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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 부산 아시안 게임/농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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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멤버 엔트리3. 준결승전 - 필리핀전4. 결승전 - 중국전
4.1. 운명의 4쿼터4.2. 기적의 연장전
5. 여담

1. 개요

2002 부산 아시안 게임의 남자농구 대표팀의 활약상을 다룬 항목

2. 멤버 엔트리

번호 포지션 이름 생년월일 신장 소속팀
4 F 추승균 1974년 12월 6일 190cm 전주 KCC 이지스
5 G 신기성 1975년 4월 30일 180cm 상무 농구단[1]
6 G 김승현 1978년 11월 23일 175cm 대구 동양 오리온스
7 F 조상현 1976년 7월 8일 189cm 상무 농구단
8 F 이규섭 1977년 11월 13일 198cm 상무 농구단[2]
9 F 현주엽 1975년 7월 27일 195cm 상무 농구단[3]
10 F 문경은 1971년 8월 27일 190cm 인천 SK 빅스
11 C 서장훈 1974년 6월 3일 207cm 서울 삼성 썬더스
12 F 방성윤 1982년 6월 3일 195cm 연세대학교
13 F 전희철 1973년 6월 26일 198cm 전주 KCC 이지스
14 G 이상민 1972년 11월 11일 182cm 전주 KCC 이지스
15 C 김주성 1979년 11월 9일 205cm 원주 TG 엑써스

3. 준결승전 - 필리핀전

2002년 10월 12일에 열린 경기. 4강전부터 극적이었는데 필리핀과의 4강에서 대한민국은 경기 종료 51초 전 필리핀의 로데리코 라셀라에게 3점슛을 허용, 66-68로 역전당한 뒤 공격 기회가 모두 무위로 돌아가면서 패색이 짙었으나 3점라인 밖 중앙에서 수비 2명을 제친 이상민이 종료 버저 소리와 동시에 3점포를 터뜨려 짜릿한 뒤집기 승리를 맛보면서 결승에 진출한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반대편에서 올라온 결승상대는 카자흐스탄을 꺾고 올라온 아시아의 최강 중국이었다. 예상대로 중국이 결승 상대로 확정되자 한국은 절망했는데, 무엇보다 그 당시 남자 농구에서 1982 뉴델리 아시안 게임 이후 20년동안 중국을 이겨본 적이 없었고 설상가상으로 당시 중국에는 NBA 출신 229cm의 거인 야오밍[4]이 있었다. 우리나라 역시 주장 문경은, 센터 서장훈 등의 국가대표 베테랑 선수들과 김주성, 방성윤, 김승현 등 최강의 신인들이 활약하고 있었지만 야오밍이 있는 중국을 넘는다는 건 불가능하다고 보는 시선이었다. 그리고 아시안 게임의 마지막 날이었던 10월 14일 사직실내체육관에서 결승전이 시작된다.

4. 결승전 - 중국전

아시안게임 결승전
10.14(월) 부산사직체육관
국가 1Q 2Q 3Q 4Q 연장 합계
대한민국 18 18 26 28 12 102
중국 25 24 18 23 10 100

4.1. 운명의 4쿼터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게 아니다."
-요기 베라


예상대로 중국은 한국을 상대로 리드를 이어나갔다. 1쿼터 초반부터 5-16으로 한국을 압도했으며,[5] 4쿼터 종료 2분 40초 전에는 73-86으로 점수를 벌렸다. 이 때만 해도 사람들은 "결국 은메달에 만족해야 하는가?" 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근성있는 플레이가 시작된다. 교체 선수로 들어온 현주엽김승현이 펄펄 날기 시작하며 조금씩 간격이 좁혀지기 시작했다. 종료 22초전 현주엽의 과감한 골밑 돌파로 85-90으로 따라붙은 우리나라는 김승현이 야오밍의 인바운드 패스 미스를 놓치지 않고 곧바로 가로채 문경은의 3점포로 연결했다. 2점 차가 된 상황에서 중국은 종료 17초 전 자유투 2개를 얻었으나, 소문난 슈터인 후웨이동이 자유투 2개를 모두 놓치면서 한국에 마지막 기회가 왔다.

