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style="margin:-0px -10px -5px" {{{#FED11E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 당중앙위원회 정치국 | |||
<colcolor=#FED11E> 상무위원 | <colbgcolor=#fff,#222>2010년 9월 전원회의 김정일·김영남·최영림·조명록·리영호 | |||
2012년 4월 4차 당대표자회 김정은·최룡해(승진) | ||||
2015년 2월 정치국 확대회의 황병서 | ||||
위가나원 | 2010년 9월 전원회의 김영춘·전병호·김국태·김기남·최태복·양형섭·강석주·변영립·리용무·주상성·홍석형·김경희 | |||
2012년 4월 4차 당대표자회 김정각(승진)·장성택(승진)·박도춘(승진)·현철해·김원홍·리명수 | ||||
2013년 3월 전원회의 박봉주 | ||||
2015년 2월 정치국 확대회의 김양건(승진)·오수용(승진)·곽범기(승진)·최룡해(강등)[1] [1] 이때 현영철도 보선되었다는 추정 존재. | ||||
후보위원 | 2010년 9월 전원회의 김양건·김영일·박도춘·최룡해·장성택·주규창·리태남·김락희·태종수·김평해·우동측·김정각·박정순·김창섭·문경덕 | |||
2012년 4월 4차 당대표자회 곽범기·오극렬(강등, 복귀)·로두철·리병삼·조연준 | ||||
2013년 3월 전원회의 현영철·김격식·최부일 | ||||
2014년 4월 정치국 회의 리영길·오수용[2] [2] 이때 장정남도 보선됐다는 추정 존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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前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 조명록 趙明祿 | Jo Myong Rok | |
출생 | 1928년 7월 12일 |
함경북도 무산군 | |
사망 | 2010년 11월 6일 (향년 82세)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평양시 | |
국적 | [[북한| ]][[틀:국기| ]][[틀:국기| ]] |
학력 | 소련 공군대학[1] |
최종 계급 | 차수 |
직업 | 군인, 외교관, 정치가 |
주요서훈 | 김일성훈장(1982) |
정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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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북한의 군인 및 정치인이다.2. 상세
2.1. 초기 이력
1928년 7월 함경북도 무산군에서 빈농의 아들로 출생했다. 북한의 선전에 따르면, 지독하게 가난한 집안이라서 끼니 때우는 것도 고생이었으나 성격이 워낙 드세서 지주나 유지들도 조씨 일가에게 함부로 대하지 못하고 마을에서 인망이 높았다 카더라. 과거에는 조명록이 1920년대 초반에 태어났다고 잘못 알려져 있기 때문에 10대 후반이었던 1938년경부터 김일성의 빨치산 부대에서 전령병, 호위병으로 근무했다가 1940년부터 소련 정찰부대에 소속되었다고 알려져 있었지만, 그가 1928년생이 확인된 지금에서 생각해본다면 10살, 12살 때부터 소년병으로 싸우다가 12살에 소련군에 갔다는 소리인데 정황상 믿기 힘든 부분이다. 또한, 북한에서 발표한 부고를 보면 "해방후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품속에서 유능한 군사정치일군으로 자라나 우리 혁명무력의 강화발전을 위하여 헌신적으로 투쟁하였다."라고 되어 있다. 이말인즉 해방 전엔 딱히 경력이 없다는 소리다. 그리고 조명록의 약력에도 6.25 전쟁에 인민군 비행사로 참전한 얘기만 있다. 조명록급 거물의 항일 빨치산 경력을 누락할 리가 없는데 조명록 빨치산 소년병설은 진위가 의심된다.1950년 12월, 조선인민군에 입대, 1950~1952년 사이 소련 공군대학에 유학하였다. 귀국 후 공군 비행사로 6.25 전쟁에 참전하였으며 중앙당학교를 다녀 당간부가 되었다. 1975년 반항공부 사령관에 임명되었으며 1975년 11월, 중앙위원회 후보위원, 77년 11월 최고인민회의 6기 대의원, 80년 10월, 김정일 후계 체제가 완성된 조선로동당 6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 겸 군사위원회 위원, 조선인민군 공군사령관에 임명되었다. 1980년을 기점으로 괄약하게 승진한 조명록 등의 신진 장교들을 1980년 그룹이라고 한다. 이들 1980년 그룹에는 조명록 외에도 총정치국 부국장 리봉원, 해군사령관 김일철 등이 있었다. 1982년 2월 7기 대의원에 선출되었으며 4월에 최현 장의위원, 1982년 4월 2일, 중앙인민위원회 정령에 따라 김일성 칠순 기념 김일성훈장을 수훈받았다. 1977년 3월, 지병학 장의위원, 1984년 4월, 오백룡 장의위원을 지냈다.
