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ddd,#000><colcolor=#000,#ddd> 계인주 桂仁珠 | |
뒷줄 오른쪽에서 세 번째. 팔미도 등대 작전팀의 모습이다. | |
출생 | 1913년 |
평안북도 선천군 | |
사망 | 1998년 |
미국 | |
학력 | 보명소학교 (졸업) 문광중학교 (졸업) |
군사 경력 | |
임관 | 봉천군관학교 (4기) |
복무 | 만주국군 육군 |
1936년 ~ 1945년 | |
대한민국 육군 | |
1948년 ~ 1953년 | |
참전 | 6.25 전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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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만주국 및 대한민국의 군인.2. 생애
1913년 평안북도 선천군에서 태어나 만주 길림성에서 보명소학교와 문광중학교를 졸업했다.1936년 만주국 봉천군관학교를 제4기로 졸업 후, 육군 헌병 군관으로 선발되어 헌병훈련처 군사학 교관으로 임명되었다. 정일권, 최남근 등과 함께 특수부대인 돌격대에 뽑혀 3개월간 폭파 훈련을 받기도 했다. 만주국 주일대사관 무관직을 거쳐 만주국군 육군 제7헌병단에서 근무했다.
해방 후 대한민국 국방부의 전신인 통위부의 법무사로 있다가, 경찰에 투신하여 서울 동대문구 경찰서장을 지냈다. 정부 수립 후 대한민국 육군에 입대하여 1948년 대한민국 육군본부 정보국 차장이 되었다.[1] 1949년 백범 김구 암살 사건이 일어나자 안두희에 대한 군법회의에서 배심심판관으로 참여했다.
1950년에 남산학교(정보학교) 교장으로 임명되었고 재교육을 받기위해 시흥의 육군보병학교 대위 지휘참모과정[2]에 입교한 상태였을때 갑자기 6.25 전쟁이 발발하였다. 계인주는 6월 26일에 급히 김포지구경비사령부 사령관으로 임명되었지만 전쟁 발발후 급조된 조직이라 휘하에 당장 가용할 실병력이 턱없이 부족한 상태였고 북한군이 김포쪽으로 쳐들어오자 명령 없이 전장을 이탈하여 1950년 6월 28일 야간열차를 타고 부산으로 내려갔다[3]. 그후 6월 30일에 부산에서 헌병대에 체포되어 대구로 압송되어 사형을 선고받고 형무소에서 사형집행을 기다리던 중에 그에게 천운이 찾아왔다. 6.25 전쟁에 대응한 전략을 짜고 있던 미군 극동군사령부에서 한반도 상황과 군사분야에 정통한 한국인 정보통이 필요하여 적임자들을 찾고 있었는데, KLO부대의 최규봉이 계인주를 추천한 것이다. 이에 미 극동군사령부의 명령을 받은 미 육군 헌병 장교의 강력한 요청으로 계인주의 신병이 미군 측에게 인도되었다. 이때부터 계인주는 한국 육군 소속이 아닌, 일본에 위치한 미군 극동군사령부 휘하에서 미군측에게 도움을 주며 활동했다. 특히 9월 15일에 이루어진 인천 상륙 작전의 개시 직전에 중요한 역할을 한 팔미도 등대 점령작전팀에 배속되어 참가하기도 했다.
우측 뒤돌아보는 사람. 인천 상륙 작전 때 팔미도 등대를 점령하고 등대불을 밝히는 작전 성공 후 기함 마운트 매킨리로 복귀하는 작전팀의 모습이다.
이런 공을 세웠음에도 한국군 입장에서 계인주는 여전히 전시 군무이탈죄를 범한 사형수이자 공식적으론 실종된 상태인 군법위반자일 뿐이었고 계인주도 사형집행을 당할 수 있는 국군으로 끝내 돌아가지 않았으며[4] 결국 1950년 10월 21일 국군으로부터 파면처분을 받고 불명예제대 당했다. 이제 아예 군인신분이 아니게 된 계인주는 그의 능력과 활용가치를 인정한 미군 측의 계속된 보호 아래 미 극동군사령부에 협조하며 지내다가 1951년 7월 창설된 미 극동군사령부 예하 제8240부대 공작대장으로 임명되어 KLO부대를 지휘하였다. 대한민국 국군으로부터는 무단이탈했지만 그후 미국이 운용하는 KLO부대 활동을 통해 6.25 전쟁에 기여해온 계인주의 공을 인정해서인지 한국 육군은 1951년 11월 15일자로 계인주의 죄를 사면한 뒤 한국 육군 장교로 복직시켰다. 하지만 그후로도 계인주는 한국군 부대로는 끝내 복귀하지 않고 파견근무의 명목으로 계속 미군 극동군사령부 정보처에서 근무하다가 1953년에 예편하였다.
그후 1954년에 일본으로 이주해서 커피숍을 운영하며 살다가 1972년에 미국으로 이민하였으며 1998년에 미국에서 사망하였다.
생전에 《맥아더장군과 계인주대령》(부제: KLO부대 한국인 사령관의 파란만장 일대기)라는 회고록을 집필하였다.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군 부문에 등재되었다.
[1] 참고로 그로부터 2년 후인 1950년 7월에 이 육군본부 정보국 내에 '공작과'라는 부서가 생겼고, 이 공작과가 1951년 3월에 정보국에서 독립해 나가서 별도 조직으로 확대 개편되는데 그게 바로 HID이다. 그러므로 인터넷상의 일부 문서에서 계인주가 HID 대장이었다고 나오는 것은 사실은 틀린 서술이다. 계인주는 HID가 만들어지기 3년 전에 육본 정보국의 차장이었는데, 계인주가 정보국을 떠난 뒤에 이 정보국 내에 새로 생긴 공작과라는 부서가 나중에 독립해서 HID가 된 것일 뿐인데, 이런 희미한 관련성이 훗날에 와전되어 HID 대장이라는 잘못된 표현까지 나온 것이다.[2] 구.고등군사반[3] 이때문에 공석이 돼버린 사령관에 우병옥 중령이 후임으로 임명됐지만 그도 압도적인 병력과 화력으로 몰려드는 북한군의 상황에 절망하여 임명 하루만에 자결하였다.[4] 아무리 싸울 실병력이 휘하에 적고 여건이 역부족인 사정이었다 해도 전쟁시에 지휘관이 군무이탈한 것은 중죄이다. 다만 계인주는 회고록에서 군무이탈한게 아니라 정상적인 절차에 따른 후퇴였고, 국방부 장관이 국군 후퇴의 책임전가를 위해 자신을 희생양으로 삼아서 탈영처럼 조작한 것 뿐이었다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