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6-07-20 16:53:56

광개토대왕/생애/6~17년

상위항목 : 광개토대왕
관련항목: 광개토대왕/생애/원년~6년

1. 6년~9년 : 주변 정리
1.1. 요동 확보1.2. 숙신족 복속
2. 9년~17년 : 서방의 연, 남방의 왜
2.1. 신라 구원과 임나가라 원정2.2. 고구려의 왜 원정?2.3. 후연과의 8년 전쟁과 후연의 멸망

1. 6년~9년 : 주변 정리

1.1. 요동 확보

이렇게 백제를 항복시킨 광개토대왕은 다시 군대를 북으로 돌려서 광개토대왕 6년에 후연의 요동성을 차지하고, 요동을 고구려의 영역으로 삼았다. 이 사건은 《동사강목》에만 기록되어 있어 후대의 추산이 아닌지 정확한 사실 여부가 의심되는 점이 있지만, 어찌되었든 이 즈음에 광개토대왕이 요동을 고구려의 영역으로 삼았다는 점은 상당히 개연성이 있다.

우선 당나라위진남북조 시대의 역사를 기록한 '양서'와 '북사' 고구려전에 "모용수가 죽고 모용보가 즉위하자, 광개토대왕을 평주목으로 삼고 요동·대방 2국 왕으로 봉했다. 요동군을 공략하여 가졌다."[1]는 기록이 있다. 모용보의 재위기간이 396~398년임을 보면 요동으로의 진출은 대략 이 사이에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광개토대왕이 요동 방면으로 진출하자, 모용보가 이를 인정하는 셈으로 광개토대왕을 책봉한 것 같다는 주장이 현재까지의 통설.

또한 원래 요동을 관할하는 평주자사의 치소는 요동반도의 평곽이었는데, 402년에 평주자사 모용귀가 평곽이 아닌 숙군성에 있었던 것으로 보아 적어도 402년 이전에는 후연이 요동에서 밀려난 것으로 보인다. 더불어 해동고승전에는 396년에 승려 담시(曇始)가 요동에 와서 불법을 전하니, 이것이 고구려가 불법을 들은 시초라고 전하고 있다. 따라서 397년 이전에 광개토대왕이 요동을 확보했다는 주장은 신빙성이 높아보인다. 다만 자치통감에 400년 3월 후연의 양평령 단등이 모반하여 살해당했다는 기사가 있는데, 양평현은 본래 요동군의 치소다. 그렇다면 요동군이 400년까지 버티고 있었다는 생각도 할 수 있는데, 이에 대해서 400년에 후연이 새로 점령한 신성과 남소성에 양평을 교치했다는 주장도 있고, 요동군의 영역이 고구려에 분점되어 있었다는 주장도 있고, 하여튼 논의가 분분한 상태다.

후연의 역사를 보면, 이 시기 후연이 극심한 내분을 겪고 있었다는 점과 이어서 생각할 수 있다. 396년 후연은 북위를 상대로 참패를 겪고 모용수까지 분사하면서 국운이 뿌리째 흔들리는 상황이었다. 이후로도 북위에게 국토가 유린당하자 모용수의 뒤를 이은 모용보는 397년 용성으로 달아나게 된다. 하지만 398년 용성에서도 난한의 쿠데타로 모용보가 제거되고, 난한은 다시 모용성에게 제거되는 막장 상황. 이러한 후연의 위축과 혼란은 광개토대왕의 요동 진출을 도왔을 것이다.

하지만 이때의 요동 진출이 완전한 것은 아니라서 훗날 후연이 요동으로 쳐들어오기도 하고 그를 격퇴하는 과정에서 전선이 요서까지 확장되며 요하를 중심으로 후연과 고구려가 공방을 거듭한다. 402년 숙군성을 깨뜨리고도 그것을 유지할 능력이 안 되었는지, 406년 후연이 다시 숙군성에 자사를 배치하는 것이 좋은 예.

