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1-23 16:42:57

강신주

<colbgcolor=#000><colcolor=#fff> 강신주
姜信珠
파일:강신주 프로필.jpg
출생 1967년 ([age(1967-12-31)]~[age(1967-01-01)]세)
경상남도 함양군
직업 철학자, 작가
학력 연세대학교 공과대학 (화학공학 / 학사)
서울대학교 대학원 (철학[1] / 석사[2])
연세대학교 대학원[3] (철학 / 박사[4])
경력 연세대학교 철학과 외래교수
문사철 기획위원회 위원
종교 무종교(무신론)
링크 파일:네이버 카페 아이콘.svg 파일:유튜브 아이콘.svg

1. 개요2. 생애
2.1. 색다른 상담소2.2. 강신주의 다상담2.3. 감정수업
3. 성향
3.1. 대중적인 성향3.2. 노장의 범주 해체3.3. 반자본주의?
4. 논란
4.1. 힐링캠프 출연
4.1.1. 반론
4.2. 노숙인에 대한 발언
4.2.1. 반론
4.3. 페미니즘 수준 발언4.4. 공룡과 냉장고 발언
4.4.1. 반론
4.5. 영화 어벤져스 비난 논란
4.5.1. 반론
4.6. 무신론자여야 인문학자가 될 수 있다 자격 주장
4.6.1. 반론
5. 저서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철학자이자 저술가.

2. 생애

1967년 경상남도 함양군에서 태어났다. 연세대학교에서 화학공학을 전공했고, 석사부터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동양철학을 공부했으며 철학 박사 과정은 다시 연세대학교 대학원에서 마쳤다. 석사논문은 '나가르주나', 박사논문은 '장자'를 주제로 썼는데 이것은 2018년 기준 여전히 강신주의 마지막 논문이다. 박사논문을 발표한 2003년 이후로 전혀 논문 발표가 없은 덕에 강신주가 철학자라는 명함을 가지고 있으면서 학술적으로 기여한 게 있는가에 대한 근거로 쓰이기도 한다. 본 내용은 《장자, 차이를 횡단하는 즐거운 모험》(그린비 출판사)이라는 책으로 출간된 바 있다.

2.1. 색다른 상담소

MBC 라디오 김어준의 색다른 상담소에 출연하며 인지도를 넓혔다. 그로 인해 강연과 저술에 탄력을 받았다. 저서 《철학이 필요한 시간》은 철학서적으로는 드물게 10만 권이 넘는 판매 부수를 올리게 되고 베스트셀러 작가로도 등극하였다.

2.2. 강신주의 다상담

이후 정권이 바뀌며 김어준의 벙커1이 망해갈 무렵, 김어준에 대한 ‘으리’로 벙커1에서 강연을 진행한다. 그 ‘으리’는 강연 도중에 강신주 본인이 누차 밝힌 사실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강연이 딴지일보의 동영상 강의 및 팟캐스트로 제작되어 다시 인기를 올리게 된다.[5] 팟캐스트는 ‘강신주의 다상담’이란 타이틀로 진행했는데, 시간이 쌓여 고민 내용을 책으로 엮어서 출간했다. 이 또한 상당한 반향을 일으켰다.

2.3. 감정수업

2013년 말에 출간한 《감정수업》은 무려 28만 권이 넘는 판매 부수를 기록한다. 강신주는 그렇게 많이 팔릴 책이 아니고 무거운 책이라며 겸손과 우려를 표했지만 기쁨을 감추지는 못했다.

3. 성향

3.1. 대중적인 성향

대중적인 전달을 중시한다. 그 때문에 가벼운 출판과 방송 출연 등이 잦은 편인데 그것만으로도 찬반 논쟁을 일으키는 편이다. 이러한 면모는 김용옥의 사례와 유사하다. 다만 대중 매체에 나와 떠드는 일부 속빈 '자칭' 철학자들과는 다르게, (논란의 여지가 있더라도) 자신만의 전문 분야를 가지고 있는 철학자이다. 참고로 강신주 본인은 김용옥의 대중과 소통하려는 태도와 함께, 그가 동양학의 대중화에 기여한 공로는 높이 사지만, 그의 담론이 따지고 보면 상당히 엘리트주의적인 한계를 지닌다고 지적한다.

