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20 00:41:09

이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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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방송공사 국제부 PD
이한영[1]
국에서 원히 살라는 뜻이다.]
李韓永 | Lee Han-young
파일:Lee Han-young.jpg
출생 1960년 4월 2일[2]
평양시 중구역 대동문동[3]
사망 1997년 2월 25일 (향년 36세)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야탑동 분당차병원
묘소 경기도 광주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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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78787> 본관 전주 이씨
종교 개신교 (장로회)[4]
국적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대한민국
학력 대동국민학교 (졸업)
만경대혁명학원 (중퇴)
모스크바 종합대학 예비학부 (수료)
모스크바 외국어대학 (어문학부 / 중퇴)
스위스 제네바 어학연수
한양대학교 (연극영화학 / 학사)
경력 KBS 국제부 러시아어 담당 PD
(1987년 12월 - 1990년 4월)
가족
리태순
성혜랑 (1936년 - )
여동생 리남옥
이모 성혜림 (1937년 - 2002년)
이모부 김정일 (1942년 - 2011년), 이평[5]
외삼촌 성일기
이종사촌 김정남
당조카 김한솔
아내 김종은(1969년생)
이예인(1990년 2월 21일생) }}}}}}}}}
1. 개요2. 가계도3. 생애
3.1. 유년 시절3.2. 로열 패밀리3.3. 소련 유학 시절3.4. 스위스 유학 시절3.5. 귀순 후3.6. 성형수술3.7. KBS 취업3.8. 결혼3.9. KBS 퇴사 후 사업3.10. 구속3.11. 석방3.12. 신변 노출3.13. 피살3.14. 피살 이후
4.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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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북한 제2대 최고지도자 김정일조카이자 최측근이었던 북한이탈주민.[6] 황장엽과 더불어 북한 역대 최고위급 귀순자이자 성혜랑의 아들이다.

소련 유학 중이던 1982년 9월 28일, 만 22살에 스위스 제네바에서 우연한 기회를 통해 대한민국으로 망명했다.[7]

1997년 2월 15일 대한민국 경기도 성남시에서 북한 간첩에게 총격을 당하여 열흘 후 파란만장한 인생을 마감하였다.

2. 가계도

  • 외할아버지 성유경(1905 ~ 1982) / 외할머니 김원주(1907 ~ 1994)
    • 외삼촌 성일기 (1933년생)
    • 어머니 성혜랑 (1935년생) / 아버지 리태순 (1928 ~ 1968)
      • 리일남(이한영) (1960 ~ 1997) / 妻 김종은 (1969년생)
        • 딸 이예인 (1990년생)
      • 리남옥 (1966년생)
    • 이모 성혜림 (1937 ~ 2002) / 김정일 (1941 ~ 2011)

3. 생애

3.1. 유년 시절

김정일은 성혜림의 어머니 김원주를 포함한 모든 가족들에게 깍듯이 대우해줬다고 한다. 한편, 이한영의 이모인 성혜림은 김정일과 정상적인 결혼이 아닌 불륜이었기 때문에 북한 사회에서 김정남의 존재는 비밀에 부쳐졌다. 이런 인정받지 못 한 관계에 김정일의 성혜림에 대한 애정까지 식어버리자 성혜림은 아들을 빼앗기고 쫓겨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과 신경성 질환으로 건강이 급속히 악화돼 버리고 모스크바와 스위스를 전전한다. 이때 자신의 어머니인 성혜랑과 이모 성혜림 등과 같이 생활하였다.

이한영의 부친 이태순은 1928년 함경남도 북청출신으로 김일성종합대학 재학중 한국전이 발발하자 군에 입대하여 전쟁에 참전하였고, 전쟁이 끝난 이듬해인 1954년에는 북한당국이 청년 장교들 중 총명한 사람들을 뽑아서 유학을 보냈는데 이때 연형묵 전 정무원총리, 허담 전 외교부장, 김영남 외교부장, 김석기 교육위원회 위원장, 김환 기계공업상 등과 함께 모스크바에서 공부한 유학생 1세대로 모스크바 종합대학에서 역학을 전공한 엘리트다. 귀국 후 핵무기 연구기관인 평양 근교에 위치한 평성과학원 물리수학연구소에서 근무하던 중 같은 연구원인 1959년 평양으로 귀국하여 그해 성혜랑과 만나 결혼했다. 이태순은 1965년 함흥에 있는 국방과학원 핵물리연구실 연구원 겸 국방대학 물리수학 교수로 소좌(소령)계급을 달고 부임하였으며, 그는 북한 핵개발의 대부로 불리는 이승기박사의 수 제자로 핵무기개발에 깊숙이 관여한 인물이다.

이씨의 모친 성혜랑은 서울 종로구 출신으로 서울사대부속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이화여고 1학년 때 부친을 따라 월북하였고, 1954년 김일성종합대학 물리수학부에 입학하여 졸업했다. 1965년 남편 이태순이 직장을 옮김에 따라 성씨도 같은 과학원내에 있는 과학원출판사의 '물리수학' 편집부 기자로 자리를 옮겼다.

이씨의 이모인 성혜림도 서울에서 서울사대부속 국민학교를 거쳐 풍문여중을 다니다 월북했다. 1955년 평양연극영화대학에 입학했으며, 1960년 대학을 졸업하기 전 59년 이미 <분계선 마을에서> 라는 영화의 주인공으로 데뷔한다. <백일홍>, <온정령>, <내가 찾은 길>, <인민교원> 등 영화는 큰 히트를 쳤으며, 김정일의 외압에 의해 1968년 <한 자위단원의 운명> 이란 영화를 끝으로 영화계를 떠나게 된다.

3.2. 로열 패밀리

이한영의 북한 최고 로열패밀리로써의 생활은 72년 9월 만경대혁명학원 입학부터 82년 9월 스위스 제네바에서 어학연수중 한국으로 망명할때까지 정확히 총 10년이다.

이모 성혜림이 이평의 동생인 이강의 친구 김정일에게 눈에 띈 후 절대권력으로 강제 이혼당한 후 두 사람은 67년경부터 만나기 시작하고, 69년경부터는 서로 동거하기 시작한 이후로 이한영의 인생은 그때부터 눈에 띄게 변화하게된다.

학교는 남한의 초등학교에 해당되는 인민학교 또한 대동문 인민학교를 다녔다. 대동문 인민학교는 김성주(김일성의 본명) 소학교라는 또다른 명칭이 붙을 정도로 평양에서는 유명한 학교이다.

