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6-14 16:22:32

기오르기 8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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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통합 조지아 왕국 5대 군주
카헤티 왕국 초대 군주

გიორგი | 기오르기 8세
파일:기오르기 8세.jpg
제호 한국어 기오르기 8세
조지아어 გიორგი
라틴어 George VIII
가족 알렉산드레 1세(아버지)
타마르(어머니)
바크탕 4세(이복 형)
디미트리오스(이복 형)
다비트(동생)
자알(동생)
바그라티오니(이복 누이)
네스탄-다레잔(첫째 아내)
타마르 자켈리(둘째 아내)
알렉산드레 1세(아들)
생몰 년도 1415년에서 1417년 사이 ~ 1476년
재위 기간 1446년 ~ 1465년(조지아 왕국)
1466년 ~ 1476년(카헤티 왕국)
서명
파일:기오르기 8세 서명.svg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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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차 통합 조지아 왕국 5대 군주, 카헤티 왕국 초대 군주. 바크탕 4세가 죽은 뒤 이메레티 통치자인 이복 형 디미트리오스를 제치고 조지아 왕위에 올랐으나 바그라트 6세와의 내전에서 패한 뒤 카헤티에서 왕을 칭했다.

2. 생애

2차 통합 조지아 왕국 3대 군주 알렉산드레 1세와 이메레티 군주 알렉산드레 1세(이메레티)의 딸 타마르의 아들이다. 이복 형으로 바크탕 4세, 디미트리오스가 있었고, 이복 누이로 바그라티오니가 있었으며, 친동생으로 다비트, 자알이 있었다. 일찍이 알렉산드레 1세에 의해 카헤티 카르틀리의 공동 통치자로 선임되었다. 1438년 페라라 공의회에 조지아 대표를 보냈고, 1439년 피렌체 공의회에도 대표를 보냈다.

1442년 알렉산드레 1세는 공동 통치자로 세워둔 디미트리오스와 기오르기 8세가 자신의 통제를 제대로 따라주지 않는 것을 보고 왕국의 미래를 걱정한 끝에 장남 바크탕 4세에게 왕위를 넘겨주고 수도원에 들어갔다. 이후 바크탕 4세는 자신을 왕중왕으로 칭하며 동생들보다 우월한 권위를 내세웠지만, 동생들이 각각 이메레티와 카르틀리에서 사실상 왕을 칭하며 권세를 누리는 걸 제지하지 못했다. 그러던 1446년 12월 바크탕 4세가 사망했다. 그는 왕위 경쟁자 디미트리오스를 이메레티로 쫓아내고 자신이 조지아 국왕을 맡았다.

1451년, 동로마 제국의 마지막 황제 콘스탄티노스 11세가 그에게 사절을 보내 딸을 자신에게 시집보내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이에 동의했지만 지참금으로 동로마 제국의 영역을 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면서 그 대가로 56,000두카트, 장신구, 고급 가구, 의복, 연간 지불료 3,000두캇을 보내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오스만 술탄국에 정복되고 동로마 제국이 멸망하면서, 이 결혼은 실현되지 않았다. 오스만 술탄국은 두 국가의 동맹을 경계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치기 전에 조지아 서부 지역인 압하지야를 습격해 타격을 입히기도 했다.

그는 조지아 왕을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카르틀리만 마음대로 통제할 수 있었고 다른 지역의 통제력은 그리 강하지 않았다. 특히 밍그렐리아, 구리아, 삼츠헤 등 조지아 공국들은 왕국으로부터 독립할 기회를 노렸다. 1447년 삼츠헤에서 벌어진 내전에서 아그부하 자켈리가 쿠바르쿠바레 3세에게 패배해 왕궁으로 피신했다. 삼츠헤 측은 내전에서 패배한 자를 보호해주는 왕국에 좋지 않은 감정을 품었다. 1451년 아그부하가 병사하면서 양국의 긴장은 온화되는 듯했지만, 얼마 후 쿠바르쿠바레 3세가 삼츠헤 내 왕실 영지를 몰수하고 예루살렘과 안티오키아에서 찾아온 성직자들로 구성된 삼츠헤 정교회를 독자적으로 세웠다.

삼츠회 정교회는 그와 조지아 총대주교 다비트 4세의 이름을 명단에서 삭제하고 그들이 선출한 주교를 총대주교의 직위로 격상했다. 이에 분노한 총대주교 다비트 4세는 사제들에게 삼츠헤 교회에 대한 예배 집전을 하지 말라고 경고하고 삼츠헤 사제들을 파문했다. 삼츠헤 교회는 곧 재정위기를 겪게 되자 조지아로부터 독립하려던 계획을 포기하고 므츠헤타의 총대주교를 다시 받들었다.

