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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3 리/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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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dium Tank, M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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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M3 리의 실전 기록을 정리한 문서.

2. 제2차 세계 대전

2.1. 북아프리카 전역

파일:959036cc76e5e21b026c537f09b51aa4.jpg
리비아 트리폴리 근교의 영국 육군 소속 그랜트 IX 커맨드 "몬티"와 버나드 로 몽고메리 장군[1]
무기대여법으로 영국군에 지원된 M3 리, 그랜트들은 북아프리카 전역에 투입되자 순식간에 독일 국방군 전차를 화력에서 압도했다.

그래서 M3가 도입되자 그때까지 영국제 전차들의 저열한 화력[2]으로 고통받던 영국 전차병들은 "드디어 우리 전차도 75mm를 달았어!"하며 기쁨의 눈물을 흘렸을 정도이다.[3]

1942년 초에 200량의 그랜트 전차가 이집트의 영국 제8군에 공급되었으며, 그랜트를 주력으로 장비한 영국 제4기갑여단은 1942년 5월 가잘라 전투에 참가하여 활약했다.

북아프리카 전역에서는 위에 언급된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꽤나 성공을 거두었으나 이후 독일 아프리카 군단4호 전차 F2형과 8,8cm FlaK을 앞세운 공세로 인해 피해가 커지기 시작했다.[4]

2.1.1. 엘 알라메인 전투

파일:M-3Grants-E_014053.jpg
엘 알라메인 전투 당시의 영국 육군 소속 M3 리 & 그랜트
파일:external/orig02.deviantart.net/on_commanding_an_m3_in_north_africa_by_epictones-d5vrkgy.jpg
엘 알라메인 전투 당시 상황을 묘사한 만화
75mm를 쏘고 있다. 37mm도 쏘고 있지만 엉뚱한 방향으로 돌아가 있다.[5]
브라우닝은 탄이 걸렸다.
나는 A-set에 "조종수, 전진!"을 외쳤지만
내 말이 안 들리는 조종수는 후진 중이다.[6]
포탑 위로 올라갔더니 50 야드[7] 거리에서 전진 중인 적 전차 12대가 보이던 차에...
누군가가 치즈 샌드위치를 건네주더라.
- 켄 자일즈 중위(Lieutenant Ken Giles), 2차 엘 알라메인 전투에서
엘 알라메인 전투의 주역이 바로 이 전차였으며, 특히 제2차 엘 알라메인 전투 당시 그랜트 전차가 매복해 있다 독일 아프리카 군단 소속 기갑부대의 측면을 기습해 무려 49량을 격파한 기록을 달성하기도 했다.

2.1.2. 튀니지 전투

파일:SC167328t.jpg
튀니지 전투 당시 젠두바에서의 미 육군 제1기갑사단 제2/13기병연대 D중대 소속 M3 리[8]
튀니지 전투 당시 연합군의 주요 전력 중 하나로 사용되었다.

2.1.3. 이탈리아 전선

파일:Grant Command Tank in Sicily.webp
이탈리아 전선 당시 시칠리아에서 작전 중인 영국 육군 소속 그랜트 커맨드
이탈리아 전선 당시, 소수의 단차가 투입되어 사용된 기록이 남아있다.

2.2. 서부전선

2.2.1. 오버로드 작전

파일:M31 Normandy.jpg
코브라 작전 당시의 프랑스 육군 소속 M31B2 TRV
프랑스 도서 지역을 독일군으로부터 탈환하는 오버로드 작전 당시 소수의 M31B2가 자유 프랑스 육군 소속으로 투입되었다.

