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7 17:07:16

김관홍

1. 개요2. 일생
2.1. 세월호 참사2.2. 진상규명 활동2.3. 20대 총선 선거운동 지원2.4. 사망
3. 추모4. 영향5. 참고 자료

1. 개요


세월호 참사 때 많은 시신을 수습했던 민간 잠수사다.

2. 일생

은평구 토박이로 은평구에서 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덕분에 은평구에 출마한 박주민 변호사를 도울 수 있었다) 94년 군 전역하였다.
어릴 때부터 공부보다 운동을 좋아했다. 여러 직업을 전전하며 고생하다가 찾은 직업이 잠수사이다. 1996년부터 오래된 교각의 안정성 점검 및 수리, 유물 발굴이나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들을 찾아내는 일까지 다양한 일을 하였다.

아내를 만나 결혼하였고 밑으로 세 명의 자녀를 두었다. 세월호 사건 이전에는 밖에서 일을 하는 일이 많아 집에 오래 머무는 일이 적었다고 한다. 아내의 출산 때도 같이 있어주지 못할 정도였다고. 그런데 잠깐 집에 머물고 오면 어느새 또 애가 생겨 자녀를 셋이나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2.1. 세월호 참사

2014년 4월 세월호 참사 당시 민간잠수사로서 구조팀에 참가하였다. 그가 사고 직후 바로 내려간 것은 아닌데, 아내는 '어차피 당신이 내려가도 지금 500명이나 내려가 있다고 방송도 그런다'며 만류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아는 잠수사들에게 계속 연락도 오고, 계속 신경쓰여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아하는 모습을 보고 아내는 가라고 허락했고, 김관홍은 그날로 장비를 싸들고 현장으로 찾아갔다. 알고 보니 500명 이야기는 순 거짓말이었고, 그 중 그 환경에 실제로 잠수가 가능한 사람은 극소수였으니[1] 김관홍이 진도에 내려간 것은 현장 상황에 큰 도움이 되는 일이었다. ...그 자신에게는 불행이 되었지만.

목숨을 걸고 물 속에서 라인을 연결하고 선내 집기를 정리하여 희생자 유품을 올려주는 등 사고자 수습 작업을 한 것은 바로 그를 포함한 민간잠수사 스물다섯명이었다. 이들이 해경에게서 전달받은 도면이나 참고자료, 수색 시 유의사항이나 수색장소 등에 대해 들은 설명 등은 전혀 없었다. 또 해경 측에서는 심해잠수 훈련을 받은 사람들이 없기에, 가이드라인을 잡아주거나 민간잠수사들이 세월호 안에 들어가 시신을 찾아내 끌어안고 나오면 이를 수습하는 일만 했을 뿐이다. 기분나쁜 비유지만 차려놓은 밥상에 숟가락만 얹는 꼴. 나중에 이춘재 경비안전국장은 1차 세월호 청문회에서 '민간잠수사가 수면까지 올라오면 거기서부터 함께 한 것', '역할을 나눈 것'이라며 회피성 변명을 주워섬기면서, 결국 선체에 들어가서 시신을 수습하는 데 있어 해경이 한 것은 없음을 간접적으로 인정했다.
심지어 해경에 의해 무리한 요구를 받기도 했다. 해수부장관이 유가족들한테 잡혀있다느니 하면서, 물의 상황이 좋지 않아 생명이 위험할 수 있는 상황인데도 무작정 물 속에 들어가라는 것이다.

그는 5월 1일 수색 과정에서 물살에 휩쓸려 정신을 잃고 긴급하게 병원에 이송되었는데, 병원에서 한 달간 잠수를 하지 말라고 했지만 응급처치만 받은 후 사흘 만에 현장에 복귀하였다. 목과 등 등에 부상을 입었다. 5월 5일 무렵에도 또 챔버 안에서 쓰러져 병원에 옮겨졌으나 다시 곧 돌아왔다. 잠수를 못한다면 호스라도 잡겠다(물 밖에서 돕는 일)면서.

