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cba7b3><colcolor=#000> 켄트 공작부인 그리스와 덴마크의 마리나 공주 Πριγκίπισσα Μαρίνα της Ελλάδας και της Δανίας | |
이름 | 그리스와 덴마크의 마리나 (Μαρίνα της Ελλάδος και της Δανίας) |
출생 | 1906년 12월 13일 |
그리스 왕국 아테네 | |
사망 | 1968년 8월 27일 (향년 61세) |
영국 잉글랜드 런던 켄싱턴 궁전 | |
배우자 | 켄트 공작 조지 왕자 (1934년 결혼 / 1942년 사망) |
자녀 | 장남 에드워드, 장녀 알렉산드라, 차남 마이클 |
아버지 | 그리스와 덴마크의 니콜라오스 왕자 |
어머니 | 러시아의 옐레나 블라디미로브나 여대공[1] |
언니 | 올가[2], 엘리사베트 |
종교 | 그리스 정교회 |
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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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그리스 왕국의 공주이자 영국의 왕자비. 영국 조지 5세의 4남인 켄트 공작 조지 왕자의 아내이며 엘리자베스 2세의 막내 작은어머니이자 사촌시누이다.조지 5세와 메리 왕비의 4명의 며느리들 중에서도 유일하게 통치 가문 출신의 공주였기 때문에, 객관적으로 따지자면 막내 며느리였음에도 불구하고 며느리들 중에서 가장 높은 신분이었다.[3] 더군다나 상당한 미녀라서 켄트 공작 가의 우월한 유전자에 제대로 한몫 했다. 마리나의 세 자녀들은 물론 손주들의 외모까지 상당히 출중한 편이다. 특히 장녀인 켄트의 알렉산드라 공녀가 어머니를 쏙 빼닮은 미녀였다.
2. 작위
<rowcolor=#000> 문장 | 모노그램 |
- 그리스와 덴마크의 마리나 공주 전하 Her Royal Highness Princess Marina of Greece and Danmark (1906년 12월 13일 ~ 1934년 11월 29일)
- 켄트 공작부인 전하 Her Royal Highness The Duchess of Kent (1934년 11월 29일 ~ 1961년 6월 8일)
- 켄트 공작부인 마리나 공주 전하 Her Royal Highness Princess[4] Marina, Duchess of Kent (1961년 6월 8일 ~ 1968년 8월 27일)
3. 생애
1906년 12월 13일, 그리스 왕국의 요르요스 1세의 3남 니콜라오스 왕자와 러시아 제국의 옐레나 블라디미로브나 여대공의 3녀 중 막내딸로 태어났다. 마리나가 태어날 때 무척이나 난산이었기 때문에[5] 니콜라오스 왕자 부부는 마리나가 태어난 이후 더 이상 아이를 갖지 않았다.혼란스러운 그리스의 정치 상황 때문에,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11살의 나이에 그리스를 떠나 가족들과 함께 파리로 향했다. 이후 마리나는 다른 그리스 왕족들처럼 여러 곳을 떠돌면서 살았다.
1933년 9월, 마리나는 언니 올가 부부와 함께 런던으로 결혼을 위한 선 자리에 참석하기 위해 왔다. 이전에도 몇 번 만난 적이 있었던 조지 왕자와 마리나는 호텔에서 점심을 함께 먹으며 진지한 관계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이때 조지의 형인 에드워드는 동생이 마리나를 에스코트 하도록 적극적으로 밀어붙였다고 한다. 1934년 여름, 마리나와 마리나의 어머니를 비롯한 그리스 왕가 사람들이 영국으로 오게 된다. 1934년 8월 20일, 백개먼 게임을 하고 난 후 마리나의 가족들은 마리나와 조지가 단 둘이 있을 수 있도록 잠시 자리를 비켜줬는데 이 시간 동안 조지는 마리나에게 프로포즈를 할 수 있었고, 같은해 8월 28일에 버킹엄 궁전은 둘의 약혼 소식을 공식 발표했다.[6]
켄트 공작부부는 태어난 아이들이 자유로운 환경에서 생활할수 있도록 시골에 있는 저택 코핀스로 이사했고[7], 어두운 저택을 아름다운 정원과 아이들이 뛰어놀수 있는 놀이터까지 있는 밝은 곳으로 재단장시켰다. 두 사람은 아이들의 잠자리를 직접 챙겨주거나 본인들의 침실에서 함께 놀아줄 정도로 다정한 부모였으며[8], 이상적인 가정의 모습을 보여주며 많은 영국인들의 부러움을 샀다.
