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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임한 직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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前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각 총리 박봉주 朴奉珠 | Pak Pong-ju | |
출생 | 1939년 4월 10일 ([age(1939-04-10)]세) |
함경북도 성진군 (現 함경북도 김책시) | |
국적 | [[북한| ]][[틀:국기| ]][[틀:국기| ]] |
학력 | 덕천공업대학 (학사) |
직업 | 관료, 정치가 |
주요서훈 | 김일성훈장(2002) |
정당 | |
지역구 | 평안남도 수복선거구(제100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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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북한의 정치인.내각 화학공업상, 당 경공업부 제1부부장 및 부장 등 주요 경제요직을 역임했으며 2차례에 걸쳐 10년간 북한의 내각 총리를 지냈다. 한때 김정은 정권의 경제정책의 상징으로, 김영남의 은퇴 이후에는 서열 3위에 이른 인물이었으나 2021년 1월, 8차 당대회를 기점으로 고령으로 은퇴하였다.
2. 행적
2.1. 초기 이력
1939년 4월 10일, 함경북도 성진군에서 출생, 덕천공업대학 졸업 이후 기계제작기사 자격을 취득했다. 고향인 함경북도 도당 부부장을 거쳐, 남흥청년화학연합기업소 책임비서를 지냈고 중앙위원회 부부장까지 승진했다. 1980년 10월, 6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에 선출되었으며 80년대에 그를 다룬 '군당 책임비서'라는 선전영화가 만들어질 정도라고 한다. 현장에서 성과를 올려본 경험이 있기 때문에 북한 계획경제의 한계점을 잘알고 있는 경제전문가로 북한의 대표적인 테크노크라트(기술관료)이다.2.2. 화학공업상
1998년 7월, 10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 9월 5일, 최고인민회의 10기 1차 회의가 소집되면서 홍성남 내각에서 화학공업상에 임명되었다. 2002년 3월 27일, 김일성 탄생 90주년 기념 김일성훈장을 받았다. 2002년 10월 26일부터 11월 3일까지, 박남기가 이끄는 경제시찰단의 일원으로 8박 9일 동안 대한민국을 방문, 남한의 경제발전상을 둘러보았다.2002년, 방남 때의 모습. 의자에 앉은 사람들 기준으로 오른쪽에서부터 국가계획위원장 박남기,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 장성택, 경공업부 제1부부장 김히택, 화학공업상 박봉주.[1]
경제시찰단이 방남할 당시 박봉주는 일정에 없던 재래 시장을 보여달라고 요구했다. 그래서 경제시찰단을 동대문 쇼핑물에 데려다 줬는데 박봉주는 가게에 들러 열심히 물어보고 메모했다. 그래서 기자들이 “왜 이렇게 열심히 물어보고 메모하냐”고 물어보자 박봉주가 “지금 볼 게 많은 데 눈이 두 개 뿐이오. 말 좀 걸지 마시오.”라고 대답한 일화는 유명하다.[2] 북한 경제가 가라앉은 뒤에 박봉주가 남한의 경제가 얼마나 역동적인지 돌아가는지 직접 확인한 것이다. 천안까지 내려가서 박남기와 함께 천안역에서 조치원역 사이 구간을 기차로 이동해보고 "승차감이 좋다. 기술력이 뛰어나다"라고 놀라움을 표했다. 대덕단지내 화학연구원도 방문하여 갖은 질문을 던졌고 남한에서 개발된 제초제를 보고 샘플을 요청하기도 하였다. 김히택과 함께 태광실업을 방문하여 신발 밑창까지 꼼꼼히 다 만져보기도 했다.
2.3. 내각 총리 1기
차후 김정일의 신임을 받아 2003년 9월 3일, 최고인민회의 11기 1차 회의에서 홍성남의 뒤를 이어 신임 내각총리에 선출되었다. 이때 총리 취임 직후 "장군님 명령이라도 나라 경제 발전에 실리가 맞지 않으면 방침을 다시 올려서 기각시키겠다."라고 김정일에게 직언했고 김정일은 그 말에 배짱이 마음에 든다고 박봉주에게 인사권과 검열권을 부여하면서 크게 총애하였다. 2005년 9월, 방북한 정동영 당시 통일부 장관과 회견하기도 했다.전임 홍성남 총리가 단행한 ‘7·1경제관리개선조치’를 이어받아 부총리 로두철, 곽범기, 전승훈 등과 함께 기업소 부업농제, 노무관리권 일선 이관, 독립채산제 기업 증설 등 시장경제 요소를 더욱 강화한 경제개혁을 단행했으며 그간 경시되어왔던 농업과 경공업에 대한 투자를 크게 확대했다. 그리고 김정일에게 당과 정부의 구조조정, 시장경제의 전면적 도입 등을 건의하였으나 북한 권부 내 강경파의 반발에 부딪혀 2006년 6월, 공금 유용 혐의로 40일간 직무정지를 당했고 2007년 4월 11일, 최고인민회의 11기 5차 회의에서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총리에서 해임, 김영일에게 자리를 내주고 실각했다.
