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7-07 09:35:48

귄뒤즈 클르츠

귄뒤즈 클르츠의 감독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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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대
클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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튀르키예의 前 축구 감독
파일:귄뒤즈 클르츠.jpg
<colbgcolor=#eeeeee,#191919> 이름 "바바" 귄뒤즈 클르츠
"Baba" Gündüz Kılıç
출생 1919년 10월 29일
오스만 제국 이스탄불 갈라타사라이
사망 1980년 5월 17일 (향년 60세)
미국 뉴욕시
국적
[[튀르키예|]][[틀:국기|]][[틀:국기|]]
신체 181cm
직업 축구선수 (스트라이커 / 은퇴)
소속 선수 갈라타사라이 SK (1934~1946)
아다나 데미르스포르 (1946~1947)
갈라타사라이 SK (1947~1953)
감독 갈라타사라이 SK (1952~1953)
베파 SK (1953)
갈라타사라이 SK (1954~1957)
튀르키예 대표팀 (1954)
페리쾨이 GK (1959~1960)
갈라타사라이 SK (1960~1963)
갈라타사라이 SK (1964~1967)
알타이 SK (1968~1969)
베식타스 JK (1971~1972)
국가대표 11경기 5골 (튀르키예 / 1936~1951)

1. 개요2. 생애
2.1. 어린 시절2.2. 선수 생활2.3. 감독2.4. 이후
3. 스타일 & 평가
3.1. 선수3.2. 감독
4. 뒷이야기5. 수상
5.1. 선수
5.1.1. 클럽
5.2. 감독
5.2.1. 클럽

[clearfix]

1. 개요

튀르키예의 전 축구 감독.

2. 생애[1]

2.1. 어린 시절

클르츠는 이스탄불에서 태어나 앙카라에서 성장했다. 갈라타사라이의 초등학교에 다니던 클르츠는 탁심 스타디[2]에서 축구 경기를 보고 축구에 빠졌고 축구를 배우면서 본격적으로 선수의 길을 가기로 결심했다. 클르츠는 처음에 골키퍼로 경기에 나서고 싶어했지만 센터 포워드에서 뛰게 되었다.

2.2. 선수 생활

2.2.1. 클럽

클르츠는 1934년, 갈라타사라이 SK에 입단했다. 그는 군복무 때문에 아다나 데미르스포르에서 보낸 1년을 제외하면 모든 커리어를 갈라타사라이에서 보낸 사실상의 원 클럽 플레이어였다.

1935년 4월, 집에 있던 클르츠는 한 통의 전화를 받게 되었다. 전화를 건 인물은 팀의 부감독이었고 그는 클르츠에게 당장 팀으로 오라는 명령을 내렸다. 클르츠는 한번도 본적이 없었던 갈라타사라이의 1군 선수들과 갑자기 경기를 뛰어야 했고 갈라타사라이의 상황은 좋지 않았다. 당시 상대적인 약체였던 아나돌루와의 친선 경기였음에도 갈라타사라이는 전반 종료 시점에 0:2로 끌려가고 있었다. 그러나 이 상황에서 클르츠가 나섰고 그는 해트 트릭으로 경기를 뒤집었다.

클르츠는 다해 4월 26일, 탁심에서 열린 이스탄불스포르와의 경기에서 정식으로 데뷔했고 한달 후에는 페네르바흐체 SK 등 라이벌전에도 출전을 시작했다.

1948-49 이스탄불 풋볼 리그에서 우승을 맛본 클르츠는 1952년 3월에 있었던 페네르바흐체전을 끝으로 선수 경력을 거의 마무리했다. 1952-53 시즌의 클르츠는 엔트리에만 등록된 선수 겸 감독으로 보냈다.

2.2.2. 국가대표

클르츠는 1936년1948년의 두 차례 올림픽 축구에 참가했지만 당시 튀르키예의 성적은 올림픽 메달권과 거리가 있었다.

클르츠는 1949년 11월 20일의 1950년 월드컵 지역 예선 시리아전에서 득점을 올리며 튀르키예의 7:0 압승에 기여했다. 시리아와 최종 라운드 상대였던 오스트리아가 모두 기권해서 튀르키예는 본선 진출을 확정지은 상황이었지만 튀르키예 역시 소련과의 전쟁 위기가 오자 기권했다.