1942년 막내 마이클 공자가 태어난 지 불과 두 달 만에 남편 조지 왕자가 비행기 사고로 사망하면서 과부가 되고, 당시 겨우 여섯 살이던 장남 에드워드가 공작 작위를 물려받았다. 이후 영국 왕실의 일원이 되어 의무를 수행하였고, 공식 석상에도 자주 나왔다. 또 시조카인 엘리자베스 2세를 대신하여 여러 곳을 다녀왔는데 특히 가나와 보츠와나가 독립할 때 여왕을 대신하여 다녀왔다고 한다.
1968년, 켄싱턴 궁전에서 뇌종양으로 인해 6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4. 가족관계
<rowcolor=#000> 1942년 가족사진 |
4.1. 조상
본인 | 부모 | 조부모 | 증조부모 |
그리스와 덴마크의 마리나 (Princess Marina of Greece and Denmark) | <colbgcolor=#fff3e4,#331c00> 그리스와 덴마크의 니콜라오스 왕자 (Prince Nicholas of Greece and Denmark) | <colbgcolor=#ffffe4,#323300> 요르요스 1세 (George I) | |
크리스티안 9세 (Christian IX) | |||
헤센카셀의 루이제 공녀 (Princess Louise of Hesse-Kassel) | |||
올가 콘스탄티노브나 여대공 (Grand Duchess Olga Constantinovna of Russia) | |||
러시아의 콘스탄틴 니콜라예비치 대공 (Archduke Constantine Nikolayevich of Russia ) | |||
작센알텐부르크의 알렉산드라 공녀 (Princess Alexandra of Saxe-Altenburg) | |||
러시아의 옐레나 블라디미로브나 여대공 (Grand Duchess Elena Vladimirovna of Russia) | |||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알렉산드로비치 대공 (Grand Duke Vladimir Alexandrovich of Russia) | |||
알렉산드르 2세 (Alexander II) | |||
헤센의 마리 공녀 (Princess Marie of Hesse and by Rhine) | |||
메클렌부르크슈베린의 마리 여공작 (Duchess Marie of Mecklenburg-Schwerin) | |||
메클렌부르크슈베린 대공 프리드리히 프란츠 2세 (Friedrich Franz II, Grand Duke of Mecklenburg-Schwerin ) | |||
로이스쾨스트리츠의 아우구스테 공녀 (Princess Augusta Reuss of Köstritz) |
4.2. 자녀
자녀 | 이름 | 출생 | 배우자/자녀 |
1남 | 켄트 공작 에드워드 공자 (Prince Edward, Duke of Kent) | 1935년 10월 9일 | 캐서린 월슬리[9] 슬하 2남 1녀 |
1녀 | 아너러블 레이디 오길비 알렉산드라 공녀 (Princess Alexandra, The Honourable Lady Ogilvy) | 1936년 12월 25일 | 앵거스 오길비 경[10] 슬하 1남 1녀 |
2남 | 켄트의 마이클 공자 (Prince Michael of Kent) | 1942년 7월 4일 | 마리 크리스티네 폰 라이프니츠 여남작 슬하 1남 1녀 |
<rowcolor=#000> 장남 에드워드 공자와 함께 |
<rowcolor=#000> 장녀 알렉산드라 공녀와 함께 |
<rowcolor=#000> 차남 마이클 공자와 함께 |
5. 창작물
더 크라운 시즌2 10화에 잠깐 등장했다. 같은 궁에 거주하는 마거릿 공주의 신혼집 공사 소리가 너무 시끄럽다고 여왕에게 민원을 넣는 것으로 등장했다.6. 여담
- 보통 영국 왕실로 시집오는 여성들은 무종교이거나 다른 종교를 믿고 있다가도 영국의 국교인 성공회로 개종을 했지만, 마리나는 성공회로 개종하지 않고 평생 그리스의 국교인 정교회 신자로 살았다.