한편, 1452년 또는 1453년에 이메레티에서 권세를 누리던 디미트리오스가 사냥 사고로 사망했다. 이리하여 조지아의 유일한 군주가 된 그는 이를 과시하기 위해 므츠헤타에서 다비트 4세의 주관하에 대관식을 거행하고 1455년 콘스탄틴 1세의 손자 바그라트 6세를 이메레티의 통치자로 세웠으며, 디미트리오스의 아들 콘스탄틴 2세를 자기 보호 하에 두었다. 이때 카스피해의 이슬람 세력권이자 조지아의 속국인 쉬르반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그는 즉시 군대를 이끌고 이 지역을 공격해 짧은 공성전 끝에 쉬르반을 복종시켰다.

1456년, 카라 코윤루의 우준 하산이 조지아를 침공하여 아르메니아 북부를 파괴하고 오르베티 요새를 포위하여 항복을 받아냈다. 이후 하산은 카르틀리를 파괴하고 무크란 시를 점령한 후 페르시아로 돌아갔다. 외세의 위협이 갈수록 심해지자, 1459년 그와 삼츠헤의 지배자 쿠바르쿠바레 3세는 휴전 협정을 체결하고 이슬람 세력을 상대로 공동으로 대응하기로 했다. 그러던 1459년 9월 교황 비오 2세오스만 제국에 대항하기 위한 십자군을 선포했다. 그는 교황의 사절로부터 십자군에 참여해달라는 요청을 받자 즉각 동의하며, 12만 대군을 동원해 십자군에 참여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는 조지아에서 4만 명, 트레파준타 제국에서 3만 명, 아르메니아에서 2만 명, 삼츠헤에서 2만 명, 밍그렐리아에서 1만 명, 항구 도시들에서 30척의 배, 그리고 오스만 제국에 적대적인 우준 하산의 제한된 병력이 함께 할 거라 예상했다.

비오 2세는 삽자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겠다고 약속한 것에 고무되어 그를 "페르시아의 왕"으로 칭하고 유럽 전역에 사절을 보내 조지아와 함께 오스만 제국을 무찌르자고 호소했다. 그러나 정작 서방 국가들은 십자군에 지극히 회의적이었기 때문에 교황과 그의 계획은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한 기록에 따르면, 조지아 협상가들은 다음과 같이 한탄하며 유럽을 떠났다고 한다.
"유럽이 유리한 순간을 활용하는 방법을 몰랐으니, 언젠가 의 문에서 투르크인을 보게 될 것이오."

1460년 9월, 오스만 제국의 메흐메트 2세가 트라페준타를 포위 공격했다. 메흐메트 2세는 공격을 개시하기 앞서 조지아에 사절을 보냈다. 사절단 대표 오스트로비카의 콘스탄틴은 "만약 조지아군이 트라페준타에 단 한 명의 지원병을 보낸다면, 술탄께선 조지아를 침공하실 것"이라고 위협했다. 그는 이를 두려워해 트라페준타 제국을 돕지 않았다. 트라페준타 제국의 마지막 황제 다비드는 조지아의 구원을 기대했으나 별다른 소식이 없자 1461년 8월 15일 마침내 항복했다. 트라페준타 왕실은 대거 숙청되었지만, 다비드의 아내 엘리니 등은 조지아로 망명했다.

1462년, 이메레티의 통치자 바그라트 6세는 삼츠헤의 쿠바르쿠바레 3세와 함께 그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키기로 밀약을 맺했다. 그는 삼츠헤 외에도 밍그렐리아의 리파리트 1세, 구리아의 마미아, 압하지야 및 스바네티아의 영주들에게 "자신을 도와주면 중앙 정부에 과세를 낼 의무를 면제해주겠다"라고 약속했다. 이리하여 반란이 발발하자, 그는 즉각 토벌에 나섰다. 1463년, 리키 산맥을 넘어 이메레티로 진군한 그는 공식적으로 반란에 가담하지 않고 있던 쿠바르쿠바레 3세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쿠바르쿠바레 3세는 군대를 이끌고 이메레티에 도착했지만, 전장에서 멀리 진을 치고 전황을 관망했다.

양군은 치코리에서 격전을 벌였다. 그 결과 반란군이 정부군을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그는 카르틀리로 후퇴한 뒤 자신에게 충실하지 않다고 판단된 귀족들을 가혹하게 처벌했다. 한편 바그라트 6세는 조지아 서부에서 가장 큰 도시인 쿠타이시를 점령하고 밍그렐리아, 구리아, 압하지야, 삼츠헤, 스바네티의 대귀족들 앞에서 자신을 이메레티의 왕으로 선포했다. 그는 복수를 다짐하고 병력을 규합해 삼츠헤로 쳐들어가 그곳을 공략했다. 하지만 그 사이 카라 코윤루의 우준 하산이 그의 본거지인 카르틀리를 공격해 철저히 파괴했다. 기오르기 8세는 방향을 돌려 하산과 맞붙었으나 패배했고, 카라 코윤루는 조지아 동부 일대를 철저히 황폐화시켰다. 이리하여 쉬리반, 아란 및 모바칸 등 동부 일대는 조지아로부터 떨어져 나갔다. 이와 동시에, 쿠바르쿠발레 3세는 바그라트 6세의 군대와 함께 삼츠헤 탈환 작전에 착수해 성사시킨 뒤 기오르기 8세에게 협조했던 지역 귀족들을 가혹하게 처벌했다.

