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27 22:09:39

아르칠리(이메레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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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이메레티 왕국 11대 군주
카헤티 왕국 9대 군주

არჩილი | 아르칠리
파일:아르칠리(이메레티).jpg
제호 한국어 아르칠리
조지아어 არჩილი
라틴어 Archil
가족 바크탕 5세(아버지)
로담 카플라니슈빌리-오르벨리아니(어머니)
노다르 치치시빌리 공작의 딸(첫째 아내)
케테반(둘째 아내)
알렉산드르 아르칠로비치(장남)
마트페이 아르칠로비치(차남)
다비드 아르칠로비치(삼남)
다리아 아르칠로브나(딸)
생몰 년도 1647년 ~ 1713년
재위 기간 1661년 ~ 1663년(이메레티 국왕 1차 재위)
1664년 ~ 1675년(카헤티 국왕 재위)
1678년 ~ 1679년(이메레티 국왕 2차 재위)
1690년 ~ 1691년(이메레티 국왕 3차 재위)
1695년 ~ 1696년(이메레티 국왕 4차 재위)
1698년(이메레티 국왕 5차 재위)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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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차 이메레티 왕국 11대 군주, 카헤티 왕국 9대 군주.

2. 생애

카르틀리 왕국 12대 국왕 바크탕 5세와 로담 카플라니슈빌리-오르벨리아니의 아들이다. 1661년 바크탕 5세는 이메레티 왕국을 침공하여 이메레티의 수도 쿠타이시를 점령하고 바그라트 5세를 사로잡았다. 이후 14살된 그를 이메레티 왕으로 세웠다. 그러나 1663년 카르틀리 왕국의 종주국인 사파비 제국이 바그라트 5세를 복위시키라고 명하자 어쩔 수 없이 왕위에서 물러나야 했다.

1664년, 바크탕 5세는 아들을 카헤티 국왕으로 세웠다. 이때 사파비 제국의 동의를 얻기 위해 이슬람교로 개종했지만, 실제로는 조지아 정교회 신앙을 유지했다. 그는 왕위에서 쫓겨난 테이무라즈 1세 일가의 복위 시도를 물리치고 카헤티가 어느정도 안정을 되찾고 번영하는 기반을 닦았다. 그러나 1675년 페르시아의 대총독 샤이크 알리 칸의 음모로 인해 카헤티를 떠나 압하시헤의 아슬란 파샤에게 망명했다. 그는 구리아의 기오르기 구리엘리 공작과 손을 잡고 아슬란 파샤에게 당시 이메레티 왕으로 복귀해 있던 바그라트 5세를 몰아내달라고 청했다.

1678년, 아슬란 파샤의 지원을 받은 그는 이메레티 왕국에 쳐들어와서 수라미를 점령하고 많은 이메레티 귀족들을 자기 편으로 삼았다. 그 후 쿠타이시로 진군해 왕위에 올랐고, 바그라트 5세는 구리아로 도주했다. 아내 타마르는 스칸다 요새에 남아있다가 그의 군대가 요새를 함락한 뒤 밍그렐리아로 이송되었다. 바그라트 5세는 이에 맞서 구리아 공작 기오르기 구리엘리를 도로 자기 편으로 삼고 아슬란 파샤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아슬란 파샤는 에르주룸 파샤 휘하의 투르크군을 파견하여 이메레티로 파견했다. 1679년 8월 투르크군은 그가 이끄는 군대를 격파했고, 이메레티 귀족들은 바그라트 5세 편을 들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카르틀리로 도주했고, 에르주룸 파샤는 아르칠리를 따랐던 이들을 모조리 처형하고 이메레티 각지를 황폐화시켰다.

1681년 러시아 제국에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자녀들과 함께 모스크바로 이주했고, 그곳에서 6년간 살았다. 1687년 카르틀리의 왕이자 그의 형제인 기오르기 11세의 요청으로 자식들과 함께 카르틀리로 돌아왔다. 기오르기 11세는 그를 이메레티 왕으로 선임하기로 마음먹고, 이메레티 귀족들과 협의한 뒤 원정을 개시했다. 그러나 알렉산드레 4세의 군대에게 패퇴하여 오디시로 후퇴할 수밖에 업었고, 오스만 제국 술탄과 크림 칸에 도움을 요청했다. 그는 크림 반도로 가기로 마음먹고 합하지야로 이동해 흑해를 거슬러 올라가려 했지만 배를 구하지 못하자 오디시로 돌아왔다.

기오로기 11세와 사칠라오로 후퇴한 뒤 알렉산드레 4세에게 자신들이 카르틀리로 돌아갈 수 있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알렉산드레 4세는 그가 이메레티 왕위에 도전하지 않겠다고 맹세하면 소유물을 가지고 돌아갈 수 있게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는 동의할 수밖에 없었고, 이메레티를 떠나 카르틀리로 돌아갔다. 한편, 아르칠리의 사절은 크림과 이스탄불을 잇따라 방문했다. 오스만 술탄 쉴레이만 2세는 카푸치를 이메레티에 보내 알렉산드레 4세와 아르칠리 중 누가 적임자인지를 알아보게 했다. 알렉산드레 4세는 카푸치를 죽이려 했지만, 카푸치는 압하치헤로 도주한 뒤 그곳에서 카르틀리 왕 기오르기 11세를 만났다. 기오르기 11세는 카푸치에게 많은 뇌물을 주고 오스만 제국의 충실한 봉신이 되겠다고 약속했다. 카푸치로부터 아르칠리가 적임자라는 보고를 받은 쉴레이만 2세는 그를 이메레티 왕으로 인정하고 그에게 로브와 세이버를 하사했다.