2.4. 몰락과 재기
이후 평남 순천비날론련합기업소 지배인으로 강등당하고 김영일에게 자리를 내주어야 했다. 그러나 2009년 박봉주 실각에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당 계획재정부장 박남기의 화폐개혁이 참담한 실패로 돌아가고 박남기가 총살당하자 경공업비서인 김경희 등의 추천으로 2010년 8월 당 경공업부 제1부부장에 임명되면서 중앙정계로 복귀할 수 있었다. 2010년 9월, 3차 당대표자회에서 당중앙위원회 후보위원에 재선되었다.2012년 4월, 4차 당대표자회에서 김경희의 뒤를 이어 당 경공업부장으로 승진하였으며 이때 당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승진했을 가능성도 높다. 2012년 11월 14일 정치국 확대회의에서 국가체육지도위원회가 설치됨에 따라 초대 위원이 되었다. 2013년 3월 전원회의에서 정치국 위원으로 승진, 2013년 4월, 최고인민회의 12기 7차 회의에서 최영림에 이어 6년 만에 내각 총리에 복귀했다.
2.5. 내각 총리 2기
장성택 사후, 장성택의 인맥으로 평가되면서도 오히려 권력서열이 오른 박봉주 총리는 ‘가장 뜬 인물’로 평가받지만, 한때는 북한의 경제개혁 실패에 대비해 언제든 숙청당할 수 있는 대표적 ‘희생양’이 될 것이라는 분석이 나왔었다. 장성택의 울타리 안에 있던 박봉주가 군부의 견제를 받으며 ‘홀로서기’가 가능할지에 의문을 제기하는 시각도 적지 않았다. 전문가들은 “박봉주가 정치국 확대회의에서 장성택을 비판하며 울먹거린 여러 가지 이유 중에는 장성택의 전철을 밟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깔려 있다”는 해석을 내놓고 있다. 김정은이 그에게 힘을 실어줬다 해도 아직 막강한 이권사업을 거머쥔 군과 조선로동당, 국방위원회 등 버거운 조직들이 버티고 있어 가시밭길이 예상됐다.하지만 위의 분석이 무색하게 박봉주는 김정은 시대에 들어서 권력의 핵심부에 진입하여 북한경제를 재건하는데 중추적 역할을 맡게 되었다.
2016년 5월 조선로동당 제7차대회에서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승진, 당중앙군사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민간인인 내각 총리가 중군위에 포함된 것은 매우 상징적이면서도 이례적인 조치이다. 김정은, 김영남, 최룡해와 함께 빅4로 꼽혔다. 2016년 6월 29일, 최고인민회의 13기 6차 회의에서 새롭게 신설된 국무위원회의 부위원장으로 내각을 대표해 임명되었다. 2017년 4월 15일 태양절 105주년 열병식에서는 김정은의 바로 왼편에 위치해 강력한 실세임을 과시했다. 하지만 박봉주의 높아진 위상에도 불구하고 그의 역할은 어디까지나 내각에 대한 당적 지도를 상징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냉소적인 분석이 있으며 박봉주 개인이나 내각 자체의 힘은 그리 강력하다고 보기 힘든 상태이다. 실제로 김정일은 2003년 박봉주를 등용하면서 거의 전권 위임에 가까운 막강한 권한을 주었으나 김정은은 박봉주의 지위는 높여주었지만 그에 뒷받침되는 실질적인 권력까지 부여하진 않았다.
2017년 10월,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제7기 제2차 전원회의 집행부로 선출되었으며, 2018년 4월 20일,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제7기 제3차 전원회의 집행부로도 선출, 첫째 의정 토론을 맡았다.