1985년 5월에 공군 상장으로 승진했다. 86년 8기 대의원, 90년, 9기 대의원에 선출되었으며 1988년 4월 동독을 방문한 후 1992년 4월 23일, 최고사령관 명령 0024호에 따라 태병렬, 조명선, 김룡연, 리종산, 리하일, 리병욱, 리봉원, 리동춘, 장성우, 김일철, 김영춘, 김봉을, 전재선, 박기서, 김리창과 함께 대장으로 진급하였다. 1994년 7월 김일성 장의위원, 1995년 2월, 오진우 장의위원을 지냈다. 1995년 10월 6일, 모범적 군인으로 선정되어 김정일로부터 표창을 받았다. 1994년 공군대표단장으로 이란, 쿠바를, 1998년에 시리아를 방문했다.
김현식의 증언에 따르면 1989~1994년 사이 원응희의 주도로 소련 유학파 장교들이 대대적으로 숙청될 당시에 조종사들을 다 죽이면 공군은 살아남지 못한다면서 공군을 보호하려고 최대한 애썼다고 한다. 덕분에 숙청의 마수에서 벗어난 사람이 나중에 공군사령관을 지낸 오금철이라고. 참고로 1980년 당대회에서 선출된 19명의 군사위원들은 30년 동안 충원이 없어서 2010년에 이르면 6명을 제외하고 죄다 늙어죽거나 숙청당해서, 2010년 8월 시점에는 김정일, 조명록, 리을설, 김영춘, 리하일, 김명국만 남은 상태였다. 사실 노동당 조직 대부분이 이 꼬라지라서 정치국 상무위원회만 해도 상무위원들이 김정일 빼고 다 늙어죽은 상태였고, 검사위원회는 구성원조차 알려지지 않았다.
2.2. 김정일의 2인자
이때까지만 해도 유력한 장군 중 한명 정도였으나, 조명록은 김정일 집권 후 북한을 상징하는 인물 중 한 사람이 된다. 1995년 10월, 노동당 창건 50주년을 기념하여 오진우가 차지하던 인민무력부장과 총정치국 자리의 분배가 이뤄졌는데, 인민무력부장은 최광한테 돌아가고, 조명록은 리하일, 김영춘과 함께 조선인민군 차수로 승진 후 조선인민군 총정치국장에 임명되어 죽을 때까지 무려 15년간 직책을 유지하였다. 1995년 10월 7일, 조선로동당 창건 50주년 로력영웅 칭호를 받았다. 1998년 10기 최고인민회의가 소집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회 체제가 성립하면서 야전군 사령관 출신들을 선호한 김정일의 의도에 따라 김명국, 현철해, 박재경, 리명수, 김영춘, 김일철 등과 함께 김정일을 보좌하는 군부 측근 그룹을 형성했으며 10기 대의원 겸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에 선출되었다.1994년 김일성의 장례식 시점에서 공식서열 89위에 불과했던 조명록의 지위는 빠르게 상승하여 1996년 김일성 2주기 중앙추모대회에서 11위로 상승했으며, 1998년 9월 최고인민회의 10기 1차 회의 주석단 서열에서 7위, 1999년 최고인민회의 10기 2차 회의에서 김정일과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의 뒤를 이은 공식서열 3위에 올랐으며, 죽을 때까지 제1부위원장 자리와 대의원 자리에 유임되었다. 북한 국가 운영의 중핵인 국방위원회의 2인자, 그리고 인민군대의 정치사업을 담당하는 총정치국의 수장 자리를 차지하여 김정일의 뒤를 잇는 북한의 2인자로 자리매김하였다. 이 시기 정치사업을 강조한 김정일의 의도 덕분에 총정치국장이 처음으로 인민무력부장의 서열을 추월하였다. 그러나 김정일은 인민무력부장 김일철과 총참모장 김영춘, 노동당 군사부장 리하일에게도 그에 버금가는 권력을 실어줌으로 조명록이 자신의 권위를 위협하지 못하도록 철저히 조치했다.
