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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토 유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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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관총 금동신발 완형 사진 출처 : 전남목포신문 - 43년 만에 경주 신라 고분에서 금동 신발 다시 출토
금관총 금동식리 바닥 사진 출처 : 상동
1. 개요
일제강점기인 1921년에 경상북도 경주시 노서동의 이사지왕의 무덤인 금관총에서 출토된 고신라시대 금동 신발 2쌍. 현재 2쌍 모두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2. 내용
사진 출처 : Google Arts & Culture - 대한민국 경상북도 경주시 노서동 금관총 금동신발
금관총 관모와 금동신발 복원품의 모습. 사진 출처 |
길이 342mm
1921년 금관총에서 금관총 금관 및 금제 관식 등의 여러 황금 유물들과 함께 발견된 고대 한국의 금동신발 두 켤레로, 제작 연대는 확실치 않지만 대략 5세기 경(서기 400년대)으로 추정되고 있다.
당시 금관총에서는 순금제귀걸이, 금제와 은제 팔찌, 반지 등과 각종 구슬, 금제와 은제의 허리띠, 금동제신발 등의 각종 장신구를 비롯하여, 도검, 갑옷(甲胄), 창신(槍身), 쇠화살촉(鐵鏃), 쇠도끼(鐵斧) 등의 무기류와 말안장금구, 말방울, 말띠장식, 교구, 혁대금구 등의 말갖춤류(馬具類), 신라토기, 목칠기, 유리용기, 쇠솥(鐵釜), 금속제용기, 조개제품 등 많은 유물들이 부장되어 있었는데, 곡옥(曲玉)을 포함한 각종 구슬류만도 무려 3만 점이 넘었으며, 다른 유물까지 합쳐 약 4만점이 넘는 신라시대 화려한 문화재들이 쏟아져 나왔다.한국 미의 재발견 - 고분미술 : 금관총
당시 금관총에는 총 2켤레의 금동신발이 발견되었다. 첫번째로 완형을 이루고 있는 금동신발은 황남대총 남분 금동신발과 비슷하게 전형적인 신라식 금동신발 형태를 하고 있으며, 내부에는 천을 부착했던 흔적이 있다. 피장자에 발치에서 출토된 것을 볼 때 시신에 직접 신겨져 있던 것으로 추정된다.
두번째로 황남대총 북분 고구려식 금동못신처럼 바닥만 남아있는 식리는 금관총의 주인인 이사지왕이 직접 신고 있던 것은 아니며, 신발 바닥 아래에 꽃 문양을 한 스파이크를 박아넣었다. 이를 토대로 상기 논문에서는 이 신발이 고구려 양식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나 어디까지나 추측 단계에만 머무르고 있는 상황이다.
지금으로부터 1,600여년 전에 만들어진 한국의 금동신발 2쌍으로, 당시 신라의 금속공예술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