2.3. 감독

클르츠는 1952년에 갈라타사라이 SK에서 선수 겸 감독으로 처음 감독 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갈라타사라이에서 감독 데뷔 시즌만 치르고 베파 SK로 잠시 떠났다가 1954년에 복귀했다.

1954년에 클르츠는 팀을 이스탄불 풋볼 리그에서 우승시켰고 이 시기에 갈라타사라이의 역대 최다 득점자가 될 메틴 오크타이도 영입했다. 클르츠의 눈은 틀리지 않았다. 그렇게 맞이한 다음 시즌에 갈라타사라이는 이스탄불 리그 연속 우승과 함께 오크타이는 리그 득점왕에 올랐다. 클르츠의 갈라타사라이 2기는 1957년까지였다.

1960년 1월에 새로 취임한 갈라타사라이의 보드진은 클르츠를 다시 팀의 감독직에 앉히고 싶어했고 클르츠는 1960-61 시즌을 쉬페르리그 준우승으로 마쳤다. 1961-62 시즌을 시작하면서 오크타이가 팔레르모 FC에 진출[3]하는 악재가 터졌지만 클르츠의 갈라타사라이는 쉬페르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갈라타사라이의 성공 발판을 놓았던 클르츠는 1972년에 베식타스 JK에서 감독 생활을 마무리했다.

2.4. 이후

클르츠는 감독직에서 물러난 후 축구 칼럼니스트로 일했지만 1979년에 폐암 진단을 받았고 치료를 위해 뉴욕으로 갔다. 하지만 클르츠는 병마를 이겨내지 못하고 1980년 5월 17일에 눈을 감았다.

이틀 후, 갈라타사라이 SK는 클르츠를 위한 추모 행사를 가졌다. 파티흐 테림이 들고 온 꽃다발과 함께 그의 유니폼이 벤치에 놓였다. 같은 시각 페네르바흐체 SK알타이 SK에서도 귄뒤즈를 추모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3. 스타일 & 평가

3.1. 선수

클르츠는 강하고, 덩치가 크고, 교육을 잘 받았고, 세련되고, 카리스마가 넘치고, 매력적이고, 성공에 굶주린 사람이었다. 클르츠는 결코 화려해 보이지 않았지만 결코 지루하지 않았다.

3.2. 감독

클르츠는 바바라는 별명에서 알 수 있듯 갈라타사라이 SK 팬들에게 아직도 많은 존경을 받고 있다.
모든 사람이 서로 다른 습관과 성격을 갖고 있는 것처럼 축구팀에도 고유한 성격이 있다는 것을 알고 계실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 갈라타사라이의 습관을 명확하고 철저하게 설명할 수 있다면 당신은 우리를 잘 알게 될 것이며 앞으로 몇 년 동안 친구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갈라타사라이는 느낌의 팀입니다. 자신들의 색깔을 사랑하고 서로 사랑하는 축구선수들의 팀이죠. 갈라타사라이는 포기와 희생을 할 줄 아는 선수들로 구성된 팀입니다. 갈라타사라이는 버릇없는 사람, 오만한 사람, 자기 생각만 하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한마디로 갈라타사라이는 함께 밧줄을 당기는 사람들, 함께 슬퍼하고 기뻐할 줄 아는 사람들의 팀입니다.
귄뒤즈 클르츠

4. 뒷이야기

  • 클르츠는 베식타스 JK를 상대로 1경기에 5골을 넣은 적이 있다.
  • 클르츠는 아다나 데미르스포르에서 군복무를 할 때 친정팀과의 경기를 뛰어야 했다. 클르츠는 감독의 요청으로 내키지 않지만 경기를 뛰고 갈라타사라이의 골문에 한 골을 넣었다. 그러나 다음 상대였던 페네르바흐체 SK의 골문에 4골을 폭파시키며 아다나의 4:3 승리를 혼자 떠먹였다.

5. 수상

5.1. 선수

5.1.1. 클럽

5.2. 감독

5.2.1. 클럽



[1] 출처: 위키피디아, 11v11, 갈라타사라이 홈페이지[2] 1921년부터 1940년까지 갈라타사라이 SK, 베식타스 JK, 페네르바흐체 SK의 홈구장으로 사용되었다.[3] 클르츠는 오크타이가 이적할 때 팔레르모 구단에 그를 잘 부탁한다는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