그러다가 민간잠수사들은 2014년 7월 10일 갑작스럽게 해경으로부터 철수해달라는 일방적인 통보를 받고 사실상 갑자기 쫓겨난다. 그는 반발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고. 그렇게 철수한 이후에도 그는 당시 입었던 신체적 외상 및 극심한 정신적 트라우마에 시달려왔다. 그의 생전 인터뷰에서 이를 엿볼 수 있다.
나는 그냥 현실에 대해서 논리적으로 내가 궁금한 것에 대해서 묻고 싶은 거야. 알고 싶은 거고. 내가 그 현장에 있었으니까. 그것 때문에 잠을 못 자요. 생활이 안돼. 몸이 다쳐서.
내가 왜 그래야 되는데? 내가 왜 그것 때문에 끔찍한 생각도 해야 되고. 내가 왜...내 가족한테 위해를 가할까봐 밤마다 나가가지고 이래야 됐냐고? 또 내가 왜? 잠수사. 그 잘나가는 가오 있는 잠수사가 대리기사가 되어가지고 막 이래야 되냐고? 내가 왜?
내 대면을 하다보니까 내 스스로 나를 보니까 아, 너는 착각 속에서 살고 있었구나. 대한민국이라는 착각 속에서.
이 정상적이지 않은 나라에서 내가 정상적일 수 있나? 내가 일해왔던 상황은, 그 세월호 상황은 정상이 아니었어. 국가권력...지금도 한 게 뭐 있는지 물어보고 싶어 내가. 그 당시 당신들은 뭐 하셨는지? 나는 당신들 뭐 하는 걸 못 봤는데. 뭐 하셨는지?
우리는 수중에서 더듬더듬해서 머리로 그린단 말입니다. 머리에서 그려지는 게...제 머릿속에 자꾸 생각나고 그러는데. 하루 한 번 들어가야 할 현장을 많게는 네 번, 다섯 번 들어간 분들도 있어요. 다른 잠수사들이 그런 이야기를해요. 왜 그렇게 일을 했냐고. 아니 사람이 없는데..그럼 어떻게 해요..
진짜 중요한 것은 살릴 수 있었던 아이들을 살렸으면 우리 같은 사람들이 있을 필요가 없었을 텐데...제대로 구할 수만 있었다면...그런데 그 누구도 구하지는 않고 상황을 보고報告, 보고, 보고(만 하고)...
바지선은 가만히 있고 잠수사들만 나올 때, 비바람 치고 파도치고 그러는데 작은 새들이 날아와요, 작은 새들이. 그 추위에, 강풍에, 비바람에....
작아요 새가. 되게 예뻐요. 그 새소리도 예뻐요.
빗소리에...저들이 울부짖는 게 자기네들 두고 떠나지 말라고 울부짖는 느낌...

동료 잠수사들이(그는 함께 목숨걸고 일한 동료들을 '형제'라고 불렀다.) 세월호에 대한 관심이 남다르다고 회상할 만큼, '유가족들이 자신의 가족들 같고 희생된 아이들이 자신의 아이들 같아서', '좀더 있으면 수온이 올라가서 많이 상하니까, 조금이라도 온전할 때 올려주고 싶어서' 잠수병으로 건강이 상해감을 알면서도 무리하게 잠수와 수색을 했던 그는 결국 후유증으로 본업인 잠수사 일을 그만두고 낮에는 아내의 꽃가게 일을, 밤에는 대리운전을 하며 생계 활동을 이어왔다. 정부로부터 민간잠수사는 피해자로 인정받지 못해 치료비용을 지급받지 못했고, 그로 인해 육체적 경제적인 어려움에 시달리고 있었다.

고인을 기리는 사촌 형 김형주씨의 글에 따르면 김관홍은 후배들의 생활고를 부담하였고 이것이 그의 경제적 부담을 더욱 가중시키는 일이 되었다.

그 와중에도 세월호의 인양이 준비될 무렵, 유가족들이 동거차도[2]에서 머물며 인양 상황을 살펴보며 기록할 때 이들과 같이 기거하며 돕기도 했다. 이때 유가족들과 친해지며 수색과 수습 과정에서 해준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했다.