1.2. 숙신족 복속

영락 8년, 광개토대왕은 요동의 정반대인 고구려 동북방 변방으로 한 부대의 군대를 파견해 숙신족(광개토왕 비문에는 식신이라 나옴)을 순찰하였다. 이때 그들의 막사라성 가태라곡의 남녀 삼백여인을 붙잡았다. 이후로 숙신족은 고구려에 조공을 약속하고 내정을 보고하며 고구려의 명을 받기로 하여 고구려에 복속되었다. 이전의 서천왕대에도 숙신족을 복속시킨 적이 있기 때문에 이때의 숙신족 복속은 재복속이나 지배력 강화, 또는 서천왕대에 복속시킨 숙신족과는 다른 숙신족 세력을 복속시킨 것으로 보인다. 다른 숙신족 세력을 복속시킨 것으로 보는 경우 서천왕 대 복속된 숙신은 송화강 유역, 이 때 복속된 숙신은 목단강 유역의 것으로 보는 주장이 유력하다.[2]

이때의 숙신이란 세력은 훗날 물길-말갈로 변모하는 세력으로 발해를 거처 여진-만주족이 된다라는게 학계의 통설이긴 한데, 연구가 축적되면서 숙신,읍루,물길,말갈,여진,만주가 서로 별 연관없는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이들은 북쪽으로는 흑룡강,동쪽으로는 오호츠크해에 이르며 서남으로는 현재의 연길지방 이북에 이른 것으로 추정된다. 매우 광범위한 영역에 숙신이라 통칭되는 숙신계 종족이 분포하고 있었으며 중앙집권화가 되지 않고 서로 남남으로 퍼저있었다.광개토대왕대에 복속한 숙신은 그 규모로 보아 숙신족중 일부 세력으로 보인다.

이때 복속된 숙신은 장수왕대에 고구려에 얹혀 북위에 사신을 파견한 것으로 보아 고구려의 부용세력이 된것 같다. 하지만 또다른 숙신계인 물길이 성장하여 고구려를 괴롭힌다.

※식신(백신?)의 정체는?
  • 이상의 사실은 광개토왕비문에 나와있는 백신토곡(帛愼土谷-백신 땅의 곡이라는 뜻. 곡은 골짜기를 말한다. 토욕혼이 아니라...) 복속 기사를 바탕으로 도출한 것인데, 백신의 백자를 백으로 판독하느냐 식으로 판독하느냐에 따라 복속대상이 달라질수 있다. (숙신이 식신으로 불리기도 한다.) 비문이 워낙 훼손이 심해서 정확한 판독이 어렵다. 백(帛)자나 식(息)자 가운데 하나로 보인다.

1.동예 계통의 세력 : 백신으로 판독하면 숙신이 아닌 강원도 방면의 동예 세력으로 추측할수 있다. 광개토대왕이 399년~400년에 한반도 방면으로 남진한 것이 근거다. 그 전에 미리 교통정리를 하며 신라로 가는 길에 강원도에 위치한 동예 부족을 손봐주었다는 이야기. 하지만 이 동예 세력으로 알려진 세력들중 백신이란 이름을 가진 세력이 없다. 또한 강원도 방면의 동예 세력은 이미 선대에 고구려에 복속된 것으로 보인다.

일단 태조대왕이 동예를 복속하기도 했거니와, 앞선 동천왕대에 신라와 충돌하는 것으로 보아[3] 적어도 동천왕대까지는 고구려에서 동예의 방해 없이 신라로 가는 길이 열린 것으로 보기도 한다. 아니면 396년 백제를 정벌할때 백제의 58성 700촌에 편성되어 있던 동예 세력을 점령한 것으로 보인다.

2.숙신 계통의 세력 : 식신으로 판독하면 숙신의 이칭으로 파악된다. 학계에서는 숙신이란 설이 지배적이다. 다만 한국 고대사 관련 자료에는 숙신이라고 나오는 것이 우위를 차지하고 있지는 않고 동예와 숙신이 번갈아가며 나온다. 가끔 동예와 숙신이 한꺼번에 나오는 실수도 보인다. 하지만 백신이라는 판독이 정확하다는게 확증될 경우 숙신설은 안드로메다로 가버린다. 숙신을 백신이나 그와 비슷한 명칭으로 칭한 사례가 없기 때문. 물론 그렇다고 동예라는 확증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그냥 누군지 모르겠다가 되어버린다.

3.신라 설 : 왜구로부터 구원해주러 가며 손봐줬다는 설.

4.백제 설 : 중국 학자 왕건군의 주장. 백제의 일부 영토를 순찰했다는 설이다.