1995년 7월, 김봉률 장의위원, 1997년 2월, 최광과 김광진 장의위원, 1998년 12월, 전문섭 장의위원을 맡았다.
2.3. 선군의 외교사절
2000년, 김대중 대통령이 방북했을 때 김정일과 함께 순안비행장에 나와 그를 영접했으며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방북 때도 참석했다. 그가 국제적인 무대에서 제일 유명해진 순간은 2000년 10월, 김정일의 특사로 워싱턴을 방문하여 빌 클린턴 대통령과 접견한 사건이었다. 당시 미국과 북한 관계는 여러 악조건이 겹치면서 뒤숭숭한 상황이었다. 북한은 미국에 테러지정국 해제를 요구했으나 클린턴 행정부는 2000년 5월 1일 발표한 연례테러보고서에서 북한을 테러지원국으로 유지하였으며, 2000년 9월, 김영남이 유엔 밀레니엄 정상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뉴욕으로 가던 중, 프랑크푸르트 공항에서 미국 아메리칸 항공의 보안검색에 항의하여 평양으로 돌아가는 사태가 벌어졌다.북한으로부터 미사일 수출의 중단, 장거리 미사일 개발 계획 포기를 받아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지만 역시 소득이 없던 미국 정부는 몇몇 불미스러운 사건에 대해 미국 정부와 관계가 없음을 강조하였다. 9월 27일, 뉴욕에서 개최된 김계관-카트먼 회담은 북한이 미국 법률요건을 충족시키면 테러지원국 지정을 해제한다는 <국제테러에 관한 미북 공동성명>에 합의하고 조명록의 방미를 논의하였다. 김정일은 북미관계의 전환을 위해 2인자 조명록을 특사로 보내기로 결정하였고, 김대중도 클린턴에게 조명록을 만나줄 것을 부탁하였다. 미국이 승낙하면서 이 소식은 전 세계에 공포되었다.