2015년 12월 20일, 마포구 합정동의 한 카페에서 노컷v 기자를 만나 인터뷰를 하였다. 그 중 일부를 발췌하였다. ()는 문맥상 적절하다고 판단되는 내용으로 작성인이 넣었음을 밝힌다.
전문가분이 이런 말을 하더라구요. 트라우마? 죽음에 대한 각인이다. 죽음에 대해서 느끼고 만지고 냄새 맡고 이런 뭐가 각인이 된거야 …. 그러니까 생존자들도, 내가 구하려고 했던, 못 살린 사람들 눈빛이 살아있을 거라고. 그거에서 오는 죽음에 대한 각인이라고 … 죽음이 이제 너무 쉽게 생각되는 거야 우리한테…. 아 이런 말 하면 또 안되는거야?
모든 건 바뀌었어요. 모든 게 몇 도 몇 도로 바뀐게 아니라 왜 사람들은 할 말을 안하고 다른 짓거리들을 하고 … 딴 말로만 뱅뱅 돌까? 언론은 왜 이런 얘기를 안 하나.
아니 우리가 한 마디로 말하면 바깥에서 막일하는 사람이에요. 물 속에서 막일 하는 사람들이 (생각하기에는) 생각보다 더 많이 배우고, 권력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왜 저것밖에 안될까. 진짜 할 얘기를 하는 사람들이 없네. 처음에 우리가 살려고 얘기를 한 거에요. 그런데 지금 남들은 다 내 주변 지인들은 나한테 그런 얘기를 하지 말래. 다친다고. 잊으래. 아니 잊을 수 있으면 내가 잊었지, 지울 수 있으면 지우고. 아니, 그 시점에 삭제를 시켜버렸으면 좋겠는데 현재까지의 모습을. 약을 먹어도 안 되고, 술을 먹어도 안 되고, 지인들이 떠나요. 나도 말을 할 수가 없으니까 나조차도. (지인들이) 나를 위해서 얘기를 해줘요. 나를 위해서. 그런데 그게 상처가 되는 거야.
우리가 자전거가, 이것도 정혜신 박사님이 하신 얘긴데, 자전거가 왼쪽으로 쓰러져요. 그러면 핸들을 왼쪽으로 꺾으면 안 쓰러지는데 우리는 안 쓰러지려고 반대로 꺾는다고, 그래서 쓰러진다고. 아 내가 여태까지 내가 살려고 하는 행동들이, 나는 살고싶어서 한 행동이, 저는 많이 좋아진 게 맞아요. 점점점 좋아지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야. 이유가 나는 왼쪽으로 쓰러지니까 왼쪽으로 (핸들을) 꺾었던 거야. 마주 대한 거야. 객관화시키려고 하고. 내가 왜이렇게 힘들고 아프고, 가족들한테 상처를 주고 있고. 유가족들한테 왜 내가 아직도 고개를 숙이고, 시선을 피할 수 밖에 없는지를…….
정부를 저는 비판한 게 아녜요. 싸운 게 아니야, 몸부림이고, 이거 아닙니다라고 얘기하고 싶은데. 소리 없이 탄압하는 거 이건 탄압이에요. 내가 왜 탄압을 받아야… 내가 좌파예요? 좌파가 뭔데? 그런 사람들이 좌파가 아니야. 단지 생각이 다른 사람들일 뿐이야. 여기 민주주의잖아요. 생각이 다를 수 있잖아. 들어야지 같이 얘길하고 합의점을 찾아가야 하는데…….

2.1.1. 박근혜정부의 소송

그가 처했던 어려움을 이해하기 위해서 세월호 참사 이후 정부의 소송사건에 대해 이해를 하여야 할 필요가 있다.

위 각주에서 해경이 자기 측 잘못까지 민간잠수사 측에 떠넘겼다고 했는데, 사람이 죽은 사건 같은 중대한 책임에까지도 이런 짓을 했다. 민간잠수사들 중 가장 연장자였고 자연스레 지휘자 역할을 했던 공우영을 5월에 일어난 이광욱 잠수사 사망사건과 관련해 업무상과실치사 혐의로 2014년 8월 26일 고소하였던 것이다. 심지어 소송에서 승리하기 위해 문서를 짜깁기하였다. 7월 초순 갑작스럽게 잠수사들을 쫓아낸 것도 결국은 책임을 떠넘기기 위해서였다.