김어준과 많이 친하다. 두 사람은 문일고등학교 동문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김어준의 색다른 상담소에서 같이 상담을 진행하던 중에 알게 되어 친해진 듯하다.

글을 도발적으로 쓰는 경향이 있다.
기사
한 강연에서 "현실이 어떻게 보이느냐? 대통령을 죽여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해야 한다"라고 말해 논란이 일었는데, 본인은 대통령의 권위에 눌리지 말고 스스로의 의견을 어떤 방식으로든 피력하고 민주주의를 요구하라는 의미였다고 한다.

이는 니체계열 철학을 하는자들에게 흔히 나타나는 성향이다. 니체부터가 도끼를 든 자로 비유할 만큼 사회에서 신성시되는 영역을 박살내는 글을 써왔고, 그의 계보를 잇는 프랑스 철학자들도 충격요법이건, 아님 얄팍한 자기만족에서이건 자주 써왔다.

3.2. 노장의 범주 해체

그의 박사 과정 논문 및 추가 연구, 저서 등을 통해 흔히 도가 철학으로 엮이는 노자장자의 사상이 상당히 다름을 지적하며, 특히 노자 사상의 통치규범적 면모를 지적하고, 장자 사상의 아나키즘적 측면을 재평가한 바 있다.

제자백가들을 다룰 때, 전한 왕조 이후 특정 관학화된 사상의 기준에서 기록된 제자백가의 언행이나 역사 기록보다는, 당대 인물들(즉, 해당 학자와 동시대를 살면서 그 학자와 교류했던 인물들)의 흔적이 남은 기록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제자백가들의 사상에 대한 그의 관점을 간단히 요약하면 '국가주의 좆 까, 장자가 제시한 것 같은 소통과 연대의 논리는 얼마나 아름다운가' 쯤 된다.
특히 노자를 자연주의적, 신비주의적으로 해석하는 관점들을 대차게 까며, 노자식의 "도가"적인 부드러운 통치술이야말로 교묘하게 포장된 국가주의적 논리라는 점을 강조한다. 또한, 당대 텍스트에 대한 비교철학적 접근을 통해 노장, 공맹 외에도 양주 등의 사상을 재발견하려는 시도도 하고 있다. 양주에 대한 그의 평가는 이중톈의 그것에 가까운 편이다.

다만 강신주가 기존 학자들의 주장과 거리를 두었다고 해서 그의 주장이 신선한 것이라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강신주의 주장은 이미 학계에서 여러 차례 거론된 것들 뿐이지 전혀 새로울 건 없다. 한 예로 노자의 통치규범적 면모를 최초로 지적한 것 역시 강신주가 아니다. 사기 열전에서도 노자한비열전으로 노자를 법가 계열로 분류하여 다뤘을 만큼 노자의 정치철학적 면모는 일찍부터 주목 받아 왔다. 노자 항목 참조

그 외 장자의 사상을 해석하면서 스피노자, 니체, 베냐민, 비트겐슈타인[6], 라캉, 가라타니 등의 사유를 자주 재해석, 참고, 인용한다.

즉, 전반적으로 형이상학적 본질주의를 거부하고, 본질의 사후성과 개별체의 실존을 중시하는 편이다. 그가 상대적으로 가벼운 상담이나 강연 등에서 보이는 태도에서 실존주의의 냄새를 맡았다면 당신의 느낌이 꽤나 잘 들어맞은 것이다. 강신주 본인은 사석에서는 장폴 사르트르, 알베르 카뮈 등의 낡은 실존주의 계열의 철학을 평가절하하는 경향이 있지만 모리스 메를로퐁티질 들뢰즈, 장 보드리야르 등은 긍정하기도 한다.

이런 식으로 노장철학과 서양철학을 결부지어 설명하는 접근방식 자체는 이미 많은 학자가 시도한 바 있다. 대표적인 예가 캐나다의 오강남 교수인데, 오강남은 도덕경과 장자(내편)을 번역했으며, 좋은 평가도 받은 바가 있다. 하지만 강신주의 텍스트에 대한 해석은 기존의 방식과 궤를 달리하여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참고

3.3. 반자본주의?