2000년, 백악관에서의 조명록 |
1999년 페리 보고서를 발표 이후 주로 팔레스타인 문제에 매달리느라 북한 문제에 소극적이었던 클린턴 행정부가 조명록을 만나기로 한 것에 미국의 북한 전문가들과 아시아 언론은 다들 깜짝 놀라는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미국 쪽에서는 차기 미국 대통령 선거에 정신이 팔려 조명록에게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2] 조명록은 10월 10일, 매들린 올브라이트 국무장관과 만났다. 올브라이트와 회담할 때까지만 해도 양복을 입고 있던 조명록은 백악관으로 가기 전, 군복으로 갈아입는 퍼포먼스를 보였다. 북측은 분명히 미국에 조명록은 군복을 입지 않을 것이라고 통보한 상태였고 이 때문에 미국의 담당자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으며 특히 공화당에서 클린턴이 공산주의 독재자의 주구와 놀아난다고 비난할 것에 대해 우려했다. 올브라이트는 그와의 만남을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국무부에서 나와 만날 때 조명록은 회색 양복 차림이었다. 하지만 30분도 채 안돼 백악관에 도착했을 때 그는 군복으로 성장하고 있었는데, 옷에 견장과 훈장(적어도 그중 하나는 베트남에서 미군과 전투를 벌이고 받았을), 그리고 기장까지 빠짐없이 달고 있었다. 그는 과장된 동작으로 김정일의 서신을 전달하며 대통령에게 평양으로 오라고 초청했다. 대통령은 이 제안을 검토해보겠지만, 어떤 방문이라도 그것이 성사되려면 사전에 조정해야 할 것들이 있다고 말했다. 조명록은 좀 더 명확한 답변을 요구했다. 대통령은 내게 사전 준비를 위해 먼저 가는게 어떻겠느냐고 말했다. 조명록은 대통령과 장관이 함께 온다면 "우린 모든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할 방안을 찾을 수 있을 겁니다."라고 말했다. |
조명록은 클린턴에게 북미 관계정상화, 북한 로켓을 3국이 발사해주는 것에 대한 국제사회의 재정지원을 조건으로 내걸며 미국이 이를 받아들이면 장거리 미사일 개발을 포기할 용의가 있다고 제안했다. 찰스 프리처드는 조명록이 클린턴의 방북의사를 받아내기 위해 거의 애걸조에 가깝게 말했다고 회고했다. 특사들이 외교적 성과를 거두지 못해서 수령의 노여움을 산 것을 생각한다면 총정치국장을 미국까지 보낸 퍼포먼스에도 불구하고 성과가 없을 시에 김정일의 분노가 클 것임을 생각한다면 조명록의 초조함은 논리적인 것이었다. 클린턴은 잠시 침묵했지만 매우 우호적인 태도로 조명록이 건내준 김정일의 친서에 대해서 "훌륭한 서한"이라고 높이 평가했고, 조명록을 비롯한 북한 대표단은 크게 안도했다고 한다. 클린턴과의 회담 후, 조명록은 올브라이트 장관, 윌리엄 코언 국방장관과 회담을 재개하였고 이후 10월 12일, 북미 코뮤니케가 발표되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 1. 북한은 사실상 장거리 미사일 개발을 포기할 것을 선언하여 미사일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음.
- 2. 북미 양국은 상호 적대관계를 포기하고 경제 교류, 협력을 확대할 것이며 미국은 북한의 체제를 보장하고 경제를 지원할 것임.
- 3. 정전협정체제를 평화체제로 전환하기 위해 4자회담을 비롯한 여러 가지 방안을 활용할 것임.
- 4. 클린턴 대통령의 북한 방문을 가능한 준비하기 위해 올브라이트 장관이 평양을 방문할 것임.
코뮤니케 발표 후 조명록은 올브라이트가 당황할 정도로 과격하게 술을 마셨다. 이후 올브라이트는 약속대로 10월 23~25일 사이, 평양을 방문하여 김정일과 2차례 회담을 가졌다. 조명록은 그때도 나와 올브라이트를 맞이하였다.
2001년 3월에는 중국 공산당 대표단 접견식에 참석하였으며, 2001년 9월 장쩌민 중국주석의 방북을 맞이했고, 2003년 4월에 중국을 공식방문하여 후진타오 주석과 면담했다. 그외에도 중국, 쿠바의 군사 관계자들과 면담하면서 군사외교를 수행했다.
