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15 13:51:40

김장하

파일:김장하_경상대.jpg
<colbgcolor=#000><colcolor=#ffffff> 이름 김장하(金章河)
출생 1944년 ([age(1944-12-31)] ~ [age(1944-01-01)]세)
경상남도 사천시 정동면
경력 남성당한약방 대표
학교법인 남성학숙[1] 이사장
남성문화재단 이사장
진주신문 이사장
진주환경운동연합 고문
형평운동기념사업회장
진주문화사랑모임 부회장
한국가정법률상담소 진주지부 이사장
경상국립대 발전후원회장
지리산살리기국민행동 영남대표
지리산생명연대 공동의장 겸 상임의장
진주오광대보존회 이사장
진주문화연구소 이사 등
남성(南星)

1. 개요2. 생애3. 남성당한약방4. 기타

[clearfix]

1. 개요

똥은 쌓아두면 구린내가 나지만 흩어버리면 거름이 되어 꽃도 피우고 열매도 맺습니다.
돈도 이와 같아서 주변에 나누어야 사회에 꽃이 핍니다.
대한민국의 한약업사, 전 문화기관단체인, 시민활동가.

MBC경남 다큐멘터리 <어른 김장하>로 전국적으로 이름이 알려졌다.


2. 생애

경남 사천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중학교를 간신히 졸업한 후 친구들이 학교를 다닐 때 삼천포의 한 한약방에서 점원으로 일하면서 낮에는 약을 썰고 밤에는 공부를 했다. 열아홉 살 최연소의 나이로 한약업사 자격을 얻어[2] 1963년 사천시 용현면 석거리에 한약방을 개업했고, 9년 뒤인 1972년 진주시 동성동으로 이전했다. 이곳 남성당한약방을 약 50년 동안 운영하였고 2022년 5월 말 은퇴하면서 문을 닫았다.[3] 그러나 정작 김장하 선생은 한약방을 운영해 번 돈을 개인을 위해 쓰지 않고 이 돈을 지역사회를 위한 지원으로 돌렸다.

일평생 동안 수많은 사회운동과 자선사업을 하며 나눔을 실천해온 독지가로, 대표적인 사례로는 1983년 학교법인 남성학숙을 설립해 이듬해 100억 원이 넘는 사재를 들여 명신고등학교를 설립해 10여 년간 이사장을 하면서 체육관과 도서관 등 모든 학교시설을 완비한 후에 1991년 국가에 기부채납한 일이다. 그는 20대 젊은 시절부터 가정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을 위해 남몰래 장학금을 주었고, 지금까지 김장하의 장학금을 받은 사람이 1000명을 웃도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의 지원은 교육뿐만 아니라 사회, 문화, 예술, 역사, 여성, 인권 등 지역사회 모든 영역에 걸쳐 있다.

그는 진주 지역의 각종 문화예술단체나 언론·역사·환경운동 등 시민사회 전 영역에 걸쳐 조건없이 지원해왔다. 1990년대 시민주로 창간했던 옛 <진주신문>의 주주·이사로 참여했고, 1995년부터 27년간 '진주가을문예'를 지원했다.[4] 국립 경상대학교 최초의 기부 건축물인 남명학관을 건립하는데 앞장섰으며 '진주문화를 찾아서'라는 문고 발간사업도 계속하고 있다. 형평운동기념사업회[5]와 진주문화연구소는 직접 설립에 앞장섰고, 남성문화재단을 통해 장학사업도 꾸준히 진행하는 등[6] 건강한 지역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이외에도 지금은 진주를 대표하는 지역서점이 된 진주문고가 어려웠던 시기 지역서점을 살리기 위해 두 차례나 큰 도움을 주었고, 여성평등기금 조성으로 가정폭력 피해여성 지원에도 힘쓰는 등 여성운동에도 아낌없이 지원했다. 극단 현장이 현재의 위치에 자리 잡을 때도, 진주여성민우회가 창립될 때도 김장하의 도움이 있었다. 남명학, 진주오광대, 진주솟대놀이가 재조명되는 데도 그의 손길이 닿았다.