자본주의는 종교나 다름없다고 했다. 돈을 받고 또 그 돈을 써야만 하는 구조라므로 벗어날 수 없으며, 돈에 소비재 이상의 가치를 부여하기 때문에 그렇다고. 그래서 강의 중간에 돈을 태우고 사람들이 놀라는 반응을 보이자 종이에 종이 이상의 것을 보았기에 그런 반응을 보인 것이라고 지적했다.[7]

강신주는 마르크스주의자 계열로 보이지만, 최근 다수의 방송, 잡지 등 미디어를 통해 드러나는 모습은 그가 정말로 반자본주의를 지향하는 철학자로서 굳건한 노선을 견지하는 것인지 의문스러운 것도 사실이다. 참고로 그가 카를 마르크스를 논할 때에는 자크 랑시에르, 알랭 바디우, 루이 알튀세르, 가라타니 고진 등의 마르크스에 대한 해석을 비교하거나 하는 식으로 접근할 때도 많다. 특히 알튀세르의 스피노자 해석이나 고진의 "트랜스크리틱" 등이 함께 엮일 때도 있다. 물론 마르크스 생전 당대의 사상가들과 마르크스를 비교하기도 하고, 어쩌든 그는 마르크스에는 대해서 직접 파고들기보다는 비교철학적으로 접근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2014년 2월호 패션잡지 <로피시엘 옴므> 참고 : 휴고보스 등 수백만원대 명품을 입고 서있는 반자본주의자?!?)#

강신주 본인도 돈을 벌기 위하는 태도에는 대해서 "나도 내가 말하는 대로 철저하게 실천하지 못하기 때문에 말로라도 '이렇게 해 보자'고 열심히 떠드는 것"이라고 말한다. 애초에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반자본주의적 삶을 실천하기란 쉽지 않고, 적어도 자본주의 위에서 해낼 수 있는 역할에 따라야 게을러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돈을 위해서 여러 가지 활동을 하는 거냐는 비판도 있지만, '인문학자로서 항상 인간의 자유와 행복을 생각한다'[8]고 말하고 다니는 것으로 보아 인본주의자에 가깝다고 보는 시선 또한 존재한다. 주로 강신주를 옹호하는 시각에서 '자본주의가 인간에 반(反)하기 때문에 이를 비판하는 것이다'는 입장. 즉, 비단 자본주의만을 반대하는 건 아니므로 반자본주의자로서 행동을 실천하기 위해 일단 강연부터 공짜로 하는 것을 강요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사실 대중을 대상으로 하는 공짜 강연에도 꽤 자주 출몰하는 편이다.

강신주 본인이 사회주의공산주의개인주의든 어떤 사회/정치/경제적 사상에 대해 '인간의 행복을 충족시키지 않기에 반대한다'고 말할 때까지는 알 수 없는 논란이다. 정작 그의 인생관은 '인생 자체는 고통의 연속이며 행복해지기 위해 움직이고 게으를줄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4. 논란

자신의 의견을 제시하는 자리에서 좀 깨는 발언이 튀어나올 때가 많다. 물론 단순한 도발이라기보다는 강신주 나름의 표현 방식이고 판단하는 것은 독자의 몫이지만, 간혹 좀 지나치다 싶은 사례들도 있다.(이 부분은 강신주 특유의 화법으로서 사람들을 놀라게해 깨우는 역할이 본인의 역할이고 철학자의 역할이라 본인의 저서와 강연에서 밝힌적 있다.)

4.1. 힐링캠프 출연

2014년 초에는 힐링캠프에 출연하여 힐링류의 이야기를 까는 걸[9]로 인터넷에서 반향을 얻었는데, 지나치게 꼰대적이란 반감도 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본인은 "영웅[10]주의를 혐오한다"는 것을 인터뷰나 저서에서 많이 강조한다.

어쨌든 이때쯤 방송에 계속 출연하면서 "혼자 먹는 밥은 밥이 아니라 사료" 등의 막말을 계속 쏟아냈다. "결혼의 잣대가 더러운 거잖아요. 결혼의 논리는 독점과 소유의 문제고, 자기 혈통을 보존하겠다는 논리거든요. 사랑은 소유와 반대되는 논리라고요. 내가 배고파도 음식을 주고, 서로서로 상대방의 욕망에 맞추려고 하고, 내 것을 내려놓는 과정이라고요."라는 말도 많은 사람들을 깨게 했다.