2.4. 말년
2005년 10월, 연형묵 장의위원장을 맡았다. 2000년대 후반에 들어서는, 황순희 등과 함께 마지막으로 남은 항일 빨치산 1세대의 일원으로, 나이가 너무 든 상태였기 때문에 중병설, 사망 임박설이 계속 나돌았으며 김정일이 군부의 중핵인 조명록을 잃을까봐 우려하고 있다는 분석도 계속 나왔다.실제로 이 시기에 들어서 조명록은 골골거려서 김정일의 현지지도 수행도 하지 못했으며, 총정치국장직은 총정치국 제1부국장 김정각이 사실상 대행하고 있었다. 2009년 4월에 개최된 최고인민회의 12기 1차 회의에서 국방위원회의 권한이 강화되는 김정일 헌법이 통과되면서 제1부위원장인 조명록도 수혜를 볼 수 있을... 까 싶었는데 앞서 말했듯이 80대의 고령이라 12기 최고인민회의에 참석도 못할 정도로 건강이 안 좋아서 의미가 없었다. 김정일은 선군정치의 살아있는 상징과 같은 조명록의 죽음에 대비하기 위해 국방위원회를 대대적으로 확충하고 장성택, 주상성, 우동측, 주규창, 김정각을 새로 국방위원으로 영입했다. 2010년 4월, 김중린 당비서가 사망하자 빈소를 방문한 것이 마지막 공식활동이었다.
2010년 9월에 열린 조선로동당 제3차 당대표자회에서 최영림, 김영남, 리영호와 함께 정치국 상무위원에 선출되었으나 군사위원회에서는 마찬가지로 골골대는 영감인 리을설과 함께 물러났고, 불과 몇달 후인 11월 6일 10시 30분, 만성적인 심장병으로 인하여 82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당중앙위원회, 당중앙군사위원회, 국방위원회,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는 연명으로 부고를 발표, "조명록동지는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의 충직한 혁명전우이며 조국의 자유와 독립, 사회주의위업의 승리를 위한 성스러운 투쟁에 한생을 바친 우리 당과 국가, 군대의 저명한 활동가이다. 조명록동지는 생애의 전기간 일편단심 당과 수령, 조국과 인민에게 무한히 충실하였으며 민족의 자주권과 존엄을 수호하고 주체의 선군혁명위업의 승리를 이룩하기 위하여 자기의 모든것을 다 바쳐 투쟁하였다. (...) 조명록동지는 당과 혁명에 대한 무한한 충실성과 조국과 인민에 대한 헌신적복무정신, 투철한 혁명적원칙성과 고지식한 품성으로 하여 우리 당원들과 인민군장병들, 인민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 지금 전체 인민군장병들과 인민들은 우리 당과 국가, 군대의 탁월한 활동가를 잃은 커다란 슬픔에 잠겨있다. 조명록동지의 서거는 사회주의강성대국건설위업의 승리와 조국의 자주적통일을 앞당기기 위하여 힘차게 투쟁하고있는 우리 당과 군대, 인민들에게 있어 커다란 손실로 된다."라고 최고의 찬사를 퍼부었다.
당연히 장의위원회가 구성되었고 장의위원장은 김정일이 맡았으며 국장이 거행되었고 시신은 애국렬사릉에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 조선인민군 차수 직함으로 안장되었다. 황당하기 그지 없는 일이지만 죽은지 4년이 지난 2014년에 뜬금없이 조명록이 쿠데타를 일으켜 김정은을 체포했다는 개소문이 전파돼서 세계적인 주목을 받은 바가 있다. 고려대학교 남성욱 교수에 따르면 소위 증권가 작전세력들이 이런 북한 관련 찌라시들을 기습유포하여 장난을 치는 경우가 많다고 하는데 이와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
2016년 5월, 7차 당대회 개회사에서 김정은은 '혁명무력의 강화발전을 위한 투쟁에서 영웅적 위훈을 세운 귀중한 선군혁명전우'로 김광진, 김두남, 전재선, 윤치호, 리동춘, 김하규, 리진수, 심창완과 함께 조명록을 언급하였다.
