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808080><colcolor=#fff> 제프 버클리 Jeff Buckley | |
본명 | 제프리 스캇 버클리 Jeffrey Scott Buckley |
이명 | 스캇 "스카티" 무어헤드 Scott "Scottie" Moorhead |
출생 | 1966년 11월 17일 |
캘리포니아 오렌지 카운티 애너하임 | |
사망 | 1997년 5월 29일 (향년 30세) |
테네시 멤피스 | |
국적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
직업 | 싱어송라이터, 기타리스트 |
장르 | 싱어송라이터, 얼터너티브 록, 어쿠스틱 록 |
활동 | 1990년 ~ 1997년 |
신장 | 170cm |
부모 | 아버지 팀 버클리 의붓아버지 론 무어헤드 어머니 메리 귀베르 |
링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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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싱어송라이터. 포크가수 팀 버클리[1]의 아들이기도 하다.
90년대 중반, 인디 록씬에 등장해 독보적인 음악으로 센세이션을 일으키며 단번에 주목받는 신성으로 떠올랐으나 단 한장의 정식 앨범만을 남기고 요절해 주위를 안타깝게 한 아티스트이다. 풀 네임은 제프리 스캇 버클리(Jeffery Scott Buckley), 스캇 무어헤드(Scott Moorhead)라는 양아버지 성을 딴 이름도 있다.
대표곡으로 "Hallelujah", "Grace", "Last Goodbye", "Everyboby Here Wants you", "Lover, You Should've Come Over" 등이 있다.
2. 삶
2.1. 성장기
어린 시절의 제프 버클리
1966년 11월 17일에,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팀 버클리와 메리 귀베르 사이에서 태어났다. 팀 버클리는 1965년 1월 31일에 당시 17세의 메리 귀베르와 결혼했지만 막 음악 인생이 시작된 그는 제프가 태어나기도 전에 이혼했고, 메리는 이후 재혼하여 제프는 양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제프는 양아버지의 성을 따라 스카티 무어헤드(Scotty Moorhead)로 개명되기도 했었다. 팀 버클리와는 2살 때인 69년에 만나고 8살 때인 75년 4월에 다시 만났는데, [2] 이것이 둘의 마지막 만남이 되고 만다. 부활절 연휴 기간에 한 주 동안 시간을 함께 보낼 수 있었지만 그나마도 팀은 대부분 홈 스튜디오에서 음악 작업을 하고 있느라 바빴다고 한다. 불과 몇 달 뒤 6월 28일, 팀 버클리는 텍사스 주 댈러스에서 1,800 석이 매진 된 공연 후 음주와 친구가 주입한 헤로인 약물 과용으로 28세의 나이에 갑작스레 요절하고 말았다. 이후 제프는 성장해서 버클리라는 성을 되찾았다.
팀 버클리 역시 음악에 미쳐 가정을 버렸지만 아내를 사랑하지 않은 것은 아닌지 전 아내이자 제프의 어머니인 메리 귀베르를 위해 'I Never Asked To Be Your Mountain' 이라는 곡을 만들기도 했다. 제프 역시 롤링 스톤 지와의 인터뷰에서 "난 아버지의 장례식에 (초대받지 못해) 참석하지 못했고 아버지와도 거의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것이 내 인생에서 가장 괴로웠습니다. 추모 공연에 참가한 것 역시 아버지에 대한 존경과 사랑을 표현하고 싶었기에 참가했습니다"고 밝혔다. 이처럼 생전에 제프 역시 아버지인 팀 버클리에 대한 그리움과 원망의 표현을 많이 하였다고 한다. 한마디로 애증의 관계라 할 수 있을 듯.