2.2.2. 독일 본토 진격전

파일:M31_1945.png
독일 본토 진격전 당시의 미 육군 제899대전차대대 소속 M31B1 구난전차
M3 리는 사용부적합병기로 판명되어 투입되지 않았지만, 이를 베이스로 하여 제작된 M31B1, M31B2가 독일 본토 진격전 당시 각 전차 대대에 배속되어 격파되거나, 피격당한 전차들을 회수하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2.3. 독소전쟁

파일:ww2_ussr_m3_lee_late.jpg
독소전쟁 당시의 소련 육군 소속 M3 중형[9]
독소전쟁 당시, 1942년 북아프리카 전역 이후부터 2선급 장비로 돌려진 M3 리 다수가 소련으로 공여되었으며, 1944년 이후로 일선에서 은퇴하여 2선급 장비로 돌려졌다.

2.3.1. 제2차 하르코프 공방전

파일:Kharkov_M3_knocked_out.jpg
제2차 하르코프 공방전 당시 격파된 소련 육군 소속 M3 중형
제2차 하르코프 공방전 당시, 소련군의 M3 리는 데뷔전을 치렀으나 바르벤코프스키 다리를 방어하는 임무에 실패하여 다수가 격파되는 피해를 입었다.

2.3.2. 스탈린그라드 전투

파일:Don_front_1942_12_M3_lee.jpg
스탈린그라드 전투 당시 돈 전선으로 이동 중인 소련 육군 제241전차연대 소속 M3 중형 네임드 차량 "스탈린을 위해!"
스탈린그라드 전투 당시 벌어졌던 돈 전선에 소련군 소속으로 다수의 M3가 투입되어 전투를 치렀다.

2.3.3. 제3차 하르코프 공방전

파일:1943_bryansk_M3_Lee.webp
제3차 하르코프 공방전 당시 브랸스크 전선에서 격파된 소련 육군 소속 M3 중형
제3차 하르코프 공방전 당시 소련군 소속으로 다수가 투입된 기록이 남아있다.

2.3.4. 쿠르스크 전투

파일:Soviet_M3_Lee_tanks_of_the_6th_Guards_Army_Kursk_July_1943.jpg
쿠르스크 전투 당시의 소련 제6근위군 산하 제193독립전차연대 소속 M3 중형 전차 소대
쿠르스크 전투 당시에도 소련 제6근위군 산하 소속으로 다수의 M3가 참전하였다.

2.4. 태평양 전쟁

파일:M3 burma.jpg
태평양 전쟁 당시의 영국 육군 소속 리 I 네임드 차량 "칼레도니안"
태평양 전쟁 당시, 상술한 유럽 전선에서의 도태 이후 태평양 전쟁의 영연방군 소속으로 투입되어 보병을 지원하는 보병전차로서 훌륭하게 역할을 수행했다.

2.4.1. 동남아시아 전역

파일:A_Lee_tank_being_loaded_onto_a_pontoon_ferry_by_men_of_the_2nd_Division_before_crossing_the_Irrawaddy_river_at_Ngazun,_Burma,_28_February_1945._SE3155.jpg
동남아시아 전역 당시 버마의 영국 육군 산하 제2사단 소속 M3 리[10]
동남아시아 전역에서는 영연방군이 주로 사용했는데 험지돌파력이 떨어지지만 높은 차체는 오히려 수풀이 우거진 동남아시아에서 다른 전차들보다 나은 시야를 확보해 주었고, 차체에 붙은 75mm 포는 "초목을 제거하는데" 쓸모가 많았다고 한다.

게다가 일본군 전차는 하고, 치로, 치하와 같은 경장갑에 빈약한 화력을 가진 전차뿐이라 주포로 초목을 제거하면서 동시에 포탑에 달린 37mm 부포로 일본군 전차도 제거해주는 일도 많았다.[11] 또한 보병이 공격하기 어려운 진지나 거점공격에도 활용되었다.

결국 44년에 유럽전선에서 퇴출된 리는 일본군 상대로는 종전까지 사용되게 된다. 일본군은 효과적인 대전차 수단이 별로 없었기에 M3를 상대로 처절한 육탄공격을 감행했다. 특히 임팔 작전 당시 영국군 소속 제3소총기갑연대의 M3 그랜트들을 막기 위해 일본군은 영국군으로부터 노획한 M3 스튜어트까지 동원해야 했다.

