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21 11:34:31

장성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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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조선로동당 마크.png 당중앙위원회 정치국
<colcolor=#FED11E> 상무위원 <colbgcolor=#fff,#222>2010년 9월 전원회의 김정일·김영남·최영림·조명록·리영호
2012년 4월 4차 당대표자회 김정은·최룡해(승진)
2015년 2월 정치국 확대회의 황병서
가나 2010년 9월 전원회의 김영춘·전병호·김국태·김기남·최태복·양형섭·강석주·변영립·리용무·주상성·홍석형·김경희
2012년 4월 4차 당대표자회 김정각(승진)·장성택(승진)·박도춘(승진)·현철해·김원홍·리명수
2013년 3월 전원회의 박봉주
2015년 2월 정치국 확대회의 김양건(승진)·오수용(승진)·곽범기(승진)·최룡해(강등)[1]
[1] 이때 현영철도 보선되었다는 추정 존재.
후보위원 2010년 9월 전원회의 김양건·김영일·박도춘·최룡해·장성택·주규창·리태남·김락희·태종수·김평해·우동측·김정각·박정순·김창섭·문경덕
2012년 4월 4차 당대표자회 곽범기·오극렬(강등, 복귀)·로두철·리병삼·조연준
2013년 3월 전원회의 현영철·김격식·최부일
2014년 4월 정치국 회의 리영길·오수용[2]
[2] 이때 장정남도 보선됐다는 추정 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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前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행정부장
장성택
張成澤 | Jang Song Thaek
파일:장성택 위원.jpg
출생 1946년 1월 22일[1]
함경북도 청진시 신암동
(現 함경북도 청진시 청암구역)
사망 2013년 12월 12일 (향년 67세)
평양시
본관 청송 장씨
국적
[[북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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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틀: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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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틀:국기|
파일: 기.svg
속령
]](1948~2013) (공민권 박탈 / 2013.12.8.)
학력 김일성종합대학 (학사) (학적 삭제 / 2013.12.8.)
모스크바 대학교 (학사)
직업 정치인, 군인
최종 당적

파일:조선로동당 로고타입.svg
(출당·제명 / 2013.12.8.)
군사계급 조선인민군 대장 (군적 삭제 / 2013.12.8.)
서훈 로력영웅(1989) (명예칭호 박탈 / 2013.12.8.)
김일성훈장(1992) (훈장 박탈 / 2013.12.8.)
김정일훈장(2012) (훈장 박탈 / 2013.12.8.)
가족 아버지 장용환, 어머니 불명
전처 김경희
장녀 장금송
첫째 형 장성우
둘째 형 장성길
첫째 누나 장계순
둘째 누나 장은순
조카 장용철
매형 전영진, 이태남

1. 개요2. 일생
2.1. 청년2.2. 김씨왕조부마가 되다2.3. 첫 번째와 두 번째 숙청2.4. 김정일의 최측근2.5. 세 번째 숙청2.6. 김정은 승계 전후2.7. 실각2.8. 처형
3. 평가4. 여담5. 대중매체에서

[clearfix]

1. 개요

북한정치인, 군인. 초대 최고지도자 김일성의 사위이자 김경희의 전 남편이며 동시에 2대 최고지도자 김정일의 매제이며 3대 최고지도자 김정은의 고모부이기까지 한 인물이다. 생전 최종 직책은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행정부[2] 부장 겸 국방위원회 부위원장 겸 국가체육지도위원회 위원장 겸 최고인민회의 제11기 대의원이다.

친형인 장성우장성길조선인민군 간부였으며 둘 다 지병으로 사망했다. 자녀로는 무남독녀인 장금송이 있었다. 친딸이 아니고 입양한 딸이라는 설이 있었는데 라종일은 이 설을 부인했다. 2006년 8월에 신변 비관으로 프랑스 파리에서 수면제를 과다복용해 스스로 생을 마감한 걸로 알려졌다.

파일:장성택 가계도.jpg

김정일 시대에는 굴곡이 있긴 했지만 명실상부한 북한의 권력 2인자로 군림한 실세 중의 실세였으며 한때는 김정일의 뒤를 이어 북한의 새로운 최고 권력자가 될 것이라는 예측을 받기까지 했던 사람이었다. 김정일이 죽은 뒤에도 김정은과 더불어 북한의 투톱이 되거나 김정은을 얼굴마담으로 앉혀 놓고 본인이 막후에서 실권을 휘두르는 최고 실권자가 될 거라는 예상이 많았을 정도였지만 2013년 12월 12일에 석연치 않은 이유로 갑작스럽게 숙청된 후 곧바로 처형당했다.

북한의 대표적인 친중 인사로 알려진 인물이기도 했다. #

2. 일생

2.1. 청년

파일:AEVS7LLLdeZ-1WVgf599WptBXzQyllPsDRc9nBU3LBFhVwZ9WUmsF80SjRwytK-IIcwT0c4jEETIJjYbtx6PiWA-zz4XWa_so_uTU-lGBaTEboFamI3j0nuM7nbMsmcmAaPU9Zyp-1.png
북조선인민위원회 시대 함경북도 청진시 청암구역# 출신으로 부친은 일제강점기에 국내 공산주의자들이 주도한 함경북도 길주군 명천 농민쟁의에 참가했다고 하며 그렇게 부유한 집안은 아니었던 정도로 알려져 있다. 다만 일설에는 함경남도 문천군(현 북한 강원도 천내군) 출신이란 떡밥도 있으나 이는 정치국 위원 주상성의 출신지다. 주상성도 김정일의 신임을 받았으나 2011년 미움을 받아 전격 좌천, 해임되었다.#

김일성종합대학 정치경제학부를 졸업하고 1969년에는 모스크바에서 유학하는 등 엘리트 코스를 밟았다. 아버지가 국내에서 항일운동을 하다가 체포된 경력이 있던 탓에 성분은 나름대로 괜찮아 김일성대에 입학할 수 있었다. 그가 대학에 입학할 때까지만 해도 국내에서 항일투쟁을 한 후손들의 성분은 나름대로 알아줬다고 하지만 1950년대에 김일성이 소위 종파분자들을 때려잡으면서 김일성은 항일한 게 벼슬은 아니라고 공격하면서 빨치산 이외의 항일 투쟁 경력자들을 격하하였고 1960년대에 갑산파가 항일 빨치산뿐만 아니라 함경도 농민운동을 비롯한 온갖 항일운동에도 혁명 정통성을 부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가 처참하게 숙청당하면서 상당히 몸을 사려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어쨌거나 자기가 김일성급 정통성이 있다고 주접을 떨지 않고서야 일제 시대 항일 경력이 좋은 성분으로 인정받기는 했다.

2.2. 김씨왕조부마가 되다

젊은 시절 기준으로 준수한 키에 호감형 외모였던 그는 유머감각도 있으면서 노래도 잘하고 아코디언도 능숙하게 연주하며 카드놀이도 잘해서 어딜 가든 사람들에게 인기가 좋은 인싸였다고 한다. 김정일의 전속요리사였던 후지모토 겐지를 비롯해 최은희, 신상옥 부부도 그를 모두 '장신의 미남'이라고 묘사했다.

