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Royal, Celestial and Military Order of Our Lady of Mercy and the Redemption of the Captiv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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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가톨릭의 종교 기사단. 1218년에 기사 성 돈 페드로 데 놀라스코[1]의 주도로 창설되었다. 속량의 성모회, 자비수도회, 메르체다리오회 등으로도 불린다.
1. 설명
다른 기사단과 달리, 칼을 휘두르지 않은 특이한 사례. 사실 이 기사단의 창설 목적은 북아프리카 마그레브 지방의 바르바리 해적들에게 붙잡힌 유럽인 노예들을 구할 목적으로 세운 기사단이다. 그렇다고 해서 해적 집단을 습격하는 식의 무력을 사용한 것이 아니라, 가톨릭 신자들에게서 기부받은 기부금으로 노예들을 사들여 고향으로 풀어주는 식으로 평화적인 방법을 지향했다. 기부금은 유럽 각지의 성당에 고장난 나침반을 달아놓고 신자들에게 받았다고 한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예를 부린 이슬람 측의 욕심이나 기타 이유로 순교한 기사들이 때때로 발생하였다. 구출 순위는 포로로 잡히거나 납치당한 직후 몸값을 낼 수 없는 가난한 사람을 우선순위로 하였다. 이러한 방식은 자칫 잘못하면 해적들에게 돈 맛을 알게 해 오히려 해적행위를 부추긴다는 비난도 받았지만, 오스만 제국을 비롯한 이슬람 세계의 후원을 받는 해적들을 유럽 각국 정부들만의 힘으로 퇴치한다는 것은 비현실적이라 구출 기사단의 평화적 방법 이외에는 대책이 없었을 것이다. 실제로 몇 차례의 무력행사도 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이 지중해의 해적행위는 성전으로 여겨져 지역 정부와 사회의 대대적인 지원을 받았고, 기독교측도 구호기사단의 해적질을 성전으로 여겼다. 당대 최강 오스만도 기독교 국가들의 전력을 분산시키기 위해 해적들을 후원했다.
2. 성과
1218년 스페인 출신의 기사 돈 페드로 데 놀라스코에 의해 설립된 이 기사단은 4년 뒤인 1222년 교황의 인가를 받고 그해 160명의 기독교도 노예들을 처음으로 구출한 이래로, 1779년, 즉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기 10년 전까지 총 344회에 걸쳐 557년 동안 노예로 붙잡힌 이들을 구출하였다. 거꾸로 뒤집어 말하자면 이 때까지 유럽 본토가 해적들에게 삥을 뜯겼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2]여담으로, 해적들이 완전히 소멸된 때는 바르바리 전쟁을 거쳐[3] 프랑스가 북아프리카를 식민지화한 때이다. 물론 프랑스는 제국주의적 침략에 입각해 북아프리카를 식민지화한 것이지만. 어찌보면 기독교 정신에 가장 부합한, 그리고 다른 기사단보다 가장 성공적이었던 기사단일 수 있을 것이다.
3. 현대의 기사단
기독교도 노예 구출이 무의미해진 프랑스 혁명 이후에는 존속의 위기를 겪었으나 대대적인 회칙 개정과 방향 전환으로 오늘날에도 꾸준히 교육, 자선, 사회 사업을 수행하고 있다. 설립자인 놀라스코는 1628년에 시성되었으며 축일은 1월 28일이다.4. 구출수도회(삼위일체 수도회)
비슷한 시기 구출 수도회도 따로 있어 1197년 프랑스 출신의 수도자 장 드 마타(마타의 성 요한)에 의해 설립되었다. 그리고 2년 후인 1199년 첫 구출을 시작, 500여년 동안 50만명이 넘는 기독교도 노예들을 구출하였다고 한다. 이 두 단체는 해적이 사라질 때까지 노예로 잡힌 이들을 구원하였다. 그리고 평생 가난하고 소외받은 이들을 우선으로 해적들로부터 구원하여 노예에서 해방시키겠다는 서원 역시 해산 때까지 지켜졌다. 그나마 이들이 해방시킨 이들 중 유일하게 이름이 남겨진 이는 바로 미겔 데 세르반테스.구출수도회의 경우도 19세기 바르바리 해적들이 사라진 이후 방향 전환이 이루어져 교육과 봉사, 선교 활동을 수행하고 있으며 2002년 한국에도 천주교 마산교구에 진출하였다. 홈페이지 카페
[1] 스페인식으로 표기되었으나 원래는 남프랑스 출신이다. 한국 가톨릭에서는 '성 베드로 놀라스코'로 표기하고 있다.[2] 신항로 개척 이후 대서양 지역에 비하면 지중해 지역은 리즈 시절을 지나 소외되어서 상대적으로 국가의 관심을 덜 받긴 했다.[3] 미국의 첫 해외 군사 행동으로 기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