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 FIFA 월드컵 우루과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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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선 토너먼트 | 준결승 | 결승 |
{{{#!folding [ 각주 ] |
[1] 이 대회는 첫 대회 홍보차원으로 지역 예선 없이 모든 팀을 초청해서 진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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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30 FIFA 월드컵 우루과이의 결승전을 정리하는 페이지.2. 결승전 아르헨티나 2 vs 4 우루과이
1930 FIFA 월드컵 우루과이 결승전 1930년 7월 30일 15:30 (UTC -3) | ||
에스타디오 센테나리오 (우루과이, 몬테비데오) | ||
주심: 장 랑제뉘 (벨기에)[1] | ||
| 2 : 4 | |
20′ 카를로스 페우셀레 37′ 기예르모 스타빌레 | 12′ 파블로 도라도 57′ 페드로 세아 68′ 빅토리아노 이리아르테 89′ 엑토르 카스트로 |
2.1. 경기 전
우루과이와 아르헨티나는 남미의 대표적인 축구 라이벌이다. 1902년에 첫 시합을 한 이후로 2011년까지 붙은 횟수만 해도 피파 공식기록으로 180회나 되고 심지어 같은 날에 2번 시합을 한 적도 있을 정도다. 같은 날 2번 시합의 경우는 아침 8시에 기상해서 아침 9시에 아침밥을 먹은 후 아침 10시에 그라운드에 나와서 낮 12시까지 1경기를 뛴 후 점심밥을 먹고 나서 오후 2시에 그라운드에 다시 나타나서 오후 4시까지 2경기를 뛴 꼴이다.[2] 이 결승전이 두 팀의 102번째 만남이었다.센테나리오 경기장에 9만 3천명이 들어왔는데 아르헨티나에서만 만 명이 넘는 사람이 원정 응원을 왔고 경기 시작 시간이 오후 2시인데 정오도 안 되어서 경기장이 만원이 되었다. 아르헨티나가 우루과이와 가까운 이웃나라라서 가능했던 일. 그리고 축구 열기가 광적인 남미의 대표적 라이벌전답게 무기도 참 많이 발견되어서[3] 주심으로 내정된 랑제뉘는 안전이 확보되지 않으면 심판 못 보겠다고 떼를 썼다.[4] 그래서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몬테비데오 항 인근에 랑제뉘를 위한 보트까지 정박시켜놓았다.
심판을 겨우 달래 놓았더니 이번에는 우루과이와 아르헨티나 선수들이 서로 자기네 공을 써야 한다고 싸우고 있었다. 공인구가 없었기 때문에 일어났던 해프닝인데 우루과이제 공이 아르헨티나제 공보다 조금 더 크고 무거웠다고 한다. 결국 양팀 선수들은 랑제뉘의 중제로 전반에는 아르헨티나, 후반에는 우루과이의 공을 쓰는 것으로 싸움을 일단락지었다.
소동의 중심이었던 결승전 당시 시합구. 좌측이 아르헨티나제, 우측이 우루과이제 공이다. |
이런 소동들 때문에 예정보다 킥오프가 한 시간 반 늦어져 15시 30분에서야 경기가 시작되었다.
2.2. 선발 명단
GK 후안 보타소 | |||||||||||||||||||||||||||||
FB 호세 델라토레 | FB 페르난도 파테르노스테르 | ||||||||||||||||||||||||||||
HB 후안 에바리스토 | HB 루이스 몬티 | HB 페드로 수아레스 | |||||||||||||||||||||||||||
FW 카를로스 페우셀레 20' | FW 프란시스코 바라요 | FW 기예르모 스타빌레 37' | FW 마누엘 페레이라 | FW 마리오 에바리스토 | |||||||||||||||||||||||||
FW 빅토리아노 이리아르테 68' | FW 페드로 세아 57' | FW 엑토르 카스트로 89' | FW 엑토르 스카로네 | FW 파블로 도라도 12' | |||||||||||||||||||||||||
HB 알바로 헤스티도 | HB 로렌소 페르난데스 | HB 호세 안드라데 | |||||||||||||||||||||||||||
FB 에르네스토 마스체로니 | FB 호세 나사치 | ||||||||||||||||||||||||||||
GK 엔리케 바예스테로스 | |||||||||||||||||||||||||||||
우루과이 선발 명단 2-3-5 감독: 알베르토 수피시 |
2.3. 경기 실황
아르헨티나 주장 마누엘 페레이라(왼쪽)와 우루과이의 주장인 호세 나사치(오른쪽)가 경기장에 들어오고 있다. 참고로 1900년대 초반부터 이 시기까지는 가끔 우루과이와 아르헨티나가 서로 상대방의 유니폼을 사용하기도 했다.[5] 그러다가 이 시기 이후로 아르헨티나는 줄무늬, 우루과이는 민무늬로 고정되었다. |
결승전은 라이벌전답게 격렬한 경기가 진행되다가 마침내 우루과이의 파블로 도라도가 전반 12분에 아르헨티나 골키퍼 보타소의 다리 사이를 빠르게 빠져나가는 강력한 슈팅으로 선제골을 기록했다. 하지만 아르헨티나도 만만치가 않아서 페우셀레와 '신데렐라' 스타빌레가 각각 한 골씩을 기록하여 전반은 2대1로 아르헨티나가 리드한 채 끝났다. 여기에서 우루과이의 주장 호세 나사치는 스타빌레의 역전골이 오프사이드였다고 강력히 주장했지만.. 씹혔다.
이 경기에서 누구보다 결의를 다지고 있었던 선수는 아르헨티나의 루이스 몬티였다. 2년 전이던 1928년 암스테르담 올림픽 결승전에서 우루과이와 재경기까지 치렀다가 결국 패배한 아픔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평소보다 더욱 열심히 플레이를 펼쳤다. 우루과이 팬들도 그걸 예상했었을까? 몬티는 우루과이 팬들에게 경기 전날 살해 협박을 받기도 했다.
후반전은 우루과이의 무대였다. 세아, 이리아르테의 연속골이 터지면서 순식간에 경기를 뒤집었다. 그리고 마지막은 외팔이 공격수 엑토르 카스트로가 장식했다. 후반 44분, 승부에 쐐기를 박는 헤딩골을 넣은 것이다.
카스트로의 쐐기골. 우루과이가 FIFA 월드컵 최초의 챔피언이 되는 순간이다. |
그들은 특별히 제작된 우승컵-쥘리메 컵을 처음으로 수여받는 영광을 누렸다. 그리고 올림픽에 이어 월드컵까지 제패하면서 세계 최강의 축구팀은 자신들이라는 것을 다시 세계인들에게 각인시켜 주었다.
[1] 월드컵 최초 결승전 주심이다. 대회 4강전 1경기, 조별리그 1조 1경기, 3조 1경기 주심이었다.[2] 이게 얼마나 말이 안 되는 기록인지 예를 들어본다면 지금까지 한 한일전의 횟수가 2011년까지 67회다. 그러니까 얘들은 한일전 비슷한 짓을 3배 가까이 한 거다. 물론 얘들 쪽이 시간 측면에서 2배 정도 길기는 하지만..[3] 관중들이 입장하기에 앞서서 몸수색을 실시했는데 권총이 수십 자루가 발견되었다.[4] 이것은 어린애같은 투정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당연한 몸부림이다.[5] 특히 1900년부터 1910년까지 우루과이가 사용한 공식 유니폼의 디자인은 영락없는 현재의 아르헨티나의 유니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