그는 김정일의 처조카로써 어린 시절부터 북한 김씨 일가 및 최고 로열 패밀리들이 이용하는 북한 최고의 의료기관인 봉화진료소를 드나드는 특권을 누렸다. 김정남도 이 봉화진료소에서 태어났다. 그 곳에는 김정남과 이한영의 가족들을 위한 입원실이 따로 있었고, 그들이 몸이 건강할 때는 아무도 오는 사람이 없으니 1년 내내 비워두었다고 회고했다. 일반 인민들은 해당 거주 구역의 구역 병원을 이용할 수 있었고, 사단장 정도는 되어야 11호 병원 특별과 또는 인민무력부산하 2진료소를 이용할 수 있었다. 봉화진료소는 군 장성 중에서도 인민무력부 군단장 급 이상은 되어야 사용할 수 있는 곳이었으니 이한영의 권력이 막강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이한영 본인의 회고에 의하면, 한때 김정일의 후계자로 거론된 장성택 또한 자신보다 14살 어린 이한영에게 '일남아' 라고 부르지 않고, '일남 동무' 라고 했다고 한다. 6살 더 많은 김일성의 자녀 김평일에게도 '수령님 아들' 이 아닌, 그냥 평일이라고 했다. 북한에서 그에게 반말을 할 수 있었던 사람은 김정일을 포함한 아예 자기 가족들밖에 없었고, 이로 인해 남한 생활 초기에는 연장자들에게 경어를 쓰는 것이 힘들었다고 한다.

3.3. 소련 유학 시절

만경대혁명학원 졸업을 1년 반 앞두고 기숙사 생활에 싫증이 난 이한영은 이모 성혜림의 도움으로 1976년 5월 17일 북한을 떠나 모스크바 1기 유학생으로 모스크바 서남쪽에 위치한 레닌대로 바빌로바 85가(Vavilova st.85)에 위치해있는 북한이 소유한 고급 아파트 3층에 머물면서 부유한 유학 생활을 시작했다. 이 곳에서 이한영은 연애도 하고 한국 식당에 가면서 자본주의 문화를 조금씩 접했다.

그가 한국행을 택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다름 아닌 그의 이종사촌 김정남의 교육 문제에 대한 원인이 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정남의 교육 문제로 고민한 김정일은 이철의 소개로 대지 2천5백평에 건평이 약 5백평 가량의 제네바 국제학교 교외 레만 호수 옆 고급 단독주택가의 빌라를 2백만 달러에 사서 1980년 가을 김정남을 이모 성혜랑, 외할머니 김원주, 그리고 같이 국제학교에 입학할 사촌누나 이남옥, 보모 2명과 함께 그곳으로 보냈다. 관저 운전수 박태준도 동행시켜 벤츠 450과 도요타 차를 미리 사놓았다. 이씨도 이들과 함께 먼저 평양에서 모스크바로 경유했다. 당시 유학중이었던 이씨는 모스크바에 남았고, 그 외 김정남 일행 전부 모스크바에서 제네바로 떠났다. 이씨 왈, 처음 제네바로 갈 때 20만 달러를 김정일이 주었고, 그 후로는 한달 평균 5만 달러씩 경비를 쓰기로 허락받았다고 한다.

그 후, 뉴질랜드 기자 출신의 애나 파이필드가 이씨의 여동생 이남옥이 살고 있는 프랑스에서 비공개로 직접 서로 만나 2019년에 '마지막 계승자' 라는 책을 출간했다. 이 책에서는 김정남을 당시 스위스 주재 북한대사 리수용의 아들로 둔갑시켜 'Ri Han' 이라는 가명과 함께 'Henry' 라는 영어이름을 쓰게했으며, 리수용은 김정남을 5살 많은 김정남의 이종사촌누나 이남옥과 같은 반에서 공부시켰다고 한다. 이남옥 또한 이때 'Ri Ma Hy' 라는 가명과 'Marie' 라는 영어이름을 사용했으며, 그로부터 몇년후, 김정남은 모스크바로 돌아와 고등학교에 다닐때는 성을 'Ri' 에서 'Lee' 로 바꿔 사용했고, 수업을 자주 빼먹고 벤츠를 몰고 커피숍에 자주 들렀다" 며 작가는 전했다.

제네바 국제학교 입학식 날 외국에서 온 학생들은 자기 나라 국기를 들고 들어왔다. 그러나 김정남만 깃발을 들지 않았다. 이때 희한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 입학식에 우연히 참석한 스위스 주재 한국대사 노신영씨(전 총리·현 롯데재단 이사장)가 다가가 어느 나라에서 왔냐고 물었다. 김정남은 "피양(평양)서 왔시요" 라고 대답했다. 노신영과 김정남을 따라온 수행원도 놀랐으며 노신영은 정남이의 머리를 쓰다듬고 돌아섰다. 그후 노대사는 이씨가 귀순했을 때 안기부장으로 있었다. 이씨는 귀순후 노씨에게 이 얘기를 해주었더니 노씨는 기억난다며 당시를 회상했다고한다.

그 이후로 집 부근에서 남조선 자동차가 눈에 띄기 시작했고, 매일 김규채와 경호원들이 집 주변을 보호하기 시작했다. 최첨단 전자 방범장치가 빌라 주변에 있긴 했지만 그 부근에 남조선 대사관 사람이 살 수도 있었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이 일로 불안해진 성혜림은 김정남의 새로운 숙소를 1백50만 달러에 새로 구입했다. 제네바 교외 클로 벨몽의 아파트 4층으로 옮긴것이다.(이 숙소는 96년 성혜랑이 망명하기위해 잠시 머물다 제네바를 탈출할때까지도 소유했다) 그러고도 안심할 수 없어서 1982년 봄 김정남을 모스크바로 불렀으며, 김정일은 "일남이(이한영)는 스위스 제네바에, 그리고 정남이는 모스크바의 프랑스대사관 학교를 다녀라" 고 명령해 1982년 스위스로 거처를 옮겼다. 김정남이 스위스에 온지 2년도 채 되지 않았을 때였다.

모스크바의 최준덕이 프랑스대사관 부설 학교의 입학 수속을 시작했으며 평양에서 여름을 보내고 가을 학기가 시작되자 이남옥과 김정남은 프랑스대사관 학교에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1982년 9월 20일 이한영은 이철, 식모와 함께 스위스 제네바 클로 벨몽의 아파트에 여장을 풀었다. 이철은 이한영을 어학원에 등록시킨 뒤 개인 교수를 초빙해 영어와 불어를 배우게 했다. 이한영은 한국의 동아출판사 에센스 영한사전을 가지고 다니며 공부했다.

3.4. 스위스 유학 시절

그는 모스크바 유학시절부터 전자오락 게임에 푹 빠져서 미국에 가고 싶어했었다. 경호원들에게 얘기해봐야 들어주지도 않을것 같고 학교 친구들에게 "어떻게 했으면 좋겠냐?" 고 물으니 친구들이 "남한대사관에 얘기하면 미국에 갈 수 있도록 도와주지 않겠느냐?" 고 답했다.

스위스로 온 지 8일만인 1982년 9월 28일 오전, 이한영은 학원을 가기 위해 어머니 성혜랑의 배웅을 받고 숙소의 엘리베이터에서 나와 오후 1시 5분까지 오겠다며 어머니와 점심 약속까지하고 서로 헤어졌다. 당시 스웨터에 운동화를 착용하고 있었던 이한영은 호주머니에 동전 몇 개가 전부였다. 그러나, 그저 순수하게도 미국이 가고싶었고, 영어가 유창하지않아 말이 제대로 통하지않는 미국대사관 대신 대담하게도 직접 제네바의 대한민국 대표부로 전화를 걸어 "나는 북한 외교관이다. 북한 외교관 여권과 공무원 여권 등 3개나 가지고 있다. 그저 미국 여행을 하고 싶은데 방법이 없겠느냐" 라고 물었다고 한다.

