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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민(1974)/일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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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방송계 활동 이전2. 극동방송 PD3. 라디오21 PD 및 뉴스앤조이 시절 (2003~2007)4. 프리랜서 방송인시절 (2007~2011)5. 나는 꼼수다 활동기6. 박근혜 정부7. 문재인 정부8. 윤석열 정부 이후

1. 방송계 활동 이전

1974년 춘천 출생. 원래 춘천에서 살다가, 목사인 아버지가 서울의 홍익교회로 부임하자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이주했다. 서울 성동구 마장동 소재 홍익교회(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교단) 김태복 원로목사가 그의 아버지다.[1] 학창시절부터 방송반 활동을 하면서 휴대용 녹음기를 들고 다니며 취재, 라디오 PD의 꿈을 키웠다. 이어 1993년 강남대학교 신학과에 진학했고, 대학시절에도 방송사의 라디오 리포터를 하면서 방송국 입사 준비를 했다고 한다. 그가 방송에서 주목받게 된 계기는 대학교 2학년 때였던 1994년의 성수대교 붕괴 사고이다. 당시 라디오 리포터를 하고 있던 그는 성동구 자택에서 학교로 등교하던 중 성수대교 붕괴를 현장에서 바로 목격하고 취재를 했다고 한다. 항상 녹음기를 들고 다녔기 때문에 현장의 생생한 목소리를 취재하여 방송국에 전달한 것이다. 극동방송 입사 전에는 CBS에서 매주 일요일 오후에 방송하던 <사랑의 노래 평화의 노래>라는 CCM 음악프로그램 작가로 활동하기도 했다.

2. 극동방송 PD

목회자 집안 출신인 데다, 학창시절부터 방송반 활동, 리포터를 하면서 능력을 인정받았기 때문에, 졸업하면서[2] 바로 종교방송인 극동방송에 입사할 수 있었다.

이렇게 목사 집안에서 자라나서 원래는 보수 성향이었다고 한다. 1997년 대선에서는 이회창을 찍었다고. # 그래서 그런지 1998년 대학을 졸업하고 극우적인 극동방송 PD로 입사함[3][4]으로써 언론인 생활을 시작한다.

여의도 순복음교회의 조용기 목사와 같은 거대교회의 부패상을 비판하고자 하였으나 개신교계 언론이라는 회사 특성 상 공개적으로 방송에서 직접 비판하지 못하고, 자신의 홈페이지에서, 그나마도 부패상 자체가 아닌 윤리적인 차원만 비판했다[5]. 이에 대해 여의도 순복음 측이 극동방송의 사주인 김장환 목사에게 항의공문을 보냈는데, 김장환 본인도 대형교회(수원중앙침례교회) 담임목사이며, 여의도순복음교회와의 관계 문제도 있고 하여, "종교개혁을 하려면 밖에 나가서 해라"며 해직권고를 하였다. 이에 사표를 냈다고 한다. 당초 김장환은 그를 지방 송신소의 청원경찰로 좌천시키려고 했으나, 청원경찰복이 그의 거구와 맞지 않아서 그냥 사직권고를 했다고 한다.[6]

이후 CTS기독교TV의 PD로[7] 근무했으나[8] "꼴통"이라는 별명을 가진 상사와 트러블을 일으켜서 사직했다고. 다른 언론기관에서 정규직을 얻으려고 노력하지만, 보수가 주류인 기독교 방송계에서 이미 반골 진보인사로 찍혔기 때문에 프리랜서로 뛰게 된다.[9]

결국 김용민은 잘나가는 기독교방송에 소속된 PD에서 프리랜서 방송인이 된다. 하지만 이 시절 주경야독하면서 건국대학교 언론홍보대학원에서 석사, 국민대학교에서 문화교차학 박사를 받았다.

