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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광덕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자 / 호 한숙(漢淑) / 청봉(晴峰)
본관 제주 고씨[1]
출생 1874년[2] 3월 4일
전라도 구례현 토지면 구만동
(현 전라북도 구례군 토지면 구산리)
사망 1945년 10월 17일
강원도 금강산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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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고광덕은 1874년 3월 4일 전라도 구례현 토지면 구만동(현 전라북도 구례군 토지면 구산리)의 천석꾼 집안에서 아버지 고종주(高宗柱, 1852 ~ 1895. 4. 19.)와 어머니 원주 이씨(1846 ~ 1920. 12. 17.) 이면흠(李勉欽)의 딸 사이의 3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고종주는 1885년(고종 22) 증광시 생원시에 3등 34위로 입격하여 1894년(고종 31) 7월 현릉 참봉제수되었으나, 그해 10월 병으로 사직하였다. 그러다가 1895년 4월 영선군을 추대하려는 쿠데타 음모에 가담하여 반란군을 모으던 중 체포되었고, 4월 19일 교수형선고받고 당일 처형되었다.

한편 그는 임진왜란 때 의병장이었던 고경명의 12대손이자 고인후의 11대손으로, 1907년 1월 24일 18촌 지간의 족형(族兄) 고광순이 창평 저산 분암에서 의병을 일으키자 즉시 가담하여 고광순을 주장, 고제량을 부장으로 추대하고, 자신은 고광훈, 고광채, 윤영기(尹永淇), 박기덕(朴基德) 등과 함께 참모를 맡았고, 집안의 재산을 털어 군자금으로 대기도 했다.

이후 각처에 연락하여 의병을 모집하던 중 남원의 양한규로부터 남원 합동작전을 연락 받고 곧 행군을 개시하여 2월에 남원으로 진격하였으나 이들이 도착하기 전에 양한규 의병대가 이미 패주했기 때문에 일시적으로 남원성 포위전을 벌이다가 곧 퇴각했다. 그 후 다시 병력을 증강해 능주로 진격하여 4월 25일에 점령했다.

이튿날 동복으로 진군했지만 광주부에서 파견된 관군과 접전하다가 패배하자 병사들이 일시적으로 흩어졌다. 이후 장흥 고씨 일족은 전날의 실패를 거울삼아 무기를 개량 제조하고, 전법을 훈련하는 한편 의병을 규합하여 대규모의 거사를 계획했다. 그러나 여의치 않자, 9월 11일 고광순을 도독으로 추대하고 천지신명께 맹서한 다음 지리산 아래에서 장기 항전을 계속하기 위하여 동복을 거쳐 곡성군 구룡산으로 진군했다. 그러다가 참모 신덕균의 제의를 받아들여 일본인이 많이 살고 있는 동복을 토벌하기로 결정하고 9월 14일 새벽 동복읍을 점령하고 다수의 일본인을 살해했다.

1907년 9월 17일 고광순은 지리산 화개동에 들어가 진영을 갖추고 군사들을 훈련시켰다. 이때 고광덕, 고광채, 고광석, 고광명 등은 유격과 호위를 맡았고, 신덕균은 참모에, 윤영기는 호군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10월 11일 일본군이 구례 연곡사로 들어와 습격했고, 고광순은 군대를 2대로 나누어 끝까지 분전했으나 끝내 패하고 고제량 등 여러 의병장들과 함께 전사했다.

이때 고광덕은 가까스로 빠져나 온 뒤 1910년부터 1914년까지 이석용 의병장과 함께 남원, 임실 등지에서 일본군과 교전했으며, 관아를 습격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석용이 끝내 일본 헌병대에게 체포되어 처형된 후 금강산으로 들어가 은거했으며, 1945년 10월 17일에 별세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고광덕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1] 장흥백파-의열공파(毅烈公派)-진위공파(振威公派) 22세 광(光) 항렬. 족보명은 고광수(高光秀).[2] 탐라장흥고씨대동보 권3 1048쪽에는 1875년생으로 등재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