잠시 후 한국 대사관 직원이 "북한 여권으로 미국에 가려면 일단 만나서 이야기하는 것이 좋겠다" 라며 있는 곳을 물었고 대사관 일행의 권유로 제네바 국제대학교 정문앞에서 서로 만나 상의 끝에 프랑스와 벨기에를 넘어, 독일 프랑크푸르트를 거쳐 9월 30일 오후 5시 10분 필리핀 마닐라에 도착한 뒤 대만을 경유해 10월 1일 오후 4시 30분 대한항공 KE616편으로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이로써 자신의 외가 쪽 고향인 남한에 첫발을 내딛게 된것이다.

이것은 정부 문건에서 이른바 '몽블랑' 이라고 보고 된 사안으로, 한국에서 숨막힐 듯한 물밑 작업에 의해 성사된 망명으로 알려졌다. 2013년 3월 31일 이씨의 망명 문건이 드디어 세간에 공개되어 화제가 되었다. 외교부는 '외교문서 공개에 관한 규칙' 에 따라 만 30년 6개월이 지난 외교문건 중 심사를 거쳐 공개가 결정된 총 1490권, 22만여쪽의 외교문서를 이날 공개했다.

일명 '김영철 귀순 대책건의' 라는 문서에는 우리 정부가 당시 4가지 귀순 시나리오를 두고 저울질했다는 내용도 있었다.

3.5. 귀순 후

국가안전기획부의 조사를 받으면서 그는 김일성이 거주하는 금수산 의사당(주석궁)의 구조와 조직 관계부터, 한국에 알려지지 않았던 김일성-김정일의 생활상 및 권력구조 등 초특급 핵심 정보를 진술했다. 조사가 끝날 무렵 '자유 대한에서 영원히 살라' 는 뜻으로 '한영(韓永)' 이란 새 이름을 받았다. 주민등록번호 또한 그의 실제 생년월일 600402가 아닌, 태어난 해를 1살 뒤로 늦추어 1961년으로 하고, 스스로 한국행을 택한 9월 28일을 엮어서 610928 이라는 의미있는 숫자가 주어졌다.

1982년 10월 어느 날, 이한영은 반포에 있는 40평 남짓의 안전가옥에 안내를 받아 들어섰다. 이한영은 북한에서 살 때와 달리 천장이 낮은 아파트에 들어와 답답함에 현기증을 느꼈다고 회고했다. 안내를 받은 이틀 후, 그는 성북동에 있는 천장이 높은 단독 주택 안전가옥으로 옮겨져 조사를 받고 정착 준비를 진행했다.

이후 남산에 있는 천장이 낮은 지하실에서 조사를 받았다. 조사가 끝나고 천장 높고 어리어리한 룸살롱에서 여자와 함께 술도 마셨다. 자본주의 정착교육이라는 명분이었는데 남의 혼을 빼려 작심한 듯 여겨졌다. 그리고 천장 낮은 중국 음식점에서 짜장면도 먹었고 높이를 재기보다 화려함에 먼저 압도당하는 백화점에도 가봤다. 해당 문단을 읽으면 알 수 있듯이, 계속해서 천장을 언급하는 것으로 보아 처음 들어선 안전가옥의 낮은 천장에 충격을 크게 받은 것으로 보인다.

1983년 서울특별시 강동구 상일동의 28평짜리 고덕주공아파트 614동 301호에 입주할 예정이었으나 입주가 늦어져 반 년간 서초구 잠원동의 18평 한신아파트를 2천만 원에 전세로 들여 거주하였다.

안기부로부터 받은 특별(정착)보상금 1억여 원 중 전세 값으로 2천만 원을, 나머지 8천만 원은 정기예금에 넣어 두고 이자로 나오는 70만 원으로 생활했다. 당시 대학 등록금이 50만 원 가량이었던 물가로 보면 한 달에 70만 원은 결코 적은 돈이 아니었으나 북한에서 귀공자처럼 살던 그에게는 턱없이 부족한 용돈이었다고 한다. 이 중 전라도 할머니 파출부 몫으로 15만 원, 식비로 15만 원, 관리비로 10만 원이 나가고 나머지 30만 원이 그의 용돈이었다.

1984년 한양대 연극영화과에 입학한 그는 안기부의 권유로 초등학교 시절 핀란드로 이민간 교포로 신분을 위장하였고, 그리고 집을 담보로 잡고 받았던 당시로써는 꽤 큰 돈인 융자 3백만 원을 대학 친구들과 술 마시는데 다 써버려 안기부에게 혼쭐이 났다고 자신의 저서에 밝히기도 했다. 이한영은 공부보다는 술 마시고 노는 걸 좋아했다. 그러자니 1억 원의 정착금 이자로만 생활하긴 너무 빠듯했다. 결국 그는 정기예금 원금을 건드렸고, 돈은 금방 동났다. 당시 그는 "오로지 돈을 쓸 때만 살아있다는 것을 느꼈다" 고 갓 20대 초반의 나이에 북한에서 홀로 한국에 도착한 극도의 외로움과 소외감을 표현했다.

한편, 안기부 조사에서 초특급 정보를 털어놓았다. 김일성이 거처하는 금수산 의사당(일명 주석궁)과 김일성 등 요인을 경호하는 호위사령부의 구조와 조직에 대해 털어놓았다. 특히 호위사령부에 대한 진술에서 1호위부가 김일성과 주석궁을, 2호위부는 김정일과 중앙당 집무실을 경호한다는 것과, 김일성·김정일이 행차할 때 근접 경호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상세히 진술했다.

"김일성 부자가 먹는 쌀은 문덕에서만 생산되고, 그들이 마시는 맥주는 용성맥주 공장의 전용 라인에서 생산된다", "김일성이 피우는 담배는 첨성대이고, 김정일은 백두산을 피우다 80년부터 외제인 로스만으로 바꾸었다", "한국 경호실이 대통령을 코드 원이라 하듯 북한 호위사령부는 김일성을 1호 동지라고 한다" 등 시시콜콜한 것까지 털어놓았다.

"김정일이 생활하는 15호 관저에서 김정일 집무실까지는 지하도가 연결돼 있다. 관저에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로 백m쯤 내려가면 집무실과 통하는 지하도가 있는데, 너비는 4∼5m고 높이는 3m이며 걸어서 6분 정도 걸린다" 는 등 여간해서 알기 힘든 정보도 제공했다. 문세광이 육영수 여사를 저격한 다음해(75년) 일본의 야쿠자 조직이 조총련을 통해 "수백만 달러를 주면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해주겠다" 고 제의해 이를 검토했으나 최종 단계에서 취소되었다는 사실도 알려 주었다.

한편 김정일은 김일성 탄생 60돌인 72년부터 측근자들과 정례화된 파티를 시작했으며, 그 전부터도 맘에 맞는 측근들과 자주 어울렸다고한다. 김정일이 마시는 술에 대해서도 "정례화된 파티에서는 마오타이 대신 양주로 바꿨으나 그 이전에는 파티에서 중국산 마오타이를 마셨고, 주량도 대단하여 마오타이를 한 병 마시고도 백두산에 올라갔다" 고 이씨는 밝혔다.

