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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문화훈장 수훈자 | |
<colbgcolor=#980000><colcolor=#EDE4D3> 연도 | <colbgcolor=#EDE4D3><colcolor=#980000> 1976 |
이름 | 김정한 |
분야 | 소설가 |
은관문화훈장(2등급) |
金廷漢
1908년 10월 20일 ~ 1996년 11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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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제강점기 부터 군사 정권 시기까지 활동한 대한민국의 소설가. 호는 요산(樂山)이다. 경상남도 부산부(지금의 부산광역시 금정구) 출신. 일본 와세다대학 제일고등학원 중퇴. 1908년 출생 1996년 사망. 부산을 대표하는 소설가[1]이자 부산 지역 문단의 거두였기 때문에 그의 작품을 읽다보면 부산 인근 사람들에게 익숙한 지명이 많이 나온다. 설사 이름이 다르게 나온다 할지라도 사하촌의 배경은 범어사와 청룡노포동 아니면 남산동 북부[2], 수라도의 배경은 양산시 원동면 화제리 명언마을 일대, 모래톱 이야기의 배경은 낙동강 하구 지역인 현재의 을숙도와 강서구 일대임을 어렵지 않게 유추해 낼 수 있다. 실제로 김정한 선생이 사하촌을 발표했을 당시 범어사의아이러니하게도 김정한 본인의 출신 자체는 정작 이런 가난하고 평범한 민중의 삶과는 거리가 멀었다고 한다. 김정한의 아버지인 김기수는 당시 동래구 북면(지금의 금정구 지역)에서도 손꼽히는 지주였고, 명정학교[3]라는 근대식 학교를 세우는 등 지역 사회의 개선에 힘쓴 인사였다. 그래서 김정한 본인 역시 이 명정학교를 거쳐 동래고등보통학교(현 동래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학교 교사로 활동했었다. 강남 좌파나 부르주아 문서에 나오듯이, 중산층 이상의 계층 출신 인사가 이렇게 일반 민중들의 삶에 관심을 가지고 개혁적인 성향을 가지는 것은 특이한 일이 아니다.
김정한은 현실에 참여해 불합리한 사회에 저항해야 하는것이 문학인이 갖추어야 할 덕목이라고 생각했다. 김동리가 김정한에게 "정한이 너 참여파 두목으로 한국문학 어지럽힐 거냐?"[4]고 물으니 김정한은 "문학도 인간이 살아가는데 더 좋은 환경을 만들기 위한 것 아니냐. 자네는 정서나 혼으로, 나는 기존의 환경을 고치기 위한 투쟁으로 말이다."라고 응수했다. 김정한의 이러한 문학 정신은 소설 산거족에 나오는 구절이자 김정한 문학비에 적혀있는 "사람답게 살아가라. 비록 고통스러울지라도 불의와 타협한다거나 굴복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사람이 갈 길이 아니다."라는 구절로 요약할 수 있다.
동아일보 동래지국장을 하던중 동아일보가 폐간되자 일제의 검열 밑에서 더는 글을 쓰지 않겠다며 1940년에 절필 선언한 후 26년간 글을 쓰지 않았던 적이 있었고[5]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성격이었기 때문에 일제강점기 때 일본 경찰에 여러번 피검당했다. 일제강점기 뿐만 아니라 복귀한 1960년대 이후 역시 권위적인 정권들에 비판적이었는데 유신 시대에 김광일 김영삼 대통령비서실장을 민주화운동으로 끌어들인 사람이 김정한이다. 전두환의 독재에 맞서 저항활동을 했던 5.7 문학협회(현 부산작가회의)의 창립자중 한명으로 이름을 올렸고 1987년에는 자유실천문인협의회의 후신인 민족문학작가회의(현 사단법인 한국작가회의)의 초대 회장으로 추대됐다.
부산일보 논설위원과 부산대 교수, 한겨레신문 초대 이사를 지냈으며 건강이 악화된 1990년대 초반까지 수십년간 매주 부산대와 동아대에서 특강을 했다. 말년에는 심장질환으로 인해 자택에서 칩거하다가 1996년 사망했다. 부산 수영구 천주교 부산교구 주교좌 남천성당에서 사회장으로 장례를 치르고, 양산시 물금면의 신불산 공원묘지에 안장했다.
부산광역시 금정구에 작가의 호를 딴 요산문학관이 있다. 요산기념사업회와 부산작가협회에서 이곳에서 매년 요산문학축전을 개최한다. 바로 옆에 김정한의 생가가 보존되어 있다.
2. 대표작
3. 수상
- 한국문학상
- 은관문화훈장
[1] 일본 유학시절과 서울에 일을 보러 잠시 방문할때를 제외하면 평생 부산 경남에서 머물렀다.[2] 제목인 사하촌(寺下村)은 절 밑의 마을이라는 의미로 사하구와는 무관한 제목이다.[3] 명정학교는 학생들이 1919년 3.1운동에 참가해서 일제의 탄압을 받아 폐교되었다. 간접적으로는 청룡초등학교와 금정중학교로 명맥이 이어지고 있다. 두 학교는 본래 범어사에서 세운 사립학교를 기원으로 하는데, 명정학교 또한 김기수와 범어사가 손잡고 세운 사립학교이기 때문이다.[4] 1960년대부터 한국 문학계는 순수한 예술로서의 문학의 가치를 추구(순수파)할 것인지, 아니면 현실을 직시하고 사회의 모순 및 문제점을 고발하는 형태로 활동(참여파)할 것인지를 두고 첨예한 논쟁이 이어졌다. 김동리는 이 중 순수파의 유력 인사격으로 활동했고 교편을 잡던 시절 사회주의 문학 운동 단체에 가입하거나 조선인 교원단체를 만들어 저항하던 김정한과는 정 반대의 입장을 취했다.[5] 문단 복귀작이 모래톱 이야기다. 그러나 그가 절필했다는 기간 동안 친일 작품을 썼다는 논란이 학계에서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