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28 19:47:39

김행

파일:Document_Protect.svg   편집 보호된 문서입니다.
문서의
ACL 탭
을 확인하세요.

{{{#!wiki style="margin: -8px"<tablebordercolor=#00205c><tablealign=center><tablebgcolor=#00205c>
파일:대한민국 대통령실 흰색 심볼.svg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color: #fff;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373A3C,#DDD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초대
신범식
제2대
강상욱
제3대
윤주영
제4대
김성진
제5대
임방현
초대
서기원
초대
이웅희
제2대
황선필
제3대
정구호
제4대
이종률
제5대
최재욱
초대
이수정
제2대
김학준
초대
이경재
제2대
주돈식
제3대
윤여준
제4대
신우재
초대
박지원
제2대
박준영
제3대
오홍근
제4대
박선숙
초대
송경희
제2대
윤태영
제3대
김종민
제4대
김만수
제5대
정태호
제6대
윤태영
제7대
천호선
초대
이동관
제2대
박선규
김은혜
제3대
김희정
제4대
박정하
초대
윤창중
제2대
김행
제3대
민경욱
제4대
정연국
초대
박수현
제2대
김의겸
제3대
고민정
제4대
강민석
제5대
박경미
초대
강인선
제2대
이도운
제3대
김수경
제4대
정혜전
}}}}}}}}}}}}
<colbgcolor=#082e59><colcolor=#fff> 박근혜 정부 제2대 대통령비서실 대변인
김행
金杏 | Kim Haing
파일:김행.jpg
출생 1959년 4월 5일 ([age(1959-04-05)]세)
서울특별시
본관 경주 김씨
현직 (주)소셜뉴스 부회장
재임기간 박근혜 정부 제2대 대통령비서실 대변인
2013년 5월 9일 ~ 2014년 1월 1일
제6대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 원장
2014년 2월 28일 ~ 2015년 11월 30일
링크 파일:페이스북 아이콘.svg | 파일:X Corp 아이콘(블랙).svg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colbgcolor=#082e59><colcolor=#fff> 학력 홍익대학교사범대학부속여자고등학교 (졸업)
연세대학교 가정대학 (식생활학 / 학사)
연세대학교 대학원 (사회학 / 석사[1])
연세대학교 대학원 (사회학 / 박사 과정 수료)
소속 정당

파일:국민의힘 흰색 로고타입.svg
경력 한국사회개발연구소 연구원
중앙일보 전문위원
오픈소사이어티 대표
국민통합21 기획본부장
국민통합21 대변인
위키트리 부회장
대통령비서실 대변인 (박근혜 정부)
제6대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 원장 (박근혜 정부)
국민의힘 공천관리위원회 대변인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
여성가족부장관 후보자
}}}}}}}}}

1. 개요2. 생애
2.1. 정치활동 이전2.2. 정치활동
2.2.1. 윤석열 정부 시절
3. 비판 및 논란4. 소속 정당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언론인 출신 정치인이자 위키트리 창업자.

2. 생애

2.1. 정치활동 이전

1959년 4월 5일 서울특별시에서 태어났다. 홍익대학교 사범대학 부속여자고등학교, 연세대학교 가정대학 식생활학과(現 연세대학교 생활과학대학 식품영양학과)를 졸업하고 1986년 연세대학교 대학원에서 사회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연세대학교 대학원에서 사회학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전두환 정부 시절, 집권 여당 민주정의당이 정당 산하에 설립한 여론조사 기관이었던 '한국사회개발연구소'에서[2] 당직자로서 10년 정도 근무하다가, 이후 1994년부터 중앙일보에서 여론조사 관련 글을 쓰는 '전문기자/전문위원'로 활동하였다.[3]

2.2. 정치활동

중앙일보를 그만둔 후 '디오픈소사이어티', '디인포메이션' 등의 여론조사 및 미디어 회사를 잠시 운영하다 정몽준 캠프에 합류하면서 본격 정치활동을 시작했다. 2002년 제16대 대통령 선거 국면에서 정몽준 후보의 국민통합21에서 대변인, 기획본부장을 지냈다. 그 유명한 선거 전날 저녁 노무현-정몽준 단일화 철회를 발표한 주인공이기도 하다.

당시 영상

이후 김행이 밝힌 바에 따르면 기자로 활동하다 첫 정치무대에 선 상황이었기 때문에 섣불리 발표를 맡은 것을 후회한다고 했다.[4] 이 사건으로 차기 정부의 대주주 내지는 차기 유력 대선 후보가 될 수 있었던 정몽준이 다시는 대권주자로 올라가지 못한 것은 물론이고 본인도 결국 이 한번의 사건으로 10년이 넘게 야인 생활을 해야 했다.

국민통합 21이 해체된 이후 의류 벤쳐회사 등을 운영하다[5] 2010년 위키트리[6]를 공동창업한 후 부회장을 역임하기도 했으며, 2012년 대선 국면 당시에는 여러 종편 시사 프로그램에서 박근혜 후보를 지지하고 방어하는 역할의 보수 우파 패널로 활동하였다.