"김정일은 성혜림과 사이가 벌어진 뒤 집무실의 타자수인 김영숙과 결혼해 딸 설송을 낳았고 다시 북송 재일 동포 출신인 고영희를 좋아해 81년 둘째 아들 정철을 얻었다" 는 것도 밝혔다. 95년 말 모스크바에 있던 어머니 성혜랑씨와의 통화에서는 정철이가 스위스 베른의 국제학교에 다닌다는 정보를 알아내기도 했다.

한국에 귀순한 뒤 그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아들 정남씨가 남조선의 코미디언인 이주일, 허장강과 구봉서씨를 좋아해, 여덟 살 때인 79년 이주일을 데려오라고 떼를 쓰기도 했다고 밝혀 안기부 직원들을 웃기기도 했다. 이씨의 이런 진술은 대통령에게도 전달되어 전두환 대통령이 기자들에게 "우리측 첩보에 따르면 김일성과 김정일이 한국의 텔레비전을 본다" 라고 말했다고 한다.

3.6. 성형수술

전술한 내용만 보면 안기부가 이한영을 홀대한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이한영은 국내 탈북자 중 유일하게 김정일의 친척이고 측근이며 소중한 정보원이었기에 안기부에서 일반적인 탈북민들과 달리 신경을 무척 많이 써주었는데, 신변의 안전을 위해 1985년 여름방학에는 1983년 개원한 명동의 오인성형외과 의원에서 성형 수술을 제안했고 이한영도 "어차피 내가 거절한다고 안기부에서 가만히 있을것도 아니니 이왕 수술할 거 알랭 들롱같은 미남으로 만들어 달라" 고 제안에 흔쾌히 응했다고 한다. 수술 당시 전신마취를 했는데 이한영은 잠꼬대를 하는 와중에 김정일에 관한 얘기를 했다고 한다.

성형외과에 두 달간 입원해 있으면서 1차로 눈과 코를, 2차로 턱과 이마, 마지막으로 귀를 수술해 제2의 인물로서 새로운 삶을 살고자 했다. 당시 이씨가 받았던 성형수술은 당시의 의료 수준을 고려해 보면 엄청난 '대규모 공사' 였다. 요즘도 80년대에 받은 수술이 잘못돼 재수술을 받거나 부작용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미용이 아닌 생존을 위해 택한 수술이었다는 점에서 많은 이들이 그에게 연민을 보낼만하다. 어쨌든, 수술 담당 의사인 함기선 박사를 제외하고는 간호사조차 이한영의 신분을 몰랐으며, 어쨌든 그는 수술 후 자신의 바뀐 얼굴에 대해 굉장히 만족했다고 한다.

3.7. KBS 취업

안기부 측에서는 그에게 가짜 신분을 만들어주고 거처까지 수시로 바꿔줬다. 대학 졸업 전인 1987년 10월 안기부는 그를 핀란드에서 활동하다 순직한 요원의 자녀로 꾸미고 KBS에 취직시켰고, 76년부터 81년까지 5년간의 러시아 유학을 통해 익혀온 유창한 노어실력 덕분에 KBS 수습 15기와 동기가 된 그는 국제방송국 러시아어 방송 담당 PD가 될 수 있었다. 1988년 서울올림픽이 열리자 이씨는 러시아어 전문가로 활약했다. 이 시기 러시아에서 사귀었던 옛날 여자친구를 기적적으로 만나기도 하였다.

3.8. 결혼

이한영은 입국 때부터 안기부 직원들, 자신의 맞은편 집 이웃인 한양대 선배 김씨, 자신의 성형수술을 집도한 국내 성형학 1세대인 함기선 박사, 그리고 대학시절 같은과 여자친구 등을 제외하고는 그 어느 누구에게도 신분을 철저하게 밝히지 않았다. 그는 한양대 재학 시절 남한 학생들과 코드가 맞지 않아서인지 친구가 많지 않았고, 아울러 집에 친구를 데려오는 일은 거의 없었다. 외로움을 많이 타서 앞집인 대학 선배의 집에서 살다시피 했다. 방학 때면 안기부 사람들과 여행을 가서 오랫동안 집을 떠나있는 일도 많았는데 어디를 갔는지는 아무에게도 말해주지 않았을 정도로 폐쇄적인 생활을 했다.

결혼식이 있기 약 보름전, 이한영이 눈물을 흘리며 "사실 나는 참 외로운 사람이다. 이모부가 김정일이다." 며 자신의 진실을 고백하는 모습에 약혼녀 김 씨는 어마무시한 비밀에 놀라긴 했지만 이한영이 그렇게 순수해보이고 애처로워 보였다고 했다. 이로 인해 학업과 결혼을 사이에 놓고 고민하던 김씨는 스무살이라는 이른 나이에 부모의 반대에도 무릅쓰고 결혼을 택했다.

마침 해외 여행 자율화가 시행된 1989년 그는 부인과 유학 시절부터 바라온 미국 여행, 그리고 러시아 출장을 계획했으나 망명 시 주민등록증을 받았을 때부터 '출국 정지자'라는 자신의 신분을 몰랐던 그는 "한국에 올 땐 자유롭게 미국에 갈 수 있다고 해놓고 이렇게 발을 묶는가, 나는 과연 2등 국민인가" 라고 푸념했다고 한다.

3.9. KBS 퇴사 후 사업

KBS 에서 러시아어 전문 PD로 일하며 나름 자부심을 느꼈으나 한직 취급을 하던 내부 분위기 때문에 마음이 뜨는 도중 KBS 직장 주택조합을 만드는 데 우연치 않게 참여하게 되어 부지선정, 조합원 모집, 조합인가, 건축허가, 입지심의 등 관련 절차를 모두 겪으며 사업을 해야겠다는 결심을 해 KBS를 90년 4월 퇴사하였다.

첫 사업으로 서울 성수동의 가구 공장 터에다 조합주택을 짓기로 하고 매입에 나섰다. 결과는 대성공적이었다. 90년대 초반 첫 수익금이 무려 24억원이었으니 그야말로 초대박을 터뜨린것이다. 호화로운 삶이 다시 시작됬다.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정말 재밌게 살았다. 거기다, 아름다운 아내와 사랑스런 딸과 함께였으니 남 부러울게 전혀 없었다.

3.10. 구속

1993년 3월 "수익금이 너무 많은것 아니냐" 는 조합원들의 시기를 받으며 횡령시비가 벌어져 신고를 당하게 되어 옥고를 치루게 되었고 수인으로 전락했다. 마음고생이 심했는지 잠자리에서도 평양거주 시절 특히, 김정일의 꿈을 자주 꿨다고한다. 훗날 이주일쇼에서 "북한에서 귀족적인 생활방식을 그대로 하다보니 자금관리, 사람관리를 제대로 못해 사업에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고 자본주의 사회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겪었던 어려움을 털어놓았다.

