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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통합 조지아 왕국 3대 군주 2차 동부 조지아 왕국 초대 군주 ბაგრატ | 바그라트 5세 | ||
제호 | 한국어 | 바그라트 5세 |
조지아어 | ბაგრატ | |
라틴어 | Bagrat V | |
가족 | 다비트 9세(아버지) 신두타르(어머니) 굴칸 에우도키아(누이) 엘레니 메갈리 콤니니(첫째 아내) 안나 메갈리 콤니니(둘째 아내) 기오르기 7세(장남) 콘스탄틴 1세(차남) 다비트(삼남) 타마르(장녀) 올림피아스(차녀) | |
생몰 년도 | 미상 ~ 1393년 | |
재위 기간 | 1360년 ~ 139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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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차 통합 조지아 왕국 3대 군주, 2차 동부 조지아 왕국 초대 군주. 티무르의 침략에 결사적으로 항전했으나 끝내 패배하여 사로잡힌 후 이슬람교로 강제 개종했다. 하지만 티무르의 봉신으로 지내며 나라를 재건한 뒤 독립 전쟁을 벌인 끝에 티무르로부터 독립하고 티무르의 침략을 틈타 독립한 이메레티 왕국을 복속시켰다.2. 생애
1차 통합 조지아 왕국 2대 군주 다비트 9세와 삼츠헤-사타비고 공작 이오안 1세 자켈리의 딸 신두타르의 외아들이다. 1355년 아버지와 함께 공동 통치자가 되었고 1360년 아버지가 사망한 뒤 단독 군주로 등극했다. 당시 조지아 왕국은 흑사병과 경제위기로 인해 국력이 쇠약해지고 있었다. 1362년, 몬태나 스바네스가 반란을 일으켜 서부 조지아 일대를 장악하고 조지아의 두번째 도시이자 서부 조지아의 최대 도시인 쿠타이시를 파괴했다. 그는 즉시 카케티아와 헤레티아 일대의 병력을 모집하여 반란의 확대를 저지한 뒤, 레크호미, 메스키아, 클라제티, 이메레티, 카르틀리 연합군을 이끌고 스바네티로 진격하여 몬태나 스바네스를 제압하여 투옥시키고 자신이 신임하는 관료를 스바네스가 다스리던 영지의 관료로 앉혔다.반란을 제압한 직후, 추파니드 일대의 투르크인이 삼츠헤에 쳐들어왔다. 그는 12,000명의 병사를 이끌고 3일 밤낮으로 행군해 아락시스에 도착한 뒤, 포로들로부터 조지아군의 위치를 잘못 전해듣고 방심하고 있던 투르크군을 기습 공격해 패배시키고 추파니드로 진격하여 수많은 투르크인을 살해하고 막대한 전리품과 포로를 챙기고 삼츠헤로 돌아왔다. 이 시기에 삼츠헤 공작 쿠바르쿠바레 1세가 사망하자, 그는 공작의 아들인 베카 2세를 삼츠헤 공작으로 임명하고 티플리스로 귀환했다. 그러나 1365년 흑사병이 재발해 수많은 이가 죽어나가고 경제가 파탄 지경에 처했다. 시디 아흐메드 올라트는 이 때를 틈타 샤키 일대를 장악하고 투르크 토후국을 세웠다.
흑사병이 가라앉은 뒤, 그는 14년간 피폐해진 경제를 되살리고자 노력했고 인접 이슬람 국가인 아란, 모바칸, 도빈을 조지아의 속국으로 삼음으로써 샤키를 잃은 것을 만회했다. 그리고 1372년에 바그라트 1세의 아들 알렉산드레 1세를 이메레티의 에리스타비(조지아의 지방 최고 행정관)로 임명하고, 바메크를 1375년에 오디치의 다디아니로 임명해 각지의 통제력을 강화했다. 하지만 1373년 투르크군이 자바케티를 침략해 크사니 공작과 알스탄탄의 기오르기 왕자를 알스탄탄 전투에서 전사시키는 등, 투르크인의 침략에 끊임없이 시달렸다.
