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君主
군주 문서로.2. 郡主
황실 및 왕실의 구성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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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중국 황제국에서 친왕의 딸, 즉 황제의 손녀에게 주는 칭호다. 외명부/중국 참조.
중국 서진에서는 황제의 딸을 군공주[1]로 삼고 제후왕의 딸은 현주(縣主)로 삼았다.
조선에서는 외명부의 직책으로 세자의 적녀에게만 부르는 호칭으로 사용했고 정2품이었다. 세자의 서녀는[2] 현주(縣主)라고 하여 종2품이었다.
조선 초기에는 중국처럼 대군의 딸들에게도 군주의 호칭을 붙였다. 특기할만한 것은 왕 대접을 못 받던 정종의 딸들에게도 일괄적으로 군주의 호칭을 붙였는데[3], 이들은 세종 13년 10월 18일에 일괄적으로 군주로 봉해졌다. 참고로 이 날 함께 군주에 봉해진 한산군주는 진안대군의 장녀 경혜옹주, 무진군주는 익안대군의 장녀 선혜옹주, 재령군주는 양녕대군의 장녀이다.
재미있는 것은, 왕의 유모였던 봉보부인[4]은 종 1품으로 세자의 딸들보다 품계가 높았다는 점.
다만 군주는 정2품 현주는 정3품이었으나, 고종 때 정1품으로 승격되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za_10507010_001
좋은 뜻을 가진 미칭을 작호로 주었던 공주나 옹주와 달리, 조선 초기에는 군주나 현주의 경우는 앞에 지역 이름을 붙였다. 경혜공주도 아버지 문종이 세자일 시절에는 평창군주였고 명숙공주는 아버지 의경세자가 덕종으로 추존되기 전까지 태안군주로 불렸었다. 인조 때가 돼서야 군주와 현주도 미칭을 썼고 공주와 옹주로 진급되어도 군주, 현주 때 썼던 미칭을 그대로 사용했다. 숙안공주는 아버지 효종이 세자일 시절에 숙안군주로 불렸고 공주가 되자 군주때 썼던 미칭을 그대로 사용했다.
아버지인 세자가 왕위를 물려받으면 딸들 또한 공주와 옹주로 승격하게 되며, 품계는 무계가 된다.
세자가 아닌 대군의 딸은 '향주'라고 한다. 본래 대군의 적녀는 현주였으나 경국대전 반포 이후 세자의 서녀만 주는 품계로 바뀌고, 대군의 적녀와 서녀 모두 향주로 하였다. 인평대군의 적장녀 향주 이금온(남편 조기수)과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적차녀(남편 정중만)가 있고 능창대군이 첩에게서 얻은 유일한 친자식 얼녀 향주 이영온(남편 허서)이 있다.
2.1. 실존인물
왕이 되지 못한 세자의 딸만 기록한다.3. 軍主
신라 왕조의 직위로 주(행정구역)의 장관을 "군주(軍主)"라고 했다.현대로 치면 도지사겠지만 전쟁이 잦았던 삼국시대인 만큼 삼국통일 이전에는 행정관이라기보다는 각 주의 군대를 통솔하는 장군의 역할이 컸다. 삼국통일 이후에는 총관(摠管), 도독(都督) 등으로 명칭이 바뀌었고 전쟁이 없어지면서 관직의 성격도 행정관리 역할로 변한다.
이하는 역임자이다.
- 이사부 - 실직주, 아슬라주 군주
- 이부(爾夫) - 실지 군주[7]
- 이등(伊登) - 사벌주 군주
- 우덕(于德) - 관산성 군주
- 김무력 - 신주(新州) 군주
- 기종(起宗) - 감문주 군주
- 죽부(竹夫) - 한성 군주
- 복등(福登) - 비리성 군주
- 심맥부(心麥夫) - 감문 군주
- 일부(日夫) - 일선주 군주
- 변품(邊品) - 북한산주 군주
- 김서현 - 대량주 군주
- 김품석 - 대야성 군주[8]
- 김유신 - 압량주 군주
- 수승(守勝) - 우두주 군주
- 김인문 - 압독주 군주
4. 軍酒
곧 입대할 사람을 격려하기 위해 차리는 술자리. 입대주라고도 한다.보통은 입대할 사람들을 맞이해서 평범하게 먹이고 예비군 선배들이 자기 군 생활 이야기를 하면서 군 생활은 이렇게 해야 하니 등등 여러가지 충고를 주는게 목적이다. 보통은 평범하게 술을 먹이는데, 생일주와 비슷하게 온갖 술을 섞어서 먹이는 경우도 있다. 이때도 격려가 주 목적이기 때문에 생일주처럼 별별 불건전한 것은 안타는 편이다. 그런데 과거엔 멀쩡한 술을 군화나 부츠에 따르고 먹이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고 한다(...)
반대말은 제대주. 혹은 전역주. 이때는 곧 전역하거나 막 전역한 사람을 축하하기 위해 먹인다. 이때는 예외없이 군화도 부츠도 없고 그냥 평범하게 술을 먹이는게 암묵의 룰.
[1] 약칭은 군주(郡主)[2] 왕과 별도로 세자의 후궁이 따로 있었다. 세종대왕 때 세자 이향에게 후사가 없어 고민하다가 세자에게도 후궁을 들일 수 있게 했는데, 왕의 후궁보다는 품계가 낮았다. 이때 들인 후궁인 승휘 권씨는 훗날 세자빈까지 되지만 아들을 낳은 후 요절하고 만다. 나중에 왕후로 추존되기는 하나...[3] 세종은 정종을 임금으로 인정하지 않았으며, 신하들도 이에 동의하였다. 심지어 하륜은 정종을 두고 "기생한 임금"이라고 칭하기까지 했다. 실록 기사.[4] 주로 비슷한 시기에 출산한 현숙한 양반 여인이 맡았다. 왕들이 생모 이상으로 공경했다.[5] 이외에도 어릴 적 요절한 딸이 2명 더 있었다.[6] 고종 대에 사도세자가 왕(장조)으로 추증되면서 공주로 추증.[7] 울진 봉평리 신라비에 등장한다.[8]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김품석의 직함이 도독으로 적혀 있으나, 〈김유신 열전〉에서 김품석을 "군주"라고 지칭하는 대목이 있으므로 〈신라본기〉의 기록은 후대에 개서된 것으로 여겨진다. # 대량주 총관 또는 대량주 도독으로 기록된 김서현의 직위 역시 활동 시기를 고려하면 실제로는 대량주 군주였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