그의 양아버지는 그에게 레드 제플린, 퀸, 지미 헨드릭스, 더 후 등의 음악을 들려주었고, 제프는 12살 때 음악가로서의 길을 걷기로 결심한다. 13살 때는 Les Paul 기타를 받아 연주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록 밴드 키스를 좋아했으나, 고등학교 때에는 재즈 밴드에서 활동하면서 밴드, 제네시스, 러시 같은 프로그레시브 록 밴드의 음악을 자주 들었다. 그런데 메리 귀베르에 따르면 버클리는 무엇보다 스미스의 빅팬이었다고 한다. 본인도 생전에 자신이 솔로 뮤지션이 아닌 밴드를 한다면 스미스 정도의 수준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스미스의 곡을 즐겨 커버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에는 헐리우드 소재 MI에 재학했다.
파격적이면서도 우울하고 신비한 음악 이미지와는 다르게 어린 시절부터 외로움을 많이 타서인지 코메디언이나 광대 노릇을 하길 좋아했다고 한다. 장난기가 넘쳐서 생전의 인터뷰들을 보면 진지하면서도 종종 망가지는 모습을 연출하는 등 개그에 능했던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패션 스타일이 뛰어나고 키가 170cm로 남자치고 신장이 크거나 근육질은 아니지만 상당한 꽃미남이다. 해외에서도 미남 뮤지션을 거론할 때 언제나 언급된다.
2.2. 음악 활동
1991년 팀 버클리 추모 공연에서 연주하는 모습.
1995년 글래스톤베리 페스티벌에서 연주하는 모습.
그는 동부인 뉴욕에서 본격적으로 재능을 꽃 피웠고, 그 이전에 LA의 유명 음악기술 교육원인 MI (Musician’s Insititute)에 들어갔지만 이것을 나중에 상당히 부끄러워 했다고 한다. 제프는 6년간 다양한 밴드들과 함께 연주했고, 레게 음악가 샤인헤드와 투어를 다니기도 했다. 1990년에 뉴욕으로 이주하여 지하철 연주, 덴젤 워싱턴 등의 유명 영화배우들의 전화 응답 서비스, Banana Republic같은 의류 상점 등에서 일하며 서서히 자리를 잡기 시작한다.
뉴욕에서 제프는 인디락과 아방가르드 음악씬에 주기적으로 모습을 드러내며 그의 보컬 스타일에 큰 영향을 준 파키스탄의 수피 이슬람 종교 음악, 카왈리(Quwwali) 가수인 누스랏 파테 알리 칸, 블루스 기타리스트 로버트 존슨, 록 밴드 배드 브레인즈 등을 접하게 되었다. 제프는 아버지 한 때 팀 버클리의 매니저이자 제프를 어린 시절부터 눈여겨 보아 온 허브 코헨[3]의 데모 테이프 녹음을 도와주겠다는 그의 제안을 받아들여 다시 로스 앤젤레스로 돌아가 그곳에서 <Babylon Dungeon Sessions>라는 첫 번째 데모 테이프를 완성한다. 제프가 어린 시절 모친과 허브 코헨의 집에 식사를 하러 가면 목소리가 부친 팀과 너무 흡사해 종종 그를 자신도 모르는 새 팀이라고 불렀다는 일화가 있다.