리바운드를 잡은 한국은 현주엽이 종료 4.7초를 남기고 일대일 상황에서 스핀무브를 활용한 과감한 골밑 돌파로 승부를 원점으로 돌려놓는데 성공한다. 이때 중국이 빠르게 역습을 가해 4쿼터 종료 약 3초를 남기고 3점 라인 밖에서 후웨이동이 공을 잡았고 그 순간 야오밍이 노마크 상태로 골밑으로 쇄도하고 있었다. 그런데 후웨이동이 야오밍에게 패스를 안 하고 성급하게 3점 슛을 날렸고, 야오밍이 공격 리바운드에 이어 덩크를 성공시켰으나 이미 4쿼터 종료 버저가 울린 뒤였다. 대한민국 대표팀 킬러로 유명했던 후웨이동의 이해할 수 없는 연이은 클러치 실책으로 인해 경기는 연장전으로 접어들게 되었다.[6][7]

4.2. 기적의 연장전


경기는 연장으로 접어들었고, 기적적으로 중국을 따라잡은 대한민국은 야오밍을 필사적으로 막는 한편 공격에서도 흐름을 타며 기세를 올리기 시작했다. 서장훈이 첫 공격에서 꽂은 3점포와[8] 현주엽의 연속 득점, 김승현의 기가 막힌 어시스트에 이은 문경은의 리버스 레이업[9] 등으로 99-94로 달아나는 데 성공했고,[10] 결국 102-100로 극적인 2점차 승리를 거두면서 1982 뉴델리 아시안 게임 이후 20년만에 만리장성을 넘으면서 금메달을 따낸다.

파일:2002 부산 아시안게임 농구 금메달 단체사진.jpg

5. 여담

  • 서장훈은 경기 직후 '왜 중국을 못 이기나'라는 비판을 떠올리며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후일 무릎팍도사에 나와 자신이 뛴 경기 중 비열한 짓까지 해가며 가장 열심히 뛴 경기라 술회했다.
  • 이 금메달로 병역 특례를 받은 인물은 두 명으로 김승현방성윤이었다.[11] 한국 농구의 미래를 이끌 선수들이었지만 둘 모두 선수생활이 순탄치 못했다.
  • 야오밍이 중국성인대표팀에 선발되어 뛴 경기 중 아시아 팀에게 당한 유일한 패배가 바로 이 경기이다.[12]
  • 김주성은 유일하게 2002년과 2014년 인천 아시안게임에 출전하여 금메달을 획득, 연금 수령 대상자가 되었다.[13]-서장훈은 금메달이 하나뿐이라 연금을 못 받는다. 대신 월세 받는다.
  • 당시 최강의 위용을 자랑하던 중국대표팀을 상대로 역전승을 거둔 임팩트, 그리고 2002년 한국대표팀의 화려한 네임밸류 덕에 역대 최강의 대표팀 후보 논쟁에서 2014년 아시안게임 대표팀과 함께 계속해서 회자되고 있다. 2014년 대표팀 감독이었던 유재학은 2002 멤버가 워낙 화려해서 두 팀이 붙으면 2002년 팀이 이길 것 같다고 하면서도 2014년 팀이 더 잘 조직된 팀이라고 높이 평가했으며, 두 팀에 모두 몸 담았던 모 선수는 2014년 팀이 서로 손발 맞출 시간도 훨씬 길었고 조직력도 탄탄했다는 이유로 2014년 팀의 손을 들어줬다고 한다. 2002년 대표팀의 경우 선수 개개인의 기량이 더 좋고 전성기 서장훈 및 젊은 김주성을 필두로 한 골밑이 강했지만, 양동근과 양희종 등으로 대표되는 2014년 대표팀도 막강한 수비 조직력을 보여준데다 국대 역사상 최고의 활약을 펼쳤던 문태종이 있었던 만큼 팬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갈리는 주제이다. 2014 인천 아시안 게임/남자농구 참고.