김일성의 딸 김경희와는 1964년 입학한 김일성종합대학에서 동급생으로 만났다. 김일성대학은 한국 대학과 다르게 학부가 결정되면 수업은 선택이 아니라 강제로 부여받고 한국 고등학교처럼 시간표와 좌석도 지정된다. 그와 김경희가 같은 반이었는데 김경희가 앞자리를 배정받은 그를 처음 보고 반했다고 전해지며 그에게 끈질기게 구애를 했다고 한다. 그렇게 시작된 인연으로 둘은 사귀게 되었다고 한다. 이 때 김경희가 그의 바로 뒷자리에 앉아 솔잎으로 그의 귀를 간지럽히는 장난을 치는 등 당시 북한에서 흔치 않았던 자유연애를 했는데 이 사실을 들은 김일성은 처음엔 대단히 불쾌하게 생각하여 김경희를 불러 다그치기도 하고 타이르기도 했으나 김경희는 요지부동이었다. 이에 김일성은 김일성종합대학 총장 황장엽에게 둘을 떼어놓으라고 지시했으나 되려 김경희가 총장실에 직접 쳐들어가서 "총장 선생이 뭔데 남의 연애사에 간섭이시오?"하고 고함을 친 것은 유명한 이야기다.

결국 김일성은 김영주를 시켜서 그가 대학교 3학년이었을 때 '놀기 좋아한다'는 이유로 김일성종합대학에서 원산경제대학으로 강제로 전학시키기도 했는데 이 인연 등으로 장성택이 원산을 아껴 경제특구로 키우고 싶어했다는 주장이 있었다. 원산은 김정은도 아끼는 도시다. 그런데 김일성이 그를 원산으로 보내 둘을 떼어 놓으려고 애를 쓸 때도 김경희는 김일성의 차를 끌고 원산과 평양을 왕복하면서 그의 뒷바라지를 해주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김경희가 처음 원산경제대를 방문했을 때는 교직원들이 수령님의 차가 뜬금없이 오는 것을 보고 "어이쿠, 현지지도하러 오셨구나!"면서 혼비백산했다 카더라. 연애로 민폐 이렇게 김경희는 험준하기로 유명한 마식령 고개를 매번 넘어가서 그의 빨래까지 해주고 가곤 했다.

김정일과 김일성의 설득에도 독한 김경희가 조금도 뜻을 굽히지 않자 오빠 김정일이 먼저 "저러다가 차 사고 나서 애 다치면 어떡합니까? 낮은 신분은 높여주면 그만입니다."라고 아버지를 설득하여 결국 둘의 연애는 인정되었다. 그는 이때부터 평양시당 지도원, 당중앙위원회 지도원, 당 부과장을 거쳐 외교부 담당 과장이 되었고 70년대에 북한 대사관들을 통한 마약 밀수 등으로 외화벌이 사업을 지도하여 김정일에게 막대한 자금을 바쳤다. 한편 그는 당중앙위원회 지도원 시절엔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1976년)으로 분개한 미국이 폭격기들을 전개하자 미군의 평양 폭격에 대비해 평양에 소재한 주민들과 군수공장들을 대피시키는 작업을 성공적으로 지휘했는데 그 공으로 국기훈장 2급을 수여받았다.

그러나 장성택과 가까웠던 탈북자 박윤희[3]의 주장에 따르면 장성택은 대학에 가지 못하고 말단 교통안전원으로 평양 시가지에서 근무하던 중에 차를 타고 등하교하던 김경희의 눈에 띄어 구애를 받았고, 장성택과 결혼하지 못하면 평생 혼자 살겠다고 고집을 피우는 김경희에게 굴복한 김일성이 장성택을 면천(?) 시킨 후 원산경제대학에 진학시켰다고 한다.# 하지만 장성택과 김경희가 캠퍼스 커플이었다는 것은 당시 총장이었던 황장엽의 증언이며, 최은희도 김정일로부터 직접 둘이 캠퍼스 커플이었다는 설명을 들었으니 그냥 이런 썰도 있더라 정도로 넘어가면 된다.[4]

2.3. 첫 번째와 두 번째 숙청

이렇게 김일성은 사윗감인 그를 몹시 미워했으나 김경희의 끈질긴 요청과 김정일의 중재로 장성택을 복귀시켰고, 장성택은 김정일의 측근이 됐다. 대신 그동안 사상교육으로 고생 좀 했다고 하는데 말이 교육이지 실제로는 가혹한 육체 노동+갈굼으로 점철된 공개 비판으로 사람 돌아버리게 만드는 처벌이라고 한다. 김일성이 그를 싫어했던 이유 중 하나가 그의 부친이 공산주의자로 소작쟁의를 주도하긴 했어도 자신과 연고가 없는 함경도 토착 공산주의자, 즉 김일성 자신의 잠재적인 정적이었기 때문이며 함경도 출신의 오기섭이라는 자가 김일성과 삐딱선을 탔다고 한다. 그래서 김일성은 함경도 출신들을 경계했다. 혈통을 제일 중시하는 계급제 사회 북한에서 김일성 정적의 아들이 부마가 된다는 것 자체가 김일성에겐 껄끄러웠을 것이다.

다만 고위직에 있었던 탈북자 강명도 교수에 의하면 김일성은 그렇게까지 장성택을 싫어하지 않았으나 오히려 김정일이 장성택을 더 싫어했다고 한다. 그 이유는 김정일은 김경희를 무척이나 아꼈는데 김정일이 여동생 김경희에게서 일찍 죽은 자신의 어머니 김정숙을 투영해 보았다는 주장도 있다. 때문에 김정일이 김경희가 장성택의 아내가 된 것이 못마땅했다는 것이다. 장성택의 능력이 뛰어났기 때문에 김정일이 장성택을 더욱 미워했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정말로 미워했다면 김경진의 남편 김광섭처럼 곁가지 취급하면서 눈도 못마주치게 해버리거나, 김경희와 소원해진 후에 이혼시키고 숙청해버리면 그만인데 김경희가 김용순과 바람나면서 사실상 딴살림 차린 후에도 측근으로 데리고 다닌 것을 보면 김정일이 장성택을 시기하고 미워했다는 주장은 신뢰하기 어렵다.

김경희는 그의 누이 장계순과 함께 1969년소련으로 유학을 떠났다가 돌아와서 1972년에 장성택과 결혼하고 무남독녀 장금송을 출산했다. 장금송은 29세이던 2006년 8월에 프랑스 파리에서 유학 생활 중에 자살했다. '장금송이 살아있었다면 장성택이 처조카에게 처형당하는 비참한 상황은 면치 않았을까' 하는 의견도 있다.