3. 라디오21 PD 및 뉴스앤조이 시절 (2003~2007)

2003년 2월 새롭게 개국인 인터넷 라디오 방송인 라디오21에 입사하여 제작3팀장, 보도국장, 편성제작국장 등을 지냈고, 여러 라디오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또 제작했다. 특히 김구라가 진행했던 프로그램[10]에 여럿 PD로 참여하면서 인연을 맺게되었고, 2012년 김용민이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할때 김구라가 출마영상을 보냈는데, 과거 라디오21 시절 막말했던 과거가 드러나면서 김용민은 선거에서 낙선하고, 김구라 역시 얼마 뒤 위안부 할머니 막말건으로 한동안 방송 활동을 중단해야 했다. 그리고 이 시점에 SBS러브FM <SBS 전망대>를 시작으로 평론가로서 라디오에 출연하기 시작했다. 2004년부터는 SBS파워FM <이숙영의 파워FM>에 조간 브리핑을 코너를 맡고 2012년 총선 출마 전까지 출연했다.

2005년 11월 라디오21을 퇴사했는데 당시 대표이사였던 양경숙이 2012년 공천헌금 비리로 구속되었을때 몇몇 언론이 김용민과 엮으려는 시도를 했었는데 이에, 김용민은 나는 꼼수다 봉주 19회에서 양경숙과 매우 험악한 사이에 고소까지 오갔으며 2007년 이후 일체 연락을 한 적이 없다며 그 증거를 보여 주겠다고도 했다.[11]

라디오21을 퇴사하고 얼마 뒤 진보성향 인터넷 기독교매체인 뉴스앤조이 편집장으로 약 1년여 활동했다 그만두고 완전한 시사평론가의 길로 들어선다.[12]

4. 프리랜서 방송인시절 (2007~2011)

본격적인 프리랜서 방송인 겸 시사평론가로 들어서면서 KBS, SBS, TBS, CBS는 물론 심지어 불교방송(BBS)에 라디오 시사 프로그램에 출연했었고, 김구라가 지상렬, 우승민(올라이즈밴드)와 함께 진행하던 XTM 도와주십SHOW에도 고정 출연하기도 했었다. 이때 한양대 겸임교수로 임명되어 신방과에서 강의하기도 했고, 목사의 아들답게 한국 개신교 역사 100년에 대해 많은 전문가 수준의 지식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2008년 이명박이 집권하자 야권 성향의 그는 대부분의 방송에서 퇴출되었다.[13] 그리고 한양대 겸임교수도 재계약이 거부되었다. 그래도 2012년 총선 출마 전까지 SBS 전망대와 이숙영의 파워FM에서 계속 뉴스브리핑을 진행했고 오세훈이 서울시장으로 있던 TBS의 라디오 시사프로그램에도 고정출연했다.

정권에 잘 휘둘리지 않는 기독교방송(CBS)에서는 지상파에서 끈떨어진 그를 끝까지 품었으나, 김용민은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후인 2009년 5월 31일, <시사자키 양병삼[14]입니다>의 주말 오프닝 멘트에서 댜음과 같은 멘트를 하게된다.
갑자기 이 대통령 생각이 납니다.
이 대통령은 교회 장로입니다.
이 대통령은 대표적인 친미주의자입니다.
이 대통령은 친일파와 손잡았습니다.
이 대통령은 정적을 정치적 타살했다는 비난을 듣고 있습니다.
이 대통령은 북한을 자극해 결국 도발하도록 조장한 것 아니냐는 의혹도 사고 있습니다.
이 대통령은 야당을 인정하려 들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정치는 날마다 꼬였습니다.
이 대통령 주변에는 아첨꾼들로 들끓었습니다.
이 대통령은 반정부 시위가 일어나니까 경찰을 앞세워서 가혹하게 탄압했습니다.
이 대통령은 그러다가 권좌에서 쫓겨나게 됩니다.
이 대통령은 해외로 망명하더니 그곳에서 비극적인 최후를 맞게 됩니다.
이 대통령은 결국 국민들의 외면으로 국장이 아닌 가족장으로 쓸쓸하게 세상과 작별하게 됩니다.

여기서 말하는 이 대통령은...
이승만 대통령입니다.
현재까지는...