1심에서 유죄 판결로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황석영 작가의 자전적 수필인 '수인' 에 따르면 황석영이 방북 사건으로 수감 중에 이한영과 만나기도 했다. 당시 이씨는 분한마음에 황씨에게 먼저 접근하여 존경의 표시를 나타내며 "나는 당국에의해 납치되어왔다. 기자회견을 열어달라" 고 부탁했다고 한다. 이씨는 황씨에게 "어느날 학교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누구를 만나서 차를 탄 기억은 나는데 그후 정신을 잃고 사흘 후에 깨어나 보니 한국이었다" 고 밝혔으나 이것은 이씨가 사실을 고의적으로 과장해서 작정하고 자신이 반강제로 납치되어 한국에 왔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한 일종의 수단이었지 사실이 아니다. 이씨는 옥중에서 탄원서까지 수없이 썼지만 외면당했다.

3.11. 석방

그가 믿는 신이 결국 그를 도왔다. 10개월간 옥살이를 하다 1994년 1월 10일 2심에서 드디어 풀려나와 94년 1년간은 안기부가 주는 월 80만 원으로 연명했다. 지출의 절반은 딸의 교육비로 나갔다.

한편, 이씨는 교도소 생활 중 전도를 받아 94년 말부터 경기도 성남시 이매동에 위치한 한생명교회를 다니면서 세례도 받고, 이 교회 주변에서 은둔생활을 해오다 95년 새해부터는 지원이 끊기자 중국 농산물 수입 중개업, 러시아 상인 상대 장사, 외제옷 판매, 북한 그림 수입 등 다양한 사업을 모색했으나 어느 것 하나 여의치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지원이 끊긴 후에 정부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돌아오는 답은 "더 이상 도와줄 수 없다. 포장마차라도 해서 먹고 살아라." 는 냉정한 대답뿐이었다. 이씨는 러시아에 들어가 장사를 하고 싶었으나 당국이 출국금지조치를 해제하지 않자 출국금지취소처분소송을 준비하기도 했다.

3.12. 신변 노출

석방된 후 1년 뒤 안기부의 지원마저 중단되자 자신이 가지고 있는 정보를 팔러 나섰는데, 월간조선 기자를 만나 모스크바에 있는 모친 성혜랑과 통화하는데 성공했고 이 일이 매스컴에 보도되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1996년 2월 13일 오전 6시 30분, 안기부 직원에게 전화를 받고 잠에서 깬 이한영이 자신이 김정일의 측근이자 성혜림의 조카라는 사실이 세상에 알려졌다는 말을 듣고 서울의 모처에서 동아일보 기자의 인터뷰에 최초로 응하게 된다. 이후 신문, 잡지 인터뷰에 직접 등장하게 된다.

가족들의 망명 기사가 나가자 "조선일보가 월간조선을 인용해서 엄마와 이모의 탈출 사실을 보도하는 것을 나는 전혀 몰랐다. 신문을 보고 알았다. 사전에 아무런 통보도 받지 못했다. 엄마와 이모 일행이 안전하게 정착한 후 기사를 쓰기로 조선일보 측과 약속했다. 나도 3월달이나 돼야 보도될 것으로 생각했다. 조선일보와 안기부가 그렇게 하기로 협의가 된 것으로 알고 있었고 나하고도 그렇게 하기로 약속이 돼 있었다." 며 분노를 감추지 못 했다. 그는 인터뷰를 끝내며 "언론사를 찾아가지 않았더라면 조용히 일이 이뤄졌을텐데. 어머니는 날 원망할 것이다" 고 한탄했다.

기사를 최초로 보도한 조선일보 측의 우종창 기자는 "기사가 보도되기 전에 미리 알려줬다. 테이프 제작 문제와 관해 상의를 진행하기도 했다." 며 정면으로 반박했다. 여하튼 동아일보는 조선일보의 첫 보도가 나간 1996년 2월 13일 아침, 이한영의 신병을 확보해 만 30시간 동안 그와 숙식을 함께 했다.

이한영은 빚을 갚기 위해 언론을 상대로 장사를 한다는 의심을 샀으며, 그는 항상 "빚 때문에 내가 이런 행동을 하고 다닌다고 보지마라" 고 강조하였고, 어머니와 통화가 이루어진 후 아내를 1995년 12월초 홍콩으로 보내어 남옥이(여동생)의 외국인 친구들과 만나게 해서 이모가 10만 달러, 어머니가 2만 달러를 보냈다며 그는 "이미 엄마가 보내준 돈으로 모든 빚을 정리했다" 고 했다. 처자식을 굶길 수 없었던 것이 모스크바와의 통화를 생각하게 된 계기라고 대답했다. "엄마나 이모가 보고 싶기도 했지만, 그것보다는 이모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앞섰다." 고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언론사에 먼저 돈을 달라고 요청한 적은 없다. 현재 부도가 나서 무척 어려운 상태이고 엄마와 이모의 탈출 보도가 나가면서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떠돌이 신세라는 사정을 알고 언론사가 격려금조로 얼마씩을 줬다" 고 밝혔다

한편 "지도자와 같은 관저에서 살았고 김정일 비서가 누구보다 아끼는 자식(김정남)을 낳은 사람(성혜림)을 어떻게 동거녀라 할 수 있느냐" 고 목청을 높였다.

성혜림 일가 망명사건 이후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던 이씨는 당시 취재기자에게 겁에 질린 표정으로 "신문은 괜찮지만 TV에 내 얼굴이 나가면 성질 급한 이모부가 특수요원을 보내 나를 암살할지도 모른다." 고 수차례 반복했다. 어려서부터 김정일과 함께 살아온 그였기에 불같은 김정일의 성격을 누구보다도 잘 알던 그였다. "김일성이 죽은 이후 김정일을 제어할 사람은 북에 아무도 없다" 는 것이 이한영의 설명이었다.

그 후 3월 초에는 한 언론사와의 인터뷰 중 "지도자(김정일)를 자극하지 않기 위해서 방송에는 나가지 않겠다. 활자매체로 나가는 것과 비디오로 나가는 것과는 자극의 정도가 훨씬 다르다." 며 방송 활동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으나, 이를 번복하고 1996년 4월 23일 5월 5일 오후 10시에 방송될 KBS 2TV 추적 60분과의 방송 인터뷰 시간을 가졌다. 이후 2011년 12월 방송된 'KBS 특별기획 김정일 3부 - 최후의 선택' 의 앞 부분에 이한영이 진행했던 인터뷰가 간략하게 나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같은 달 23일에는 SBS 이주일의 투나잇쇼에 게스트로 출연한 방송이 나갔다. 자신의 가계도부터 시작해서, 김씨 일가의 사생활, 김정남이 어린 시절 팬이었던 이주일을 북한으로 데려오라는 에피소드를 얘기하는 등 방송을 통해서도 활발하게 북한에 대한 실상을 폭로했다. 이 방송에서 이한영은 다시 한 번 성형수술을 해서 완전히 잠적하고 싶다고 밝혔으나...