가까이에서 그들을 지켜본 강명도에 의하면 부부 중 누구에게 문제가 있는지는 몰라도 장성택과 김경희 사이에는 아이가 생기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처음에는 부부 관계는 꽤나 좋았다고 전해지지만 아이가 생기지 않았기 때문에 둘의 사이가 점점 벌어졌다고 하는데 이에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택한 방법이 김정일의 첫째 아들인 김정남을 키우는 것이었다. 그러나 여러 노력들에도 둘의 관계를 돌리기에는 역부족이었고 둘의 사이는 더욱 벌어졌다. 강명도는 방송에 나와 김경희가 자기 집에 와서 막 우는 장면을 종종 목격했으며 김경희가 엄청나게 술을 마신 후 강명도의 어머니에게 상담을 받았다고 이야기하며 강명도가 어머니에게 "김경희가 왜 저러냐"며 자초지종을 물어보니 장성택이 바람을 피워서 김경희가 힘들어하는 것 같다는 말을 들었다고 증언했다.

훗날 탈북하여 남한으로 망명했다가 북한 공작원에게 암살당한 김정일의 처조카 이한영의 회고에 의하면 김정일이 측근들과 비밀 연회를 열었듯 장성택도 자기 측근들을 불러놓고 매주 연회를 즐겼다고 한다. 그런데 그게 보위부를 통해 김정일의 귀에 들어갔고 김정일은 장성택을 불러 "네가 뭔데 내 흉내를 내느냐. 이 땅에서 세도를 부릴 수 있는 사람은 나 밖에 없다."고 몹시 화를 냈고 1978년부터 2년간 강선제강소의 작업반장으로 쫓아내 버렸다.

한참이 지난 뒤 이한영의 이모이자 김정남의 생모였던 성혜림이 김경희에게 "장성택 없이 고생이 많다"면서 위로를 건넸고 김경희는 "잘못했으면 벌을 받아야죠"라고 말했지만 성혜림은 그게 본심이 아니라 여겨 김정일에게 "정남이 고모가 많이 힘들어한다" 라고 했다고 한다. 그 이야기를 들은 김정일이 아무런 반응이 없자 이제는 됐다 싶었던 성혜림이 독단적으로 그를 평양으로 불러 올렸다. 사상 교육을 받고 돌아온 그는 몰골이 말이 아니었는데 어찌나 구르고 굴렀는지 후지모토 겐지는 그의 맨다리를 볼 때마다 쇳물이 튀어 입은 화상 자국을 몇 군데나 보았다고 증언했으며 이한영도 장성택이 작업반장으로 일하다가 불에 뎄다는 말을 들었다고 책에 써 놨다.

김정일은 그를 보고 그냥 성혜림에게 "당신 참 극성이구려"라며 한 마디 쏘아붙이기만 하고 화를 내거나 하진 않았다고 하며 한 마디 없이 식사를 하다가 그에게 술 한 잔을 따라주며 다시는 이런 일이 없게 하겠다는 다짐을 받고 용서를 해 줬다고 한다. 이후 조직지도부 당원등록담당 과장에 임명되어서 다시 중앙당에서 일하게 되었으며 1982년에 당중앙위원회 청년사업부 부부장이 되었다.

하지만 돌아온 뒤에도 아내 김경희와의 관계는 개선되지 않았고 김경희는 알코올 의존증을 보이기 시작한다. 김경희가 자신의 개인 음악 교사였던 바이올리니스트 김성호와 맞바람을 피우자 그가 심화조 사건 때 김성호를 반동 혐의를 씌워 죽였으며 이후 부부 사이가 완전히 벌어졌다는 주장도 있다.

여기에 그에게 또 시련이 찾아왔는데 사로청 비서 최룡해가 황색바람 혐의로 숙청당하면서 사로청 간부 김동연, 리학철, 박병서, 리찬[5] 등이 안기부에게 매수되었다는 혐의로 줄줄이 숙청당했다. 그가 직접적으로 잘못한 것은 없었으나 그는 당중앙위원회 청년사업부장이었고 숙청된 이들은 그와 모두 잘 아는 이들이었기 때문에 강원도 농장으로 혁명화를 당했지만 70년대에 당한 첫번째 혁명화처럼 엄중한 감시를 당하진 않아서 지역 간부들의 편의 속에서 요양하다 온 수준에 불과했다고 한다.

2.4. 김정일의 최측근

이후 쾌속 승진하였는데 1982년 10월 복귀하여 조선로동당 청소년사업부 부부장, 1985년 7월 청년사업부 제1부부장을 맡았으며 1986년 11월 최고인민회의 제8기 대의원, 1988년 12월에는 청소년 사업부 부장을 맡았다. 1989년 7월에는 조선로동당 청년 및 3대혁명소조부 부장을 맡았는데 이것이 그의 공식 직함이 되었다. 1990년 4월 제9기 대의원으로 재선하였으며 1992년 당 중앙위원회 위원이 되었다. 1998년 9월과 2003년 9월에 다시 제10기, 11기 대의원으로 재선하였다.

복귀 후에는 마약 밀수를 진두 지휘하고 3대혁명소조운동을 지휘하는 등 김정일의 최측근으로 권세를 부렸다. 그의 권세를 엿볼 수 있는 일화로 역시 후지모토 겐지의 증언인데 아무도 장성택을 '장 동지'나 '부부장 동지'라고 부르지 않고 깍듯이 '장 1부부장님'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2002년에는 남북경제실무접촉회담 때 북한 경제시찰단의 일원으로 서울을 몇 차례 방문하기도 했는데 삼성전자 및 한국의 여러 공장들을 둘러보고 갔다. 당시 "자본주의 문화를 맛보자"면서 밤마다 가라오케(노래방, 룸살롱) 등을 즐겼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런데 이때 그는 술에만 취하면 남한과의 경쟁이라는 단어 쓰기도 이젠 부끄럽다고 한탄하는 말을 했는데 이 때문에 2004년에 3번째 숙청을 당하는 빌미를 제공했다.

당시 기준으로 남한을 방문한 북한의 최고위 인사였다. 이때 북한경제시찰단의 명목상 단장은 박남기 국가계획위원장이었지만 실권자는 그였다고 전해진다. 박남기가 카드로 계산이 되는 자판기를 보고 신기해하면서 돈 떼먹으면 어떻게 되냐고 남한 측 관계자에게 자꾸 꼬치꼬치 캐묻자 그가 짜증을 내면서 반말로 빨리 가자고 명령했고 박남기가 즉시 꼬리를 내리고 이동했다고 할 정도였으며 남측에서 대접한 술에 취한 그가 늦잠을 자고 있으면 모든 사절단이 장성택의 객실 앞에서 도열해서 어쩔 줄을 모르고 기다렸다고 한다. 보다 못한 남한 측에서 호텔 객실 전화로 그를 깨우고 나서야 사절단이 움직일 수 있었다고 한다. 박남기는 후에 로동당 계획재정부장을 역임했으나 2009년에 실시되었던 통화정책 실패의 책임을 지고 2010년 3월에 공개처형되었으며 3년 뒤 장성택도 같은 죄목을 지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참고로 '남한 땅에 와 본 북한 최고위 인사'라는 그의 기록은[6] 2014년 10월 인천 아시안게임 폐막식을 맞아 방남한 황병서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이, 2018년 2월 평창올림픽 개막식에 참가한 김영남이, 2018년 4월 27일 휴전선 이남 땅을 직접 밟은 김정은이 각각 경신했다. 황병서랑 같이 왔었던 최룡해도 정치국 상무위원 겸 국무위원회 제1부위원장,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에 등극하면서 장성택의 기록을 깼다.