2. 9년~17년 : 서방의 연, 남방의 왜

2.1. 신라 구원과 임나가라 원정

파일:attachment/광개토대왕/생애/6~17년/5a.jpg
장수왕 때 고구려가 신라에 하사한 호우명 그릇.[4]
399년, 백제에서는 아신왕이 다시 한번 군사를 모아 고구려를 공격하려고 하지만, 백제는 백성들이 징집을 피해 외국으로 달아나버려(...) 군사력이 고갈되어 있었다. 달아난 백성 가운데 궁월군(弓月君)을 필두로 한 일부는 다시 왜로 건너가려고 했지만, 신라의 저지를 받았다고 보기도 한다.[5] 이런 내부적인 문제로 인해 고구려에 복수할 기회를 노리던 백제는 맹서[6]를 어긴 채 와 화통하게 되었고, 마침내 백제에 의해 끌어들여진 왜가 신라를 침공했다.

영락 9년, 이러한 남방의 정세를 감지한 것인지 광개토대왕이 평양에 행차하고 있는데, 신라가 사신을 보내서 왜인의 침공을 받았다며 구원을 요청하였다. 광개토대왕은 사신에게 밀계(密計)를 알려준 뒤 돌려보내고, 광개토대왕 9년에 후방을 안정시키기 위한 것인지 후연으로 사신을 보내어 조공했지만[7] 모용성은 사신이 무례하다는 핑계를 잡아 그대로 신성과 남소성을 먹어버렸다. 하지만 곧장 양평령 단등의 반란 크리가 터지고 마는데...

어쨌든 영락 10년에 이르러 광개토대왕은 보기 5만의 대군을 편성하여 신라로 보냈다. 참 여기서 적 연합군은 20만명이였다 고구려군은 남거성에서부터 왜인을 구축하며 신라성까지 이르렀고, 왜인이 버틸 수가 없다를 외치며 퇴각하자 이를 추격해 임나가라에 이르러 성을 항복시켰다. 항복시킨 성에는 안라인수병(安羅人戍兵)했다.

사실 이 대목은 설이 굉장히 다양하게 갈리는 부분인데, 주로 임나가라·종발성·안라인수병의 해석이 문제가 된다.
  • 임나가라(任那加羅)의 경우에는 이것을 '임나라는 가라'로 보아서 김해의 임나가라로 보기도 하고, '임나의 가라'로 보아서 김해의 가라국으로 보기도 하고, '임나와 가라'로 보아서 창원의 임나와 김해의 가라로 보기도 한다.
  • 종발성(從拔城)의 경우에는 종발(從拔)을 동사로 봐서 '따라서 성을 무너뜨렸다'로 보기도 하고, 이 자체를 하나의 명사로 보아서 '종발성'이라 보고 이를 부산이나 김해에 비정하기도 한다.
  • 안라인수병(安羅人戍兵)의 경우에는 안라(安羅)를 명사로 봐서 '안라국 사람 수비병'으로 보기도 하고, 안(安)을 동사로 봐서 '라인(羅人) 수비병을 안정시켰다'로 보기도 한다. 이 경우에는 '라인'이 누구냐는 문제가 겹쳐서 신라인이라는 설, 가라인이라는 설, 안라인이라는 설, 라인(邏人)이라는 설이 서로 엇갈리는 상황. 아 입맛대로 골라잡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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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가야-왜국의 연결
그러나 확실한 것은 이를 계기로 고구려는 한동안[8] 신라에 내정 간섭 수준의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며, 또한 근초고왕 대 이룩되었던 백제-가야-왜국의 국제 커넥션이 사실상 와해되었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김해의 가락국은 기존까지 담당해오던 국제사회의 중간 매개자 역할이 축소되면서 가야 내부의 주도권도 점차 상실하게 되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른바 '전기 가야연맹의 와해'로 지칭되는 이 문제에 대해서는 다시 의논이 갈리지만 그 뒤로도 김해 가락국은 일단 존속하고 있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고구려가 가야지방에 유형지를 두었다는 기록과 가야의 정치에 고구려가 개입한 적이 있었다는 말이 있지만 이는 명확한 출처가 필요하다.