1991년 6월, 제프는 뉴욕에서 열린 아버지 팀 버클리의 추모 공연에 참가하였다. 여기서 아버지 팀과 흡사한 목소리와 외모에 그의 환영을 본 듯한 인상을 주어 음악 관계자들 모두를 놀라게 하였고, 캡틴 비프하트와 매직밴드의 전설적인 기타리스트인 게리 루카스의 관심을 끌어 그와 작업하게 된다.# # 제프는 1989년 게리의 밴드 갓즈 앤 몬스터즈(Gods and Monsters)의 결성에 참여하지만 곧 밴드를 떠난다. 이후 그는 시네(Sin-e)를 비롯한 뉴욕의 클럽들을 돌며 자작곡, 레드 제플린, 밥 딜런, 누스랏 파테 알리 칸, 레너드 코헨 등의 커버곡들을 연주했다. 제프는 레코드사들의 관심을 끌었고, 결과 1992년 10월에 컬럼비아 레코드와 계약을 맺었다. 그리고 마침내 1993년 11월 23일, 시네에서의 라이브를 모은 <Live at Sin-e>라는 EP로 데뷔한다.제프는 1993년에 기타리스트 마이클 타이(Michael Tighe), 베이시스트 믹 그론델(Mick Grondahl), 드러머 맷 존슨(Matt Johnson)으로 이루어진 밴드를 결성하고 프로듀서 앤디 월레스(Andy Wallace)와 함께 데뷔 앨범 작업을 시작했다. 1994년 초에는 처음으로 미국과 유럽 투어를 다니기 시작했다. 1994년 8월 23일, 제프의 첫 정규 앨범 <Grace>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Grace 앨범 제작기 다큐멘터리
제프는 이후 1994~1995년 사이 미국을 비롯하여 영국, 독일, 프랑스, 일본, 호주 등으로 투어를 다녔다. 그러나 1996년 초, 밴드 드러머 맷 존슨이 탈퇴하면서 투어는 끝나게 된다. 탈퇴 당시 다른 멤버들과의 관계가 좋지 않았는지는 몰라도 맷의 Grace 20주년 기념 인터뷰를 보면 Grace 앨범 녹음과 제프와의 관계는 평생 간직할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는 것으로 보인다. 드러머 맷 존슨의 Grace 녹음 당시를 회상하는 인터뷰
타이틀곡 'Grace' BBC 라이브, 1995년 1월. 보통 미국 대중음악을 그리 높게 평가하지 않던 영국인들에게 제프 버클리의 등장은 충격이었다고 한다.
투어를 마친 뒤, 제프는 1년 동안 공연에 많이 나가지 않았다. 이때 평소 좋아했던 뮤지션 패티 스미스의 앨범 작업에 참여했다. 이후 새로운 드러머를 영입하는 한편, 텔레비전의 기타리스트 톰 벌레인(Tom Verlaine)과 손잡고 <My Sweetheart The Drunk>라는 이름의 새로운 앨범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제프는 뉴욕에서 이루어진 녹음에 만족하지 못했고, 멤피스로 가서 재녹음을 했지만 그것도 만족하지 못했다. 결국 제프는 전작 <Grace>의 프로듀서 앤디 월레스와 밴드를 멤피스로 부른다. 그런데...
2.3. 사망
제프가 사라진 곳인 멤피스의 울프 강.
제프가 물에 들어가기 몇 시간 전에 찍힌 사진. 그가 생전 마지막으로 찍힌 사진이라고 알려져 있다.[4]
1997년 5월 29일 오후, 멤피스로 오던 밴드를 기다리던 제프 버클리는 레드 제플린의 <Whole Lotta Love>를 부르며 친구와 울프 강을 걷다가 갑자기 옷을 다 입은 채로 즉흥적으로 수영을 하겠다고 물에 뛰어들었다. 잠시 다른 일을 하던 친구가 다시 강을 본 순간 제프는 사라져 있었고, 이후 수색 작업이 진행되었으나 결국 거의 일주일이 지난 6월 4일, 멤피스 강 상류에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부검 결과 그의 신체에서 알콜이나 약물의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다.[5] 이미 음악적으로는 거의 완성된 두 번째 앨범 녹음 후 발표 예정이었고 자살을 할 만한 이유도 딱히 없어 미스테리한 일이었다. 직접적인 사인은 당시 강을 지나던 예인선의 물살에 휩쓸려가 익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고작 30살밖에 안 된 젊은 뮤지션의 안타까운 죽음이었다. 제프가 물에 들어갈 때 제프의 밴드와 앤디 월레스는 비행기를 타고 오고 있는 중이었다.