표면적으로는 이승만조봉암사법살인한 진보당 사건을 빗대어 이야기 한 것이지만 당연하게도 이 멘트는 이명박 당시 대통령을 정면으로 비판한 이야기였다. 그는 이전에도 해당 프로그램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시국에서 이명박 대통령의 정치적 책임이나 시민분향소 철거 등의 행태에 대해 강하게 비판하고 있었다. 어쨌거나 이명박 정부 시대의 사회문화적 분위기가 대강 어땠나를 돌이켜본다면 그 기독교방송이라고 해도 김용민을 더 이상 품어 주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것은 안 봐도 짐작이 가능하다. 김용민은 이때 자신의 하차 사실을 사내 게시판을 보고 알았다고 한다.

이렇게 지상파에서 퇴출된 그는 2009년부터 한겨레의 자회사인 한겨레TV에서 김어준이 진행하던 김어준의 뉴욕타임스에서 한 코너를 맡았다. "시사돼지"라는 이름으로 시사평론을 하는 일이었다. 김어준과의 첫만남은 2006년에 SBS러브FM <김어준의 뉴스엔조이>에서 진행하면서 였다고 한다. 성향이 비슷했기 때문에 친구처럼 지내게 된 듯.

5. 나는 꼼수다 활동기

이렇게 2009-10년에는 한겨레TV의 김어준의 뉴욕타임즈에서만 활동했다. 하지만 2011년 나는 꼼수다의 공동진행을 맡으면서 그는 정규방송에 나올 때보다도 더욱 인지도 있는 유명인사로 발돋움하였다. 김어준에 가렸지만 대한민국 팟캐스트의 신기원을 연 나는 꼼수다의 공동진행자 겸 프로듀서로서, 라디오 제작 PD의 노하우를 이용하여 나꼼수가 본궤도에 오르게 하는 데 커다란 역할을 했다.

나꼼수 F4 중에서 취재나 진행보다는 주로 제작을 담당했기 때문에 나꼼수 진행 중에서는 발언이 많이 없다. 하지만 다른 멤버들은 이구동성으로 나꼼수의 성공적 안착에는 김용민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말하고 있다. 나꼼수는 대본 없이 진행되어 진행방향이 중구난방으로 튈 때가 많았는데, 수년간 라디오 PD로 현장에서 뛰었던 김용민이 이를 몇 번씩 듣고 깔끔하게 편집하고 여기에 빵빵 터지는 음원합성기술로 지상파에서는 들을 수 없는 신박한 사운드까지 추가해 지상파 방송 못지 않은 퀄리티를 유지하게 된 것이다.[15] 이때문에 나꼼수는 대성공을 했고, 일부 야권지지자에게만 알려져 있던 김용민도 전국구 인사가 되었다.[16]

그런데 정봉주가 감옥에 간 이후, 2012년 총선에 정봉주의 지역구에 출마했다가 낙선하면서 한동안 야권 패배의 원흉으로 불리기도 했다. 이 이야기의 자세한 사정은 아래 막말 파문에 적혀 있다. 사실 김용민은 정계에 입문할 뜻이 전혀 없었지만, 정봉주가 2007년 BBK 의혹을 제기한 것에 대한 사법처리로 구속되면서, 정봉주가 당 지도부에 자신의 지역구에 출마시켜줄 것을 적극 추천하여 출마하게 되었다.[17] 결국 막말파문으로 낙선했으며, 본인도 선거 출마를 크게 후회하고 있는 듯. 간간이 방송중에도 낙선드립을 치기도 한다.[18]

김어준이 박근혜 당선 직후 출국해 몇 달간 해외도피를 했을 때, 김용민에 연락해서 파리에서 접선하자고 하자, 출국 전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와이프와 합방을 했는데 바로 셋째를 임신했다는 일화가 있다.[19]

6. 박근혜 정부

2013년부터 박근혜 정부가 출범하자 야권성향 지지자들이 불리한 언론지형에 대항하기 위해 만든 미디어협동조합 국민TV에서 시사평론 및 연출로 관여했다. 그는 제작 뿐만 아니라 경영까지 참여했다. 하지만 국민TV는 조합시스템이라는 구조적인 문제 외에도[20], 개성 뚜렷하고 자기주장 강한 야권성향 논객들이 자기 고집만을 펴면서 배가 산으로 간 데다가, 주인없는 국민TV를 이용해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야심가들이 다수 합류해서 깽판을 놨기 때문에 창립 초기부터 계속 분쟁에 휘말렸다. 이 때문에 창립을 주도한 김용민도 상당히 힘든 시절을 보낸 듯하다. 그 바쁜 와중에 신학 대학원에 다시 들어가서 목사가 되기 위한 공부를 하기도 했다.

