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5-05 17:30:02

힐라(이라크)

파일:이라크 힐라.jpg

1. 개요2. 역사
2.1. 마즈야드 후국2.2. 근대2.3. 테러와 혼란
3. 갤러리

1. 개요

아랍어 ٱلْحِلَّة
영어 al-Ḥillah

이라크 중부의 도시. 수도 바그다드에서 남쪽으로 80km, 카르발라에서 동남쪽으로 30km, 나자프에서 북쪽으로 40km, 디와니야에서 서북쪽으로 60km 떨어진 유프라테스 강 동쪽에 위치한다. 인구는 약 60만으로, 이라크에서 10번째로 큰 도시이자 바빌 주의 주도이다. 11세기 옛 바빌론 유적 남쪽에 지어진 도시로, 지명인 힐라는 아랍어로 '아름다움'을 뜻한다. 메소포타미아 평원의 중앙부에 위치한 덕에 주변에 유적이 많다. 대표적인 관광지인 바로 북쪽의 바빌론을 비롯하여 동쪽 15km의 키시, 서남쪽 7km의 보르시파 등이 그것이다.

시가지는 유프라테스 강의 힐라 지류 양안에 형성되어 있으며, 서안이 도심이다. 일대는 관개 수로에 의해 농업이 발달하였고, 각종 곡물과 과일 및 직물이 집산된다. 또한 도시 주변에는 대추야자 숲이 형성되어 있어 사막의 모래폭풍을 막아준다. 구도심 외에 바둑판식으로 계획된 시가지 내에는 힐라 근현대 박물관이 있고, 남쪽에는 바빌론 대학교가 있다. 고대 유적 외에 이슬람 성지들도 있다. 시내의 '태양의 대답' 및 자파르 앗 사디크 성지, 동남쪽의 아이유브 영묘, 남쪽의 아부 바크르 빈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 영묘, 서쪽의 샤리파 빈트 하산 빈 알리 영묘 등이 그것이다.

2. 역사

파일:힐라 이라크 1.jpg
'태양의 대답' 성지 (مشهد رد الشمس)

고대 역사는 바빌론 문서로. 남쪽 20km 유프라테스 강변의 엘 키플에는 유대 선지자 에제키엘의 영묘가 있다. 7세기 이슬람 정복 후 일대는 바그다드의 채석장이 되어 버려졌다가 10세기 유프라테스 동안에 알 자미얀이란 마을이 형성되었다. 한편 1차 피트나 당시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가 658년 여름, 나흐라완의 카와리지 세력을 격파한 후 쿠파로 회군하며 미래의 힐라 자리에서 유프라테스 강을 건넜다 한다. 이때 일단의 병사들이 강을 늦게 건너 아스르 (오후) 예배를 드리지 못했는데, 이에 알리가 신께 (이미 져버린) 해를 돌려달라 청하여 그들과 다시 기도를 드렸다는 전승이 있다. 또한 그 자리는 옛 태양신 신전이었다고도 한다. 어쨋든 이러한 설화 덕에 시아파에서 성지화되어 후일 현재와 같은 건물이 세워졌다.

2.1. 마즈야드 후국

그러던 1012년 셀주크 제국아바스 왕조에 대항했던 베두인계 마즈야드 왕조[1] (바누 마즈야드)의 창건자 알리 이븐 마즈야드가 야영지를 세운 것이 힐라의 유래이다. 힐라는 기존의 알 자미얀을 흡수하며 성장하였다. 1101년 알리의 손자 사이프 앗 다울라 파크르 앗 딘 아불 하산 사다카 1세는 힐라를 수도로 정하였고, 바빌론 유적을 재차 활용하여 성벽을 둘렀다. 사다카는 '아랍의 왕'을 자처하며 셀주크 조와 지속적으로 대립했기에 셀주크 조는 지속적으로 토벌에 나서 수 차례 힐라를 점령하였으나 마즈야드 세력을 일소하지 못하였다. 그러다 마침내 1163년 칼리파 알 무스탄지드의 아바스 군이 힐라를 점령하고 마즈야드 조를 멸하며 이라크 지역의 패권을 장악한다.

2.2. 근대

파일:이라크 힐라 1.jpg
힌디야 보의 완공식에 참석한 청년 튀르크당의 삼걸 중 하나인 제말 파샤

오스만 제국 지배기인 18세기에 힐라는 행정 치소로 거듭났다. 19세기 힐라 지류가 토사로 메워지며 가뭄으로 일대의 농지가 버려지는 등 난관을 겪었으나 1911-13년 인근 지류의 물을 가져다주는 알 힌디야 보가 세워지며 농업 생산력이 회복되었다. 1918년에는 대사원 1층에 첫 초등학교인 마드라사트 엘샤르키야가 세워졌다. 오스만 시대에 혜택을 입은 도시였기에 이어진 영국의 지배에 대한 반감이 심했고, 1920년 반영 봉기가 벌어져 맨체스터 부대의 3백 영국군을 일시 축출하기도 하였다. 다만 영국 위임통치기에도 중등 교육 기관이 세워지는 등 꾸준히 발전하여였다.

2.3. 테러와 혼란

여러 성지들과 함께 1250년에는 열두이맘파의 주요 학자들 중 하나인 자말 앗 딘 하산 빈 유수프 알 힐리가 이곳에서 태어났고, 이로써 힐라는 시아파가 득세하게 되었다. 따라서 1991년 다른 쉬아/쿠르드 도시들처럼 반정부 봉기가 있었으나 잔혹히 진압되었다. 2003년 이라크 전쟁 시에 수백의 공화국 수비대가 전사한 후 점령된 힐라에서는 사담 정권 시절 학살된 3천 피해자의 매장지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졌다. 2004년 2월 127명, 2005년 2월 125명이 사망한 폭탄 테러를 시작으로 힐라에서는 경찰 혹은 쉬아 순례객들을 상대로 한 테러가 연이어 일어났다. 2005년 5월에 31명, 2007년 1월에 73명, 2월에 45명, 3월에 114명, 2010년 3월에 105명이 사망하는 비극이 일었다. 2016년 3월에는 다에시의 테러로 60명 이상이 사망하였다.

3. 갤러리

파일:이라크 보르시파.jpg
보르시파 유적
파일:이라크 힐라 영묘.jpg
에제키엘의 무덤이라 전해지는 누카일라 모스크

[1] 960년경 부와이 왕조의 에미르 무이즈 앗 다울라로부터 군사 복무의 대가로 쿠파와 히트 사이의 영지를 하사받은 것에서 시작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