이한영은 자신의 서적을 통해 김정일의 가족과 치부를 까발리는 내용의 저서를 출판하여 김정일을 비판하였다. 남한 생활 14년 꿈과 좌절의 고백(1996. 06.11 동아일보)

이러한 활동은 당연하게 북한의 눈에 거슬릴 수밖에 없었다. 특히 북한의 로열 패밀리였던 그가 폭로한 실상들은 북한에게 커다란 위험 요소였다. 김정일은 이 소식을 듣고 자신의 사생활을 폭로한 것에 대단히 분노했다고 한다. 유사하지만 다른 결말을 맞이한 후지모토 겐지는 북한 체제에 대한 비판 또는 김 씨 일가를 비판하는 내용이 없었고, 오히려 김정은에 대한 인간미를 느낄 수도 있는 부분이 들어가 있어 큰 문제 없이 잘 넘어갔다.

1995년, 성혜랑과 이한영의 통화 내용을 들어보면 이한영이 신분을 밝히고 활동을 하지 않았더라면 충분히 위협 없이 살 수 있었다. 아울러, 성씨의 자서전 '등나무집' 에서는 김정일은 되려 아들을 잃어 당황한 성혜랑에게 "침착하라, 조금 더 생각해보자." 고 당부했고, 성씨의 부탁으로 김정일이 이한영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성씨의 어머니와, 정신이 불안했던 성혜림에게 무려 6년간 비밀로 지켜주었다고 한다.

여기에 안기부와의 갈등도 이한영의 안위를 위협했다. 안기부는 이한영에게 서울 시내 모처에 있는 안전가옥을 제공하고 그 곳에서 살도록 해왔으나, 이한영이 수기를 출판한 후 안기부에게 내용을 검열받던 중 이한영이 안기부의 검열 및 내용 수정 요구를 거부하면서 마찰이 심해졌다. 1996년 6월 13일, 안기부 담당관은 "6월 15일까지 집을 비우라" 고 통보했다. 이한영은 원래 7,000만 원짜리 분당의 아파트에 전세를 두고 살았으나 이 아파트도 채권자의 손에 넘어가 아내와 딸은 처가에, 자신은 친구들의 집을 전전하는 신세가 되었다. 이에 대해 안기부 측은 "더 이상 이 씨를 보호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 이라고 답했다.

실제로 이씨는 생활고와 테러 위협 등으로 부터 벗어나기위해 96년 초에는 부산으로 내려와 2~3개월 동안 러시아인을 상대로 통역 일을 하다, 2~3개월동안 경기도 평촌의 한 백화점 점포에서도 일을 하는 등 도피생활을 하기도 했다. 이씨는 사업에 실패한 후 심한 생활고를 겪으면서 부인 김씨와 8살 딸을 서울 성북구에 있는 처가로 보낸 후 여관 등을 전전하며 어려운 생활을 했다.

성혜랑의 증언에 따르면 실제로 성혜림은 망명을 하기위해 모스크바에서 제네바까지 왔다가 결국 김정남 때문에 망명을 포기하여 다시 모스크바로 되돌아갔다고 한다.

3.13. 피살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이한영 암살 사건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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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영은 1996년 12월 "당국에선 나를 자본주의 못된 것만 배운 골치 아픈 놈으로 간주하고 있는 줄 안다. 스스로도 그런 면이 있음을 많이 털어놨다. 천장 얘기? 비단 물질적으로가 아니라 마음으로나마 천장 높게 대우해 줬더라면 이런 수렁에는 빠지지 않았을 것이다." 라고 말하며 대한민국마저 버릴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때까지도 남쪽으로 찾아드는 많은 탈북자들의 사연을 접하면서 묘한 가슴앓이를 하고 있었다. 환영행사 와중에도 '행여 저들도 자본주의의 틈바구니에 치여 다치지나 않을까' 하며 염려했다.

1996년 가을 신분이 이미 노출된 이한영은 활동을 접고 거처, 전화번호, 그리고 무선호출기(삐삐) 번호까지 변경하면서 '평범한 생활이 불가능한 나를 믿고 결혼한 아내와 자식을 위해서도 마음을 잡고 살아야겠다' 며 한국-러시아 무역을 하기 위해 부산으로 떠났다.

그러나, 결국 1997년 2월 15일 밤 9시 50분경 이한영은 어디론가 떠났다가 3일만에 임시 거처를 다시 방문하였으며 집에 들어가기 위해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문 앞 현관에서 권총으로 북한 공작원들에게 피격당했다. 그로부터 10일 후, 분당차병원의 중환자실에서 사망하였다. 자세한 내용은 이한영 암살 사건 문서 참조.

김정일의 측근이자 엘리트로 살아와 망명했지만 결국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여, '가장 불행한 탈북자', '북한 정권에 희생된 파란만장했던 사람' 이라 불리게 된 그의 유해는 경기도 광주시 오포면 광주공원 묘지에 묻혔다.

3.14. 피살 이후

2008년 한국 대법원은 이한영이 피살된 사건과 관련해 국가가 유족에게 손해배상을 할 책임이 있다고 판결했다. 이한영의 부인 김모 씨가 2003년 2월24일 처음으로 "한국 정부가 보호 의무를 소홀히 해 남편이 살해됐다" 며 국가를 상대로 4억 8,000만 원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하였고, 이에 대해 1심 재판부는 "국가가 이 씨를 위해 보호 조치를 하지 않은 점과 교도소 직원 등이 북한 공작원의 의뢰를 받은 심부름 센터 측에 이 씨의 신상 정보를 제공한 점이 인정된다" 며 배상 책임을 인정했다. 재판부는 다만 "이씨도 국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언론과 인터뷰를 하거나 수기를 출판한 과실이 있다" 며 국가의 책임을 70%로 보고 유족에게 1억 400만 원을 지급하라고 선고했다. 하지만 2심인 항소심 재판부는 이 씨의 책임이 더 크다고 보고 국가 책임을 60%만을 인정했다.

부인 김씨의 손해배상 소송을 도와온 피랍탈북인권연대의 도희윤 대표는 "1, 2심에서 승소했음에도 불구하고 지난 정부가 이에 불복해 5년 6개월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며 "이번 판결이 고인과 가족들에게 명예회복의 기회가 될 수 있어 기쁘게 생각한다" 고 말했다. 3심에서 2008년 8월 21일 9,699만원을 지급할 의무가 있다고 원심 확정했다. 단, 안기부의 만류를 무시하고 언론 등을 통해 신분을 노출한 책임이 있다고 판단하여 국가 책임을 60%로 제한했다고 밝혔다.

방송에서는 2014년 10월 29일, TV조선 강적들 51회 평양 주석궁 미스테리편에서 이한영과 그의 어머니 성혜랑의 전화통화 음원을 방영하기도 했다. 그의 암살 사건을 모티브로 영화 의형제가 제작되었다.

그리고 약 20년 뒤 그의 사촌 김정남도 그와 비슷한 최후를 맞게 된다.