2.6. 당 부위원장 시기
2019년 4월 10일,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제7기 제4차 전원회의에서 내각총리 해임이 결정됨에 따라 정무국 부위원장으로 조동되었다. 4월 11일에 열린 최고인민회의 14기 1차 회의에서 내각총리에서 퇴임, 자강도 당위원장 김재룡이 후임 내각총리에 임명되었다. 회의에서 국무위원회 부위원장에 유임되는 등 아직도 정치적으로 건재함을 드러냈다.# 특히 91세의 김영남 전 상임위원장이 물러나고 대대적인 세대교체가 이루어진 이번 내각 개편에서, 80세의 고령인 그가 위상을 유지한 것이 주목할만 하다. 2019년 6월 29일, 김정은 국무위원장 추대 3주년 중앙보고대회에 참가했다. 하지만 2019년 이후부터 고령으로 인해서 주요 회의에 불참하는 모습을 많이 보였으며 나타나도 두발로 걷지도 못하고 휠체어에 실려다니는 모습도 여러번 보였다.2.7. 은퇴
그러다가 2021년 1월에 개최된 조선로동당 제8차대회에서 주석단에 포함되긴 했으나 모든 당직책에서 물러났다. 국무위원회 부위원장 자리는 한동안 유지하였으나, 2021년 9월의 최고인민회의 14기 5차 회의에서 최룡해의 제의에 따라 국무위원회 부위원장에서 해임됨으로 확실하게 모든 공직에서 은퇴하게 되었다. 그의 은퇴에 대해 많은 학자들은 김정은이 더 이상 시장친화적 경제개혁에 관심을 두지 않는 증거로 해석하고 있다. 정책 방향도 바뀌었고 나이도 많은 관계로 은퇴한 것으로 보인다.이후 정권의 주요 행사가 있을때마다 은퇴한 원로들과 함께 불려다니며 얼굴마담 역할을 하는 등 그래도 원로로서 예우는 확실하게 받는 것으로 보인다. 2021년 9월의 안전무력 열병식에는 김영남과 함께 주석단에 올라 김정은에게 아부하는 모습을 보였다. 2022년 정권수립 74주년 기념행사에 김영남, 최영림, 최태복, 김경옥, 박재경, 황병서, 김정각과 함께 초대받았다. 9월 9일에 열린 경축연회에도 다른 노간부들과 함께 참석했다. 건강관리를 잘 했는지 휠체어에 실려다니던 과거와 달리 그런대로 제발로 걷는 모습을 보였다. 2023년 7월 27일, 노간부 자격으로 조국해방전쟁승리 70돐경축 대공연, 기념보고대회, 열병식에 초대받았다. 한달 후인 9.9절 열병식에도 노간부 자격으로 초대받았다.
2024년 7월 8일, 김일성 30주기 추도식에도 김영남, 박재경, 김정각, 리명수, 태종수 등과 참석했으며 김영남과 함께 이름이 호명되었다. 9월 8일, 정권창립 기념 야회에 참석했다.
3. 현지료해
박봉주/현지료해 목촉 참조.4. 경력
임기시작 | 임기종료 | 비고 |
내각 화학공업상 | ||
1998년 9월 5일 | 2003년 9월 3일 | 최고인민회의 10기 1차 회의에서 선출 최고인민회의 11기 1차 회의에서 내각총리로 영전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각총리 | ||
2003년 9월 3일 | 2007년 4월 11일 | 최고인민회의 11기 1차 회의에서 선출 최고인민회의 11기 5차 회의에서 소환 |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경공업부 제1부부장 | ||
2010년 하반기 | 2012년 4월 11일 | 복권 4차 당대표자회에서 경공업부장으로 승진 |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경공업부장 | ||
2012년 4월 11일 | 2013년 3월 31일 | 4차 당대표자회에서 임명 2013년 3월 전원회의에서 조동 |
조선로동당 6,7기 중앙위원회 정치국 위원 | ||
2013년 3월 31일 | 2021년 1월 10일 | 2013년 3월 전원회의에서 보선 7차 당대회에서 재선 8차 당대회에서 은퇴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각총리 | ||
2013년 4월 1일 | 2019년 4월 11일 | 최고인민회의 12기 7차 회의에서 선출 최고인민회의 13기 1차 회의에서 재선 최고인민회의 14기 1차 회의에서 퇴임 |
조선로동당 7기 중앙위원회 정치국 상무위원 | ||
2016년 5월 9일 | 2021년 1월 10일 | 7차 당대회에서 선출 8차 당대회에서 은퇴 |
13,14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무위원회 부위원장 | ||
2016년 6월 29일 | 2021년 9월 29일 | 최고인민회의 13기 4차 회의에서 선출 최고인민회의 14기 1차 회의에서 재선 최고인민회의 14기 5차 회의에서 은퇴 |
조선로동당 7기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 ||
2019년 4월 10일 | 2021년 1월 10일 | 7기 4중전회에서 선거 8차 당대회에서 직함 폐지, 은퇴 |
5. 여담
- 강성산과 더불어 임기를 2번에 나눠 수행한 북한의 총리이며 무려 3번이나 총리로 선출되어 김일성을 제외한다면 가장 많은 횟수를 자랑한다.
- 1948년 건국 이래로 1972년까지 24년간 수상직에 있었던 김일성을 제외한다면 북한의 총리 중 최장 재임기간을 자랑하는 총리다. 2003년 9월~2007년 4월 간 3년 7개월, 2013년 4월~2019년 4월까지 6년, 도합 10년 가까이 총리로 지냈다.
- 만 74세로 총리에 임명, 만 80세로 퇴임함으로 역대 내각수상, 정무원총리, 내각총리들을 합쳐 역대 2위 최고령 총리라는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1위는 만 79세에 임명되어 만 82세에 퇴임한 최영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