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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민군 육군 집단군사령관 류경수 柳京洙 | Ryu Kyong Su | |
출생 | 1915년 |
함경남도 신흥군 | |
사망 | 1958년 (향년 43세) |
국적 | [[일본 제국| ]][[틀:국기| ]][[틀:국기| ]]1915~1945 [[소련| ]][[틀:국기| ]][[틀:국기| ]]1945~1946 북조선인민위원회1946~1948 [[북한| ]][[틀:국기| ]][[틀:국기| ]]1948~1958 |
계급 | 상장 |
전직 | 조선인민군 제9 땅크려단장 조선인민군 근위 서울 제105 땅크사단장 조선인민군 제3 군단장 |
정당 | |
주요서훈 | 공화국영웅 국기훈장 제1급 국기훈장 제2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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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북한의 군인. 본명은 류삼손(柳三孫)이다.2. 생애
1915년 9월 9일, 함경남도 신흥군에서 태어났다. 태어난 가정은 빈곤한 농사꾼 집안이였다고 알려져 있으며, 그외 유년기 시절에 대해서 알려진 게 별로 없다. 아내 황순희의 수기에 따르면 어려서 머슴으로 고생해서 힘이 장사였고 성격이 매우 시원시원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김일성과 함께 항일 빨치산 활동을 시작하며, 김일성의 측근 중 한 명으로 거듭난다. 아명은 류삼손으로, 해방 시점까지만 해도 류삼손이란 이름을 많이 썼다. 해방 직전에 김정숙의 주선으로 황순희와 결혼하였다. 류경수가 처음에 결혼은 조국이 해방된 후에 하겠다고 하자 김일성이 혁명은 조국 광복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동무가 혁명을 하다 쓰러지면 동무의 아들들이 계속 혁명을 해야하므로 혁명을 위해 장가를 가라고 독촉하여 결혼하게 되었다고 한다.평소 탱크에 관심이 많았다고 하며, 소련군과 교류를 통해 탱크에 대한 지식을 얻었다고 한다. 또한 조선인민군의 창설자 중 한명으로 알려져 있으며, 6.25 전쟁 때 남침하여 서울을 가장 먼저 점령하여 북한에서는 영웅 대접을 받고 있다. 자신의 이름을 딴 기갑 사단인 근위 서울 류경수 제105 땅크사단이 존재할 정도. 1950년 9월 2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공화국영웅 칭호를 받았다.
한국전쟁 이후에도 군단장, 집단군사령관을 맡는 등 승승장구하였으며 1956년 3월, 조선로동당 3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58년 1월 21일, 리권무, 최종학, 최현, 김봉률, 김철우, 최용진, 리림, 리방남, 지병학, 김화천, 정병갑, 전우, 김창봉, 김대홍, 한일무, 유성철, 최광, 김창덕, 허봉학, 오진우, 정화준, 박창림, 전문섭과 함께 조선인민군 창건 10주년 국기훈장 1급을 수여받았다.
하지만 1958년 11월 19일에 급병(알려지기론 뇌일혈)으로 사망한다. 당중앙위원회와 내각은 부고를 발표, "위대한 쏘베트 군대에 의하여 우리 조국이 해방된 후 동지는 새 조국 건설과 인민 무력의 건설 및 그의 강화를 위하여 자기의 모든 정력을 다 바쳐 투쟁하였다. 동지는 영용한 군사 활동가로서 미제를 괴수로 하는 16개국 제국주의 무력 침공자들을 반대하는 조선인민의 정의의 조국해방전쟁에서 항상 전투의 승리를 빛나게 보장하였으며 특출한 공훈을 세웠다. 전후 조선 정전의 성과를 공고히 하고 우리 인민의 사회주의 건설을 굳건히 보위하며 인민군대를 간부군대로 강화발전시킴에 있어서도 동지는 거대한 업적을 남겨 놓았다. (...) 동지는 전 생애를 통하여 당과 혁명의 리익에 무한히 충실하여 계급적 원쑤들과 비타협적으로 투쟁하는 공산주의자로서의 고결한 풍모와 모범을 보여주었다. 우리 당과 인민의 충직하고 용감한 아들인 유경수 동지의 서거는 당과 정부와 우리 인민에게 있어서 커다란 손실이며 슬픔이다."라고 아주 좋게 말해주었다.
1961년에 부하의 오인사격으로 살해당했다는 일설도 있지만 적어도 날짜에 대해서는 북한 뉴스를 접할 기회가 극히 어렵던 당시 남한 사정상 부고 자체를 접하지 못하던 상황에서[1] 흔히 나오던 전혀 신빙성이 없는 음모론에 불과하다. 더군다나 산 사람을 쥐도 새도 모르게 치울 순 있어도 산 사람을 죽었다고 발표하고 계속 일을 맡기는 것은 북한에서 전혀 할 이유가 없는 해괴한 짓이다. 다만 부하의 손에 죽었다는 얘기 자체는 유성철, 장학봉 등 망명한 고려인 간부들이 기억하는 내용이다. 특히 장학봉의 주장에 따르면 류경수의 장례식장에서 류경수가 오발로 죽었다고 들었으며 1년 후에는 문제의 부관이 사실은 반당종파분자임이 밝혀져서 처형당했다고 발표했다고 한다. 그리고 류경수의 딸 류춘희는 김경희의 애인관계를 잘 알고 있어서 숙청당했다고 주장했다. 탈북자의 주장에 의하면, 사냥을 나갔다가 부관이 주는 총을 받다가 총알이 잘못 발사되어서 사망했다고 한다.[2]그 이후로부터 북한에서 고위인사에게 총을 줄때 메뉴얼이 바뀌었다고 한다. 북한군 군사교육시간에 교관들이 총기관련해서 교육을 할 때 예를 들때 꼭 등장하는 인물이다.
사후 북한에서는 그가 6.25 전쟁에서 활약하였다는 것과 김일성의 충직한 심복이였다는 점을 들어 선군정치의 상징적인 인물로 활용하고 있으며, 대성산혁명렬사릉에 위치한 그의 무덤에 김씨 일가가 자주 방문하고 조화를 보내고 있다. 그리고 아내인 황순희가 2020년 1월에 사망 당시 장의위원회가 구성되고 최룡해가 장의위원장을 맡았으며 성대히 장례식이 치러진 뒤 류경수랑 같이 대성산혁명렬사릉에 합장됐다.
3. 장의위원회 구성
4. 여담
6.25 전쟁 당시 서울대병원 학살사건을 주도 내지는 방관했다는 혐의가 있다.아내 황순희는 조선혁명박물관 관장직을 역임했고, 김정일과 김경희를 돌보는 등 김일성 일가와 줄곧 각별한 관계를 유지했다. 만년에도 김정은이 직접 방문할 정도로 대우를 잘 받았다. 이후 2020년 1월 17일, 100세를 일기로 급성폐렴으로 사망했다. 이한영의 증언에 따르면 장남 류영근은 1976년에 음주운전하다가 식물인간이 되었다고 한다. 그외에 탈북자 김용의 증언에 따르면 또 다른 아들인 류홍근은 아편중독에 빠져서 18호 수용소에 끌려갔으니 성분 덕분인지 본보기로 몇년만 굴리다가 다시 석방되는 혁명화 과정으로 끝났다고 한다.
류경희는 김정은 및 김여정의 집사나 다름없는 김창선의 첫 아내이다.
북한에서도 류경수가 아니라 유경수라고 적었고 그의 부고도 유경수라고 떴으나, 이후 류경수로 고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