3. 장의위원회 구성
- 위원장: 김정일
- 위원: 김정은, 김영남, 최영림, 리영호, 김영춘, 전병호, 김국태, 김기남, 최태복, 양형섭, 강석주, 변영립, 리용무, 주상성, 홍석형, 김경희, 김양건, 김영일, 박도춘, 최룡해, 장성택, 주규창, 리태남, 김락희, 태종수, 김평해, 우동측, 김정각, 박정순, 김창섭, 문경덕, 김명국, 김경옥, 김원홍, 정명도, 리병철, 최부일, 김영철, 윤정린, 최상려, 최경성, 오극렬, 백세봉, 현철해, 리명수, 김철만, 리을설, 리종산, 전재선, 리하일, 정창렬, 김윤심, 한동근, 조경철, 박재경, 변인선, 김우호, 김택구, 최세관, 정호균, 전창복, 오금철, 김명환, 김철, 김수학, 김인식, 심상대, 동영일, 리병삼, 김성덕, 리창한, 로흥세, 리두성, 임종춘, 강표영, 김형룡, 김격식, 리용환, 김춘삼, 리영길, 한창순, 현영철, 양동훈, 리봉죽, 박승원, 리춘일, 리태섭, 김송철, 조성환, 박광철, 윤경서, 양인국, 리히수, 리철, 오철산, 손청남, 황홍식, 강필훈, 김장수, 리영민, 박영래, 박영식, 김수길, 림종환, 김경찬, 김동화, 최재복, 김영남, 리정래, 주동철, 김승국, 주승남, 정운학, 차명성, 현병무, 김도운, 리승호, 방춘산, 손철주, 전하철, 로두철, 박수길, 조병주, 한광복, 김영대, 류미영, 리영수, 최희정, 오일정, 김정임, 채희정, 리재일, 리룡하, 박봉주, 전일춘, 김동일, 한광상, 정명학, 김동이, 홍인범, 강양모, 리만건, 로배권, 박태덕, 주영식, 오수용, 곽범기, 김히택, 림경만, 백계룡, 박의춘, 김형식, 김태봉, 전길수, 리무영, 안정수, 리룡남, 김용진, 류영섭, 박명철, 장철, 김기룡, 김병호, 차승수, 김정숙, 리용철[3], 김병률, 장병규, 량만길, 성자립.
4. 경력
임기시작 | 임기종료 | 비고 |
조선인민군 공군사령관 | ||
1980년 10월? | 1995년 10월 | |
조선로동당 6기 중앙군사위원회 위원 | ||
1980년 10월 14일 | 2010년 9월 28일 | 6차 당대회에서 선거 3차 당대표자회에서 소환 |
조선인민군 총정치국장 | ||
1995년 10월 | 2010년 11월 6일 | 임기 중 사망 |
10, 11, 12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 | ||
1998년 9월 5일 | 2010년 11월 6일 | 최고인민회의 10기 1차 회의에서 선출 최고인민회의 11기 1차 회의에서 재선 최고인민회의 12기 1차 회의에서 재선 임기 중 사망 |
조선로동당 6기 중앙위원회 정치국 상무위원 | ||
2010년 9월 28일 | 2010년 11월 6일 | 3차 당대표자회에서 선거 임기 중 사망 |
5. 참고문헌
- 간대욱, 「김정일 시대 북한 권력엘리트의 특성」 『사회과학연구』 17(1) (2001.12)
- 김구섭, 차두현, 『북한의 권력구조와 엘리트』(서울: 한국국방연구원, 2004)
- 김국신, 『미국의 대북정책』(서울: 통일연구원, 2000)
- 매들린 올브라이트, 『마담 세크러터리』 2권(서울: 황금가지, 2003)
- 박형중 외, 『김정일 시대 북한의 정치체제: 통치이데올로기, 권력엘리트, 권력구조의 지속성과 변화』(서울: 통일연구원, 2004)
- 이교덕 외, 『김정은 체제의 권력엘리트 연구』(서울: 통일연구원, 2012)
- 이승철, 「조명록의 방미와 올브라이트 방북」『관훈저널』 60(3) (2018.9)
- 정성장, 「김정일 시대 북한 국방위원회의 위상·역할·엘리트」 『세종정책연구』6(1) (2010)
- 통일부 정세분석국 정치군사분석과, 『2020 북한 인물 주요정보』(서울: 통일부,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