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인민군 총참모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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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d40000><colcolor=#ffdd0c> 조선인민군 제4대 총참모장 리권무 李權武 | Yi Kwon-mu[1] | |
출생 | 1914년 |
함경북도 | |
사망 | 몰년 미상 |
재임기간 | 제4대 총참모장 |
1957년 9월 ~ 1959년 7월 | |
복무 | 팔로군 → 조선인민군 육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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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북한의 군인 및 정치인.2. 생애
1914년 함경북도에서 태어났다. 소련에서 동방노력자대학을 졸업했다. 1938년 코민테른의 지령을 받고 방호산, 진반수, 림해, 박훈일, 리림, 전우, 장복, 김창덕과 함께 중국 섬서성 옌안시에 파견되어 중국공산당의 영도 하에서 사업했다. 중일전쟁 종결 이후 조선의용군의 북한 입국이 소련에 의해 거절됨에 따라 동북조선의용군으로 개편되기로 결정되었다. 따라 동만주에서 편성된 박일우 휘하의 제5지대에서 부지대장을 맡았는 등 등 초기 북한에서 가장 군사경험이 많은 인물 중 하나였다. 1946년 초에 귀국 후 1946년 7월, 평안남도 보안부 부부장을 맡았다.조선인민군 창설 이후 개천에 주둔한 김웅의 1사단 산하 1연대장을 맡았다. 하지만 1947년 말에 소련 고문단과 싸우다가 해임되고 일개 병사로 강등당하는 수모를 겪었다가 다시 복직되었다. 사단 정치위원 최태환의 증언에 따르면, 소련고문의 월권에 욱해서 대판 싸웠던 것이 원인이라고 한다. 1948년 3월, 조선로동당 2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48년 10월 15일, 평안남도 대동군 유사리에서 제4독립혼성여단이 창설되면서 여단장을 맡았다. 1950년 4월, 국공내전에서 승리한 조선인 부대들이 조선인민군에 증원됨에 따라 인민해방군 독립여단을 받아들여 18연대로 개편하고 진남포시에서 4사단을 편제하게 되었으며, 중국에서 활동한 경험이 있는 리권무가 4사단장이 되어 이들을 지휘하였다.
1950년 6월 22일, 총참모부가 하달한 전투명령 1호에 따라 4사단은 진남포에서 기차를 타고 개성 부근에 집결했으며, 6월 25일 7사단 1연대의 방어를 격파하고 동두천으로 진격했다. 전차를 앞세운 맹공 끝에 동두천이 점령되었고 이후 리권무는 창동과 미아리를 돌파, 서울을 점령하였다. 이후 7월 1일, 영등포-수원 방향으로 진격했으며 류경수의 105전차사단과 함께 수원을 공격했다. 7월 3일, 4사단은 한강 도하에 성공했고 7월 4일에 수원을 점령, 오산-평택으로 진격하여 7월 8일에는 천안에 이르렀고, 1번 국도를 따라 쾌속진격했다. 이후 리영호의 3사단과 함께 금강 방어선을 돌파하고 논산을 점령했고 안의, 함양, 거창을 점령하여 낙동강 방어선을 돌파하여 대구를 함락시키라는 김일성과 1군단장 김웅의 지시를 받게 된다. 7월 23일, 금산을 출발한 리권무는 7월 26일 안의, 7월 29일 거창을 점령하고 대구로 진출하려 했으나 국군 17연대의 분전으로 실패한다. 그러나 8월초에 창녕 서쪽으로 낙동강을 도하해 다시 한번 대구를 공격하였고, 이번엔 미 24사단과 다시 격전을 벌였다. 4사단은 근위 서울 4사단으로 개칭되었으며, 1950년 8월 21일, 공화국영웅 칭호를 받았다.
이후 인천 상륙 작전으로 북한군 전열이 붕괴되자 유일하게 붕괴되지 않았으며 1950년 10월, 김웅을 대신하여 1군단장에 임명되어 방어전을 수행했다. 방호산과 더불어 6.25 전쟁 중 가장 잘 싸운 장군 중 한명이었기 때문에 공화국영웅 칭호를 받았으며, 로동신문은 인민군 창건 4주년을 기념하여 리권무의 위훈을 찬양하는 기사를 게재하였다. 1951년 2월, 김책 장의위원을 지냈다. 1953년 7월 29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6.25 전쟁 중의 공을 인정받아 자유독립훈장 제1급을 받았다. 전후 1953년 8월 5~9일에 열린 제6차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김일성, 박정애, 박창옥, 김일, 박영빈, 리기석, 김황일, 정일룡, 김광협, 한설야, 강문석, 황태성, 김열, 고봉기, 김승화, 박금철과 함께 당규약개정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1956년 3월, 3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에 재선되었다. 이후 2집단군 사령관으로 승진, 1957년 8월, 2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었으며 전임 총참모장 김광협이 민족보위성으로 이동함에 따라 후임 조선인민군 총참모장에 임명되었으나 어디까지나 임시직에 불과했다. 8월 종파사건으로 놀란 김일성은 1958~1959년 사이에 군부에 대대적인 숙청을 감행했다. 리권무는 1958년 2월호 근로자에 김일성의 눈치를 봐서 소련군의 조선인민군에 끼친 영향을 폄하하는 논문을 게재하였고 1958년 1월 21일, 최종학, 최현, 김봉률, 류경수, 김철우, 최용진, 리림, 리방남, 지병학, 김화천, 정병갑, 전우, 김창봉, 김대홍, 한일무, 유성철, 최광, 김창덕, 허봉학, 오진우, 정화준, 박창림, 전문섭과 함께 조선인민군 창건 10주년 국기훈장 1급을 수여받고 1958년 11월, 류경수 장의위원을 지내는 등 괜찮을 것 같더니 결국 1959년 6월에 김창봉에게 총참모장 자리를 빼앗기면서 해임되었고 실종되었다.
사단 정치위원을 했던 강수봉의 증언에 따르면 1차 당대표자회에서 중점토론 대상이 되어 토론 이후 얼마되지 않아 종파두목의 하나로 지목되어 체포되어 침묵으로 일관하다가 2집단군 23해안포병여단장이었던 동생 리재운과 함께 무장폭동 사주 배후로 지목되어 처형당했다고 한다.
3. 참고문헌
- 김광운, 북한 정치사 연구 1: 건당, 건국, 건군의 역사(서울: 선인, 2003).
- 김선호, 조선인민군: 북한 무력의 형성과 유일체제의 기원(서울: 한양대학교 출판부, 2020)
- 서동만, 북조선사회주의체제성립사 1945~1961(서울: 도서출판선인, 2005).
- 안문석, 무정 평전: 비운의 혀경가 무정의 삶 그리고 생각(서율: 일조각, 2019)
- 여정, 붉게 물든 대동강: 前 인민군 사단정치위원의 수기(서울: 동아일보사, 1991)
- 6.25 전쟁사 3권: 한강선 방어와 초기 지연작전(서울: 국방부군사편찬연구소, 2006)
- 6.25 전쟁사 4권: 금강-소백산맥선 지연작전(서울: 국방부군사편찬연구소, 2008)
[1] 혹은 Ri Gwon-m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