에르주룸 파샤는 쉴레이만 2세로부터 아르칠리를 이메레티 왕에 세우라는 지시를 받고 1690년 대규모 병력을 이끌고 아르칠리와 함께 쿠타이시로 진군했다. 알렉산드레 4세는 피신했고, 쿠타이시에 입성했다. 그러나 그는 인근 요새에 주둔 중이던 투르크 군을 포위 공격한 일로 투르크인과 갈등을 벌였다. 한편 알렉산드레 4세는 압하지야 파샤에게 자신을 도와달라고 청했다. 이에 1691년 압하지야 파샤가 보낸 투르크군이 이메레티를 침공했고, 많은 귀족은 아르칠리에서 알렉산드레 4세 편으로 넘어갔다. 그는 별다른 저항을 하지 못하고 카르틀리로 도망친 뒤 드발레티를 거쳐 러시아에 망명했다. 그러나 체르케제티에서 체포될 뻔한 뒤 카르틀리로 되돌아가야 했다.

1695년, 이메레티 귀족들은 반란을 일으켜 알렉산드레 4세를 주살했다. 이후 그들의 추대를 받고 네번째 이메레티 국왕이 되었다. 그러나 1696년 기오르기 아바시제와 기오르기 리파르티아니가 반란을 일으켜 그를 몰아내고 기오르기 5세를 왕위에 옹립했다. 그는 다시 드발레티로 피신했다. 1698년, 이메레티 귀족들은 기오르기 5세를 타도한 뒤 그에게 왕위에 복귀하라고 청했다. 그는 거부했지만 친척들의 압력을 받고 어쩔 수 없이 따랐다. 이리하여 1698년 다섯번째로 이메레티 왕위에 복귀했지만, 오스만 술탄 무스타파 2세는 압하지야 파샤에게 그를 몰아내라고 명령했다.

압하지야 파샤는 카르틀리 왕 헤라클리오스 1세에게 알렉산드레 4세의 아들이며 그의 궁정에서 자란 시몬 왕자를 보내라고 요구했다. 헤라클리오스 1세가 지시에 따르자, 압하지야 파샤는 시몬 왕자와 함께 이메레티로 쳐들어갔다. 귀족들은 곧바로 압하지야 파샤와 시몬 왕자 편으로 넘어갔고, 그는 1698년 가을에 라차로 망명했다. 압하지야 파샤는 쿠타이시를 점령하고 시몬을 이메레티 왕으로 옹립했다. 이후 타가우리로 이동하여 겨울을 보낸 그는 1699년 봄 러시아로 이동해 모스크바 근교의 브세스비아츠코에에 정착했다.

그는 표트르 1세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그의 지원에 힘입어 이메레티 왕위에 복귀할 계획을 세웠으나, 1700년 나르바 전투에서 러시아군이 스웨덴군에게 참패한 뒤 그를 신경쓸 여력이 없게 되었다. 게다가 나르바 전투에 참전하여 포병을 지휘했던 아들 알렉산드르 아르칠로비치가 스웨덴군에게 생포되어 10년간 포로 생활을 해야 했다. 그는 오스트리아의 중재를 통해 아들의 석방을 시도했고, 스웨덴 왕 칼 12세에게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알렉산드르는 1710년이 되어서야 풀려났고, 러시아로 돌아오는 도중에 사망했다.

여섯번이나 즉위와 폐위를 반복하면서 혼란스럽기 짝이 없는 조지아에 신물이 난 탓인지, 그는 다시는 조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러시아에서 제2의 인생을 살았다. 조지아어로 된 서적을 출간하는 인쇄소를 설립하고 1705년에 시집을 출판했다. 그의 시는 문학성이 뛰어나고 다양한 주제를 다뤘다는 평을 받았으며, 침체되어 있던 조지아 문학을 부흥시키는 데 일조했다. 그는 이 시집에서 조지아인의 불행한 삶을 주제로 삼았고, 페르시아화 되어가는 조지아인들의 세태에 안타까워했다. 그렇게 문필가로서 여생을 보내던 그는 1713년에 사망했고 모스크바의 돈스코이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그는 생전에 두번 결혼했다. 첫번째 부인은 노다르 치치시빌리 공작의 딸이었고, 두번재 부인은 카헤티 왕자 다비트의 딸 케테반이었다. 그는 이 결혼 생활에서 아들 셋과 딸 하나를 낳았다. 장남 알렉산드르 아르칠로비치는 러시아 포병 사령관이었으나 나르바 전투에서 생포된 뒤 10년간 포로 생활을 보내다 1710년에서야 풀려나 러시아로 귀환하다가 사망했다. 차남 마트페이 아르칠로비치는 1693년 아버지보다 먼저 사망했고 돈스코이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삼남 다비드 아르칠로비치는 1688년 아버지보다 먼저 사망하고 노보데비치 수도원에 안장되었다가 1711년 돈스코이 수도원에 다시 안장되었다. 딸 다리아 아르칠로브나는 1740년까지 살았지만 평생 결혼하지 않았고, 사후 돈스코이 수도원에 가족과 함께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