2014년 1월부터 런칭된 정봉주의 전국구의 초기 에피소드에 참가했다. 이후 국민TV에 전념하기 위해 하차했다. 하지만 국민TV는 계속 분쟁에 휘말렸고, 경영진도 분열되어 서로 인신공격을 했다.

결국 견디다 못한 김용민은 2015년 국민TV를 퇴사했다.[21] 그리고 팟캐스트 전문업체인 "일곱시간행불그네"를 창업하고[22] 독자적인 팟캐스트 사업을 론칭했다. 퇴사 후에도 자신의 방송에서 국민TV를 응원하는 메시지를 종종 날리고는 하는 것을 보면 나름 미련이 남아있는 듯. 결국 2016년 말 다시 국민TV로 돌아왔다.

2015년 6월에 국민TV의 민동기 PD와 공저로 언론계의 뒷부분을 상당히 보여주는 "뉴스를 읽어드립니다."를 내었다. 프롤로그에 따르면 MBC의 김장겸 보도본부장이 명예훼손으로 고소해서 그로 인한 소송비용을 대기 위해서라고 한다.

그 이외에 이동형이 주도하는 이이제이 협동조합에서 관리하는 쇼 개불릭(투돼지쇼가 확대개편한 이름)에 개신교 파트로 출연하고 있다. 본인의 전공[23]이기도 해서 다른 분야에 비해 개신교 분야의 디테일에 무척 강한 편이지만 종교 일반에 박식하지는 않은지 의외로 타 종교에는 간혹 디테일이 약한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그런지 본인이 진행하던 팟캐스트 <김용민 브리핑>이외에 국민TV에서 진행을 해 왔다.

7. 문재인 정부

문재인 정부가 출범하기 직전부터 지상파 블랙리스트에서 풀려서 2017년 1월부터 SBS에 출연하게 되었다.[24]

2017년 1월 11일 SBS 러브FM 시사전망대에 패널로 출연하고 1월 16일부터 고정출연하고 있다. 2017년 5월 15일 건강을 이유로 일시 하차하였다가 6월 26일 복귀했으며, 이후 9월 4일부터 해당 시간대에 자신의 이름을 내건 시사 프로그램 김용민의 뉴스브리핑의 진행을 맡게 되었다.

2017년 11월부터 김어준의 다스 뵈이다에 고정출연하고 있다.

2018년 3월부터 정봉주의 정치쇼를 진행하던 정봉주가 하차함에 따라서 그 MC자리를 이어받아 <김용민의 정치쇼> 진행을 맡게 되었다. 또 2018년 5월 28일부터 KBS 제1라디오에서 <김용민 라이브>도 진행하고 있다. 하지만 2018년 11월 29일자로 <김용민의 정치쇼>에서 전격 하차했다. 그리고 2020년 02월 18일을 마지막으로 <김용민 라이브>도 하차했다.

2020년 12월 25일 코로나19에 감염되었다고 SNS에 공개하고 자가격리에 들어가고 모든 활동을 중단한다고 선언했다. 확진 판정후 경기도 이천시에 있는 치료시설에서 격리를 했다고 한다.

2021년 1월 6일 사실상 코로나19 완치 판정을 받아 페이스북 활동을 재개했다.재개하자마자 폭풍 업로드 방송은 미르미디어에서 제작하는 <김용민의 측면승부>로 방송을 재개했다.

