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항일 빨치산 1세대 출신 북한의 군인, 정치인.2. 생애
1917년 12월 17일에 태어났다. 1932년에 소년선봉대원으로 합류, 1936년 9월에 정식으로 빨치산이 되어 중대장, 중대정치지도원 등을 지냈다. 세기와 더불어에 따르면 소대장으로 일할 때 입대한지 얼마 되지 않은 기관총 부사수가 겁을 먹고 잘 싸우지 못하자 비겁한 놈이라고 마구 욕을 퍼부으면서 목숨이 아깝거든 총 내려놓고 집으로 가라고 구박했는데, 이를 본 김책에게 비판을 받은 일이 있다고 한다. 대단한 명사수로 품팔이꾼으로 위장해 비행장 정찰업무를 수행했다고 한다. 동료 빨치산 리계향과 결혼하였다.해방 후 1946년 1월, 희천군 보안서장으로 부임, 이후 평안북도 경비대장으로 승진했으며 조선인민군 창건 이후 1사단 1연대 참모장에 임명되었다. 1947년 독립여단 참모장으로 이동하였다. 1949년 1월, 제1중앙군관학교 군사부교장으로 임명되었다. 1949년 7월, 조선인민군 사단 참모장에 임명되었다가 10사단장으로 승진했다. 1951년 12월, 강건군관학교 강습소 소장을 거쳐 군단 군사부군단장으로 임명되었다.
전후 1954년 7월, 강건군관학교 교장에 임명, 군단장을 거쳐 1958년 1월 21일, 리권무, 최종학, 최현, 김봉률, 류경수, 김철우, 최용진, 리림, 리방남, 지병학, 김화천, 정병갑, 전우, 김창봉, 한일무, 유성철, 최광, 김창덕, 허봉학, 오진우, 정화준, 박창림, 전문섭과 함께 조선인민군 창건 10주년 국기훈장 1급을 받았다. 1959년 9월, 김일성군사대학 총장에 임명되었다. 1961년 7월, 정권 대표단장으로 쿠바를 다녀왔다.1961년 9월, 4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1962년 9월, 김경석 장의위원을 지냈다. 1962년 10월, 3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 민족보위성 부상에 임명되어, 아마도 최용진의 후임으로 공군사령관을 겸하였다. 1964년 12월, 북베트남에 군사대표단장으로, 1967년 11월 소련에 공군 대표단장으로 다녀왔다. 1967년 11월, 4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재선되었으며 1970년 11월, 5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에 재선되었다. 1967년 3월, 리봉수 장의위원을 지냈다.
1968년에 공군사령관에서 해임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갑자기 북한 보도에서 실종,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및 중앙위원회 위원에서 탈락하였다. 1972년 12월, 5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었다는 남한 기록도 있지만 김대룡과 혼동한 것으로 보인다. 불분명한 시기에 김일성훈장을 받긴 하였다. 남한 자료에 따르면 1972년부터 인민무력부 부부장으로 1985년까지 재임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후 죽을 때 부고조차 나가지 않았으며 1990년 11월 23일에 조용히 사망 이후 애국렬사릉에 항일혁명렬사 직함으로 안장되었다. 죽기 전에 뭔가 사고를 치긴 크게 쳤던 모양.
그래도 김정은 시대에 소개편집물 <우리 사단장>이 제작되는 등 기념되고 있다.
3. 참고문헌
- 김선호, 조선인민군: 북한 무력의 형성과 유일체제의 기원(서울: 한양대학교 출판부, 2020).
- 조선대백과사전.
- (最新)北韓人名辭典(서울: 北韓硏究所, 19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