검찰은 징역 1년을 구형하였다. 다만 이례적으로 검찰은 '국가, 해경이 체계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 잠수 부분도 물적, 인적 능력이 부족했다. 피고인의 법률적, 실질적 책임을 판단하기 어렵다. 이런 부분을 참작해달라'며 선처를 호소했다. 김관홍은 공우영이 재판을 받고 있는 상황에 분노를 표했다. 해경의 소송으로 시신을 292구 수습한 잠수팀을 지휘한 공우영은, 결국 무죄 판결을 받긴 했지만 1년 4개월간 재판을 받아야 했다. 공우영 잠수사는, 그 어떤 현장에서도 볼 수 없을 만큼 똘똘 뭉쳐있던(일원 중 하나였던 황병주 잠수사의 표현이다) 세월호 민감잠수사들의 중심이었으며 팀원들이 매우 믿고 의지하던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기소를 당했을 때 민간잠수사들이 느꼈을 배신감이 어땠을지는....

2015년에는 이런 적도 있다. 5월 30일 광화문 세월호광장의 집회에서 한 발언이다.
저희가 7월 10일날 쫓겨나고 이후에 저희가 해경에게 받은 게 있습니다.(감사장을 들어보이며) 감사장. 감사하대요. 열심히 해줘서.
(감사장을 갈기갈기 찢어버린다. 주변에서 들리는 박수소리.)
이런 거 요구한 적 없어요. 이 감사장을 주고 그들은 저희 선임을 형사고발했어요!
이광욱 잠수사님 돌아가시고 해경이 저희를 고소했습니다. 형사고발. 업무상과실치사라고.

참고로 해경이 내세운 논리가 감독 의무를 게을리했다는 것이었는데, 민간잠수사들은 사실상 자원봉사하러 찾아온 것이었고, 계약서를 쓴 것도 수습 일을 시작하고 나서 몇주는 지난, 한참 후였다. 해경 측에서도 보수를 제시한 적이 없고 잠수사 측에서도 무엇인가를 요구한 적은 없다.(헌데 괴이하게도 당시 청와대 대변인에 의해 '시신 1구당 찾을 때마다 500만원을 받는다'는 터무니없는 가짜뉴스가 퍼지기도 했다.) 공우영 잠수사는 그중 하나일 뿐이었으며 경험과 연륜 때문에 지휘하는 역할을 자연스럽게 맡게 된 것뿐, 민간잠수사 투입에 대한 공식적인 권한 같은 건 없었다. 법원도 이를 인정하여 이 고소는 '갖고 있지 않은 권한을 행사하지 않은 책임을 묻는 것'이나 다름없다며 무죄로 판결한 것이다.

2.2. 진상규명 활동


파일:external/img.seoul.co.kr/SSI_20150917173510.jpg

2015년 9월 15일 국회 안전행정위원회(국민안전처) 국정감사에 증인으로 참가하여 다음과 같이 발언하였다.
저희 법적인 논리 몰라요. 돈을 벌려고 간 현장이 아니었습니다. 돈을 벌려고 간 현장이었으면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하루에 한 번 밖에 들어가면 안 되는 그 수심에서 많게는 네 번, 다섯 번……, 법리 논리 모릅니다. 제발 상식과 통념에서 판단하셔야죠. 법리 논리? 저희가 간 게, 양심적으로 간 게 죄입니다. 그리고 두 번 다시 이런 일이 타인에게 일어나지 않기를 바랍니다. 어떤 재난에도 국민을 부르지 마십시오. 정부가 알아서 하셔야 합니다.이상입니다.