2.4.2. 임팔 작전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Imphalgurkhas.jpg
임팔 작전 당시의 인도 제국 육군 소속 M3 리와 보병들
임팔 작전 당시, 고질적인 문제점을 가졌음에도 일본군을 압박했으며 영국군으로부터 노획한 스튜어트 전차와 95식 경전차 하고로 이루어진 14 기갑연대에 큰 피해를 주었다.

2.5. 계속전쟁

파일:Jatkosotta_Soviet_91_tank_brigade_M3_medium.jpg
계속전쟁 당시 카렐리야의 소련 육군 제91독립전차연대 소속 M3 중형
계속전쟁 당시 소련군 산하 제91독립전차연대 소속으로 다수의 M3가 투입되었다.

3. 냉전

3.1. 인도차이나 전쟁

3.1.1.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파일:Indochina_war_Knocked_out_M31_French.jpg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당시 격파된 프랑스 극동 원정 군단 소속 M31B2 구난전차, 1952년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당시 프랑스 극동 원정 군단 소속으로 M31B2 구난전차 소수가 투입되었으나 이 중 1량이 베트민이 설치한 지뢰로 인해 격파되는 피해를 입었다.

프랑스군의 M31B2는 직접적으로 전투를 치룰 수는 없었지만, 고장난 프랑스군의 전차를 빠르게 회수하는 활약을 했다.


[1] 1943년 1월 27일 촬영된 사진이다.[2] 당시 영국의 전차포는 3호전차의 50mm포보다도 열세한 2파운더가 주류였는데, 개발 당시 철갑유탄이 존재하였으나 관통력이 낮다는 사유로 반려 당하고 철갑탄으로만 보급되었다. 그리고 윈스턴 처칠의 명령으로 2파운더를 고집하던 시기도 있어서 6파운더를 설치하기까지 시간이 걸렸다.[3] 흔히 미 육군의 2차 대전 교리가 아군 전차가 적 전차와 싸우는 것을 피하고 구축전차가 대신 싸우는 식이라는 것이라고 아는 경우가 있는데, 여기 나와 있듯이 차체에라도 무리하게 75mm를 장착한 이유가 전차 대 전차로 싸우기 위해서라는 좋은 반증이다. 보병지원용이라면 4호 초기형처럼 포신이 훨씬 짧은 물건으로도 충분하다. 연합군 입장에서는 보병지원임무가 바로 대전차 임무 수행이다.[4] 아이러니하게도 영국군이 75mm를 받아 기쁨의 눈물을 흘렸던 순간이 나치 독일의 4호 전차 Happy time으로 넘어갔다.[5] 전차장 입장에서는 난감한 상황과 몸개그가 따로 없었겠지만, 기관총 포탑을 겸하는 큐폴라(차장용 전망탑)와 37mm 부포탑이 따로따로 회전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화이다.[6] 영국군 전차가 사용하던 No.19 무전기에서 A-set은 연대 무전망이다. B-set이 소대망이고 IC가 인터컴 설정. 즉 인터컴이 아닌 연대망에 대고 외치고 있으니 조종수에게 전차장의 말이 들리지 않는 게 당연한 상황이다.[7] 50미터도 안 되는 코앞이란 얘기다.[8] 1942년 11월 23일 촬영된 사진이다.[9] 뱌지마 시를 해방한 직후 촬영된 사진이다.[10] 1945년 2월 28일 촬영된 사진이다.[11] 재밌는 일화긴하지만 37mm로도 일본군 전차를 격파가능하긴해도 전차를 완전히 무력화시키는게 관통만한다고 되는게 아니다. 75mm는 험지개척용이고 일본군 전차를 쏘는게 낭비니 뭐니 하는 말은 그냥 유머로 받아들이는게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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