2000년에 설립한 남성문화재단을 통해 다양한 후원을 이어왔던 김장하는 2021년 재단이 해산되자 당시 남은 기금 34억 원[7]경상국립대학교 발전기금재단에 기탁하며 사회에 환원하였다.[8]


2019년 1월 김장하 본인도 몰랐던 생일잔치에 진주 시민사회 각계각층 120명이 모였다.#

2022년 5월 은퇴 후 아내와 4남매, 손주들과 함께 사는 평범한 할아버지로 돌아갔다. 문을 닫은 남성당 한약방 건물은 진주시에서 복합문화공간 ‘진주 남성당교육관’으로 보존하기로 결정했다. 2025년 개관이 목표다.

3. 남성당한약방

본업이 한약업사이다. 1963년 사천에서 개업하면서 줄곧 가난한 학생들을 지원해주는 것을 시작으로 1973년 진주로 이전하고 50년이 넘는 세월동안 운영하면서 이곳을 거점으로 활동하였다. 진주에서는 한때 매출이 상당히 높은 한약방으로 소문난 곳이었다. 이곳에서 번 돈이 시민운동 활동의 원동력이 되었다. 진주에서는 '김장하' 하면 후원 잘해주는 어른으로 통해서 진주시민운동계에서 돈이 필요하면 곧장 이곳으로 달려와 상담을 받는다.

4. 기타

  • 이렇게 많은 후원을 하면서도 좀처럼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9] 누구를 돕게 되어도 보도자료 등을 일체 내지 않으며, 무엇보다 언론사 인터뷰를 하지 않기 때문에[10] 김주완 기자가 7년이 넘게 그의 주변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듣고 책을 썼는데 그 숫자만 대략 100명이 넘는다. 김 기자는 김장하와 함께 산을 오르거나 모임에 참석하면서 곁에서 그를 바라봤고, 카메라도 없이 갔다가 핸드폰으로 부랴부랴 촬영하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 그가 왜 학교를 설립했고, 왜 헌납했는지는 1991년 8월 그의 명신고등학교 이사장 퇴임사를 보면 알 수 있다.
    "내가 배우지 못했던 원인이 오직 가난이었다면, 그 억울함을 다른 나의 후배들이 가져서는 안 되겠다 하는 것이고, 그리고 한약업에 종사하면서, 내가 돈을 번다면 그것은 세상의 병든 이들, 곧 누구보다도 불행한 사람들에게서 거둔 이윤이겠기에 그것은 내 자신을 위해 쓰여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그런 이유에서 설립된 것이 이 학교이면, 본질적으로 이 학교는 제 개인의 것일 수 없는 것입니다. 앞에서도 말씀 드렸듯이 본교 설립의 모든 재원이 세상의 아픈 이들에게서 나온 이상, 이것은 당연히 공공의 것이 되어야 함이 마땅하다는 것이 본인의 입장인 것입니다. 그리고 본교가 공공의 것이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이 바로 공립화요, 그것이 국가 헌납이라는 절차를 밟아 오늘에 이른 것입니다,"
  • 다양한 분야에서 사회활동을 이어왔지만 언론 인터뷰를 극구 사양하고 정치권과 거리를 두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1990년대 첫 민선 진주시장선거를 앞두고 시민사회단체가 압도적으로 그를 진주시장 시민후보로 추대했는데, 그는 후보를 제안하러 오는 시민단체 대표들을 만나지 않으려고 자리를 피해 버리기도 했으며 주변에서 경남도문화상이나 진주시문화상, 경남교육대상을 추천하려고 해도 못하게 하거나 '본인이 싫다는데 왜 하려고 하느냐'며 극구 사양했다는 일화가 있다.
  • 호 남성(南星)은 할아버지께서 지어주셨다. 김장하 선생은 '남성(=남두육성, 南斗六星)은 목숨(壽)을 맡은 별이라고, 남성이 비치는 곳에서는 오래 산다는 속설이 있다. 약방에서 지어준 약을 먹고 다들 오래 살자는 뜻이 담겨 있다'고 말했다.
  • 평생 자가용 없이 자전거를 타고 다닐 정도로 검소했다. 집도 따로 없이 한약방 건물 3층을 집으로 사용했으며, 해외여행도 다닌 적이 없는데 여행이라고는 2005년 평양을 방문한 것이 전부라고 알려져 있다. 이 역시 6.25 전쟁 때 전사했다고 알고 있었던 친형이 살아있다는 연락을 받고서였다.
  • 명신고등학교 이사장으로 있던 당시 전교조 해직사태가 터졌으나 정부의 압력에도 단 한 명의 교사를 자르지 않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 2022년 연말 MBC경남 유튜브와 TV를 통해 동시공개된 <어른 김장하> 다큐멘터리가 방영된 뒤 호평이 이어지자, 설 연휴 전국방송을 통해 해당 프로그램이 재방영되었다. 이 다큐의 감독 김현지는 그를 “살아 움직이는 사회보장제도”라고 표현했다.
  • 야구선수 최동원의 팬이라고 밝혔고, 지금은 NC 다이노스의 팬이라고 한다.# 다큐가 방영된 뒤 배주현 창원시 야구소프트볼협회 이사는 "이런 분이 NC 팬인 것이 코리안시리즈 우승보다 더 뿌듯하다"고 말했고, NC는 선수단의 사인이 담긴 유니폼을 전달하기도 했다.#
  • 2023년 11월 15일, MBC경남 다큐멘터리 '어른 김장하'의 극장판 버전이 전국 동시 개봉했다. 더 마블스 등의 대형 블록버스터에 밀려서 상영관은 1일 1~2회 정도만 확보한 편. 김의성 배우 등 영화계 명사들이 MBC경남 시사교양 유튜브 채널[11] '엠키타카'를 통해 응원 메시지를 보내기도 했다.