2021년 재보궐선거에서 여당이 참패를 거두자 여당에도 책임이 있다는 분석을 했다. 특히, 이낙연에 대한 비판을 강하게 했다. 재보선 이전에는 이런 김용민의 행보에 대해 비판하는 사람도 많았지만, 재보선 이후 수긍하는 분위기가 엿보여진다.[25]

재보궐선거 참패원인으로 조국 탓을 한 더불어민주당 2030 초선의원들 (장경태, 이소영, 오영환, 장철민, 전용기)에 대해서도 강하게 비판했으며, 범여권의 잇따른 뻘짓들에 회의를 느낀 나머지 정치평론을 서서히 줄이겠다는 입장을 SNS를 통해서 밝혔으며, 2020년 6월부터 꾸준히 만들었던 보수의 길을 묻다의 제작도 종료한다고 선언했다. 근데 5월부터 조선고구마사를 선보이는 중이다.

매주 수요일과 금요일 YTN 라디오 <이동형의 뉴스! 정면승부>에 고정출연하고 있으며 김용민의 팬들은 이러한 이동형의 의리에 감탄해 하며 더불어민주당이 이동형의 의리를 배워야 한다고 말했다.

2021년 6월 21일 본인의 유튜브채널 라이브 방송을 통해 차기 YTN 사장에 도전하겠다고 선언했고 시사 코미디 부활 등 갖가지 개혁방안을 공약으로 제시했다. 6월 28일 마감된 YTN 사장 응모결과 김용민 본인이 유일한 외부응모자였다. 이에따라 예선통과 가능성도 기대되었으나 2021년 7월 12일 YTN 측으로 부터 서류단계에서 탈락했다는 통보를 받았다.

이어 페이스북을 통해 국가기간통신사인 연합뉴스 사장 공모에 도전하겠다고 선언했다가, 얼마 안가 철회를 했는데 연합뉴스 사정을 사전 취재를 해본 결과 어떻게 손댈 수 있는 상황이 아니고, 천만분의 1의 확률이지만 본인이 사장이 된다면 아무 것도 개혁할 수 없기에 그렇다고 밝히며 자세한 내용은 2021년 8월 22일 방송 예정인 국물없는 기자회에서 말하겠다며 응원을 보낸 팬들에게 송구하다는 글을 남겼다.

페이스북에서 더불어민주당 이낙연 경선후보측의 유튜브 블랙리스트 문건을 제작한 것을 보고 선전포고를 한 것인지 물었으며, 해당 문건을 캠프내에서 작성하였는지 밝힐 것을 요구했다.

이재명이 대선 경선에서 승리하여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로 확정되면서 김용민은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이 이재명에게 도움이 되는 SNS 활동을 해야 한다며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의 SNS 활동 순위를 매긴 결과를 발표했다. 심지어 당내에서도 거세 비판이 나오고 있는 상황. 민주당 박용진 의원은 자신의 SNS에 "김용민씨, 이건 아닌 것 같다"며 "김씨의 이런 일들이 스스로를 권력화하고 민주당 의원들을 근거 없이 비난하게 하고 민주당의 분열을 가져올 것"이라고 비판했다. 하지만 이같은 비판에도 불구하고 김용민은 "민주당 국회의원들의 SNS 활동의 성실성, 적극성을 체크하는 건 민의의 대변자에 대한 합법적 감시활동"이라며 "민주당 간판 덕은 다 보면서 의무는 못하시겠다? 그럼 탈당해야지"라고 주장했다. #

2022년 3월 2일, 전과 11범 이명박에 줄섰던 보수팔이들의 행태를 비난하는 극우 및 친박성향이자 윤석열을 강도높게 비난해온 변희재의 글을 공유하며 이재명의 전과가 문제이냐며 옹호하며 국민의힘 윤석열 후보를 향해 고위검사(대검찰청 중앙수사부 과장)로서 피의자였던 아내 김건희 씨로부터 성상납을 받은 것 아닌가 라며 의심했다. 국민의힘은 강력한 법적대응을 하겠다고 선언했고 고발했다.

2022년 3월 9일 제20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용민이 적극적으로 지지했던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후보가 낙선해서 향후 행보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게 되었다. 본래 이재명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될 경우 정치평론을 중단할 예정이었지만...

약 5일 정도의 휴식기를 거쳐 2022년 3월 14일부터 유튜브 방송을 재개했다.