그는 기독교 왕국에 적대적인 이슬람 세력으로 둘러싸인 상황을 만회하고자 친선 외교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서방과 조지아 왕국간의 교두보 역할을 하는 트라페준타 제국과 우호관계를 이어가고자 바실리오스의 사생아인 엘레니 메갈리 콤니니와 결혼했다. 1365년 엘레니가 흑사병으로 인해 사망하자 알렉시오스 3세의 장녀인 안나 메갈리 콤니니와 재혼했다. 또한 1370년 테살로니키 대주교와 25명의 선교사로 구성된 대표단을 접견하고 1373년 프란치스코회 선교사들을 수용하여 그들이 티플리스와 아할치헤에 2개의 수녀원을 설립하는 걸 허용했다. 그 결과 코카서스 일대에서 가톨릭의 영향력이 강화되었다.
이렇듯 투르크인의 지속적인 침략과 흑사병으로 인한 경제 파탄을 어느정도 극복하고 외교 정책을 착실하게 수행했으나, 몇년 후 최악의 위기가 닥쳤다. 1385년 티무르가 파견한 군대가 타브리즈를 점령한 뒤 1386년 초 카르스와 에르제룸을 공략한 후 조지아가 장악하고 있는 코카서스를 노리기 시작한 것이다. 티무르는 먼저 동부 코카서스에 습격대를 파견해 국경 지대를 휘젓게 한 뒤, 지하드를 선포하고 대군을 동원해 당시 조지아의 영역이었던 북부 아르메니아를 단숨에 공략했다. 티무르의 위세에 두려움을 느낀 삼츠헤 공작 베카 2세는 별다른 저항 없이 항복했다. 하지만 그는 침략자에 저항하기로 마음먹고, 공동 통치자로 삼은 장남 기오르기 7세를 삼츠베리 시로 보내 후방의 군대를 이끌게 한 뒤, 자신은 아내와 함께 티플리스 요새에서 농성하기로 했다.
1386년, 티무르는 북쪽으로 이동하여 수십 개의 마을을 파괴하고 파르츠키 시 등 여러 도시를 며칠간의 공성전 끝에 함락시킨 뒤 트리아레티와 사바라티아 일대로 진입하여 대다수 마을을 황폐화시키고 수많은 포로를 확보했다. 뒤이어 그가 농성 중이던 트빌리시 요새로 쳐들어갔지만, 방비가 워낙 잘 되어서 수십일에 걸친 공성전에도 함락되지 않았다. 이에 티무르는 요새으로 향하는 모든 진입로를 차단해 굶주리게 하고 적군이 왕을 구하러 오는 걸 막았다. 조지아 귀족들은 각자의 영역으로 도주했고, 국왕의 가장 충실한 측근들만이 그와 함께 남았다. 티무르는 이후에도 요새를 지속적으로 공격했고, 1386년 11월 21일 마침내 성벽이 무너지고 침략군이 트빌리시로 진입했다. 조지아 연대기에 따르면, 그는 이 광경을 목격하자 병사들에게 다음과 같이 외쳤다고 한다.
"그리스도의 믿음을 위해 죽는 것은 승리자에게 복종하는 것보다 더 아름답고 바람직한 운명이다!"
그는 수비대를 이끌고 성안으로 진입한 적을 향해 맹렬히 돌진했고, 양자는 막대한 희생을 치렀다. 그러다 구원군이 트빌리시에 접근해 티무르군의 후방을 노리자, 티무르는 일단 병력을 후퇴시켰다. 그러나 그는 구원군을 물리친 뒤 재차 공격한 끝에 성벽을 완전히 파괴하고 트빌리시를 점령한 뒤 교회를 모조리 불태우고 시민들을 학살했다. 그는 최후까지 사투를 벌이다 생포된 뒤 아내 안나와 차남 다비트와 함께 티무르에게 끌려갔다. 그 후 포로 신분으로 티무르의 원정에 따라가면서 조국이 침략자들에게 파괴되는 걸 지켜봐야 했다.