2.5. 세 번째 숙청

그러다가 2003년 10월부터 북한 언론의 동정 보도가 끊겼고 2004년 초에는 '권력욕에 의한 분파행위'를 의심받아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 및 수도건설부 제1부부장에서 해임당하는 등 상당히 부침이 심한 모습을 보여주었으며 그와 함께 인민보안상 최룡수 등 장성택 측근들도 대거 같이 숙청당했다. 월간 북한지의 연재에 따르면 당시 수도건설부를 장악하고 세도를 부리던 장성택과 내각총리 박봉주가 수차례 충돌했으며 장성택의 측근들은 장성택의 세도를 믿고 자녀들을 위해 초호화 결혼식을 열어주는 등 부화방탕한 생활을 즐겼다고 한다. 거기에 장성택이 김정일에게 아부한다고 나무를 뽑아서 옮겨심었는데 김정일이 자기가 그것도 못 알아볼 줄 알았냐고 대노한 묘목사건, 장성택이 김일성이 과거에 쓰던 창성특각을 장악해서 자신의 개인왕국으로 만들어 놀다가 걸린 특각사건, 김정일의 특명을 받고 인사권과 검열권까지 부여받아서 평양시 건설을 감독하려던 박봉주에게 장성택의 측근이었던 신일남 수도건설총국장이 장부장님 승인 없이는 보고서를 올리지 못하겠다고 박봉주에게 개기다가 이를 보고받은 김정일이 또 대노한 수도건설총국 사건 등이 연달아 발생하면서 김정일은 장성택이 지나친 세도를 부리고 있다고 여긴 모양이다. 장성택을 조지기 앞서 인민보안성 35국과 수도건설총국 등이 해산되었고 장성택의 측근들은 박살이 났는데 박명철 체육상도 이때 숙청당했다가 나중에 용서받고 복권되었다.

2006년 1월 29일 조선중앙방송 보도에서 당 중앙위원회가 개최한 음력설 연회에 참석한 인사들을 언급할 때 소개되어 조선로동당 근로단체·수도건설부 제1부부장 혹은 중앙위원회 제1부부장으로 복권되었음이 밝혀졌다. 2004~2006년 동안의 공백은 아직도 수수께끼인데 기존의 실각설 외에 두 번이나 사상 교육을 받은 탓에 건강이 매우 좋지 않아 아내 김경희와 함께 강원도로 요양을 간 것이 실각으로 와전되었다는 설도 있지만 장성택의 측근들도 줄줄이 잘렸다는 점, 김정일이 정동영 앞에서 그냥 아프다도 아니고 '폭탄주' 운운하면서 뼈가 있는 말을 했다는 점에서 단순 요양설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당시 실각설로는 김경희와 이혼한 후 사고사했다는 설도 있었고 반대로 김경희 사망 후 실각설도 있으나 모두 헛소문이 되었지만 당시 김경희와는 사이가 좋지 않은 듯하며 별거 중이라는 이야기가 있었다. 다만 이 잠적을 해명해 줄 만한 일화가 하나 있는데 2005년에 정동영 통일부 장관이 북한에 가서 김정일에게 장성택의 안부를 물었더니 "남쪽에 가서 폭탄주도 배우고 해서 아파서 쉬게 했다"고 말하며 웃었다한다. 어련하겠어

'흑금성' 박채서에 의하면 김정일에게 다음 세대는 집단지도 체제를 도입하자고 건의했다가 가택연금됐다고 한다. 정확한 이유가 어찌되었던 간에 이때 장성택 라인들은 하도 개박살나서 정성장 교수 등은 이후의 장성택은 이전만큼의 세도는 부리지 못했으며 김정은 승계 당시 일각에서 장성택이 김정은도 무력화하고 수양대군 놀이를 할 것이라는 분석은 장성택의 영향력을 과대평가한 것이라고 분석한 바가 있는데 이는 나중에 정확히 들어맞았다.

2.6. 김정은 승계 전후

2007년에는 10월(혹은 12월)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행정부장으로 승진해 다시 일선에 나섰다. 당 행정부장이 국가안전보위부인민보안부, 보안성, 검찰을 담당하는 직위인 것을 감안하면 사실상의 서열 2위 실권자였던 셈이다. 복권 후에는 단순히 행정부장이나 당 중앙위원회 제1부부장이라는 직함으로만 소개되었고 이후에도 그다지 존재감이 강하다고 볼 수는 없던 인물로 여겨졌다. 2009년 4월 최고인민의회 대의원에 재선되었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김정일의 건강이 악화되면서 김정은으로 승계가 진행되었고 후견인 격인 그의 지위는 점차 높아졌다. 2010년 6월에 행정부장에 더해 서열 2위인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에 임명되었음이 발표되었고 그 해 9월 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후보위원, 당 중앙위원회 위원, 중앙군사위원회 위원이 되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김정일의 3남 김정은의 후계구도를 주도하고 있다는 견해가 그때부터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이전까지 그는 김정남의 생모였던 성혜림의 도움으로 복권되었기 때문에 김정남 파였다는 것이 정설이었던 터라 이와 같은 부위원장 임명 소식은 북한 전문가들에게 꽤 혼란을 안겨주었다.

2011년 12월 김정일이 사망함에 따라 영구차를 함께 호위했고 김정은의 최측근으로 큰 영향력을 발휘할 것으로 추정되었다. 일각에서는 본인의 권력욕과 아직 막강하지 못한 김정은의 측근 세력 등으로 볼 때 김정은을 꼭두각시로 내세우고 자신이 수렴청정 권한 대행으로 정치일선에 나서거나 극단적인 경우에는 김정은을 내쫓고 자신이 그 자리에 앉을 수도 있다는 분석도 나왔다.

다만 그도 나이가 많고 그의 건강이 그리 좋지 않으며 이전에 두 차례 숙청당했을 때 자신의 세력을 거의 잃어버렸다는 주장도 있기 때문에 정권을 잡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주장도 있었다.