8. 윤석열 정부 이후

극우 논객이었던 변희재와 손을 잡고 윤석열 퇴진 운동 깃발을 들었으며, 별도로 2022년도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 목사고시에 합격했다. 또한 이 과정에서 변희재가 주장하던 태블릿 조작설을 받아들이고 윤석열과 한동훈이 태블릿을 조작했단 주장을 펼치고 있다.

2022년 7월 17일부터는 지난 4년동안 제휴를 했던 데마시안과 유튜브 제작쪽은 결별하고,[26] 평화나무가 직접 유튜브 콘텐츠를 제작하고 측면승부 이후 약 4개월여만에 박지희 아나운서, 고현준 시사평론가와 함께 팟캐스트 <김용민의 뉴스굥장>을 런칭한다. 2022년 7월 22일 김건희 성상납 발언에 대해 경찰이 김용민을 검찰로 송치되었으며, 2022년 8월 3일 서울서부지검에서 조사를 받게되었다.

2022년 11월 24일 한국기독교장로회 서울북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으며, 11월 27일 벙커1교회 담임목사로 취임하였다.

2022년 10월 시민언론 더탐사가 보도한 청담동 술자리 보도에 부정적인 의견을 피력하며 조금씩 갈등을 겪기 시작했으며 2023년 5월부터는 갈등이 표면화 되는 이른바 유싸가 시작이 된다. 2023년 더탐사 내부의 비리 문제를 고발하는 '두진서[27]를 만들었다. 한편, 선거제도 개편을 놓고 좌우집회를 함께했던 변희재가 이동형 작가를 비난하는 방송을 하게되지만 이에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시청자들의 비판을 받게되고 이동형 역시 김용민 TV 출연을 하차하는 등의 모습을 보이자 2023년 12월 말 변희재와 함께했던 강동서에서 하차한 것은 물론 이동형이 만든 커뮤니티 잇싸 탈퇴, 이동형 TV 출연도 하차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2024년 2월 18일 다시 잇싸 커뮤니티에 재가입을 했고, 이동형의 팟캐스트에도 다시 복귀를 하게 되었다. 변희재가 주장한 태블릿 PC 조작설에 대한 입장에는 변화가 없지만 변희재가 이동형을 비난할 당시 사실상 연락을 하지 않고 있으며 특히, 변희재가 소나무당에 합류하자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이게 되었다. 총선이 끝나고 한동안 잠잠했던 뉴탐사(구 더탐사)와의 갈등 양상을 다시 드러내고 있다.

