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북한의 정치인.2. 생애
1930년 2월 28일에 함경남도 고원군 산곡면 건천리에서 출생했다. 1942년 2월에 학교를 중퇴, 어려서 함경남도 산곡광산과 고원탄광에서 소년탄부로 일하다가 1951년 5월, 김일성의 눈에 띠어 민청 일군으로 발탁되었고 지도원에서 시작하여 현재의 락원군에 해당하는 퇴조군 민청 위원장까지 올라갔다. 1958년 8월, 중앙당학교를 졸업하고 이후 조선민주청년동맹으로 옮겨서 거기서 과장, 부부장, 부장을 지냈으며 다시 1963년 1월, 당중앙위원회 조직지도부로 옮겨 과장, 부부장으로 승진했다. 이때 조직지도부에서 일하기 시작한 김정일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의 최측근 중 한 사람이 된다. 김정일의 총애를 받아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까지 승진했었다고 한다. 이런 식으로 김정일의 총애를 얻은 사람들은 서윤석, 리제강, 문성술, 장성택, 현철규 등이 있다.1970년 11월, 5차 당대회에서 중앙검사위원에 선출되었다. 1973년 10월, 함경북도 책임비서에 임명, 1974년 1월에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에 보선, 1974년 11월에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승진,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보선되었다. 김일성의 칭찬을 받겠다고 매우 무리하게 살림집 건설 사업을 벌였다가 농사에 들어가야 할 인력과 자재들이 다 공사판에 흘러들어가는 바람에 1974년 함경북도 농사가 크게 망해버려서 1975년에 열린 전국농업대회에서 김일성이 김치구의 쪼인트를 깠다고 한다.왜 망했는고 하니 김치구가 경성군 주민들이 뜨락과 빈땅에 심은 구기자를 보고 개인리기주의라고 비난하면서 구기자 추방운동을 했다가 김일성에게 관료주의자로 비판받은 것이라고 한다.
북한의 선전에 따르면 김치구가 의기소침해있자 김정일이 농사에 경험 없는 김치구를 내려보내놓고 도와주지 않은 자기 잘못이라면서 다음해 농사는 더 잘 지어보자고 그를 달래어 주었고 이에 1975년에는 함경북도에선 대풍년이 들어 매우 높은 수확량을 거두었다 카더라. 김치구는 회고록에서 이게 다 김정일 덕분이라고 후빨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하지만 1977년에 또 뭔 사고를 쳤는지 함북비서에서 해임당했다.
해임당한 후에 한동안 줄담배를 피우면서 폐인처럼 지내다가 "치구는 과오를 범해도 당의 전사다. 내 반드시 잘못을 씻어 어머니 품, 당의 품에 안기리라"라는 글을 써서 바쳤고 이에 김일성이 그를 다시 용서하여 1977년 3월에 검열위원회 부위원장 및 조직지도부 부부장에 임명하고 시계도 내려주었다. 숙청의 귀재라고 불릴 정도로 김정일 반대파들의 회를 치고 다녔으며 덕분에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까지 승진했다. 1980년 10월, 6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에 재선되었다. 1981년 3월, 리근모의 뒤를 이어 남포시 책임비서에 임명되었으나 탈북자 커뮤니티 말에 따르면 1981년 5월, 사회안전부 정치국장인 심창완이 심장마비로 갑자기 죽으면서 후임 정치국장에 임명되어 다시 리근모에게 자리를 돌려주고 왔다. 초대 보위부장 김병하를 검열하여 숙청한 인물이 바로 김치구로 알려져 있다. 1982년 1월, 7기 최고인민회의 선거에서 중앙선거위원에 임명되었으며 7기 대의원에 재선되었다. 1982년 4월, 김일성 칠순기념 김일성훈장을 받았다.
1983년 10월 9일 17시에 사고로 사망했다. 김정일의 연회에 참석했다가 돌아오는 길에 주체사상탑 앞거리를 지나 김일성고급당학교에서 도로규정을 어기고 좌회전하여 옥류교로 가려다가 무궤도 전차에 충돌하여 즉사했다고 한다. 당중앙위원회는 부고를 발표, "동지는 당중앙위원회와 지방당조직, 사회안전부의 중요한 직책에 있으면서 우리 당조직들의 전투적기능과 령도적역할을 높이며 사회안전사업을 강화하기 위하여 자기의 모든 지혜와 정열을 다 바쳐 사업하였다. 김치구동지는 생명의 마지막순간까지 당의 유일사상체계를 확고히 세우고 당과 수령께 무한히 충실하였으며 우리 당을 견결히 옹호보위하고 당의 로선과 정책을 철저히 관철하기 위하여 적극 투쟁하였다."라고 괜찮게 말해주었다.
애국렬사릉에 안장되었으며 김정은 시대 들어서 과거의 대표적 충신으로 지목되어 련속소개편집물이 제작되는 등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3. 여담
사망 원인에 대해서 김정일이 초대한 연회에 참석했다가 음주운전을 하면서 귀가하다가 교통사고로 죽었다는 풍문이 전해진다. 또 다른 썰에 따르면 당시 국가보위부장 김병하를 내사하던 중에 죽었다는 말도 있다. 어쨌거나 김병하는 얼마 안가서 숙청당하고 리진수로 교체된다.또 다른 확인되지 않은 정보에 따르면 김영주의 측근으로 그의 정치적 재기를 도우려다가 교통사고로 죽었다고 하는데 정말로 그런 짓을 했다면 애국렬사릉은 언감생심이고 바로 실종되어야 정상이니 믿을만한 얘기는 못된다.
4. 참고문헌
- 서유석, 김정일-김정은 권력승계과정 비교분석, <2013년 북한연구학회 춘계학술회의 발표문>.
- 현성일, 북한의 국가전략과 파워엘리트: 간부정책을 중심으로(서울: 선인, 2007)
- (最新)北韓人名辭典(서울: 北韓硏究所, 1996).
- 조선대백과사전 4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