탈북자 주성하 기자는 이한영의 사망 배후가 김정일이 아니라 러시아 마피아일 가능성이 높다는 의견을 제시한 바가 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며, 이한영은 북한 공작원들에 의해 사망하였다. 당시 북경에 있던 김정남이 이한영의 자서전을 김정일보다 먼저 입수하여 북한 사회문화부에 암살 지시를 했다는 주장과 김정일이 만약 이한영의 암살하는데 실패한다면 이한영과 관련된 기사를 보도한 월간조선 기자인 우종창이라도 죽이라고 지시했다는 설도 있다.

이한영의 아내 김종은씨의 진술에 의하면, 첫 번째로 82년 귀순한 이씨가 모스크바 외국어대학에서 익힌 능통한 러시아어 실력을 바탕으로 러시아인 국내 관광안내 아르바이트를 했으며, 94년초부터는 러시아 중개무역업자와 거래를 하다, 이어 96년초에는 아예 부산으로 내려가 러시아 무역상과 2∼3개월 동안 함께 지냈다고 한다. 이씨는 특히 생활이 극도로 어려웠던 96년에는 속칭 '인터걸' 거래를 하는 모스크바 상인과도 어울릴 정도로 돈을 벌기 위해서는 무슨 짓이든 하려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수사관계자들은 피격된 이씨와 이들 러시아 무역상간에 발생한 채권-채무관계로 다툼이 일어 러시아 무역업자 또는 이들의 청부를 받은 러시아 마피아로부터 테러를 당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있었다. 또 이런 점에서 볼때 이씨가 95년 11월과, 96년 5월 강남구 반포동의 모아파트와, 성남시 분당구의 청구아파트 등으로 거처를 옮기는 등 지난 3년동안 8차례나 거주지를 옮긴 것도 러시아인들의 추적을 따돌리기 위한 것이라는 추측도 가능하다.

4. 여담

  • 탈북 후인 1990년 모델 출신의 한국인 아내 김씨와 결혼하여 한국에서 태어난 딸이 있다.[8] 아내와 딸은 이한영 암살 사건 이후 한 민간단체의 주선으로 미국뉴질랜드로 이사하여 생활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2008년 12월부터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살았으나 2017년 2월 김정남 피살 사건이 일어난 후 당시 뉴스에 의하면 "남한 사회도 믿을 수 없다"며 다시 거처를 옮겼다고 하며 한국해외를 오가면서 생활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28살이었던 이한영의 딸은 해외에서 대학을 졸업한 후에도 안전 문제로 인해 직장을 구할 수 없는 문제가 있었다고 한다.
  • 냉면을 특히 좋아해서 분당 옥류관에서 자신이 출석했던 교회 담임목사와 자주 만나 냉면을 먹을 때면 "나는 김정남(김정일의 장남)을 좋아한다. 북한의 후계자는 김정남이다" 는 말을 자주 했다고 한다.
  • 사기 혐의로 감옥에 있었을 때 무단 방북 사건으로 수감 중이던 황석영 작가와 만난 일이 있다. 황석영 작가는 이한영으로부터 본인이 망명이 아닌 납치로 한국에 오게 되었다는 얘길 들었다고 주장했다. 이한영 본인도 자서전에 "그때는 정말 억울하고, 신세가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다. 내가 한국에 자의적으로 온 것이 아닌, 납치되어 왔다는 것을 합리화시켜 온 세상에 알리고 싶었다"는 맥락의 솔직한 심정을 드러냈다. 자세한 내용은 황석영 문서의 여담 문단 참조.
  • 생전에 국정원측에 "우리(북한)쪽에서 김철수란 가명으로 독일에서 활동하고 있는 재독 동포가 있다. 주의해 살펴 보라" 는 정보를 주었고 이에 국정원측은 제보를 받고 내사를 시작했다고 한다. 국정원은 김철수의 정체로 내재적 접근론을 주장한 독일 뮌스터대의 송두율 교수를 지목해 그를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이자 간첩으로 구속해서 조사했으나 송두율이 다소 친북적인 시각은 가졌을지언정 정치국 후보위원이라는 엄청난 지위에 있다는 것은 그야말로 말도 안되는 혐의였고 1심에서 징역 7년이 선고됐으나 2심에선 결국 간첩 혐의가 무혐의 처분되면서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으로 형량이 대폭 낮아졌다. 송두율은 자신을 김철수로 지목한 황장엽을 상대로 명예훼손 소송을 했으나 이는 패소했다.[9]
  • 1995년 새해부터 재정지원이 끊겨 정부에 계속해서 도움을 요청하자 1995년 10월 17일 정부 당국은 생활비를 지원하지 않겠다고 공식 통보해 왔다. 사흘만인 10월 20일 <월간조선> 우종창 기자를 찾아가 "성혜림씨 전화번호 알고 있어요?" 라는 기자의 질문에 "우리 이모(성혜림. 김정일 국방위원장 전처) 예전 모스크바 방 전화번호 알긴 알아요" 라고 말했다. 안기부는 이한영과 <월간조선>을 연결시켜 성혜림 자매 망명 공작에 나선 직후 몇 차례 이한영에게 모스크바 측과 통화하게 한 뒤 이한영의 외삼촌 성일기(成日耆)씨(성씨 자매의 오빠) 등을 모스크바에 보내 성씨 자매의 망명 공작을 추진했다. 북한 최고특권층 중의 특권층인 이씨의 가족을 한국에 오게 하는 것은 다양하고 새로운 정보를 많이 얻을 수 있는 기회이므로 외교적인 관점에서 정부로써도, 그리고 안기부로써도 가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월간조선>측이 성혜림의 모스크바 정보를 대가로 이한영에게 500만원을 줬다고 한다. 이 돈은 안기부측에서 <월간조선>측에게 나중에 갚아 주었다. 안기부의 사전 작업이 아니고는 설명할 수 없는 이야기다. <신동아>는 <월간조선>보다 한 달 빨리 이한영과 접촉했으나 이씨의 신변 문제상 일이 흐지부지됐으며 이한영이 동아일보 취재망에 잡힌 것은 1995년 11월 말이다. 그는 <신동아> 취재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자신의 신분을 털어놓았고 취재진은 이씨의 신분을 확인한 뒤 본격 취재에 나서 이씨의 이모 성혜림과 이씨의 어머니 성혜랑 자매가 망명 의사를 갖고 있다는 사실도 감지하게 됐는데 이 과정에서 정부 당국이 <동아일보>에 보도 자제를 요청해 왔다. <동아일보>는 성씨 자매의 신변 안전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판단해 당국의 요청을 받아들이기로 했으나 다음해 2월13일 조선일보가 이씨와 성씨 자매의 망명 관련 움직임을 공개하게 되었다.
  • 이미 기자들이 그의 신분을 확인한 이상 '북한 로열패밀리' 에 관한 책이 나오는 것은 필연이었다. 본인의 입으로 "돈 때문에 수기 집필이라는 아이디어를 생각해냈다" 며 1995년 10월 월간조선과 접선하기에 앞서 KBS에서 같이 근무했던 동기의 소개로 1995년 9월 신동아를 방문했다고 자서전에서 이미 밝혔다. 안기부와도 수기에 대해 의논했고 안기부 측에서도 이를 승인했다. 신변 노출 후 안기부가 제공한 안전가옥에서 지내고 있었으나 수기의 내용 중 안기부에 관한 일부 내용의 삭제 요청을 거부하면서 마찰이 생겨 그만 안가에서도 나오게 됐고 거주하던 분당 아파트도 채권자 손에 넘어가면서 가족들을 처가에 보내고 자신은 일정한 주거지 없이 친구 집을 전전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대학 시절부터 가깝게 지내던 선배 집 한 칸을 임시 거처로 정하고 가끔 들르며 지내던 중 피살된다.
  • <대동강 로열패밀리 서울 잠행 14년>은 일부 안기부 검열을 거쳐 <동아일보>에서 1996년 6월 출간되었다. 솔직한 성격의 이한영은 이 책에서 안기부에 관한 자신의 부정적인 시각을 자신이 느꼈던 그대로 밝히고 싶었을 것이다. 자신이 맘먹고 쓰고 싶은 대로 썼다면 그런 내용이 무조건적으로 들어갔을 것이지만 안기부의 '협조 요청' 에 따라 <동아일보> 측이 일부 내용을 가감, 삭제하면서 책이 출간되었으나 끝내 안기부에 관한 비밀스러운 에피소드를 자서전에 넣었는데 이것이 그가 안가에서 나오게 된 원인이다. 그가 참변을 당한 후 경찰의 한 관계자는 "이씨가 안기부의 특별관리대상으로 분류됐으면서도 안기부가 신변도 제대로 보호해 주지 않을 정도로 버림을 받은 것으로 알고 있다." 고 전했으며 검찰의 일선 수사관계자는 "이씨는 자신이 성혜림의 조카라는 사실을 오래 전부터 여기저기서 떠들고 다녔다. 안기부로서도 이씨의 정보가치가 약해진데다 이런저런 사고를 많이 일으켜 관리대상에서 사실상 제외시킨 것으로 알고 있다" 고 전했다.
  •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의 범인 김현희자살에 실패하고 한국으로 전향하자 김정일북한에 남아 있던 김현희의 가족들을 모두 연좌제를 적용해 요덕수용소로 보냈다고 한다. 이 같은 사실은 이씨의 어머니 성혜랑이 이씨와의 전화통화에서 얘기했던 내용이라고 한다. 당시 신문 기사 김정일은 자살에 실패하고 남한으로 전향한 김현희 소식을 듣고 여자는 요물이라는 독설과 함께 김현희가 속했던 대외정보조사부(35호실)에서 여성 공작원들을 모두 방출하고 김현희를 교육한 노동당 조사부 간부들까지 요덕 정치범 수용소로 보냈다고 하며 김현희의 육촌 친척까지 평양에서 지방으로 추방되었다고 한다.
  •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안기부 직원의 말을 빌리자면 1982년 귀순 직후 안기부 측에서 르에게 30만원 가량 금액을 예산으로 잡고 의류를 공급해 주기 위해 백화점에 데리고 갔는데 "옷을 사줄테니 골라보라"고 말한 후 쇼핑을 시키고 나중에 확인해 보니 예산의 10배 정도가 더 되었다고 한다. 참고로 당시 한국의 대졸자 평균 월급이 약 22만원 수준이었으니 한번에 대졸자 평균 연봉보다 큰 규모로 쇼핑을 했던 셈이다. 김정일 못지 않게 그에 버금가는 초호화 생활을 하면서 수만 달러쯤은 우습게 여기던 그에게 이것은 그저 하루 쇼핑하는 정도이자 빙산의 일각이지만 유일한 탈북자 출신의 김씨 일가 로열패밀리의 일원이었던 그의 위치가 어느 정도였는지 대략적으로 가늠해 볼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척도가 되겠다.
  • 총 3개의 이름을 갖고 있다. 북한에서의 본명은 리일남, 귀순 전에 해외에서 사용했던 북한 외교관 여권에 등록된 가명은 김영철[10], 한국으로 귀순한 후에 새로 지은 이름은 이한영이다.
  • 북한의 고위 계층 인물로 편하게 살 수 있었지만 한국으로 귀순한 이유는 미국 여행을 가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한다.[11] 더 크게 보면 자유를 갈망한 것이다.
  • 여동생 리남옥은 프랑스로 망명한 후 프랑스인과 결혼하여 살고 있으며 외삼촌 성일기는 한국으로 망명했다.
  • 어린시절 이한영은 성일기씨가 빨치산 활동중 체포되어 총살당한 줄 알고 있었다고 자서전에서 밝혔다. 이한영이 암살당한후 성일기씨는 동생 혜랑씨와 다시 모스크바에서 만났다고 한다. 이한영의 어머니 혜랑씨는 자신의 아들의 죽음은 "한국에서 한 짓" 이라고 믿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자 성일기씨는 동생에게 "이 바보야. 너를 유인하려고 해도 니 아들이 살아있어야 너를 유인할텐데, 한국이 왜 그 아이를 죽이겠느냐?" 라고 하여 그제서야 성혜랑은 사태를 짐작했다고 한다.