정치적 라이벌로 평가받은 또 다른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인 오극렬의 존재도 변수로 작용하는 것 아니냐는 관측이 있었지만 오극렬도 그와 마찬가지로 정치위원 제도의 폐지를 건의했다가 오히려 김일성의 노여움을 사 실각하는 등 경력에 오점을 남긴 바 있고 나이도 여든 살을 넘겼기 때문에 오늘내일하는 군부 바지사장일 뿐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실제로 김정일 사후 발표된 국가장의위원회 명단에 이름만 올리고 장례식 때는 거의 모습을 보이지 않아 숙청설이 나돌다가 2012년 1월 1일에 은하수관현악단의 신년음악회 보도에서야 이름이 언급되는 등 여러모로 다른 군부 실세들과 비교하면 건강이나 권위 모두 예전만큼 고려될 수 없어졌다.

2011년 12월 25일에 김정은이 김정일의 시신에 참배했을 때도 다른 측근들과 함께 동행했는데 뜬금없이 대장 군복을 입고 나와 총참모장인 리영호 옆에 서 있는 모습이 나오면서 장성택 실세설에 힘을 실어주었다. 그동안 그가 대장직에 올랐다는 보도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그가 대장 군복 차림으로 등장한 것은 놀라울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대장 군복 차림으로 등장하기 바로 하루 전에 방송된 <그것이 알고싶다>에 나온 한 북한 문제 전문가는 '장성택은 대장 칭호를 받지 못했기 때문에 군부에는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을 것' 이라고 발언했을 정도다.

28일에 금수산태양궁전에서 있었던 영결식에서도 김정은의 바로 뒤에서 영구차 행렬을 호위하는 등 계속 존재감을 과시했고 2012년 2월 15일에 4.25문화회관에서 개최된 김정일 생일 70돐중앙보고대회에서도 각각 대장과 상장 계급을 받은 당 비서 박도춘과 당 기계공업부 부장 주규창 등 다른 정계 인사들과 함께 재차 대장 군복 차림으로 참석했다. 그의 대장 진급은 정계뿐 아니라 군부에서도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위치에 올랐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어서 앞으로 김정은을 보좌할 핵심 측근으로 확실히 자리잡은 것이었다.

2012년 4월 11일 당대표자회에서는 정치국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친족들과 자신의 계파에 속하는 인물들도 대부분 요직을 차지했는데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았다.

김경희(당 비서), 최룡해(당정치국 상임위원 겸 인민군 총 정치국장(대장) 겸 당군사위원회 부위원장, 다음달 조선인민군 차수가 됨), 김원홍(전 조선인민군 총정치국 조직부국장. 국가안전보위부장(남한의 국가정보원장과 비슷한 위치) 겸 정치국 위원. 대장), 리명수(인민보안부장(남한의 경찰청장과 비슷한 위치). 정치국 위원 겸 당 중앙군사위원회 위원(대장)).

북한의 핵심 고위층 인사들 중에도 정치국이나 중앙군사위원회에서 상임위원이나 위원은커녕 후보위원 자리에서 맴도는 인물들이 쌔고 쌨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 당대표자회를 통해 장성택이 당정군에서 확실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고 여겨졌다.

2012년 7월 가장 큰 라이벌이라고 볼 수 있는 조선인민군 총참모장 리영호가 모든 공직에서 전격 해임되었는데 김정은 혹은 그가 선군정치로 지나치게 힘이 커진 군부를 제어하기 위해 야전 사령관 출신이 아닌 인사들로 정권을 이끌고 나가겠다는 의지가 보여진 것이 아닌가 하는 분석이 나왔다. 리영호의 후임으로는 장성택 라인과 우호적인 관계인 것으로 보이는 신임 차수인 현영철이 임명되었다. 김영춘 인민무력부장은 당 부장으로 이동했으며 우동측과 김정각 등 김정일 시대의 군부 인사들도 리영호의 해임 이후 은퇴하거나 모습을 드러내지 않게 되었다.

8월에는 경제특구 유치를 위해 중국을 방문했는데 유치 전략이 성공적이었는지 조선중앙통신에서 광복절에 즈음해 황금평-위화도, 라선 지구 공동개발을 위한 제3차 '조·중공동지도위원회'의 협상 결과를 보도했다. 북한 장성택 "경제특구 7곳으로 확대" 그는 이 공동 개발 협상 외에 중국 정부에 100억 달러 규모의 차관도 요청했다고 전해진다. 11월에는 중앙위원회 정치국 확대회의의 결정으로 국가체육지도위원회가 결성되자 위원장으로 임명되는 등 2012년의 그는 크게 두드러지지는 않지만 막후의 실력자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그 예시로 2012년 12월 차수에서 대장으로 강등되었던 최룡해가 2013년 2월 다시 차수로 재진급한 것도 장성택의 힘이 작용했다고 추측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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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이렇게 김정은이 있는데도 삐딱하게 앉기까지 했는데 '자세가 삐딱해서 북한의 실권자로 추측된다'는 대한민국 국방부의 발표가 있을 정도였다.

그 외에도 북한식 표현대로라면 '최고존엄'이 있는 자리에서 호주머니에 손을 넣거나 김정일 참배에서 경례한 손을 먼저 내리거나 하는 등 김정은을 의식하지 않는 듯이 보이는 행동을 하기도 했다.

그가 2013년 4월 김경희에게 전화해 "개성공단은 폐쇄하면 안 된다. 정은이를 좀 말려라" 라고 한 것이 도청을 당해 김정은 귀에 들어갔다는 얘기도 있다. 관련기사가 한 건 있으나 확인된 내용은 아니다.

2.7. 실각

2013년 2월 이후 그가 북한 내부의 동정 발표에서 사라졌다. 김정은 체제가 안정되면서 그의 영향력이 줄어들고 있거나 군부 내부의 강경론자한테 밀렸다는 설, 가택 연금설, 아니면 건강이 좋지 않은 부인 김경희를 돌보기 위해 잠시 중앙정계를 떠났다는 설 등이 난립했다.

그러다가 2013년 4월 1일 북한 최고인민회의 13기 1차 회의 주석단에 착석, 최룡해 옆자리에 앉아 건재함을 과시하였다. 이에 따라 2월부터 3월까지 그가 보이지 않았던 건 본인이나 부인 김경희의 건강 문제인 것으로 추정되었다. 일부 언론 기사에서 "장성택이 되면 개방해서 더 잘 살 텐데" 같은 북한 주민의 여론을 전하기도 했다.

5월에 국가의 채무를 갚기 위해 라선경제무역지대의 토지를 50년간 외국(중국)에 임대하는 것을 주도한 것이 (사후에 확실히)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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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7월 사진
군복을 입은 장성택과 날씬해 보이는 김정은. 당시만 해도 계속 김정은의 조력자로 남을 줄 알았는데… 이때만 해도 몇 달 후 겪을 자신의 운명을 전혀 몰랐을 듯하다.

2013년 10월 말만 해도 라선시를 시찰하고 "라선은 완전히 썩어빠진 자본주의의 온상이 돼 버렸다. 봉쇄를 더욱 철저히 하라"는 말을 해서 개혁과 통제 사이에서 가닥을 잡을 실세로 여겨졌다. 11월 6일 안토니오 이노키의 방북 때도 국가체육지도위원장의 입지로 모습이 비치기도 했다.