이후 영락 14년에 왜가 다시 대방계(帶方界)로 침입해 들어오긴 하지만[9] 이내 평양에서 출정한 광개토대왕에게 궤멸당한다.[10]

백제는 광개토대왕 14년에 전지왕이 즉위하는 과정에서 한바탕 내분을 겪기도 하거니와, 왕권을 강화하려는 시도 속에서 친위세력으로 해씨와 목씨가 주도권을 잡다가 어린 구이신왕이 즉위하여 태후의 섭정을 받고 비유왕은 모종의 이유로 들판에 가매장되는 등 이리저리 치이면서 왜국·중국·신라와의 외교에나 전념(...)하게 된다. 훗날 이것을 수습하고 백제를 중흥한게 아신왕이 죽고나서 반세기쯤 뒤에 즉위한 개로왕이지만, 잘 알려져 있다시피 장수왕의 공격으로 한성은 함락되고 개로왕은 죽임당한다.

여기까지 정리하면 392년에 남으로 백제 침공, 북으로 거란 침공. 395년까지 남으로 백제 방어, 북으로 비려 침공. 396년에 대대적인 백제 강습. 397년까지 요동에서 후연 세력 구축. 398년에 잠시 북으로 숙신 좀 손봐주고, 400년에 요동에서 후연 공격 방어. 401년까지 신라에서 왜군 몰아내고 가야까지 진출... 군대를 동원하기 힘든 계절을 제외하면 거의 쉬지 않고 정복만 했고, 그야말로 전방위적인 전선의 공격-방어 교차라고 볼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민심이 동요하지 않고, 가는 족족 이겨먹었다. 사실 고대나 중세 국가들 중엔 이런 식으로 연속적인 군사활동이 이어지는데도 나라가 부강하고 민심이 안정적인 사례가 의외로 많은데, 대표적인 것이 아틸라 시절의 훈이나 카롤루스 대제시절 프랑크다. 이는 강대한 군대를 그 국가가 장기간 보유하기 힘들 경우 나타나는 현상으로, 잇단 승리와 전리품을 통해 군대를 유지하고 그 승리가 계속되는 동안 국가가 군대를 유지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려는 것이다. 물론 이건 상당히 외줄타기에 가까운 국가 운용방식이며 적정선을 지키지 않으면 국가가 위태로워진다.

각설하고, 이렇게 한반도와 만주의 이런저런 세력들을 손봐주는 과정에서 서서히 요동의 패자 자리를 놓고 숙적 후연과의 전쟁이 시작된다.

2.2. 고구려의 왜 원정?


일본서기 리추 덴노(履中天皇) 5년 기록인 404년 영락 14년에 묘한 기록에 대한 기술부분이 나온다. 이 부분에서 리추 덴노(履中天皇)가 신화적 문구로 기록되어서 애매하게 기술되어있으나 년도수를 얼추보면 덴노가 자신의 아내까지 죽고 화를 부른 차지군(車持君)에게 책임을 묻고 삼신(三神)을 받쳤다라고 되어있다. 피냄새와 재해재난의 주범이 검도태자왕(劍刀太子王)이라고 되어있다.

더욱이 한제이 덴노(反正天皇)는 고구려계로 알려진 인물로 리추 덴노(履中天皇)가 죽고 405년에 그 자리에 앉는다. 이 기록을 두고 고구려가 당시 일본 열도로 신라에서 가야와 왜의 군사력을 몰아낸이후 왜를 공격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들이 나오고 있다. 기록상으로 볼때 404년이면 왜가 다시 대방계를 공격하여 고구려가 격퇴했던 시기와 완전히 일치한다. 더욱이 기록에 언급되는 축자(筑紫)/담로도(淡路島)는 오늘날 큐슈지역이라고 한다. 고구려가 당시 이 남방전선에 집중하는 사이 후연이 공격해왔던걸 감안한다면 충분히 당시 백제와 가야를 지원하는데 병력을 보낸 왜를 공격하여 정벌전을 펼쳤을 확률이 있다. 고구려 해상력의 능력은 5세기때부터 본격적으로 최절정을 맞이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고 광개토태왕이 백제정벌등에서도 해상력을 운영하여 대규모 동원을 해본바가 있기 때문에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더욱이 재침을한 왜군을 섬멸하고 그대로 왜 본토로 진격해가는것 역시 어려운 일도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다만 이 부분은 현재 기록상으로만 존재하고 있는 문제이기 때문에 이 기록에 대한 해석이 아직은 불분명하다. 물론 경상남도지역와 큐슈지역에서 고구려 유물들이 발견된건 사실이고 실제로 경상도 지역에 신라구원이후에 고구려 수군기지가 설치되어 운영되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충분히 생각해볼수 있으나 명확하게 나온건 없다.