[1] 북한에서의 본명은 리일남인데 처음 낳은 아들, 첫째가는 남자가 되라는 의미로 지어준 것이다. '이한영'은 한국으로 귀순한 후에 안기부 직원이 지어준 이름으로[2] 주민등록상 출생일은 1961년 9월 28일. 9월 28일은 이한영이 한국대사관에 망명신청을 한 날이다.[3] 주민등록상 출생지는 서울특별시 성동구. #[4] 생전에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에 있는 한생명교회에 출석한 적이 있었다.관련 블로그[5] 월북작가 이기영의 장남.[6] 김정일의 조카가 아닌 김정일의 전처 성혜림의 친정 이종조카이기에 피 한방울 섞이지 않은 처조카가 최측근이라는 사실에 조금 의아할 수 있는데 이는 그가 단순한 처조카였기 때문이 아니라 어린 김정남의 보호자이자 유일한 친구였기 때문이다.[7] 영어가 유창하지 못했기 때문에 미국 여행을 갈 수 있는 방법에 관해 언어가 통하는 주 스위스 제네바 한국 대사관에 문의했다가 대사관 대표부의 설득에 의해 거의 우발적으로 급박하게 탈북하여 총 3일 만에 한국에 도착했다. 다만 이만갑 519회에서 김길선은 처음부터 탈북 의도를 가지고 접근했을 것이며 '귀순'을 의도한 것이라고 하면 다들 위험해지니까 미국 여행이라는 핑계를 댔을 것이라는 의견을 보였다.[8] 당장 본인부터 북한 정권에 목숨을 위협받고 있는 상황에서 본인이 지켜야 하는 아내와 딸까지 생긴 상황이었지만 당시에는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친출산 가치관이 강했던 시기였다.[9] 다만 황장엽과의 법정 다툼 중에서는 노동당에 입당한 적이 없다고 주장했으나 결국 2004년에 1973년에 입북하여 조선로동당에 가입했던 사실을 실토하면서 한국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10] 해외에서는 보안상 가명을 사용했다고 한다.[11] 소련 모스크바에서 유학 생활을 했으며 북한 외교관 여권으로 동유럽, 중국 등을 여행할 수 있었지만 유일하게 갈 수 없는 나라가 미국이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