4.1.1. 반론

그의 가치평가와 주장은 니체적 사유와 60년대 유럽의 철학 맥락에서 보면 이상할 것 없는 것들이다. 니체의 관점에서 제도란 그 본질이 고통을 주는 것이다. 니체는 인간을 계속해서 망각하는 존재로 정의한다. 작심삼일이 본질이란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굳게 결심을 십년이고 이십년이고 추구하는 사람도 있냐하면 지속해서 자신의 마음을 되새기는 작업을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되새기는 그 방법이란 스스로를 고통주는 것이다. 인간이란 동물이 행복보다 불행을 잘 기억하는 신체구조를 가졌다는 것이다. 따라서 고대의 채권자 채무자의 신체를 훼손하는 보복의 제도가 등장하게 되었다고 한다. 보복의 고통으로 계약을 기억하고 이행시킨다는 것이다.

이 관점에서 보면 결혼 제도란, 지금의 사랑이 언젠가는 망각되겠지만 그래도 사랑을 주겠다는 채무계약과 같다. 문제는 사랑은 내가 타인의 마음에 불러일으키는 것이지, 채권자가 되어서 요구한다고 다그쳐서 될 것이 아니라는 지점에 있다. 채권자가 그런 자세를 취하다간 채무자는 스스로 고통으로 사랑을 뱉어내야하는 비참한 상황에 놓이게 될 것이다. 여기에 더한 문제는 결혼제도가 성관계 독점권을 상호 부여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사랑을 요구하는 배우자는 사랑을 일으키는 노력은 게을리하면서 상대방의 신체를 볼모로 잡고 채권추심을 할 수 있다. 죽을 때까지. 그래서 결혼제도는 비극적이라는 것이다.

결국 문제의 본질은 사랑이란 일으키는 것이지 요구하는 것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요구만해도 된다고 말하는 결혼제도의 성질에 있다. 그래서 나쁜제도라고 말하는 것이다.

다만 이런한 주장은 60년대 유럽 학생운동과 히피세대의 영향속에서 자연스래 형성되었던 좀 지나간 담론이다. 결혼제도가 지닌 가정 형성과 유지, 경제적 성격을 무가치하다 여기고, 이성간의 사랑으로 다된다는 만능론 지상주의로 기울어졌는데, 자유사랑을 추구하고 자신의 이성적 매력에 자신감있는 젊은 남녀들이나 공감할만한 내용이다. 강신주는 아마 21세기 대한민국에 이게 맞다고 생각해서 주장하는 것이지만, 만약 정말 맞다면 그가 힘들여 말안해도 알아서 공감받고 널리퍼졌을 것이다. 60년대 유럽인들과 21세기 한국인이 어떻게 다른지 그의 고민이 좀 부족했던 감은 있다.

한편 혼자먹는 식사를 비판하는 것은 사르트르적인 관점이다. 강신주는 사르트르의 모형을 비판은 하지만, 사르트르의 전반적인 문제의식과 접근법은 깊게 공감하는 편이라 실질적으로는 별 구분이 안되는 수준이다. 사르트르는 인간이 주변과의 관계속에서 본질을 결정힌다 여기는데, 강시주는 이것을 인간관계(=관계) 속에서 그 사람의 삶의 의미(=본질)가 결정한다고 좁게 해석한다. 그래서 관계를 열심히 맺어야 삶의 의미를 만들 기회가 생겨나는데 현대 한국인은 혼자서 생각만하면 의미가 생긴다고 착각해서 삽질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사료라는 표현도 과격 하지만 그 식사가 생체 유지활동에 그친다는 의미로 쓰인 것이다. 그가 주로 상대하는 독자층이 생각에 비해 행동이 없다 여겨서 나오는 말인 것이다.