1465년, 자객이 그를 죽이려 시도했다. 보좌관인 이오탐 제드구니제가 그를 대신해 자객의 칼에 찔려 사망했다. 그는 이오탐의 아들들에게 카르틀리의 여러 성채를 하사하고 이오탐에게 "카르틀리의 장군"이라는 칭호를 하사했다. 그는 이 자객이 삼츠헤에서 왔을 거라 짐작하고 아라그비 공국과 동맹을 맺은 후 삼츠헤를 다시 침공하기로 했다. 삼츠헤군과 조지아 정부군은 파라바니 호수에서 격돌했는데, 전투 자체는 정부군이 승리했지만 그는 섣불리 추격했다가 적에게 오히려 포위되어 사로잡히고 말았다. 그의 조카인 콘스탄틴 2세는 가까스로 탈출하여 군대와 합류한 뒤 철수했다. 그는 아할치헤로 끌려가 그곳에서 1년간 옥고를 치러야 했다.

그가 아할치헤에서 옥고를 치르는 사이, 바그라트 6세는 군대를 이끌고 조지아의 수도 트빌리시에 입성한 뒤 조지아의 왕으로 즉위하고 그를 폐위했다. 카헤티의 통치자 다비트가 이에 맞서 반기를 들었지만, 조지아 대부분은 바그라트 6세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이 상황을 지켜본 쿠바르쿠바레 3세는 바그라트 6세가 지나치게 강해지면 자신에게 좋을 것 없다고 판단하고, 그를 자신의 딸인 타마르 자켈리와 결혼하는 조건으로 풀어주기로 했다. 이리하여 석방된 그는 삼츠헤군의 도움을 받으며 카르틀리를 탈환하려 했다. 그러나 카르틀리 귀족들은 그가 바그라트 6세에게 충성을 맹세한 자신들을 가만두지 않을 걸 우려해 따르지 않았다. 결국 카르틀리에서 패배한 그는 잔여 병력을 수습한 뒤 카헤티로 이동했다.

카헤티 귀족들은 다비트보다는 그에게 정통성이 있다고 보고 그에게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그 덕분에, 그는 다비트를 물리쳐 카헤티의 산악 지역으로 내쫓은 뒤 1466년 보드베 수도원에서 즉위식을 거행하고 카헤티의 왕을 칭했다. 이리하여 조지아는 양분되었고, 삼츠헤의 쿠바르쿠바레 3세는 이 때를 틈타 조지아로부터 완전히 독립했다. 하지만 카헤티의 몇몇 귀족들은 조지아로부터 독립한 그를 적대시했다. 그는 이들을 토벌하고 싶었지만, 바그라트 6세가 이들과 힘을 합칠 것을 두려워했다. 그래서 1467년 바그라트 6세와 협의한 끝에 바그라트 6세가 자신을 카헤티 왕으로 인정해주고 카헤티의 완고한 귀족들을 토벌하는 데 협조하기로 하고, 자신은 카르틀리에서 반기를 든 콘스탄틴 2세와 전쟁을 벌이고 있는 바그라트 6세를 돕기로 합의했다.

1470년 산악 지대로 피신한 뒤 왕위 복귀를 꾀했던 다비트를 완전히 제압하는 데 성공한 그는 반 자치 공국을 폐지하고 치지치, 엘리세니, 츠우헤티, 디도에티, 티아네티, 치아우리, 칠다, 크바렐리, 마르트코피, 그레미 및 판키시 등 여러 현을 설립했다. 이 현의 관리로 이명된 무라비스들은 세금을 징수해 수도인 그리미로 보내는 역할을 수행했다. 무라비스는 정기적으로 교체되며 세습은 금지되었다. 그 후 그는 군사 개혁을 실시해 카헤티 왕국을 사드로초라는 이름의 4개 지역으로 나누었고 각 지역에는 왕이 임명한 주교가 이끄는 군대를 신설했다. 또한 알라베르디 수도원의 대수도원장을 대주교로 승격시키고 다른 지역 주교들을 감독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조지아 정교회 총대주교의 권위를 인정했지만, 총대주교의 의향과는 상관없이 독자적으로 종교 정책을 실시하게 했다. 또한 그레미 시를 수도로 승격하고 도시를 확장했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에도 불구하고 카라 코윤루의 지속되는 침략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결국 그는 카라 코윤루를 종주국으로 인정하고 매년 남녀 노예를 공물로 바쳐야 했다. 그러면서도 조지아의 나머지 지역을 재정복하기 위한 계획을 수립했지만 실천에 옮기지 못하고 1476년 사망했다. 사후 장남 알렉산드레 1세가 카헤티의 새 군주로 등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