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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철우

具哲祐
1904년 5월 15일 ~ 1989년 6월 19일

1. 개요2. 생애3. 상훈과 추모4. 여담5. 참고 자료

1. 개요

광주광역시를 무대로 활동한 서화가. 본관은 능성(綾城)[1][2], 자는 명숙(明淑)이며, 호는 근원(槿園)이다.

2. 생애

1904년 5월 15일 전라남도 능주군 영내면 정동(현 화순군 한천면 정1리 정동마을)에서 천석꾼인 아버지 구교창(具敎昌, 1883 ~ 1955. 7. 23)과 어머니 연일 정씨(1882 ~ 1910. 10. 7) 정운하(鄭雲夏)의 딸 사이의 1남 3녀 중 외아들태어났다. 아버지 구교창은 1909년(순종 3) 8월 능주군 주사(主事)에 임명되었고, 경술국치 후에는 동복군, 흥양군, 강진군 등지에서 서기(書記)로 근무했던 하급 관료였다.

그는 8살 무렵에 이미 '꼬마명필'로 알려질 정도로 글씨를 잘 썼다. 양곡(良谷) 이승복(李承福)과 후석(後石) 오준선(吳駿先) 문하에서 한학을 배웠으며, 1920년 제주 양씨(濟州 梁氏) 양재옥(1902 ~ 1968. 3. 11)[3]과 결혼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상경하여 배재학당에 입학하여 신구학문을 두루 섭렵하였다. 그러나 중동학교 3학년 재학 중에 조부 구익모(具翼謨, 1857 ~ 1925. 9. 5)의 병환으로 귀향하여 학업을 중단했고[4], 1928년 전라남도 광주군 광주면 성저리(현 광주광역시 동구 대인동)으로 이사하면서부터는 허백련 문하에서 그림과 글씨를 본격적으로 배우게 되었다.

그는 이후 1938년 허백련이 전라남도 광주부에 전통 서화가 양성을 목적으로 설립한 연진회(鍊眞會)의 주요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소전(素筌) 손재형 같은 유명 서화가들과 친분을 맺었다. 1950년 6.25 전쟁이 일어나자 자택에서 5년 동안 매일 800자씩 글씨를 쓰면서 개성적 필법을 완성하였다. 특히 그는 조맹부(趙孟頫)의 송설체(松雪體)에 근간을 둔 단아한 행서에 뛰어났으며, 사군자 중에서는 매화가 일품(逸品)이었다.

1956년 제5회 국전 서예․사군자에 출품한 「묵죽」을 시작으로 연속 4회 특선을 하면서 1960년 국전 추천작가가 되었고, 이후 서예부의 심사위원 및 심사위원장을 7회 역임하였다. 1975년 한국예술원 원로작가에 추대되었고, 1978년 고 허백련의 유지에 따라 설립된 연진회 미술원의 초대 원장으로 후학을 양성하였다. 이곳은 광주농업고등기술학교를 바꾸어 1978년 2월 10월 개원한 미술교육 기관으로 보통과와 전문과로 나누어 사군자와 습자는 물론 국어, 국사, 기초 한문 등의 교양과목도 가르쳤다. 더불어 전라남도 미술대전, 무등 미술대전 등 공모전의 심사 또는 운영위원으로 광주 화단의 발전에 이바지하였다. 이밖에 1964년 신세계미술관에서 개인전이 열렸으며, 1973년 ‘원로작가 초대전’을 비롯해 1979년 열린 ‘아주현대서화명가전(亞洲現代書畵名家展)’, 1982년 국전(國展)이 폐지되고 처음 열리는 ‘82 현대미술초대전’, 1985년 ‘현대미술 40년전’, 1988년 올림픽을 기념해 개최된 ‘국제 현대서예전’, 1990년 ‘한국서예 국전 30년전’ 등 국내외의 주요 전시회에 참여하였다.

그 뒤 1989년 6월 19일 별세했다.

현재 전라남도 순천 선암사 경내의 삼성각(三聖閣) 편액과 허백련 묘비는 그의 글씨이며, 다수의 글씨와 사군자가 남아 있다.

3. 상훈과 추모

1996년 전라남도 문화상 수상.

4. 여담

정치인 구충곤이 그의 12촌 동생이며, 정치인 구봉우가 그의 8촌 동생이다.

5. 참고 자료


[1] 시랑중파 31세 우(祐) 항렬.(족보)[2] 가계는 1세 구존유(具存裕), 2세 구민첨(具民瞻), 3세 구연(具珚), 4세 구천용(具天容), 5세 구식(具軾), 6세 구록(具祿), 7세 구영량(具英良), 8세 구인미(具仁美), 9세 구득전(具得全), 10세 구효장(具孝長), 11세 구정여(具定如), 12세 구중절(具中節), 13세 구환(具桓), 14세 구항무(具恒茂), 15세 구득인(具得仁), 16세 구용연(具龍淵), 17세 구정(具綎), 18세 구두남(具斗南), 19세 구현경(具玄慶), 20세 구선(具善), 21세 구종전(具宗荃), 22세 구석관(具碩寬), 23세 구삼락(具三樂), 24세 구훈(具壎), 25세 구택현(具宅鉉), 26세 구인원(具仁源), 27세 구상직(具相稷), 28세 구본수(具本修), 29세 구익모(具翼謨), 30세 구교창(具敎昌), 31세 구철우(具哲祐) 순으로 이어진다.[3] 양용묵(梁龍默)의 딸이다. 묘소는 전라남도 화순군 한천면 정리에 있다.[4]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을 비롯한 구철우를 다룬 여러 자료들에서 무분별하게 증조부의 권유로 귀향했다고 기술했었다. 그러나 증조부 구본수(具本修, 1826 ~ 1913. 4. 21)는 1913년에 이미 별세했었으므로 말 자체가 맞지 않으며, 아버지 구교창의 생부이자 종조부인 구혁모(具赫謨, 1859 ~ 1895. 5. 12) 또한 1895년에 이미 별세했으므로 당시에 생존해있던 집안 어른은 조부 구익모 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