2.4. 사후
멤피스 동물원에 안장되었다. 1998년에는 제프의 어머니 메리 귀베르, 사운드가든의 크리스 코넬 등이 제프가 만든 데모 테이프, 라이브 등을 모아 <Sketches From "My Sweetheart The Drunk">을 발표했다. 2000년에는 라이브 앨범 <Mystery White Boy>와 라이브 실황 <Live at Chicago>, 2001년에는 라이브 앨범 <Live at L`Olympia>, 2003년에는 제프의 데뷔작이었던 <Live at Sin-e>의 확장판 <Live at Sin-e(Legacy Edition)>이 발표되었다. 2004년에는 <Grace> 앨범에 미발표곡을 더한 <Grace(Leagacy Edition)>이 발매되었으며, 2007년에는 컴필레이션 앨범 <So Real>이 발표되었다. 2009년에는 <Grace> 앨범 발매 이후 투어에서의 라이브들을 모은 <Grace Around The World>가 발매되었다.- 가족, 친구들, 전세계 팬들, 소니 콜럼비아 레코드사의 기부로 1998년 9월 18일, 멤피스 동물원 내 인도네시아 수마트라산 호랑이 우리 벽에 설치된 제프 버클리 추모 동판. 그는 생전에 고양이와 하마 등 동물들을 무척 좋아해 사망하기 전 멤피스 동물원에 몇 차례씩 들러 표범들과 나비 전시등을 관람했고 동물들을 돌보는 자원봉사를 할 계획도 있었다고 한다.
- 제프의 모친, 메리 귀베르의 메시지: 사랑하는 우리 "스카티"에게 - "다시 너에게 입 맞출 때까지, 우리의 눈물은 결코 마르지 않을거란다..."
2008년에는 "Hallelujah"가 아메리칸 아이돌에 등장한 것을 계기로 "Hallelujah"가 아이튠즈 다운로드 차트, 빌보드 디지털 송 차트에서 1위, 영국 싱글 차트에서 2위에 오르기도 했다. <Fall In Light>, <Everybody Here Wants You>, <Amaging Grace: Jeff Buckley> 같은 다큐멘터리들이 만들어졌으며, 2012년에는 <Greetings From Tim Buckley>[6]라는 영화도 만들어졌다. 제프의 열렬한 팬인 브래드 피트가 제프에 관한 영화를 제작하려고 하였으나, 메리 귀베르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Mystery White Boy>라는 영화도 2013년 개봉이 예고되어 있었으나 엎어졌다. 2현재도 제프를 추모하는 행사는 매년 그의 생일인 11월 17일에 계속 열리고 있다. #
2015년에 1993년도 Grace 녹음 당시의 테이프가 발견됐다. 이어 2016년, 이는 다른 가수들의 커버곡을 담은 'You and I' 앨범으로 발매되었다.
3. 평가
제프 버클리는 특히 음악 매니아들과 평론가들 사이에서 30여년이 지난 현재에도 높이 평가받는 음악가이다. 지미 페이지는 <Grace>를 "지난 10년 동안 나온 것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앨범"이라고 평했으며, 로버트 플랜트도 극찬했다.[7] "Hallelujah"의 원작자 레너드 코헨과 "Hallelujah"를 커버한 U2의 보노도 제프 버클리를 칭찬했다. 데이비드 보위는 인터뷰에서 <Grace>를 "무인도에 갖고 가고 싶은 앨범"으로 표현했고, 밥 딜런도 "가장 뛰어난 송라이터들 중 하나"라고 호평했다. 모리세이도 그의 올타임 페이보릿 앨범 리스트에 항상 <Grace>를 넣는다.[8] 라디오헤드의 톰 요크와 뮤즈의 매튜 벨라미[9], 콜드플레이도 그에게서 영향을 받았음을 인정한 것은 유명하다.음악 전문지의 평가도 높은데, 미국의 롤링 스톤 지는 2003년 선정한 '500 Greatest Albums of All Time'에서 <Grace>를 2012년엔 303위, 2020년엔 147위에 올려놓았으며, 2013년 영국의 NME 지의 동명의 리스트에서는 86위에 올랐다. 영국의 모조 지는 2006년에 <Grace>를 '역대 최고의 모던 록 앨범'으로 선정했고, 호주의 트리플 J 지는 역대 가장 인기있는 곡을 선정할 때마다 제프의 곡들을 상위권에 올려놓았다. [10][11] 피치포크 미디어는 <Grace> 에 10점 만점에 9점을 주었다. "Hallelujah"가 2014년에 미 의회도서관이 선정하는 National Recording Registry에 "Hallelujah"가 영구 등재되었다.