티무르는 카라이아 사막 지대로 이동한 뒤 한 에미르[1]를 파견해 아직도 자신에게 복종하지 않는 조지아 도시들을 파괴하게 했다. 트빌리시는 다시 황폐해지고 카르틀리 하류 일대는 사람을 찾기 힘들 정도로 파괴되었으며, 조지아의 종교 중심지였던 므츠헤타의 많은 교회가 파괴되거나 약탈당했다. 이슬람교로 개종하기를 거부한 다수의 사제, 수녀 및 주민들은 교회에 갇혀 산채로 불태워졌다.
에미르는 남쪽으로 이동하여 카헤티에서도 이같은 파괴 행위를 벌였다. 이렇게 조지아 대부분을 파괴한 뒤 귀환한 에미르는 티무르로부터 승리를 축하받은 뒤 그에게 이슬람교로 개종하지 않으면 죽여버리고 파괴를 재개하겠다고 위협했다. 그는 백성을 구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아내와 함께 이슬람교로 개종했다. 티무르는 폐허가 되어버린 조지아를 떠나 아제르바이잔으로 이동하여 그곳의 기독교인과 이교도를 학살했다. 다만 장남 기오르기 7세는 조지아 서부의 산악 지대인 이메레티에서 독자적으로 잔여 병력을 규합하여 티무르에 대항했다.
그는 다비트 4세가 입었던 외투를 포함한 많은 선물을 티무르에게 바쳤고, 티무르는 이에 보답하겠다며 그와 안나 왕비, 다비트 왕자를 조지아로 돌려보냈다. 하지만 그는 돌아오자마자 이슬람교 개종을 취소했다. 이 소식을 뒤늦게 전해들은 티무르는 1387년 가신에게 12,000명의 병력을 파견해 조지아를 공략하게 했다. 하지만 이들은 그의 장남 기오르기 7세가 이끄는 조지아군의 매복 공격으로 섬멸되었다. 티무르는 이에 분노하여 대군을 이끌고 조지아로 쳐들어가 티플리스를 또다시 황폐화시켰지만, 본국에서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자 조지아를 급히 떠나야 했다.
한편, 이메레티의 에리스타비를 맡고 있던 알렉산드레 1세는 그가 티무르의 맹공에 대응하느라 자신에게 신경쓰지 못하는 틈을 타 1387년 조지아로부터 독립하고 자신을 이메레티의 왕으로 선언했다. 하지만 쿠타이시는 기오르기 7세의 수중에 남았고, 밍그렐리아, 구리야, 압하지야, 스바네티 공작은 알렉산드레 1세의 합류 권유를 단호히 거부했다. 알렉산드레 1세는 이메레티 전역을 장악하는 데 성공했지만 1389년 사망하고 아우 기오르기 1세가 그 뒤를 이었다. 1392년, 기오르기 1세는 밍그렐리아 공작 바메크 1세와 맞붙었으나 참패하고 목숨을 잃었다. 이에 이메레티를 되찾을 기회가 왔다고 판단한 그는 아들 기오르기 7세에게 이메레티 공략을 맡겼다. 기오르기 7세는 이메레티를 공략해 조지아 왕국과 재결합했다. 기오르기 1세의 형제인 콘스탄틴 2세와 알렉산드레 1세의 아들인 디미트리오스는 북캅카스로 도망쳐 발카르 일대에 숨었다.
1393년 숨을 거두었고 아들 기오르기 7세가 왕위를 물려받았다. 조지아인들은 수많은 국난에도 좌절하지 않고 나라를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던 그의 죽음에 안타까워하며 대왕(დიდი) 칭호를 부여했다.
그는 첫 아내 엘레니 메갈리 콤니니로부터 기오르기 7세를 낳았고 두번째 아내 안나 메갈리 콤니니로부터 콘스탄틴 1세, 다비트, 타마르, 올림피아스를 낳았다. 이중 기오르기 7세, 콘스탄틴 1세는 조지아 왕이 되었고, 타마르는 엘레스 바라타슈빌리 왕자의 아내가 되었으며 올림피아스는 조지아 공작 카하베르 치자바제의 아내가 되었다.
[1] 이름은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