- 시조카인 엘리자베스 2세와 친사촌인 필립 공의 결혼에 결정적으로 힘을 써준 인물이다. 당시 필립 공의 친척들은 그가 엘리자베스 2세와 맺어지도록 적극 노력했는데, 이들 중에서 마리나가 가장 많은 노력을 했다고 한다. 본인의 결혼식에서 공주였던 엘리자베스 2세는 마리나의 사촌 동생으로써 영국을 방문해 결혼식에 참석한 필립 공을 처음 만나기도 했다.
- 통치 가문의 공주로서 자부심이 대단했다. 때문에 동서지간이자 둘째 형님인 엘리자베스 왕대비를 왕족이 아닌 귀족 출신이라고 무시했다. 이로 인해 엘리자베스 왕대비도 켄트 공작가의 재정 지원을 줄여버리는 등 사이가 좋지 않았다. 다만 켄트의 알렉산드라 공녀는 엘리자베스 2세와 마거릿 공주의 유일한 여자 사촌이었기에 친하게 지냈다.
- 태어난 지 겨우 두 달 만에 아버지를 잃은 늦둥이 막내아들 마이클 공자를 늘 애지중지했다.
[1] 알렉산드르 2세의 손녀이다.[2] 덴마크의 프레데리크 9세(당시 왕세자)와 약혼했다가 파혼하고, 유고슬라비아 왕국의 파블레 대공(페타르 2세의 당숙이자 섭정)과 결혼했다.[3] 아이러니 하게도 조지 5세의 며느리들은 서열이 뒤로 갈수록 신분이 점점 높아진다. 큰 며느리인 윈저 공작부인은 미국 출신 평민, 둘째 며느리 엘리자베스 왕비는 평범한 백작가의 영애, 셋째 며느리 글로스터 공작부인 앨리스는 명문가인 공작가의 영애, 막내 며느리인 마리나는 그리스 왕국의 공주였다.[4] 며느리에게 켄트 공작부인 작위를 물려주면서, 원래 그리스의 왕족으로서 가지고 있었던 Princess 칭호를 다시 사용했다.[5] 니콜라오스 왕자는 후에 마리나에 대해서 어머니를 거의 죽게 할 정도로 힘들게 태어났기 때문에 매우 소중한 아이라고 언급했다.[6] 약혼 중에 조지 왕자는 마리나를 위해 비행기를 몰고 오는 깜짝쇼를 벌이기도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조지 왕자는 후일 비행기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7] 다만 고위 왕족이었기 때문에 왕실 별장인 샌드링엄에서 주로 생활했다고 한다.[8] 당시 왕족과 귀족 등을 비롯한 상류층들은 주로 유모에게 자식들의 양육 전반을 맡겼다.[9] 4대 월슬리 준남작의 딸이며, 영국 왕실 일원 중 가장 나이가 많은 인물이다. 원래 성공회 신자였으나, 1990년대에 가톨릭으로 개종하였다. 세례명은 카타리나.[10] 12대 에얼리 백작의 차남. 결혼 당시 엘리자베스 2세가 백작위를 제안했으나 거부했다. 1988년 로열 빅토리아 훈장을 받아 Sir라 불리었으며, 1996년에 추밀원 고문에 임명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