4.2. 노숙인에 대한 발언

2012년 4월 중앙일보에 기고한 ‘수치심은 정신이 살아있다는 증거’라는 제목의 글[11]이 2014년 이후 새롭게 주목을 받았다. 이 글은 강신주의 신간(<감정수업>, 민음사, 2013)에도 그대로 실려 있어서 주목을 받은 것인데, 거기서 강신주는 서울역에 있는 노숙인들이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죽어 있”는 “강시 혹은 좀비처럼 보인다”고 하였다. 왜냐하면 노숙인들은 “서울역을 지나다니는 일반 시민들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을 뿐 아니라 “자신의 처지를 의식하는 일도 별로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강신주는 “자존심을 느낀다면 어떻게 노숙자로 살아갈 수 있겠는가?”라고 질문하면서 “어떻게 해야 노숙자를 하나의 인격자로 깨울 수 있을까? 아니, 어느 순간 노숙자는 자존심을 가진 인간으로 부활할 수 있을까?”라고 질문했다. 이 발언은 인터넷 공간에서 많은 비판을 받기도 했다.
파일:external/beminor.com/13899811270030.jpg
위 내용과 관련해 경향신문과 인터뷰한 기사가 있다. #

4.2.1. 반론

니체계열 사유에서는 그다지 이상할게 없는 글이다. 이에 따르면 인간의 제도, 문화, 학문 등 지적활동과 관련된 모든 영역은 인간의 이런저런 동물적 본능과 욕망에서 파생된 것들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시작점이 되는 욕망은 살고싶다는 생의 의지다. 살고자하는 마음이 있어야 자신의 삶 방식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 생기고, 그래야 자긍심이 생겨난다. 이 시각에서보면 수치심이 없는 것 즉 자긍심이 없다는 것은 살고 싶은 마음이 바닥까지 내려가버린 비참한 상태다. 그래서 남들이 무작정 도와주는 것은 별 도움이 안된다. 무엇보다도 본인이 살고 싶다는 강한 열망이 있어야 시작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것은 그 사회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생존본능조차 망가지게 할 만큼 폭력적이고 억압적인 나쁜 사회라는 뜻도 된다.

물론 강신주가 '수치심'이란 단어가 대한민국의 대중이 가진 유교적 가치관에서는 어떻게 읽히게 될지 고민을 안한것은 의사전달 방식의 심각한 문제다. 맹자적 유교 맥락에서 수치심이 없다는 것은 공동체의 비난에 감수성이 없는 인간이라 옛말로는 짐승같은 것이고 요즘말로는 사이코 패스다.

반면 강신주와 니체가 말하는 수치심을 잃은자는 그냥 깊은 상처를 입은 맹수, 영웅이다. 적절한 동기만 있으면 바로 자긍심을 회복하고, 실패를 딛고 일어서서 투쟁을 이어갈 미래의 헤라클레스다. 그가 본래 하고자하는 말은 내용적으로는 비난받을 지점이 없는데 듣는 사람 고려를 안해서 오해를 퍼먹는다는 점에서 그를 어리석다 할 수는 있지만 악하다고 말 할 수는 없다.

4.3. 페미니즘 수준 발언

<철학 VS 철학> 개정판을 출간한 16년 9월 7일 인터파크 북DB와의 인터뷰에서 질문자가 ‘1500페이지 분량의 책에서 여성 철학자는 한나 아렌트 한 명뿐’이라고 지적하자, 수준이 떨어져서 넣지 않았다고 말했다. "페미니즘은 여성적인 입장을 다루나, 아직 인간 보편까지는 수준이 안 올라갔다"며 "그래서 항상 배타적이고 공격적이다. 그 정도 가지곤 안 된다"고 했다. 또 "어떤 사람이 있는데 그가 여성이며, 음악을 좋아하고, 음식을 잘한다는 등의 특징을 전체로서 봐야 인문주의 시선이 생긴다. 그런데 ‘여성', ‘남성'이라는 이유로 들어가면 파시즘적 담론인 거다"그리고 "그건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친일파라는 이유로, 일본 사람이라는 이유로 비판하는 것과 같다"이라고 덧붙였다.

4.4. 공룡과 냉장고 발언

2013년 7월 경향신문에 인간다운 삶을 가로막는 괴물, 냉장고라는 칼럼을 개제해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본문을 읽다보면 '애써 잡은 공룡'이라는 표현이 보인다. (고생물학적으로는 틀린 표현인 건 비유법이라 치고 넘어가더라도) 옛날엔 냉장고가 없어서 음식이 빨리 부패해 장시간 보관할 수 없다고 얘기하는 듯 하지만, 냉장고가 만들어지기 전에도 이미 사람들은 소금에 절이거나 말리거나 발효시키는 방법 등으로 음식을 장시간 보관하면서 먹어 왔다. 논리적인 부분 이외에도 억지 주장으로 남들을 깨우치려는 듯한 과격한 문체도 무리수라는 반응이다. 다만 이후에 강연에서 해당 논란을 언급하며 자신의 요지는 자본주의에서 강조하는 소유와 탐욕을 비판하려는 것이었다고 밝혔다.