2015년 12월 16일, 세월호 참사로부터 만 1년 8개월만에 이뤄진 4.16세월호 참사 특별조사위원회 1차 청문회에서 참고인 자격으로 참가하여 다음과 같이 발언하였다.
약이 없으면 잠을 못 자고, 화 조절이 안되니까 그러다가 7월달 경에 지금 현재 유가족분들을 만났어요. 만나 가지고 '고맙다'고, '고생했고, 고맙다'고 그 말을 듣는 순간 저 정신과 치료제를 끊었어요. 그 한 마디에. 정신과 치료제라는게 치료가 안 돼요. 약이라는 건 화만 눌러놓는거지…. 그 한 마디가, 그 한 마디가 저에게는….
(중략) 저는 잠수사이기 전에 국민입니다. 국민이기 때문에 달려간 거고, 제 직업이. 제가 가진 기술이 그 현장에서 일을 할 수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간 것일 뿐이지, 국가 국민이기 때문이기 간 거지 애국자나 영웅은 아녜요. 저희가 왜 마지막에, 저희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 당시 11구가 남아있을 당시에 왜 나와야 했는지, 왜 저희가 그런 식으로 쫓겨나야 했는지, 우리는 포기 못했는데 그들은 왜 저희가 나가야만 했는지 저는 그걸 묻고 싶고요. 가족분들한테 저희는 구조 업무를 한 것이 아닙니다. 좀 더 빨리 찾아서 한 구라도 더 찾아드리려고 했을 뿐이고.
고위 공무원들한테 묻겠습니다. 저희는 그 당시 생각이 다 나요. 잊을 수 없고 뼈에 사무치는데, 사회 지도층이신 고위 공무원께서는 왜 모르고 왜 기억이 안 나는지? 저보다 훌륭하신 분들이 자리에 계시는데 저희는 일명 노가다예요. 그런 사람보다 더…………, 하고 싶은 얘기가 천불 같은데…… 가족분들하고 저희 오해하지 마십시오. 저희는 단순한 거에요.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닌 거. 진실은 다를 수 있지만 상황은 정확히 얘기를 해야죠. 욕을 먹더라도 ……. 여기까지 마치겠습니다.

이 자리에는 김관홍 본인 이외에도 동료였던 전광근 잠수사도 출석했는데, 그는 모든 사람을 다 수습하지 못해서 죄송하다는 말을 했다. 이 청문회에서 유가족들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한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와 동시에, 어쩌면 이 두 사람은 이 자리에 참석한 사람들 중에서 마음에서 우러나는 진실된 이야기를 한 유일한 사람들일지도 모를 일이다. 두 사람이 말을 마친 후, 다른 책임자들이 거짓말과 책임회피, 억지스러운 변명만 늘어놓던 차에 때론 분통을 터뜨리고 때론 흐느끼던 유가족들은 그들에게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냈다.

2.3. 20대 총선 선거운동 지원

세월호 참사 때 유가족들을 도왔던 변호사 박주민이 국회의원으로 출마하자 선거운동에 참가하여 운전을 도맡아 하였다. 그가 박주민 출마 지역인 은평구에 거주했던 사람이라 지리와 민심을 잘 아는 편이었으며, 옆에서 끊임없이 박주민에게 잔소리와 조언(예: '허리가 왜 이렇게 굽었냐? 인사할 때는 왜 90도가 안 되냐? 자기를 따라 해 봐라. 안녕하세요? 이게 안 돼요?')을 하며 투닥거리는 모습을 보고 선거운동본부에 참가하였던 사람들은 '톰과 제리'라는 별명으로 불렀다.(...) 둘 다 73년생 동갑내기라 격의없이 서로 잔소리하고 구박(?)하며 지냈다고 한다.

건장하여 풍채가 좋고 인상이 좀 무섭게 생겨서(실제로는 붙임성 있는 사람이지만), 거기다 머리는 짧고, 주머니에 손을 넣고 다니고 무슨 일수가방 같이 생긴 가방에 선글라스처럼 생긴 안경을 쓰고 다니는 바람에 하마터면 박주민이 조폭을 데려왔다는 헛소문이 돌 뻔했다고 한다(...)

이때 그는 간만에 행복한 시간을 보낸 듯한데 워낙 하루종일 운전을 하고 바쁘다보니 피곤해서 무려 매일 늦잠을 자 지각하곤 했다. 잠을 못 자던 사람이! 박주민이 '당신 불면증이라며 왜 이렇게 맨날 지각을 하느냐?'고 묻자 본인도 내가 이렇게 잘 자본 게 처음이라고, 당황스럽다고 얘기했다 한다. 집에 사람을 여럿 데려오는 등, 즐거울 때 하는 행동을 보였다고 아내도 나중에 회상한다.

운전기사인지라 선거운동 기간 내내 조직에 있는 어떤 사람보다 더 가깝게 붙어있었는데, 당선된 박주민 의원은 나중에, 그러니까 그가 사망한 후 장례 전날 추모행사 때 그 많았던 잔소리들에 대해 이야기하며 '잠수사님은 제 당선이 가장 절실하셨던 것, 저의 당선을 통해서 해야 된다고 생각하셨던 일들이 있던 것'이라고, 그런데 자신은 그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면서 후회하며 울었다.

