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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축구단 | |
Kyungsung FC | |
<colbgcolor=#ae1932><colcolor=#fff> 정식 명칭 | 경성축구단 |
한문 명칭 | 京城蹴球團 |
창단 | 1933년 5월 11일 ([age(1933-05-11)]주년) |
해체 | 1950년 |
연고지 | 경성부 |
홈구장 | 서울운동장 (16,000명 수용) |
구단명 변천 | 경성축구단 (1933~1946) 서울축구단 (1946~1950) |
주요 인물 | |
이사장 | 여운형 |
감독 | 현정주 |
우승 기록 | |
전조선축구대회 (1회) | 1936 |
천황배 (1회) | 1935 |
메이지신궁 경기대회 (1회) | 19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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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35년 제7회 경평축구대항전을 앞둔 경성축구단 선수단 |
2. 역사
1917년에 창단한 불교청년회 축구단이 잠시 해단하다가 1925년 조선축구단으로 재창단했고 조선축구단에서 일부 선수들과 운영진들이 나와서 같은 서울의 라이벌 경성축구단으로 합류했다.1929년, 조선일보는 경성과 평양의 도시 대항전인 경평대항축구전을 구상하고 같은 해 1회 대회를 개최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에는 경성과 평양을 대표하는 축구단이 없었기 때문에 양 팀의 선수들은 각 지역의 학교 팀과 사회인 팀에서 선발하여 구성하였다.
1933년, 평양을 대표하는 평양축구단이 창단된 직후 경성에도 지역을 대표할 축구단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점차 커짐에 따라 3월 28일 경성의 축구인들이 중심이 되어 창단 준비위원회를 구성하였으며, 같은 해 4월 6일에는 평양축구단의 초청을 받고 경평전 참여를 결정하였다. 그리고 1933년 5월 11일 종로 백화원에서 경성축구단 창단 성명을 발표하였다.
창단 당시 멤버는 다음과 같다.
이사장: 여운형
이사: 유억겸, 이용설, 배석환, 현정주, 김상익
간사: 이영선, 이창진
감독: 현정주
선수: 이혜봉, 정용수, 이창룡, 강영필(연희전문), 이종만(연희전문OB), 박석연, 서형남(세브란스의전), 윤중호, 이용겸(세브란스의전OB)
김용식(축구인), 한우량, 하영득(보성전문), 송기우(보성전문OB), 이영민
(조선식산은행), 백기주(진남포), 송기수(송도고), 유약한(철도국), 채금석, 최성손(경신중OB)
1935년 전일본종합축구선수권대회 우승 멤버 |
그러나 1938년 경평전에 함흥축구단이 추가로 참가하는 형태로 3도시축구대항전이 개최되는 등 타 지방에서도 축구열기가 고조되며 강력한 지방팀들이 생김으로 인해 경성과 평양의 양강구도가 무너지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을 뒤집고자 선수들을 영입하며 재기를 노리던 도중 1942년 일제의 구기종목 금지로 인해 팀은 사실상 해산되었다.
해방 후 축구 경기는 재개되었으나, 한반도가 38선을 경계로 분단되면서 남북간의 교류가 어려워지고 선수들의 사상이나 출신지에 따라 월남, 월북이 이루어지며 지역 축구가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이 상황에서도 경성축구단은 서울축구단으로 이름을 고치고 1946년 서울에서 마지막 경평전을 치렀으나, 한국 전쟁 이후 자취를 감추고 만다. 이로서 한국의 지역 축구는 종지부를 찍게 되며, 사실상 오늘날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과 북한 축구 국가대표팀의 남북전으로 이어진다.
3. 주요 인물
여운형 (呂運亨 | Lyuh Woon-hyung) |
대한제국, 일제강점기 조선, 미소군정기 조선 시기의 독립유공자, 통일운동가, 정치인, 언론인, 체육인. 1933년 경성축구단 이사장, 1934년 조선축구협회[2] 회장, 1935년 조선체육회[3] 회장을 역임. |
김용식 (金容植 | Kim Yong-Sik) |
대한민국의 체육인. 1936년 베를린올림픽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4], 1948 런던올림픽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5]에 선수로 참가. 1954년 스위스월드컵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6] 감독을 역임. 경성축구단 창단 멤버, 1935년 전일본종합축구선수권대회, 메이지진구경기대회, 1936년 전조선축구대회 우승 멤버. |
이영민 (李榮敏 | Lee Young-Min) |
대한민국의 체육인. 대한야구협회 초대 이사, 초대 부회장, 아시아야구연맹 한국 대표, 대한축구협회 초대~4대 집행부를 역임. 경성축구단 창단 멤버. 1948 런던올림픽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7] |
4. 여담
- 2007년 K3리그에 참가한 서울 유나이티드 FC가 자칭 경성축구단의 가치를 계승한다며 창단했다. 창단 당시에 유니폼도 경성축구단의 유니폼을 본떠 만들었다고 주장했지만, 알고보니 유니폼의 무늬와 흑백 스트라이프 컬러는 착각으로 인한 오용이었다. 위의 흑백사진의 원래 컬러는 카탈루냐주기 같은 적색, 노란색 스트라이프. 이런 사실이 알려지면서 구단측에서 유니폼과 경성축구단과의 관계를 결부시키는 홍보는 하지 않고 있다.
경성축구단의 유니폼
5. 주요 성적
- 전조선축구대회[8]
- 우승 1회 ( 1936 )
- 준우승 3회 ( 1933 , 1938 , 1939 )
- 전일본종합축구선수권대회[9]
- 우승 1회 ( 1935 )
- 메이지신궁경기대회
- 우승 1회 ( 1935 )
6. 관련 문서
[1] 한국 전쟁 중 해체로 로고는 전해지지 않는다.[2] 현 대한축구협회의 전신.[3] 현 대한체육회의 전신.[4] 16개국 본선에서 8강(8위)을 기록[5] 18개국 본선에서 8강(8위)을 기록[6] 한국이 일본을 이기고 본선 진출하여 16개국 본선에서 16위 기록[7] 18개국 본선에서 8강(8위)를 기록[8] 후신 대한축구협회 FA컵.[9] 전경성축구단(全京城蹴球團) 이름으로 조선 대표로 진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