물론 그렇다 해도 인체에는 유의미한 영향이 없는 수준이니 피폭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게다가 압축 우라늄을 대량으로 쌓아놓는 원자력 발전소가 폭발하는 것과 작은 원자폭탄이 폭발하는 것은 잔류 방사능 양부터 다르다.[5]

7. 교통, 입장료, 관람시간

가는 방법은 히로시마역에서 역 앞에 있는 히로시마 전철 본선의 2계통[6]이나 6계통 노면전차를 타고 겐바쿠돔마에역까지 가면 된다. 바로 앞에 서 있는 노면전차들중 하나이니, 반드시 물어보거나 앞을 확인하고 타자. 앞의 행선 전광판에 표시된 번호가 2나 6이면 평화기념관 가는 노면전차다. 참고로 2계통 전차가 좀 더 넓고 차량도 새것으로 운행하니 쾌적하게 가고 싶다면 2계통을 타자.

노면전차의 가격은 성인 220엔 균일 적용이다. 2계통은 구싸스 역부터 2KM마다 10엔이 부과된다. 히로시마 공항에서는 리무진을 타고 역까지 가면 똑같은 방법으로 갈 수 있다. 히로시마 전철의 열차들은 매년 8월 6일 아침 8시 15분에 추모의 의미로 근처 정류장에서 1분 가량 정차한다. 승차하면 안내방송으로 추모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공원안과 원폭돔은 무료로 관람할 수 있으며, 평화기념관은 돈을 내고 가야 하지만, 대학생 이상이 200엔(30인 이상 단체가 160엔), 고등학생은 100엔 (20인 이상 단체가 무료) 중학생 이하는 무료이며 심지어 65세 이상의 노인들은 여권을 보여주는 것에 한해서 30엔에 입장할 수 있다. 교토금각사, 은각사 입장료와 비교해보면 싼 것이다.

관람시간은 평화기념관 기준으로 3월~7월, 그리고 9월~11월은 8:30 ~ 18:00, 8월은 8:30 ~ 19:00 (8월 5,6일은 20:00까지), 12월~2월은 8:30 ~ 17:00까지 열며, 입장은 폐관 30분전까지는 해야한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보통 1시간 ~ 1시간 30분정도는 소요되므로 넉넉잡고 2시간 이전에 가기를 추천. 평화기념관은 연말연시(12월 29일 ~ 1월 1일)은 휴관이며, 공원과 원폭돔은 24시간, 연중무휴 관람가능하다.

8. 대중매체에서

  • 일본에서 나온 '세계의 역사' 같은 역사만화 전집에서는 높은 확률로 표지를 장식하고 있다. 슈에이샤, 코단샤 공통.
  • 애니메이션 사우스 파크 일본 포경 에피소드에서 한번 등장한다. 작중에서 일본 정부 수반 중 한 명이 일본의 포경 행위 방해 혐의로 수감됐던 스탠 마쉬, 에릭 카트맨, 케니에게 히로시마의 참상을 알려주겠다며 데려간다.
  •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영화)의 주요 촬영지로 나온다. 주인공 카후쿠 류스케가 와타리 미타리를 처음 소개받는 장면과 배우들이 연습하는 장면 등이 이곳에서 촬영됐고, 이후 이 기념관과 연결된 쓰레기 소각 시설인 히로시마시 나카 공장도 등장한다. 작중에서 이름은 언급되지 않는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일본 건축학가 타니구치 요시오(谷口 吉生)가 제작을 맡았다.

9. 관련 문서


[1] 출처 일본어 부분은 짤린 것이 아니고 공식적으로 저렇게 등재되어 있다.[2] 사건이나 실존하는 전통, 사상이나 신조, 보편적 중요성이 탁월한 예술 및 문학작품과 직접 또는 가시적으로 연관될 것[3] 반면 폭심지와 다소 거리가 있는, 원폭돔에서 바로 강 건너에 있는 삼각형 지형(현재의 평화기념공원 부지)은 말 그대로 삭제되었다.[911] 테러의 발생은 결국 미국의 중동 내 과도한 개입이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또한 미국은 석유가 나는 곳이면 항상 총을 들고 나타나 민주주의를 배달한다는 밈이 있을정도[5] 원자로에는 기본적으로 우라늄이 수십 톤 단위로 보관되지만, 히로시마에 투하되었던 리틀보이 내부의 우라늄은 고작 64kg 이다.[6] 버스 노선번호와 같은 개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