나중에 밝혀진 바로는 박주민이 국회의원 활동을 시작한 뒤 의원실 관계자들이 김관홍을 찾아와 같이 일하자고 제안했는데 정작 본인은 "그러면 내가 선거운동을 도와준 의미가 없다."면서 거절했다고.

사망 전날, 박주민의 지역구이자 본인의 거주지에서 열린 한 세월호 관련 행사에 참석해서 인사한 것이 두 사람의 마지막 만남이 되었다. 박주민이 같이 유가족분들 모시고 저녁식사를 하자고 했는데 그는 선거 때 친해진 지인들과 술자리를 하기로 했다고 떠났고, 그게 마지막 모습이 된 것.

2.4. 사망

2016년 6월 17일 비닐하우스 자택(경기 고양시 용두동 소재)에서 쓰러진 채 발견, 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결국 숨을 거두었다. 경찰은 현장에서 발견된 소주병과 약통, 지인에게 보낸 문자 메시지 등으로 미루어 스스로 생을 마감했을 것이라고 추정했으며 진상 규명에 들어갔다. 동년 동월 19일 은평구 서북시립병원 장례식장에서 고인의 발인식이 치러졌다. 다만 당초 추정 및 일부 언론의 보도와는 달리, 실제로는 급성 심근경색으로 인한 사망이다. 경찰의 부검 당시 위에서 수면제 성분이 검출되었지만 죽음의 원인이 될 만큼은 아니기도 했고.[3]

무리한 구조 활동으로 인하여 지병에 시달리고 있었고 트라우마도 심각한 상태였다.[4] 세월호 사건의 이후 상황과, 잠수사들이 처한 상황이 돌아가는 상태들을 보면서 억울함이 매우 컸고 나중에는 분노를 억제하지를 못했다.[5] 때문에 지인들이 떠나기도 하고 자살 충동을 느낄 정도의 고통에 시달렸다. 혹시 자신의 자녀들에게 폭력을 쓰거나 해코지를 할까봐, 아이들이 자신의 근처에 오지 못하게 하기도 하고(그전에는 자주 몸으로 놀아주곤 했다고. 그러나 아예 건드리지 않게 되는 날이 반복되다보니 점점 멀어져갔다.) 일부러 집에 들어가지 않고 지인들과 자주 술을 마시며 어울리기도 했다. 이게 기우가 아니었던 게, 동료 황병주 잠수사에게 '형 나 죽을 거 같아. 어떡해? 나 우리 애들 다 데리고 갈 뻔했어'라고 울면서 자주 전화를 한 적이 있었다...물론 황 잠수사는 꾸짖었다고 한다. "야 이새끼야. 뒤질라면 너 혼자 뒤져! 왜 죄 없는 새끼들 데리고 가냐? 이 자식아!" ...이랬던 이유는 같은 경험을 했기에 김관홍이 왜 그러는지 다 알고 공감했기 때문. 더욱 슬프게도, 이 말씀을 하셨던 황 잠수사 본인도 자살까지 하러 가신 적이 있었다고 인정하셨다. 진짜 죽으라는 의미가 당연히 아니었다. 그런데 결국 오래 버티지를 못한 것이다.
(울부짖으며)한번도 망가진 적 없는 김관홍이야. 그게 뭐냐면 누구한테도 해코지 한 적 없고. 나 열심히 사람들 사랑하고 살았어. 더불어서. 더불어서 사랑하며 살았는데. 근데 그게 안 되니까 내가 열이 받는 거고, 미쳐버리는데, 내 모습 자체가 이게 뭐냐고?
한창 트라우마가 심할 때는 길에서 아디다스 츄리닝을 입은 고등학생을 보고 주저앉을 정도였는데, 희생학생들이 아디다스 츄리닝을 많이 입고 있었다고. 죽기 전까지 고등학생들을 제대로 쳐다보지 못했다. 희생학생들이 (명예졸업을 시켜주겠다는 당초의 약속과 달리) 제적 처리되었다는 소식[6]을 듣고 지인과 단원고에 찾아갔을 때도 차마 기억교실에 들어가지 못했다고 한다. 지속적인 치료와 관리가 필요한 상태였으나 국가 정부는 치료비 지원을 사망 몇달 전에 끊었고 망가진 몸으로는 잠수사 일을 할 수가 없었기에 대리운전으로 전업, 경제적으로도 매우 어려운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월호 가족들과 함께 활동하며 박주민의원실과 협력하여 세월호 잠수사들을 지원하는 법안을 만들고 있었다. 법안이 완성되어 국회 법제실에 넘어온 날이 2016년 6월 17일이다. 법안 명칭은 '4·16세월호참사 피해구제 및 지원 등을 위한 특별법 일부개정법률안' 약칭 김관홍 법이며, 20대 국회가 끝나는 2020년 5월 20일에 본회의를 통과하게 되었다.