동료 뮤지션들에 따르면 제프는 훌륭한 기타리스트이기도 했지만 보컬 실력 때문에 오히려 그것이 묻혔다고 한다. 따라서 그는 과소평가받는 프로페셔널 기타리스트이기도 하다.[12] 릭 비아토 - 제프 버클리의 “Vacouver” 분석
안타깝게도 제프는 애증의 대상이던 자신의 아버지인 팀 버클리의 인생을 똑같이 따라 걷게 된다. 음악적으로 성공해 이른 나이에 요절한 것까지 똑같기 때문. 음악 천재였던 버클리 부자의 요절은 6070년대와 90년대 음악사에서 안타까운 손실이 되고 말았다.
2013년에 버클리 부자를 다룬 '굿바이 버클리'라는 영화가 개봉되었다. 주 내용은 아래와 같다.
1991년 제프가 아버지인 팀 버클리의 추모공연에 초청되어 공연을 하는데 사람들은 자신을 뮤지션이 아닌 팀 버클리의 아들로만 대해서, 아버지에게 감정이 좋지 않던 제프가 처음에는 짜증을 내지만, 사랑하는 여인과 만나고 아버지인 팀의 행적과 음악을 마주하게 되면서 팀이 비록 가족을 버렸지만 아들인 자신을 언제나 사랑했다는 것을 알고 아버지인 팀 버클리를 용서하고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 영화의 말미엔 팀 버클리의 입장도 나오는데, 이른 나이에 한 가정의 가장이 된 현실을 회피하고 아내가 음악을 이해하지 못한다며 불평을 하지만, 팀의 친구가 제프에게 "팀에게는 오직 음악과 너 뿐이었다"라고 얘기하거나 몰래 집에 가서 당시 갓난아기였던 제프를 보면서 미소를 짓거나 제프가 팀의 행적을 추적하면서 보는 장면들은 비록 자신은 가정을 버렸고 또 표현도 제대로 못했지만 자신의 아들인 제프를 사랑했음을 보여준다. 부자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 싶다면 영화를 한번 보는 걸 추천. 다만 예고편을 보면 알겠지만 제프 버클리라는 뮤지션의 카리스마가 워낙 어마어마해서 감히 흉내낼 수 있는 경지는 아니므로 팬들이라면 너무 기대하지는 말 것.[13]
4. 음반
4.1. 정규 앨범
4.2. EP
- <Live at Sin-e> (1993)
- <Eternal Life> (1995)
- <Live from the Bataclan> (1995)
- <The Grace EPs> (2002) Peyote Radio Theatre, So Real(a.k.a. Live at Nighttown), Live from the Bataclan, The Grace EP, Last Goodbye 등 다섯 장의 EP 박스 세트
4.3. 컴필레이션 앨범
- <Sketches From "My Sweetheart The Drunk"> (1998)
- <Songs to No One 1991-1992> (2002)[15]
- <So Real : Songs From Jeff Buckley> (2007)
- <You and I> (2016)
4.4. 라이브 앨범
- <Mystery White Boy> (2000)
- <Live in Chicago> (2000) DVD
- <Live at L'Olympia> (2001)
- <Live at Sin-e(Legacy Edition)> (2003)
- <Grace Around The World> (2009) CD+DVD
