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로동당 총비서 | |||
{{{#!wiki style="margin:0 -10px -5px" {{{#FED11E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 <colbgcolor=#c1c1c1,#444444><colcolor=#E40001,#FED11E> 서북5도당책임자 및 열성자대회 | <colbgcolor=#d1d1d1,#222222><colcolor=black,white> 북조선분국 책임비서 | 김용범 |
김일성 | |||
제1차대회 | 중앙위원회 위원장 | 김두봉 | |
제2차대회 | 김일성 | ||
제3차대회 | |||
제1차대표자회 | |||
제4차대회 | |||
제2차대표자회 | 중앙위원회 총비서 | ||
제5차대회 | |||
제6차대회 | |||
제3차대표자회 | 총비서 | 김정일 | |
제4차대표자회 | 제1비서 | 김정은 | |
제7차대회 | 위원장 | ||
제8차대회 | 총비서 | ||
상위 둘러보기 틀로 이동하기 |
<colbgcolor=#9fdaee,#104b60> 김용범 Kim Yong-bum | |
출생 | 1902년 8월 18일 |
조선 | |
사망 | 1947년 9월 7일 (향년 45세) |
북한 | |
직업 | 정치인, 사회운동가 |
소속 정당 | |
배우자 | 박정애 |
[clearfix]
1. 개요
일제강점기, 북한의 사회주의 운동가.조선노동당의 전신인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책임비서를 역임했다.
2. 생애
1902년 8월 18일에 출생, 소련 모스크바에 유학가서 공산주의를 공부하고 코민테른 요원으로서 평안도 지역에서 공산주의 활동을 벌이다 몇차례 구속되는 등 평안도 지역에서는 가장 거물급 공산주의자였고 이에 따라 해방 후에 조선공산당 평남도당 책임비서가 될 수 있었다.이후 1945년 10월 10일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이 설립된 이후에는 책임비서직까지 올랐다.[1] 1945년 12월 17일 김일성이 북조선분국의 제1책임비서로 선출되면서 김용범은 제2책임비서 직을 맡게 되었다.[2] 1946년 8월 북조선로동당이 창당된 이후에는 초대 중앙위원회 검열위원장[3] 직을 맡았으나 1947년 9월, 위암으로 사망했다.
김용범 외에 북한 지역을 대표하는 국내 공산주의자로는 현준혁도 있었지만 그가 1945년 9월 3일 일찍 암살된 이후로는 김용범이 북한 지역 공산당을 이끌게 되었다. 신탁통치 문제 이전까지 조만식을 비롯한 민족주의 진영과 심하게 대립한 정도는 아니었지만 현준혁에 비해서는 연대에 소극적이었고 또한 소련 유학 경험 등 해방 이전부터 소련과 연계가 있었기 때문에 친소련 성향이 강했다. 또한 박헌영 계열과는 연계가 없이 평양에서 공산주의 운동을 했기 때문에 박헌영이 아닌 김일성의 독자적인 조선공산당 북조선북국 설립 방안을 지지하면서 김일성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북한 극초기에는 김일성보다도 높은 직위에 있었던 인물이지만 김일성과 라이벌 관계였다기보다는 오히려 김일성을 북한의 지도자로 밀어주었다. 북한내 국내파 토착 공산주의자들 중 오기섭과 같은 인물들은 김일성을 견제하고 박헌영의 서울 중앙당을 지지하는 입장을 취하기도 했지만 김용범은 아내 박정애와 함께 주로 김일성을 지지하고 그와 협력하는 입장이었다.
이 때문에 김용범은 사후에도 북한에서 좋은 대접을 받아서 애국열사릉에 안장되고 1951년 평양에 김용범혁명유자녀초등학원이 세워졌다. 그의 아내 박정애도 숙청된 적이 있기는 하지만 김일성에게 충성하며 말년을 편하게 살다가 애국열사릉에 합장되었다.
3. 여담
북한 조선노동당의 초대 당수를 지냈다는 점에서 초기 북한의 역사에서 상당히 중요한 인물이지만 1947년 일찍 사망해서 밝혀진 정보가 별로 없고 여러모로 베일에 싸인 인물이다. 남한에는 알려진 사진조차 없을 정도. 물론 북한에는 사진이 남아 있으며 조선혁명박물관에 '위대한 수령님의 주체적당건설사상을 충직하게 받든 김용범동지'라는 설명 아래에 그의 초상화도 걸려 있다.[4]해방 이전부터 소련과 연계가 깊었고 가장 눈에 띄는 경력을 가진 공산주의자였으므로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책임비서 등 요직을 맡기도 했지만, 40대 중반의 나이에도 건강이 안 좋았으며 결국 46세에 요절하면서 북한의 역사에서 일찍 퇴장한 인물이다. 생전의 행적이나 아내 박정애의 일생을 볼 때 만약 일찍 죽지 않고 살아 있었다면 아내 박정애와 함께 8월 종파사건 등에서 김일성을 지지하면서 숙청당하지 않고 계속 살아남았을듯 하다. 최소한 박정애가 맡았던 직책과 역할들을 김용범이 맡았을 것이며 김두봉 숙청 이후에 최용건 대신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자리를 맡았을 가능성도 있다.
김일성이 집권하는데에 일정부분 역할을 한 친 김일성 인사였으므로 한국에서는 평가가 나쁠만도 하지만, 사실 인지도 자체가 너무 낮아서 김용범이 누군지도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5]
박정애와 이어진 계기는 상당히 극적인데, 공산주의 활동 과정에서 부부로 위장했다가 실제로 사랑에 빠져 결혼하게 된다. 박정애는 후일 김용범의 빈 자리를 채우듯이 북한의 핵심 인사 중 한 명으로 부상한다. 김일성이 6.25 전쟁 휴전 협정에 서명할 때 옆에 서 있는 여성이 박정애이다.
[1] 이 때 김일성은 여러 명의 집행위원 중 한명으로 선출되었을 뿐이었고 제2비서직은 오기섭과 김무정이 선출되었다.[2] 김일성에게 밀려났다기보다는 이때부터 건강이 별로 좋지 않아서 본인이 직접 김일성을 추천했다. 물론 직위와는 상관없이 소련군정의 지원을 받고 대중적 인지도도 높았던 김일성의 영향력은 책임비서 직에 오르기 전부터 갈수록 커져 가고 있었다.[3] 현재의 중앙검사위원장[4] 위의 프로필 사진은 북한 우표에 나온 초상화로 대략적인 외모를 유추해볼 수는 있다.[5] 역시 인지도가 낮은 편인 김두봉이나 최창익 같은 다른 북한 초기 정치인들보다도 인지도가 더욱 낮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