4.4.1. 반론

글의 논지는 화폐를 통한 교환이 활발해지면서 인간성의 상실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이것은 칼 맑스의 <경제학 철학 수고> 중에 '돈의 힘'이란 제목의 글에서 이미 나온이래로 유럽 사회주의 계열에서 많이 논의된 떡밥이다. 내용이 고고학적 증거와 맞지 않게 엉망인 이유도 레닌 스탈린 시절 이야기되던 논리이기 때문이다. 강신주가 구닥다리 고전을 읽고 현대화 시키는 작업도 안하고 게으르게 글을 쓴건 문제가 있지만, 논어나 손자병법 같은 고전의 소절을 칼럼으로 소개하는 자들도 별다를게 없는 것을 생각하면 엄청난 실수라고 볼 수는 없다.

4.5. 영화 어벤져스 비난 논란

2015년에는 어벤져스를 보는 것은 술집에서 여자랑 노는 것과 같다는 말을 해서 많은 이들의 반발을 샀다. 덧글을 보면 알겠지만 저 어벤져스 인터뷰를 접한 이들 대부분은 아연해하는 반응이다. 냉장고 칼럼의 경우 각종 블로그나 SNS 등지에서 논쟁을 일으켰지만, 어벤져스 발언에서 드러난 그의 억지뿐인 주장과 엘리트 의식에 많은 이들이 불쾌함을 내비치고 있다.

이를 엘리트주의에 기반한 발언이 아닌 유희에 치중된 영화를 비판하고자 한 것이라 변명한다. 그러나 유희를 추구 할 수도 있는 것이고, 유희를 추구하는 '순간'도 있는 것이다. 매번 반(反)유희라면 그 또한도 피곤하지 않겠는가? 무엇보다 유희의 대표적인 예라고 든 게 여자랑 술집에서 노는 거라고, 가져온 비유 자체에도 문제가 있다.

4.5.1. 반론

강신주는 사실상 서양 철학을 하는자다. 20세기들어서 서양 철학에서는 성행위의 신성함을 해체시키는 작업이 활발히 일어났다. 그래서 먹고 싸고 자는 것과 같이 중요하지만 특별할 것도 없는 그냥 인간의 동물적 활동으로 있는 그대로 놓고 생각하려고 했다. 그런 맥락에서 술집 여자와 논다는 표현은 아무런 가치가 담기지 않은 성관계 그 자체를 말하기 위해 채택한 것에 불과하다.

유희를 수준이 낮다고 하는 것은 실존주의 맥락에서 이다. 실존주의는 결국 사는것을 소중히 여기는데, 남들의 생존을 걸고 겪는 고통을 이해하는게 인본주의자로서는 우선이라는 것이다. 2차세계대전 생존자들이 했던 철학이기 때문에 사는게 중요하지 노는게 중요하냐는 좀 꼰대스런 마인드에서 나온 가치관이지 엘리트주의하고는 별 관계가 없다.

이에 대한 반론도 가능하다. 서양 철학에서는 먹고 자고 싸는 행동에 '술집여자'를 껴놓는가? 그것을 아무런 가치가 담기지 않는 행동으로 보는 것 자체가 문제적이다.

4.6. 무신론자여야 인문학자가 될 수 있다 자격 주장

이어령의 편을 든다는 건 우리가 보수화됐다는 거예요. 이어령의 보수성은 기독교로 넘어간 데서도 알 수 있어요.
인문학자가 어떻게 종교를 가져요? 인문학자는 고통의 폭이 더 넓어야 다른 사람들을 포괄할 수 있는데, 그만큼 고통스럽기 전에 교회에 가는 거예요. 그럼 안 돼요.

인문학자는 신을 믿는 순간 글을 쓰면 안 돼요. 왜냐하면 신에게 구원받고 위로받기 이전에 겪어야 될 고통들이 있거든요. 바닥까지 더 가야 해요. 갈 수 있는 데까지 가서 작품이 나와야죠. 어느 정도 갔다가 교회 가는 사람들은 편한 길을 가려는 거예요.