2.3. 후연과의 8년 전쟁과 후연의 멸망

요하를 건너 후연의 숙군성으로 진격하는 광개토대왕 민족기록화[11]
상술한 바와 같이, 400년에 모용성은 조공까지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사신이 무례하다는 이유를 들어 쳐들어왔다. 모용희를 선봉으로 신성과 남소성을 무너뜨리고 700리에 달하는 땅을 먹었으니, 사실상 요동의 방어선에 구멍이 난 셈이었다. 다행히 직후 양평령 단등의 반란으로 후연의 요동 진출이 주춤하면서 한숨 돌린 고구려군은 남쪽 신라로 내려와 왜군을 몰아냈고, 이내 다시 북쪽으로 돌아와 반격을 시작한다.

401년, 반란을 진압하던 와중에 모용성이 사망하고 모용희가 즉위하는 등 후연에 내홍이 계속되는 틈을 타서 광개토대왕은 다시 신성과 남소성을 점거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402년 1월에 후연이 서쪽으로 요서에서 북위를 몰아내자, 광개토대왕은 후연의 군사력이 서쪽으로 향한 틈을 타서 5월에 군사를 보내 평주자사가 머무르고 있던 숙군성을 쳤다. 이에 숙군성에 주둔하고 있던 평주자사 모용귀가 성을 버리고 달아났지만, 그대로 숙군성을 점거한 채 영역화하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

그로부터 다시 2년 뒤인 404년 11월에 모용희는 왕후 부씨와 함께 사방으로 쏘다니면서 사냥을 벌이는데, 이 와중에 호랑이와 이리에게 죽거나 얼어서 죽은 자가 5천여 명이나 되었다. 이에 12월 광개토대왕은 다시 한번 후연을 공격해 연군에서 100여인을 살육·약탈했다. 연군은 본래 베이징의 계현이 치소지만, 연군은 399년에 태수 고호가 북위에 갖다 바친고로 이 시점에는 대릉하 유역에 이치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12]

우리역사문화연구소의 김용만 소장은 저서 '광개토태왕의 위대한 길'에서 앞선 모용희의 사냥을 고구려의 공격을 막기 위한 출정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짐승이나 동사로 5천여 명이나 죽는다는게 사리에 맞지 않고, 무엇보다 한참 전쟁중인 상황에서 적군이 코앞까지 처들어왔는데 사냥이나 하고 있는다는게 쉽사리 수긍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하지만 시간대 자체가 사냥이 11월이고 전쟁이 12월이라고 되어 있어서 앞뒤가 맞지 않는 문제가 있다.

그 뒤로도 광개토대왕 13년에 광개토대왕은 군사를 내어 후연을 쳤으나, 이에 대해서는 《삼국사기》에만 전하고 그마저도 별다른 기록이 없다.

장해현지에 따르면 404년에 고구려가 요동반도 남쪽의 여러 섬들을 점거하고 성을 쌓았다고 한다.

뒤치기는 반복된다. 영락 14년에 왜군이 대방계로 침입해와 광개토대왕이 직접 이를 섬멸하는 사이, 광개토대왕 14년 모용희가 요동성으로 직접 쳐들어 온 것이다. 모용희는 요동성을 함락 직전까지 몰아붙였으나, 모용희가 동행한 황후 부씨과 함께 성을 깎아버리고 가장 먼저 입성하겠다며(...) 시간을 끄는 바람에 이를 틈타 고구려군이 방어태세를 정비하여 결국 요동성을 함락시키지 못했다.

그해 12월, 후연의 황제 모용희는 다시 거란을 정벌하러 용성을 출발해 이듬해 1월 형북에 이르렀다가 거란의 위세에 놀라 퇴각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동행한 황후 부씨가 바가지를 긁는 바람에(...) 치중까지 내버리고 3천 리를 달려서 고구려의 목저성을 기습했으나, 얼어죽는 사람이 길에 이어지는 마당에 이런 군대를 가지고 이길 수 있을 리가.(...)

광개토대왕 15년 봄에 고구려에 가뭄이 들었었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이 기간에는 고구려의 국내 사정이 안 좋은 관계로 후연에 공세를 취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듬해 고구려의 사정은 궁궐을 증축할 정도로 호전되었다고 여겨진다.