[1] 모친은 수학교사로서 사회운동을 했다고 한다. 전교조 운동을 했다고 추정하는 사람도 있지만, 집안이 보수적이었다고 했으니 가능성은 희박하다.[2] 훈련소 퇴소 후 교통 의경근무를 했다고 하는데, 당시 병역기간이었던 26개월 근무가 아니라 짧게 근무한 듯하다. 1974년생은 병력자원이 넘쳐났기 때문에 100kg만 넘으면 방위병 처분을 받을 수 있었다. 이후 방송에서 공익이였다고 스스로 밝혔다. 동호대교 화물차 과적 단속 공익이라고.[3] 사실은 이미 95년부터 극동방송에서 인턴에 가까운 비정규직으로 보조PD 일을 했다고 한다.[4] 당시 PD직군으로 극동방송에 들어간 사람이 김용민이 유일했다.[5] 김용민이 문제삼은 것은 바로 조용기의 아들이 경영하던 스포츠 투데이. 이 스포츠신문은 국민일보 자회사로, 사실상 여의도순복음교회 자금으로 설립되었는데, 너무나 노출사진이나 선정적 기사로 도배하여 살색 잉크가 동났을 정도라고 한다. 김용민은 적어도 신도가 낸 돈으로 운영되는 신문이 이런 식으로 지면을 꾸리면 곤란하지 않냐는 문제제기를 한 것.[6] 이 때문에 김용민은 자신의 방송에서 심심하면 김장환을 깐다. 극동방송 시절을 자학개그로 절찬리 활용 중이다.[7] 제작PD가 아닌 편성PD로 근무했다.[8] 김용민 본인의 저서에 언급.[9] 그나마 CBS가 있었지만 이미 두 회사에서 찍혀서 자의반 타의반 나간 상태였던지라 똑같은 루트를 탔을 가능성이 크다.[10] 김구라 황봉알의 날방개그, 김구라의 뮤직구라부, 김구라 한이의 +18, 김구라의 아이디어 코리아, 김구라의 스타구라프트[11] 라디오21은 경영난을 이기지 못하고 제18대 대통령선거 이후 폐국했는데, 사실 김용민이 나간 이후 주요 청취자들이 이탈했다. 훗날 2013년에 참여하는 미디어협동조합 국민TV와 행보가 비슷했다.[12] 라디오21에서 일했던 시절에도 지상파 방송에서 평론가로 활동하기 시작했다.[13] 이명박 집권 전에는 많은 방송에 출연하다보니 한달 수입 천만원을 넘었다고 밝힌 바 있다.[14] CBS PD[15] 후일담으로 편집되지 않은 나꼼수의 원 음원 파일들은 모두 김어준에 의해 (좀 보자는 핑계를 대고 가져갔다고 함) 노트북채 폐기되었다고 한다. 그 이유는 진행이나 인터뷰 중의 막말이나 문제의 소지가 있는 말들이 나중에 정권측에 압수 당했을 때 그 부분만 발췌되어 정권이나 보수언론에 악용될 수 있기 때문. 김용민의 총선 출마시 막말 파문때 이미 그런 식으로 한번 악용된 바 있다.[16] 그런데 이렇게 밤새워서 편집을 했기 때문에 정작 나꼼수 진행 중에는 조는 일이 많았던 듯, 가끔씩 졸았다는 이야기가 나온다.[17] 처음에는 김어준에게 공천 오퍼가 갔으나 김어준은 극구 거절했고, 김용민이 대타로 나갔다고 한다.[18] 출마 당시, 와이프가 이혼서류를 내밀었을 정도로 크게 반대했다고 한다.[19] 결혼 후 애가 5년 동안 안 생겨서 자신이 고자가 아닌가 의심했다는 이야기를 팟캐스트에서 말하기도 했다. 와이프와 몸무게 차이가 3배라고 한다.[20] 수익모델이 불분명하고, 수익이 없는 반면 지출은 많은 지속가능성이 없는 경영으로는 버티지 못한다는 것이 상식인데도, 이들은 사원과 조합원의 자발성만을 요구했기 때문에 실패는 예정되어 있었다고밖에 볼 수 없다.[21] 김용민이 퇴사하자 국민TV는 더 어려워진다.[22] 직원은 두명이라고 한다.[23] 2016년에 한신대학교 신학대학원에 입학했다. 예장(대신총회 계열) 계열 대학 신학과에서 한국 기독교 장로회 계열 신학대학원으로 간 것이 독특하다.[24] 나꼼수 F4중에서 가장 방송역량이 뛰어나지만 2017년 초반까지 그 어떤 정규 방송(지상파 및 케이블 종편)에도 진출하지 못하고 있었다. 김어준정봉주는 모두 TBS 교통방송에 진출해 있고, 시사인 기자인 주진우도 간간히 출연하고 있었지만, 김용민은 2012년 총선 막말파문의 파장이 너무 크기 때문에 (거기에 야권인사에 대한 기피도 있어서) 출연을 시키지 않았다. 다만 극보수적인 TV조선의 토론 프로그램(아마도 강적들인듯)에서 섭외를 했으나, 본인이 항상 극딜하던 방송이라서 고사했다고 한다.[25] 2021년 새해 첫날부터 이낙연의 이명박, 박근혜 사면론때 난리가 났었는데 이미 그전부터 김용민은 이낙연의 행보를 강하게 비판했는데 이때는 김용민을 지지하는 쪽과 비난하는 쪽으로 나뉘었는데 사면발언 이후 김용민의 주장에 힘이 실리게 되었다.[26] 다만 쇼핑몰 부분은 계속 협업을 할 예정이다라고 밝혔다.[27] 출연자인 김일, 최숙, 정필의 앞자를 따서 만든 타이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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