3. 추모

그의 사망 소식이 알려지자 온오프라인에서 추모 물결이 일었다. 아래는 박주민 의원의 추도사.

4. 영향

2016년 팟캐스트 '416의 목소리'에 출연해 자신의 경험을 증언했는데, 해당 프로그램 진행자를 맡은 김탁환 작가와 친해지면서 그에게 따로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김 작가는 이로 인해 세월호 잠수사들의 이야기를 쓴 소설 <거짓말이다>를 집필하게 된다. 주인공의 모델은 당연히 김관홍. 그러나 그는 완성된 소설을 보지 못하고(2016년 8월 출간) 세상을 떠났다. 그 이후 김 작가는 그를 만난 이야기와 소설 집필기를 다룬 논픽션 스핀오프 <그래서 그는 바다로 갔다>를 추가로 출간한다. 이후로도 세월호 이야기를 다룬 소설집 <아름다운 그이는 사람이어라>를 집필한다.

박주민 의원은 '4.16 세월호 참사 피해구제 및 지원등을 위한 특별법 일부 개정안'을 발의하였다. 현행법이 세월호 참사 희생자와 피해자를 '승선자 및 그들의 배우자 및 직계존비속과 형제자매'로 한정해, 자원봉사자 사이에서 광범위하게 진행 중인 2차 피해가 방치된 것을 바로잡자는 취지이다. 해당 법안은 2020년 5월 20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 하였다.

5. 참고 자료


[1] 이들이 철수하고 나서 9월 중순쯤, 이춘재 당시 경비안전국장이 유가족들에게 해준 이야기가 정말 어이가 없는데, '그때 있던 잠수사들이 우리나라에서 특A급이고 지금 있는 잠수사들은 C급 정도 된다'는 것. 유가족들이 '다 쫓아내고 나서 그런 이야기를 이제 와서 하면 어떡하느냐?'고 따지자, 다시 데려오면 된다고 했다고(...) 물론 그런 날은 끝내 오지 않았다. 그보다 더 전에 이들이 현장에 있을 무렵에 있었던 일은 더 기가 막힌다. 자기들 잘못을 민간잠수사가 못해서 그렇다고 뒤집어씌웠다고(...) 그러면 상황을 모르는 유가족은 당연히 교체하라고 난리를 치고 말이다. 거기다 힘내시라고 유가족들이 음식이라도 많이 쏘면 이 작자들이 중간에서 다 슬쩍하고 떼어먹고, 실제로 잠수사들에게 전달되는 건 무슨 오병이어의 기적 하라는 거냐는 소리가 나올 정도의 양이었다고 한다...[2] 세월호 침몰 현장에서 가장 가까이 있는 섬. 고작 1.5km 거리다. 참고로 생존자들이 구조 직후 1차로 옮겨진 곳이 바로 옆에 있는 서거차도이며, 그 다음에야 진도 팽목항으로 갔다.[3] 불면증으로 인해 복용한 것으로 보인다.[4] 세월호 잠수사 중에서는 잠수병으로 인하여 뼈가 썩어들어가 절단하거나, 신장이 망가져 투석을 받기도 한다. 끝까지 남아있던 사람들 중에서 현업으로 복귀한 사례가 드물다.[5] PTSD의 증세 중 하나가 분노다.[6] 결국 거센 반발 끝에 이는 없던 일이 되고, 2019년 미수습자들 수색까지 종료되고 장례를 마친 후 희생학생들의 명예졸업 처리가 이루어진다.[7] 6편의 중단편 에피소드로 이루어진 옴니버스 독립 다큐멘터리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