이어령을 비판하면서 자신만의 논리로 인문학자의 자격을 주장했다."종교인은 보수적이다. 그리고 종교인이 되는것은 고통을 외면하고 편한길을 가려 한다. 따라서 글을 쓰면 안 된다."라는 주장인데, 실존하는 영미와 유럽의 수많은 인문학자들을 불성립하는 존재로 간주하는 오류는 그렇다 치고 논리 구조 자체가 비약이 심하고 결론에 이르기까지의 논증이 지나치게 허접하다. 스스로 말하듯이 인문학자라면, 인문학자로서의 바람직한 '자세'를 그 '조건'과 동일시하는 것이 논리적 오류를 화법의 치장으로 가렸다 하는 것을 누구보다 눈치채고 있어야 한다. 나아가 그 '자세' 의 필요조건으로서 '탈 고통의 거부'를 당연시하는 것 역시 학문적 입장에서 떠올린 한 가지 생각을 직업윤리로 비약시킨 확대해석이고, '종교를 가지는 것'이 곧 '고통에서 회피하는 것'인 데다 '고통을 적게 겪는 것'이 '인간 군상의 이해를 저해하는 것'이라는 주장까지 끌어다 붙여야만 본인의 발언에 있기에 처음과 끝이 연결된다. 연단에서 와르르 말을 쏟아부을 때에는 청중으로 하여금 '그런가? 그런가? 그런가?'를 10여 초만 겪도록 밀어붙이면 마지막 말까지 도달시킬 수 있지만, 말 하나하나를 면밀히 펼쳐 보면 지극한 지엽적이고 개인적인 발상의 연쇄를 당연시하는 졸언이 된다. 논리를 보고 주장을 인정하기 전에 결론에 다다르기 위할 목표를 설정해 두고 견강부회를 시도했으며, 논증에 동의하기보다 주장에 동조하는 사람을 포섭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음이 드러나 있다. 적어도 글을 쓰려면 주장을 위하여 논리를 비약하면 안 된다.

4.6.1. 반론

강신주는 서양철학을 모르는 일반인들 상대로 앞뒤자르고 자신의 결론을 막 던져서 그렇지, 서양의 이원론적 사유 맥락에서는 지극히 상식적인 말을 할 뿐이다. 이에 맞추어서 그의 말을 해석하면,

고통의 폭이 더 넓어야 = 감각적 경험(데이타)이 풍부해야
다른 사람들을 포괄한다 = 다른 해석(가설)을 포섭하는 나의 해석을 만들 수 있다.
고통스럽기 전에 교회를 가면 안된다 = 감각경험이 부족한데 기성해석에 의존하면 안된다.

평생 실험 한번 안해보고 교과서를 그대로 믿고 안주하는 과학자가 만약있다면 누구나 그가 학문적으로 게으르다고 여길것이다. 강신주가 말하는 인문학자도 같은 것이다. 경험이 없는데 무작정 종교적 해석을 받아들인다면 그건 학문적으로 게으른 것이다.

강신주가 게으른 인문학자를 맹비난하는 것은 그가 니체식 주관론자이기 때문이다. 그가 보기엔 기독교 등의 객관론의 본질은 자신의 주관을 남들에게 일반화시키고 강요시키는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기독교 등에서 타자를 위한다고 아무리 해봐야 자신의 방식으로 남을 끼워맞춰서 판단하는 짓거리에 지나지 않는다. 때문에 게으른 인문학자란 게으른 과학자와 차원이 다르게 악한 존재다. 타자를 향해 자신의 해석을 폭력적으로 휘두르는 자이기 때문이다.

강신주가 서양식 사유에 대한 설명없이 결론을 던지는 것은 대중을 상대로 하는 사람으로서는 분명 문제가 있지만, 철학한다는 사람치고 안그런 자가 세상에는 거의 없다. 따라서 그렇게 맹비난할 거리도 못된다.