[1] 당시 원 소속팀은 원주 TG 엑써스 였다.[2] 당시 원 소속팀은 서울 삼성 썬더스 였다.[3] 당시 원 소속팀은 여수 코리아텐더 푸르미 였다.[4] 당시 2002 NBA 드래프트 1라운드 1순위로 휴스턴 로키츠에 지명[5] 서장훈은 야오밍을 막다가 이미 1쿼터에 반칙 3개를 범하고 벤치로 일찍 물러났다. 3쿼터 들어서는 서장훈, 김주성 모두 파울트러블에 걸리고 만다. 사실 제대로 판정했다면 이미 경기 끝나기도 전에 빅맨 다수가 파울아웃 당했을 상황이어서 대한민국 대표팀이 홈콜의 이점을 누리긴 했다.[6] 참고로 후웨이동은 '중국의 마이클 조던'으로 유명했던 선수로, 야오밍 자서전에 따르면 휴스턴 로키츠에 합류한 그에게 팀 동료들이 "너희 후웨이동이란 선수 있지 않느냐"고 물어볼 정도로 중국 농구계의 레전드였다. 반면 10살 어린 야오밍은 2002년에 맹활약하며 처음으로 상하이를 CBA우승으로 이끌었고 당시 이미 아시아 무대에선 막을 수 없는 포스를 보이고 있긴 했지만 이제 막 명성을 쌓아가는 단계였으며, 때문에 앞서 여러차례 한국 대표팀을 좌절시킨 바 있는 후웨이동 입장에서는 까마득한 후배 야오에게 맡기는 것보단 자기 손으로 경기를 끝내려는 의욕이 앞섰던 것 아니냐는 시각도 있다. 단, 당시 워낙 시간이 촉박하다보니 야오밍을 못봤을 가능성도 있고, 설사 봤다 하더라도 남은 시간을 봤을 때 패스로 득점까지 힘들 수도 있다 판단하여 본인이 슛을 던진 것일 수도 있다.[7] 물론 진실이 어떻든 후웨이동의 판단미스인 건 확실하다. 야오밍이 골밑에 도착했을 때는 1.8초나 남아있어 공 받고 원드리블 후 덩크를 해도 충분할 정도의 시간이었고, 야오밍은 키가 워낙 커 덩크를 하는데 걸리는 시간이 짧은데다 덩크 찬스를 날릴 가능성도 희박했다. 실제로 김승현은 이후 이 경기를 회고하면서 저 당시에 후웨이동이 야오밍에게 패스했으면 무조건 지는 경기였다고 인정했을 정도로 대한민국 입장에선 아찔한 상황이었다.[8] 3점 슛을 성공시킨 후 서장훈은 양팔을 벌리며 평소 이미지와 달리 기쁨에 젖은채 포효했다. 2015년 2월 20일 부산 KT 대 서울 SK 경기를 서장훈과 같이 해설하던 현주엽은 해당 장면에 대해 "속공 나가듯이 빨리 뛴 건 이때 이후로는 본 적이 없다."는 소감을 남겼고#, 그 슛을 어시스트했던 김승현은 2019년 유튜브 채널 슬램덕후와의 인터뷰에서 "장훈이형이 그렇게 좋아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고 했다. 국대 동료들에게도 꽤나 인상적인 모습이었던 것 같다.[9] 김승현이 워낙 예상 밖의 타이밍에 기습패스를 날리는 바람에 당시 카메라 앵글이 앞을 지나가던 심판에 의해 살짝 가려졌다. 훗날 김승현은 본인 인생에서 이를 가장 기억에 남는 패스로 꼽았다.슬램덕후 19.8.17[10] 이후 막바지에 중국은 빠르게 파울작전을 해야하는 상황에서 시간을 한참 소모한 다음에야 파울을, 그것도 한국 최고의 슈터인 문경은에게 하는 어딘가 이해하기 어려운 경기운영을 보였다. 이를 두고 KBS '경기의 재구성'에서 진행자 김현태 아나운서와 손대범 기자는 '중국이 아시아권에서 저렇게 위기에 몰려본 적이 없어서 위기상황 경기운영이 익숙하지 않은 것 같다'고 한 바 있는데, 실제로 당시 양 팀의 전력 차이가 컸던 건 사실이라 중국이 파작이 필요한 시간대까지 몰리는 건 예상 밖의 일이었을 것이다.[11] 현주엽은 상무 입대 중 선발되어 속칭 '대포주사'를 맞아가며 헌신했지만, 당시 규정에 금메달 취득시 조기 전역 규정이 없었던 시기라 조상현과 마찬가지로 상무에서 복무기간을 다 채우고 나와야했다. 다만 현주엽은 실제로는 부대에서 복무전환을 제안을 받았던 적이 있는데, 그 당시의 현주엽은 이미 말년병장이었기 때문에 본인 스스로 복무전환을 하는 메리트가 없다고 판단해서 이 제안을 거부하고 그대로 남은 복무기간을 다 채우고 전역했다고 한다. 복무전환을 하더라도 예술체육요원 점수는 다른 선수들과 똑같이 채워야하는 데다가 얼마 안 남은 군생활 기간 동안 이걸 다 채우기 힘들었기 때문에 이러한 선택을 한 것. 김주성의 경우 부모님께서 모두 장애를 갖고 있었던 것 때문에 생계곤란으로 이미 병역면제를 받은 상태였다. 추승균의 경우 어린시절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바람에 생계가 곤란해지면서 이미 병역면제를 받았다.[12] 야오밍은 이 경기에서 득점과 리바운드 모두 양팀 최다인 23점 22리바운드를 기록하며 (한국의 김주성의 21점, 서장훈의 6리바운드가 최다) 제몫을 했으나 경기 후반부 승부처에 힘을 못 썼다. 당시 야오밍은 최전성기 당시처럼 140kg 이상의 막강한 파워를 자랑하던 당시가 아니고, 다소 마른 편이라 집중마크를 당하면 체력이 떨어지곤 했다. 이 피지컬 부족 문제로 NBA에서도 문제를 겪자 (루키 시즌 올스타 브레이크 이전까지 필드골 성공률 52.5%를 기록하다가 올스타 브레이크 이후엔 득점은 거의 비슷한데 성공률이 46%로 떨어졌다) 2003 오프시즌에 벌크업을 해 20파운드 (9kg) 이상 근육을 늘린다. 대부분 팬들이 기억하는 건 140kg을 상회하던 시절의 야오밍.[13] 장애아동 지원을 목적으로 기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