2.8. 처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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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계도 #==
한성희
홍일천
김혜경


2
신정희
(리씨)
김혜순
리혜경
김솔희
홍영숙
서영라
김이순
장길선
김영숙
김춘송
(자녀)
(부인)
(장남)

3
(셋째)
(아들)
(남편)
(딸)
(딸)
김경진
김인강
(부인)
김은송
김성강
(부인)
(자녀)
제갈순복
김송죽
김백연
김형록
김영성
(부인)
(부인)
김정현
(부인)
김원주
김구일녀
김형실
김형복

3. 평가

1967년 갑산파 숙청 사건도서정리사업으로 모든 반대세력이 사라져 김일성 유일영도체계가 확립된 후에 (오극렬 정도를 제외하면) 나름대로 독자 세력을 가지고 행보가 주목되던 유일한 인물이었으며 남한을 직접 방문한 김정일의 가장 최측근이기도 했고 중국이나 자본주의 문화에 대한 이해와 개방 지향성도 높은 편인 인물로 여겨졌다. 그래서 김정은 시대에 '2인자'로서 더욱 주목을 받았던 인물이지만 결국 북한 역사상 박헌영8월 종파사건 이래 최대의 숙청을 당하는 파란만장하고 비극적인 삶으로 끝나고 말았다. 아울러 박헌영은 최종적으로 종파사건과 함께 처형되었으니 같은 사건이라고 볼 수도 있다.

황장엽 망명 사건 당시 숙청당한 인구가 수천 명이지만 장성택과 함께 걸려 숙청될 인구는 수만 명으로 추정되었다. 그나마도 대부분이 당원들일 것이니 거의 북한 엘리트의 몇 분지 일이 타격을 입는 일이 된다. 반면 박봉주 내각총리 등의 생존으로 보아 시범타나 확실한 측근들을 빼고 의외로 상당수는 살려둘 것이라는 분석도 있었다. 실제로 지금 군부 인물 가운데 장성택 측근으로 분류되었다가 도리어 숙청에 적극 가담한 것으로 드러나는 인물들이 꽤 있기 때문이다

다만 3대를 보좌하면서 구축한 인맥이 너무 방대해 이들을 모두 숙청해 버리면 권력 공백 사태가 벌어질 것이라는 분석이 나왔다. 주석에서 언급한 것처럼 장성택의 측근으로 분류되는 인물들 중에서도 여전히 멀쩡하게 활동하는 것으로 확인되는 인물들이 몇 있는데 2013년 12월 17일 김정일 사망 2주기 추도행사에 장성택계로 분류되던 로두철 내각 부총리, 김양건 당 비서, 문경덕 평양시 당 책임비서 등이 참석했다.

카리스마나 사람을 끄는 능력은 있었는지 김일성의 외동딸 김경희가 학창시절 쫓아다녔고 이후에도 여러 사람들이 주위에 모였다. 이렇게 주위의 사람이 모여서 두터운 인맥을 당정에 구축하였지만 이게 김부자의 경계를 사서 두 번이나 분파행위로 실각할 정도였다. 그러나 어쨌든 김일성-김정일 시대에는 그나마 고개를 숙이고 있었기 때문에 살아남을 수 있었지만 처조카인 김정은이 집권하자 방심하다가 결국 비극적인 종말을 맞은 것 같다.

2000년대 남한에서 그를 직접 만나 본 이들에게 인품은 의외로 권위적이고 흐트러짐 없이 진중하며 강성이라는 평가를 받았는데, 이는 그가 당시 김정일에게 숙청을 당한 적이 있는 인물이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김정은 승계 후의 그의 유독 삐딱했던 자세들은 결국 그의 실각을 부르는 원인이 되었다는 평가가 많다. 그러나 북한에서 유일하게 수동적이지 않고 '큰 그림을 그릴 줄 아는' 능력 있는 관료라는 평가도 함께 받았다. #

13년 동안 김정일의 요리사로 일했던 일본인 후지모토 겐지의 저서 '북한의 후계자, 왜 김정은인가?'에 의하면 김정일포커를 치던 후지모토가 그날 딴 돈을 전부 잃자 자신도 모르게 욕설을 뇌까린 적이 있었는데 장성택이 옆에서 그 '칙쇼'란 욕을 듣고 다음날 아침 자신에게 "후지모토는 돈을 잃어서 무의식중에 그랬겠지만 장군님이 들으면 무사하지 못하니 다음부터 그런 일 없도록 하라"고 주의 주는 선에서 그치자 '장성택이 도량 있는 인물이구나'하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김정일의 가정교사였던 탈북자 김현식 교수는 "지도력과 추진력은 누구도 가히 따라올 수 없었고 인간적인 의리와 인간애는 참 두텁고 따뜻했다", "한 번 만나기만 하면 강렬한 자석과 같이 관계가 끊이지 않고 계속 다져지는 것이 그가 지니고 있는 독특한 힘이었다"라며 '몸에 배어있는 강한 지도력과 풍부한 인간성, 민족과 나라를 위한 희생정신'을 극찬했다. # 다만 그의 회고록은 김씨 일가에게 비교적 긍정적인 평가를 하고 있음을 유념해야 한다.

물론 그는 김씨 왕조의 부마로서 덕을 누구보다 많이 보았던 사람이고 그 체제를 비판하거나 바꾸려던(드러나는) 시도는 전혀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의 독특한 위상은 흥미롭게 보아야 할 지점이지만 그것을 추앙하거나 지나치게 안타깝게 여길 필요는 없다는 시각도 많다. 그저 김씨왕조가 자기 팔을 잘라낸 것일 뿐이다. 주성하 기자는 북한에서 일어난 대숙청인 심화조 사건에 깊게 개입한 장성택이 처형된 것을 자업자득이라고 싸늘하게 촌평했다. 본인이 그렇게 많은 사람을 죽였으니, 본인도 같은 꼴이 되는 것도 당연하다는 것이다.# 장성택 같은 인물까지 죽였으니 새로 권력을 잡은 최룡해 일파가 김정은에게 진심으로 충성할지도 의문을 제기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자기들도 그렇게 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음을 잘 알기 때문이다.

다만 최룡해는 해당 사건 이후 승승장구하며 현재까지도 북한 권력의 최일선에 서 있으면서 그야말로 잘 먹고 잘 살고 있다. 한 마디로 장성택과 달리 최룡해의 처신은 현저히 달랐고 그것이 장성택과 최룡해의 차이점을 너무나 잘 나타내는 요소가 되었다. 이후 최룡해는 나이에 의해 자연스럽게 권력 일선에서의 은퇴 수순을 밟고 있고 최룡해와 함께 권력을 잡았던 황병서도 죽지 않고 노병 대우 받으며 잘 사는 것만 봐도 장성택은 김씨 왕조에 어찌 되든 꽤나 위협적인 존재로 각인되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2013년까지 그나마 김정은 체제가 (상대적으로) 멀쩡하게 돌아간 이유가 장성택이 적당히 제동을 걸었기 때문인데 그가 총살된 뒤 김정은은 본격적으로 제4차 핵실험, 제5차 핵실험, 무수단미사일 발사 등을 지속적으로 도발을 강행하며 미쳐 돌아가기 시작한다. 물론 이후에는 그냥 자기 멋대로 행동하고 있는지라 딱히 이게 장성택이 제동을 걸어서 그런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점이 많다.