5. 저서

  • 장자: 타자와의 소통과 주체의 변형 (2003.09.27)
  • 노자: 국가의 발견과 제국의 형이상학 (2004.04.21)
  • 장자의 철학 (2004.08.30)
  • 동양의 고전을 읽는다 (2006.07.18)
  • 스승 이통과의 만남의 대화 (2006.08.31)
  • 철학 삶을 만나다 (2006.09.28)
  • 생각하고 토론하는 중국 철학 이야기 1 (2006.11.20)
  • 회남자 & 황제내경 (2007.03.20)
  • 장자, 차이를 횡단하는 즐거운 모험 (2007.08.10)
  • 대한민국 청소년에게 (2008.08.25)
  • 과학이 나를 부른다 (2008.11.14)
  • 상처받지 않을 권리 (2009.06.30)
  • 철학적 시 읽기의 즐거움 (2010.02.05)
  • 철학 vs 철학 (2010.02.25 / 2016.08.10(개정판) 이 양반이 왜 철학박사인지 모르겠다면 읽어보자
  • 철학이 필요한 시간 (2011.02.15)
  • 철학적 시 읽기의 괴로움 (2011.09.30)
  • 철학의 시대 (2011.11.03)
  • 제자백가의 귀환 시리즈 1: 철학의 시대 (2011.11.07)
  • 제자백가의 귀환 시리즈 2: 관중과 공자 (2011.11.07)[12]
  • 김수영을 위하여[13] (2012.04.23)
  • 장자&노자 (2013.04.11)
  • 공자&맹자 (2013.04.11)
  • 맨얼굴의 철학, 당당한 인문학(인터뷰 : 지승호) (2013.05.13)
  • 철학자, 철학을 말하다 (2013.06.12)
  • 강신주의 감정수업[14] (2013.11.20)
  • 강신주의 다상담 1-3[15] (2014.01.20)
  • 망각과 자유: 장자 읽기의 즐거움 (2014.04.01)
  • 매달린 절벽에서 손을 뗄 수 있는가?: 무문관, 나와 마주 서는 48개의 질문 (2014.06.30)
  • 씨네샹떼(Ciné Chanté)(비평가 이상용과 공저) (2015.04.20)
  • 비상경보기 (2016.03.10)
  • 철학 vs 실천(강신주의 역사철학 정치철학 강의 1) (2020.06.10)
  • 한 공기의 사랑, 아낌의 인문학 (2020.07.16)
  • 구경꾼 vs 주체(강신주의 역사철학 정치철학 강의 3) (2020.09.25)
  • 바람이 분다, 살아야 겠다 철학자 강신주 생각과 말들(인터뷰 : 지승호) (2022.03.05)

[1] 동양철학전공[2] 석사 학위 논문 : 『鹽鐵論』思想 硏究 : 前漢儒家의 自律性 論理[3] 지도교수와의 마찰로 대학원을 옮겼다.[4] 박사 학위 논문 : 莊子哲學에서의 소통(通)의 논리 : 『莊子』<내편>을 중심으로[5] 팟캐스트는 무료이나 동영상 강의는 유료회원만 볼 수 있다. 또한 당시 찾아가서 직접 보는 것 역시 무료였다.[6] 비트겐슈타인의 텍스트 중에서도 《철학적 탐구》와 같은, 그의 후기 사상이 담긴 것들이 주로 해석된다.[7] 반론은 '금전교' 문서의 '자본주의는 종교인가' 문단 참고.[8] '강신주의 다상담'이나 칼럼에서 여러 번 말했다. 사실상 인문학의 목표가 인간의 자유와 행복임은 당연한 이야기.[9] 예컨대, 흔한 자기계발서 처럼 쏟아져나오는 양산형 "힐링"에 대한 서적들(아프니까 청춘이다류의 책들)은 강신주의 입장에서는 독자의 개별적인 삶의 가치를 부정하면서, 사회적 부조리 등에 대한 저항을 잠재우는 아편 역할을 하는 책들이다.[10] 종교적 구세주, 정치적 지도자, 그리고 앞의 꼰대에 해당하는 학문적 멘토까지 아나키즘적 입장에서 자주 깐다.[11] http://sunday.joins.com/archives/36400[12] 분명 시리즈물으로 소개되었는데 2편까지만 쓰고는 수 년째 소식이 없다.[13] 시인 김수영에 대한 평전이자 인문학 서적이다. 개인적으로 김수영 시인을 좋아한다고.[14] 경향신문에 연재된 칼럼의 단행본[15] 팟캐스트로 진행한 강연 및 상담의 단행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