박근혜 정부 출범과 동시에 그 유명한 윤창중과 함께 청와대 대통령비서실의 공동 대변인에 임명돼 2013년 12월까지 일했다. 참고로 김행의 청와대 대변인직 후임으로 임명된 사람이 바로 민경욱이다. 대변인직에서 내려온 이후에는 여성가족부 산하 공공기관인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원장직을 역임하였다.

2016년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를 선언한 뒤 새누리당 당적으로 서울특별시 중구·성동구 을 선거구의 예비후보로 활동하였으나, 공천에서 지상욱 후보에 밀려 탈락하였다.

2.2.1. 윤석열 정부 시절

2022년 지방선거 국면에서 국민의힘 공천관리위원회의 대변인을 맡았으며, 2022년 9월 13일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으로 선임되었다.

2023년 9월 일부 부처에 대한 윤석열 정부의 개각이 예상되는 가운데 김현숙 여성가족부장관의 후임으로 유력하게 거론되었고,# 결국 2023년 9월 13일 여성가족부장관 후보자로 지명되었다. #

2023년 9월 여성가족부장관 후보자가 된 후 재산으로 163억 원을 신고했다. # 10년전 대통령비서실 대변인 시절보다 140억원 증가한 것이다. #

10월 12일 국민의힘 최고위원회은 이날 회의에서 김 후보자의 사퇴 권고 의사를 대통령실에 전달했다.#

2023년 10월 12일, 여성가족부장관 후보자에서 사퇴하였다.# 전날 치러진 강서구청장 재보궐선거의 참패로 확인한 민심을 볼때 더 이상 임명 강행은 무리라고 판단한 여당과 정부의 입김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10월 12일 김행과 '20년 지기' 친구라는 구상찬 전 의원은 YTN '뉴스큐'에 출연해 "개표장에 있는데 밤 11시쯤 김 후보자에게 전화가 왔다"면서 "선거 결과가 굉장히 궁금했던 모양"이라고 말했다. 구 전 의원은 "고민이 많더라. 자기로 인해서 대통령을 비롯한 당이 어려워지는 것 같아 굉장히 자괴감이 든다고 했다"면서 "그래서 사퇴해야 될 것 같다는 얘기를 했다"고 밝혔다.#
“내가 김행랑? 코인쟁이라고요?”..與 ‘비례 신청' 재등장한 김행

낙마한 뒤 5개월가량 언론에 나오지 않다가 2024년 3월 초 국민의힘 비례대표 위성정당인 '국민의미래'에 공천을 신청했고 이후에 방송에 나와 윤석열 정부를 두둔하는 발언을 했다.

2024년 3월 12일 CBS라디오에 출연해 청문회 당시 제기됐던 의혹들에 대해 '가짜뉴스'라며 반박에 나섰고, 특히 이른바 '김행랑 논란'에 대해 "단 한 번도 도망간 적이 없다"며 "조작 날조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2024년 3월 18일 발표된 국민의미래 비례대표 명단에 들지 못하면서 낙마했다.

3. 비판 및 논란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김행/비판 및 논란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4. 소속 정당

소속 기간 비고

[[국민통합21|
파일:국민통합21 흰색 로고타입.svg
]]
? - ? 정계 입문


[[무소속(정치)|
무소속
]]
? - ? 정당 해산


파일:국민의힘 흰색 로고타입.svg
? - 현재


[1] 석사 학위 논문: 한국 중간층의 특성에 관한 한 연구 (1986)[2] 현재 여의도연구원의 실질적인 모태가 되는 기관이다. 민정당 산하의 기관이었던 한국사회개발연구소는 3당 합당 이후 민주자유당이 출범하자 김영삼이 별도로 꾸리고 있던 여론조사 기관인 '중앙조사연구소'와 합쳐져 '여의도연구소'라는 이름의 싱크탱크로 확대 개편된다.[3] 당시에는 특정 분야의 기사 작성이나 자문 활동을 위해 위촉한 외부인에게 '전문기자', 또는 '전문위원'이라는 직함을 주곤했다. 김행의 경우에는 학력이나 보수 정당에서의 당직자 경력이 있고 하다 보니 위촉을 했던 것이다. 사실 말이 좋아 전문기자 직함이지, 딱히 취재 활동도 없던 보직이라서, 중앙일보 기자들 사이에서 김행은 사실상 특채 알바 취급에 가까웠다는 것이 정설이다. 시중의 여론조사나 중앙일보에서 의뢰한 여론조사의 결과를 취합하고 정리하여 기사 형태로 가공하는 역할이었는데, 기사의 바이라인은 김행의 이름으로 나가긴 했지만, 실질적인 분석이나 보도의 방향은 데스크 쪽에서 전부 결정했다.[4] 정몽준 진영에 있던 단일화 지지파 정치인들은 '정치경력이 길었더라면 파국을 그대로 발표하는 독배를 들기보다 차라리 숨어버리는게 나았을 것'이라며 탄식하기도 했다.[5] 말이 좋아 의류벤처 회사이지, 본인의 이력에서 도드라지지 않는 점을 고려하면 쇼핑몰 내지는 동대문 패션타운 관광특구 부류 유통회사일 가능성이 높다. 본인의 전공과도 일치하지 않는 뜬금없는 영역.[6] 언론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수준의 황색매체이다. 그나마 요즘은 인사이트에 밀려 찾아보기도 어려워 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