광개토대왕 16년 7월에 후연에서는 드디어 풍발이 반란을 일으켜 막장 황제 모용희를 살해하고 모용운을 추대했다. 모용운은 본래 고구려의 지파로서 모용보의 양자였는데, 이 때문인지 왕위에 오른뒤 고씨로 성을 갈았다. 후연이 북연으로 바뀐 것이다.[13] 하필이면 고구려 사람인 모용운을 골라 세운 것으로 미루어 풍발이 고구려와의 관계를 고려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도 가능하지만, 일단 고구려의 직접적인 지휘를 받아 반란을 일으킨 것은 아니다.

그리고 광개토대왕 17년 3월, 광개토대왕은 북연으로 사신을 보내어 '종족을 베풀었다.(叙宗族)' 모용운이 고씨로 성을 회복한 것을 본가(?)인 고구려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한 것으로 보인다. 일각에서는 이를 두고 북연이 고구려에 복속되었다고 보기도 하지만, 이는 다소 확대된 해석으로 고구려 우위의 화친이었다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어디까지나 명목상인 것이지만, 북연은 황제국이고 고구려는 왕국이었기 때문이다.[14]

한편 영락 17년에 광개토대왕은 보기 5만으로 모종의 적과 사방합전(四方合戰)하여 모조리 참살했다. 노획한 개갑이 만여 령이고 군수물자가 부지기수에 돌아오며 깨뜨린 성이 사구성, 루성, 우불성 등이라고 하는데, 하필이면 이 부분에서 적이 누군지 알려주는 내용이 판독 불가다. 때문에 학계에서는 적을 후연으로 보는 설과 백제나 왜로 보는 설이 갈리고 있다.
[1] 요동군 공략 시점에 대한 통설과 그에 대한 이견은 링크을 참조.[2] '고구려의 영역지배방식 연구'(김현숙 저) 참고[3] 더 멀리 가면 이미 대무신왕 대에 신라와 부딪힌다...[4] 소설가 최인호는 만주등지를 뒤집고 다니며 연구한 끝에 저 호우명 그릇 바닥의 상단에 보이는 # 문장이 광개토대왕의 문장이라고 추측해내었다. 그리고 최인호 작가는 중국 입국 금지를 당했다. 지못미...[5] 신라에서 이들이 왜로 이주하려는걸 막아버린 덕분에 백제·신라·가야·왜 사이에 글로벌한 분쟁이 벌어지고, 이것이 이후 국제대전의 도화선이 되었다는 주장도 있다.[6] 396년에 백제왕이 항복한 일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7] 398년에 모용성이 모용보를 시해한 난한을 몰아내고 황제로 등극했는데, 이해 설날에 자신을 '천왕'으로 낮추었다. 이에 사신을 보낸 것으로 보이긷 한다. 하긴 '황제'라고 했다가 '천왕'이라고 낮추었으니 사신이 어느 장단에 맞추어야 할지 헷갈릴 만도 하지.[8] 약 20~30년 정도로 추정된다.[9] 대방계는 앞서 대방군이 있던 황해도 지방을 말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그 지리상으로 이 또한 백제가 왜를 끌어들인 것으로 보는 것이 통설이다. 위의 선례도 있거니와 그렇지 않고서는 멀리 황해도까지 왜인이 독자적으로 공격해 올 이유도 보급선도 없다는 주장.[10] 물론 영락 17년 기사에서 '사방합전'으로 '참살탕진'된 적국이 백제라고 본다면 이것도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11] 뛰어난 걸작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으며 70년대에 그려진 그림임에도 불구하고 수준 높은 고증을 보여준다. 서울대 미대 이종상 교수의 작품으로 자세한 정보는링크 참조.[12] 끝까지 강단사학의 단정 운운하며 연군이 북경이라고 믿고 광개토대왕의 영토를 넓혀보려는 사람들이 있으나, 아니 북경을 치려면 코앞의 용성부터 먼저 작살내던가.(...) 그 근거는 알아서 판단하기로 하자.[13] 물론 모용운 시기까지를 후연으로 보기도 하고, 모용운 시기만 뚝 떼어서 대연으로 보기도 한다. 어쨌든 국호는 다 같은 연(燕).[14] 사실 엄밀히 말하자면 모용운은 황제가 아닌 '천왕'으로 즉위했기에 명칭상 황제라기보다는 조금 격이 높거나 동급 정도기는 하다. 행세는 황제로 한 것이 맞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