[1] 진주 명신고등학교[2] 시험을 치를 당시에는 미성년자였는데 설마 붙을 줄 그 누구도 몰랐다. 하지만 김장하는 합격 후 이듬해 1월 자격증을 받았다.[3] 이곳이 문전성시를 이루면서 전국 한약방 가운데 세금을 가장 많이 내기도 했는데, 이는 그만큼 성실하게 납세를 했던 탓이기도 하다.[4] 1억 5000만 원의 기금으로 '진주가을문예'를 신설해 매년 시와 소설 부분 수상자를 선정해 1500만 원의 고료를 지원하여 지금까지 20회 수상자를 배출했다.[5] 최초의 백정해방운동이었던 이 단체를 창립해 인권운동에도 적극 나섰다.[6] 문형배 헌법재판관도 그의 장학생 중 한 명이다.[7] 서경방송 주식 2만 주(평가액 28억 원) 포함[8] 이후 경상대학교가 명예박사학위를 주려하자 수차례 고사하다 개교 60주년을 맞은 2008년 대학측과 지역사회 인사들이 다시 설득에 나서자 마지못해 학위를 받았다.[9] 가난한 학생들에게 셀 수도 없이 많은 장학금을 지원했지만, 행사를 열지도 사진을 찍지도 않았다. 특히 그는 돈을 주면서도 어떤 말도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만 했다.[10] 언론에서는 수십 차례 그와 인터뷰하려고 했지만 그는 한 번도 응하지 않았고, 실제로 다큐멘터리를 제작한 MBC경남 김현지 PD도 2년 전 촬영을 시도했다가 포기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11] 타 권역 MBC 지방국들이 채널을 1개 갖고 있는 것과 다르게 MBC경남은 뉴스는 엠뉴, 시사교양은 엠키타카, MBC경남 뮤직 등으로 유튜브 채널을 세분화해 운영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