북한의 정권 중심부에서 필연적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가 상당한 부정부패에 연루되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1차 숙청 때의 행각이나 남한 방문 때의 행각을 보면 대단히 방탕하고 향락적인 인물로 추측되기도 한다. 사형 판결문에도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장성택은 2009년부터 온갖 추잡하고 더러운 사진자료들을 심복졸개들에게 류포시켜 자본주의 날라리풍이 우리 내부에 들어오도록 선도하였으며 가는 곳마다에서 돈을 망탕 뿌리면서 부화방탕한 생활을 일삼았다.... (중략) ..2009년 만고역적 박남기놈을 부추겨 수천억원의 우리 돈을 람발하면서 엄청난 경제적혼란이 일어나게 하고 민심을 어지럽히도록 배후조종한 장본인도 바로 장성택이다.

박남기놈을 부추겨 어쩌구 부분은 2009년 처참한 실패로 끝난 화폐개혁 이야기다. 당시 북한 정권은 심각한 민심이반에 당황해서 화폐개혁의 모든 책임을 박남기 재정경제부장한테 뒤집어씌워서 처형하였는데 화폐개혁조차도 장성택의 배후조종으로 몬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2009년 북한의 화폐개혁 항목 참조.


조카에 의해 숙청당했다는 점에서 삼국지조홍과 유사하다. 차이점이라면 조비는 조홍을 목숨만이라도 붙여 놓았지만 김정은은 장성택을 끝내 죽여 버렸다는 것이다. 서로간의 관계도 김정은과 조비는 둘 다 조카이긴 한데 장성택은 고모부, 조홍은 작은아버지라는 차이 정도는 있다. 즉, 장성택 입장에서 김정은은 처조카고 조홍 입장에서 조비는 친조카이며 숙청 사유도 동일하다.

4. 여담

  • 그의 처형 후 관련자 및 친인척 등 국내외 도합 7천여 명이 줄줄이 끌려나와 조사받았고 측근들 중 문경덕 당시 평양시당 책임비서[7] 등 일부 측근들이 숙청된 반면 김양건 로동당 비서와 지재룡 주중 북한대사 등 일부만 살아남았다. 친인척 대다수는 정치범수용소로 보냈다는 얘기도 나왔고 여러 대북 소식통에선 수십여 명 숙청, 300여명 수용소 감금 등이라고 보도했으나 2014년 6월 들어 사면되었다고 한다.# 반면 7월 모 대북 소식통에 따르면 8천여 명이 숙청당했으며 특히 장성택의 측근 장수길이 몸담은 54부(승리연합총회사) 인사 대다수가 처형되거나 수용소로 이용되어 궤멸 상태이고 전체 숙청자 중 대다수가 숙청 후 관리소로 보내지거나 지방으로 하방되었으며 장성택이 부부장으로 있던 조직지도부 산하 행정부는 사라졌으나 지방 도/분당으로 파견되었다고 전했다.#
  • 한국 대중들에게는 장성택이 고사포로 공개처형된 것이 정설처럼 취급되지만[8], 이는 낭설이다. 실제로는 장성택의 측근인 리룡하장수길이 고사포로 공개처형당했다.
  • 그의 최측근 인사였다가 대한민국으로 탈북한 노희창[9] 말하길, "장 부장은 평소에는 냉정하고 무표정이지만 최측근 인사들에게는 농담도 잘하는데다 성격도 화통하고 항상 밝은 편이고 굉장히 영민하고 똑똑한 사람이다. 그리고, 악기를 굉장히 잘 다루고 바이올린, 기타, 나팔, 피아노, 아코디언에 모두 다재다능하다. 체구는 작지만 운동신경도 매우 좋은 편이고, 특히 탁구는 프로 선수급으로 실력도 좋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다.#
  • 그래서 노희창은 자신의 소식통에 의하면 "김정은이 장성택을 숙청하고 난 뒤 나중에 후회를 했다." 라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결국 아무리 최측근 부하들이 듣기 좋은 소리를 김정은에게 해줘도 본인이 믿지 못하고 죄다 숙청해 버리기 때문에 아무런 소용도 없고 김정은이 잘못된 방향으로 간다고 생각할 때 진심으로 걱정해 주면서 브레이크를 걸어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가족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 실제로 그는 원래 성격상 처남이었던 김정일에게도 잘못한다고 생각하면 여러 차례 직언을 했던 사람이었고 김정은에게 권위도 잘 살려주면서 '집안이 잘 되어야 한다'고 쓴소리도 해줬던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김정은이 장성택을 죽여버리는 바람에 자신에게 항상 좋은 말만 해주는 부하들의 진심도 믿을 수가 없게 되었다."는 예측이 나왔다. 실제로 좋든 싫든 김정은이 엇나가고 잘못하고 있을 때 직언하면서 방향을 바로 잡아줄 수 있었던 유일한 사람이 그였을 것이다. 김정남을 비롯한 김정일의 측근들은 죄다 숙청했으니까 사실 그는 김정일을 오랫동안 보좌해온 경력으로 노련한 정치 커리어를 쌓아놓은 참모 역할을 해 준 것이나 다름없었고 결국 그도 김씨 일가 가족이니까 조카에게 잘 되어야 한다고 잔소리를 해주는 것이 김정은 본인한테도 최소한 손해는 없고 도움이 되는 길이었을 것이다.
  • 대한민국이 1988 서울 올림픽을 통해 국제적 위상을 높여가고 있을 때 그는 연수차 북한에 장기간 머물고 있던 중국 공안 부문 고위층 출신 인사와 가까이 지냈다. 이 인사가 연수를 마치고 귀국할 때 공항까지 환송 나온 그는 이 인사가 비행기에 탑승하려던 순간 소곤소곤 귓속말로 주변에 들리지 않을 낮은 음성으로 "우리 두 나라가 헤어지게 되더라도 최소한 적은 되지 않도록 노력합시다."라고 말했다. 중국 공안 부문 고위층 인사는 이때는 한중수교가 공식적으로 거론되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북한 내부의 누군가가 이런 생각을, 더구나 수령의 사위되는 사람이 그런 말을 입에 올렸다는 점에서 놀랐다고 한다. 그는 이때 이미 중국이 남한과 외교관계를 맺으라는 것을 내다보고 있었고 어쩌면 사태가 북·중 간에 단교까지 갈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 외부 세계와 수시로 접촉했기 때문에 북한에 갇혀 지내는 사람들과 달리 세상과 북한을 보는 눈이 달랐고 북한 내부 현실에 괴로워했다는 증언도 있다. 해외 출장길에서 종종 그의 본심이 여과없이 드러나는 적이 있었다고 하며 특히 만취 상태에서 그런 일이 잦았다고 한다. 한번은 공관에서 마련한 만찬에 참석해 술을 많이 마셔서 그를 호텔 객실까지 데려간 북한 외교관은 그의 말을 듣고 기겁하면서 놀랐다고 한다. 거의 인사불성 상태에서 그가 눈을 뜨고 "동무, 큰일났어. 술을 마시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어. 조국은 지금 말이 아니네. 사람들이 수만 명씩 굶어 죽어가고 있네. 그야말로 진짜 고난의 행군이네. 조국에서 굶어죽어가는 당원들, 간부들, 인민들을 생각하면 잠이 아니 오네. 술이라도 마셔야지. 굶어 죽는 사람들 불쌍해서 어떻게 하면 좋은가. 우리도 중국처럼 개혁 개방을 하면 얼마나 좋겠는가. 위에서 한번만 결심을 하면 될 일인데, 왜 그렇게 할 수 없는가?"란 말을 했다는 것이다. 저서 '장성택의 길' 177 페이지에 있는 내용이다.
  • 김정은김정일의 후계자가 될 것이라는 예측을 내놓은 유일한 사람이었던 일본인 요리사 후지모토 겐지는 자신의 저서 '북한의 후계자, 왜 김정은인가?'에 그와 관련된 몇 가지 일화를 적어두었다. 후지모토 겐지의 회고에 따르면 그는 수영을 할 때 함께 수영하는 사람들의 팬티를 벗기는 장난을 즐겼는데 자신에게도 그런 장난을 치려다가 실패했다고 한다. 그러자 그는 "후지모토는 눈치가 빠르군." 이라고 말했다고 하며 김정일과는 일하는 스타일이 달랐다고 한다. 김정일은 빠른 일처리를 선호했다고 하는데 그는 차근차근 진행시키는 스타일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현안을 논의하다가 김정일이 욱해서 그에게 재떨이를 집어던지는 경우도 있었으며 그 때마다 그는 바짝 엎드리며 김정일을 달랬다고 한다.
  • 2023년 북한에서 고전영화 '대홍단 책임비서'가 재방영되었을 때 그의 조카사위인 배우 '최웅철'의 얼굴이 CG를 써서 다른 배우로 교체되어 화제가 되었다.# 참고로 최웅철은 말레이시아에서 도주하려다 발각되어 처형되었다.

