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이우스 카시우스 파르멘시스 라틴어: Gaius Cassius Parmensis | |
생몰년도 | 미상 ~ 기원전 31년/30년 |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사망지 | 로마 공화국 아티카 속주 아테네 |
지위 | 노빌레스 |
국가 | 로마 공화국 |
가족 | 퀸투스 카시우스(아버지) |
참전 | 해방자 내전, 시칠리아 내전, 안토니우스-옥타비아누스 내전 |
직업 | 로마 공화정 원로원 의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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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의 원로원 의원. 율리우스 카이사르 암살 사건의 가담자다.2. 생애
기원전 1세기 정계에서 정력적으로 활동한 대표적인 노빌레스 가문인 카시우스 씨족의 일원이다. 아버지는 퀸투스 카시우스라는 이름만 알려졌을 뿐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다. 고대 사료에서는 기원전 44년 이전의 행적에 대해 확실히 알려진 바 없지만, 일부 학자들은 카이사르의 내전 당시에 폼페이우스 편에 섰다가 파르살루스 전투에서 승리한 카이사르가 작은 배를 타고 헬레스폰트 해협을 건너왔을 때 우연히 마주친 카시우스가 바로 이 인물이었을 거라 추정한다. 아피아노스에 따르면, 그는 큰 배를 타고 있었지만 카이사르의 행운에 깊이 두려워했기 때문에 별다른 저항을 하지 않고 항복했다고 한다.그는 알려지지 않은 이유로 율리우스 카이사르 암살 사건에 가담했다. 기원전 43년 조영관에 선출된 뒤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가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돌라벨라를 상대로 전쟁을 벌일 때 아시아 해안에서 함대를 이끌었다. 동료 조영관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스핀테르는 "집정관, 법무관, 호민관, 원로원, 파트리키 및 평민에게 보내는 보고서"에서 파르멘시스가 거대한 함대를 보유하고 있다고 밝혔다.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와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가 마케도니아에 군대를 집중시켰을 때, 파르멘시스는 아시아에 남아서 그들을 지원했다. 기원전 43년 11월 제2차 삼두정치는 그를 숙청 명단에 올렸다.
필리피 전투에서 해방자파가 패배한 후, 그는 로도스에서 포획한 30척의 배로 함대 규모를 강화한 후 삼두파의 추적을 피해 자신에게 합류한 무리를 거느리고 시칠리아로 가서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와 합세했다. 이후 발발한 시칠리아 내전에 참여한 그는 기원전 36년 섹스투스 폼페이우스가 패망하자 그와 함께 아시아로 향했다. 이후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에게 귀순했고,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가 심각한 갈등을 벌이고 있을 때 옥타비아누스가 유일한 딸인 대 율리아를 오드뤼사이 왕국의 국왕 코티스 2세와 결혼시키려 하며, 옥타비아누스가 어렸을 때 카이사르에게 몸을 판 매춘 소년이라는 소문을 퍼트렸다. 수에토니우스는 파르멘시스가 옥타비아누스가 빵집 주인의 손자이며, 그의 할머니는 더러운 손으로 거칠고 추접스러운 밀가루를 반죽했다고 조롱하는 편지를 인용했다.
기원전 31년 악티움 해전에서 안토니우스의 편에서 싸웠지만 안토니우스가 패하자 아테네로 도주했다. 그 후 기원전 31년 또는 기원전 30년에 옥타비아누스의 명령을 받은 퀸투스 아티우스 바루스에 의해 살해되었다. 그는 카이사르 암살을 주동한 암살자들 중 마지막까지 살아있던 암살자였다.
파르멘시스는 여러 편의 비극, 풍자문, 비문 등을 집필했다고 전해진다. 마르쿠스 테렌티우스 바로는 '카시우스'(아마도 파르멘시스)의 비극 작품 <브루투스>를 인용했다. 그러나 그의 작품들은 현존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