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본관 | 김해 김씨 |
출생 | 1912년 1월 18일[1] |
제주군 신좌면 (현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조천읍) | |
사망 | 1959년 2월 4일 |
제주도[2]] 제주시 조천면 (현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조천읍) |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
상훈 | 건국포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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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2001년 건국포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김재진은 1912년 1월 18일 제주도 제주시 조천읍에서 태어났다. 보통학교를 중퇴한 뒤 조천읍에서 부녀자를 상대로 노동 야학을 가르치다 체포 직전 1929년 1월 일본 오사카로 피신했다.그후 오사카의 고무공장에 위장취업한 후 1933년 4월 이좌구(李佐九)의 소개로 일본 전국노동조합협의회(全協) 화학(化學) 관서지부(關西支部)에 가입하였다. 김재진은 오사카 동지구(東地區) 책임자가 되었고, 그해 6월 일본공산청년동맹의 동지구책임자 정우생(鄭友生)의 권유로 일본공산청년동맹에 가입하여 문서 배포 등의 활동을 하였다.
김재진이 일본에서 노동운동과 청년운동을 통해 재일 한인들을 위한 활동을 하고 있던 무렵, 1933년 6월 하순부터 일제의 대대적인 검거가 시작되었다. 이에 김재진은 그해 7월 1일 일본 경찰에 검거되었다. 그리고 8월 9일 검사국에 송치되었고, 9월 8일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기소되어, 오사카형무소[3] 북구형무지소(北區刑務支所)에서 옥고를 치렀다. 이때 등을 지지는 고문이 가해져 건강을 크게 해친다.
옥고를 끝낸 뒤 1942년 고향으로 돌아와 조부의 정미소를 물려받아 운영했다.
1953년에는 조천초등학교 교실 수리비로 당시엔 거금이었던 300만원을 기탁했으며, 민주당 북제주군당 부위원장 등을 역임하기도 했다.
이후 1959년 2월 4일 조천에서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