5. 대중매체에서

  • 박인권의 깜빵 시리즈 10권 평양여감방에서 김정일의 대표적 측근으로 등장해서 같이 술을 마신다. 하지만 어디에서 트레이싱을 해왔는지 우락부락한 올백머리 군인으로 나온다. 생긴 것 자체는 최룡해를 더 닮았다. 다만 직책은 청년 및 3대혁명소조부장으로 정확히 소개된다.
  • 전학생은 외계인에서 지옥 에피소드 中 깜짝 등장한다. 이전에 알리앤과 올스타팀이 관문지기 '목꼽추'를 만날 때 목꼽추의 몸이 꼽추가 되게 만든 미사일을 쏜 범인이 김정일이라는 것김정은이 직접 알려주고, 지옥에서 포상휴가를 받아[10] 이승으로 올라온 김정일이 아들과 함께 사이좋게 사망해 지옥으로 끌려간 뒤, 지옥에서 김정일을 철퇴로 때려 두 번 죽인 악마들에게 김정은이 복수하려 하자 땅 속에서 손을 뻗어 김정은의 다리를 붙잡아 방해한다. 이후 불의 기운을 얻은 시뻘갱이(...)로 각성한 김정은한테 무기로 쓰여 김정은이 장성택을 악마들에게 집어던지는 고모고모 부, 장성택의 몸으로 지면을 내려쳐 충격파를 일으키는 장성 어택에 이용당하고, 이후 김정은이 악마들을 굴복시키고 그들을 철권통치로 지배,[11] 알리앤 일행마저 노역에 끌고 가려 하지만 알리앤이 기지를 발휘해 김정은을 죽이면서 악마들이 김정은에게서 해방된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흐뭇하게 웃는 모습으로 퇴장한다.[12]
파일:스틸레인_장철우.png
* 스틸레인에선 그의 생김새와 이름을 딴 온건파의 수장 내각총리 장철우가 나온다.


[1] 원래는 1946년 2월 6일생으로 알려졌지만 이에 대해서 후지모토 겐지는 자기가 예전에 장성택 생일 잔치에 가봤을 때 1월 22일이었다고 했고 나중에 북한에서 장성택의 공식 약력을 발표하면서 1월 22일이 맞는 것으로 드러났다.[2] 2023년 기준으로는 '당 조직지도부 7과'에 해당된다. 장성택 생전에는 조선로동당에서 끗발 좋은 전문부서였으며 사법·검찰·공안 등 기관에 대한 조직지도 업무를 하던 부서였지만 그가 처형당한 사건 이후 부서원들이 대거 숙청되고 정치범수용소로 끌려가면서 와해됐고 조직지도부로 흡수통합됐다.[3] 1990 베이징 아시안 게임 당시 북한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이었던 명동찬의 미망인이자 탈북 가수 명성희의 어머니.[4] 물론 안전원을 면천시켜 결혼시켰다면 면이 안서니 장성택이 김대 학생이었다고 배경을 조작했다고 하면 말이 안되진 않고 실제로 이부진, 임우재 부부도 임우재의 배경을 가짜로 발표한 적이 있다. 하지만 장성택이 정말 안전원 출신인지는 전혀 증명할 수 없다는 게 문제.[5] 전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 겸 본부당 책임비서 리관필의 아들[6] 사실 이 기록은 장성택이 김정일의 매부라는 특수한 위치에서 나온 설레발 비공식기록에 불과하다. 장성택의 위세가 높은 것은 사실이지만 장성택보다 서열상 훨씬 높은 총리급도 연형묵, 김영일 두 사람이나 방한했고 부총리 중에서도 박성철 제2부수상, 김달현 부총리, 당 비서급으론 김용순, 김기남, 국방위 부위원장 겸 인민무력부장 김일철도 방한했다.[7] 2018년 7월 평북도당 위원장으로 복권.[8] 오죽하면 '고모고모부 총난타'라는 드립도 나왔을 정도.(...)[9] 채널A <이제 만나러 갑니다> 212화에 출연하기도 했다.[10] 김정일의 말에 따르면 지옥에서도 나쁜 짓을 계속 하다 보니 받은 것이라고 한다.[11] 이때 악마 曰, 내가 지금껏 봐 온 악마들의 악惡은 아무것도 아니었어.[12] 사실상 작중 세계는 묘사된 내용으로 보아 실제 역사처럼 김정은이 장성택을 처형한 평행 세계이기에, 알리앤이 장성택의 복수를 해 준 것으로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