[1] 1960년대에 활동하면서 재즈에 영향받은 사이키델릭 포크로 유명했던 뮤지션이다. 사이키델릭한 포크 음악이 워낙 매니아층만 듣는 장르라 한국에서는 아들보다 인지도가 좀 떨어지는 편이지만 미국 현지에서는 여전히 위상이 드높은 뮤지션. 다만 제프 버클리는 팀 버클리의 아들로 알려지는 것을 매우 싫어했다. 시카고 공연 중에 한 관객이 팀 버클리 이야기를 꺼내자 어이없다는 듯 'fuck off (번역하면 "저리 꺼져!")'라고 한다. 그리고는 60, 70, 80년대 음악은 다 bullshit이며 ('더 스미스는 빼고'라고 언급하며) 90년대에 대해 언급할 차례가 오자 자작곡 Grace를 연주하기 시작한다(!) 제프는 생전에 아버지의 이름을 따르는 등 팀 버클리에 대한 존중을 항상 표현했지만 다른 이들이 비교할 때마다 팀과는 거리를 두고 싶어했다. 사실 아버지를 거의 만난 적이 없어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을 새도 없었다고도 했다. 무엇보다 제프는 자신의 음악으로 인정받고 싶어했고 예민한 감수성에 자존심이 무척 강했다. Grace 앨범 녹음 당시 어느 평론가가 그의 목소리를 마이클 볼튼과 비교하자 너무 화가 나서 녹음을 이틀간 중단했다고 한다. 사후에 그가 마이클 볼튼 테잎을 여러 개 샀고 그의 노래를 개인적으로 커버한 녹음들이 발견되기도 한 것을 보면 고독하고 섬세한 내면을 지녔으면서도 자존심이 얼마나 셌는지를 알 수 있다. #[2] 1975년 공연을 하는 아버지를 보며 가수가 되겠다는 꿈을 키우기 시작했다고 한다.[3] 프랭크 자파, 톰 웨이츠의 매니저였다. 단, 톰 웨이츠의 경우는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발탁한 사람이기는 하나, 전적으로 그의 곡에 대한 수입 관련 계약을 자기한테 유리하게 체결해서 톰 웨이츠가 초창기 자작곡을 라이브에서 잘 안 부르게 만든 계기를 제공한 장본인. 국내에서 비슷한 케이스로는 레코드사 지구레코드에 곡의 저작권을 모조리 빼앗겼다가 최근에야 되찾은 조용필이 있음.[4] 오른쪽이 제프 버클리이며 왼쪽은 당시 투어 매니저이던 진(Gene)이다. 버클리 사후 그는 마약으로부터 뮤지션들을 보호하는 비영리 단체를 운영 중이라고 한다.[5] 공식 재단에서도 마약이나 음주때문은 아니며, 자살은 더더욱 아니라고 성명을 밝혔다.[6] 위에 나온 1991년에 열린 팀 버클리 추모 공연의 제목이다. 한국에서는 굿바이 버클리라는 제목으로 개봉.[7] 제프는 레드 제플린의 빅 팬이었다.[8] 모리세이는 제프의 아이돌이었다. 귀베르는 제프가 모리세이를 리빙 레전드로 여겼다고 회상했다.[9] 제프 버클리가 쓰던 Telecaster 기타를 매입하기도 하였다.[10] 2009년 조사에서는 "Hallelujah"가 3위, "Last Goodbye"가 7위에 올랐으며, 2013년 조사에서는 "Last Goodbye"가 3위에 올랐다.[11] 호주는 제프의 차트 성적이 다른 나라들보다 높은 편이다. <Grace>가 발매되었을 때 미국에서는 149위, 영국에서는 42위에 오른 반면 호주에서는 9위에 올랐고, <Sketches From "My Sweetheart The Drunk">가 발매되었을 때는 아예 1위에 올랐다.[12] 클린톤 기타 하나만 들고 부른 Hallelujah를 들어보면 답이 나온다.[13] 단 여기서 나온 노래는 제프가 아닌 아버지 팀 버클리의 노래 Once I Was 이다[14] 2004년에 'Legacy Edition'이 발매되었다.[15] 기타리스트 게리 루카스와 함께한 스튜디오 세션, 홈 레코딩, 클럽 공연 레코딩 작업물을 모은 협업 앨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