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철의 역대 등번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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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주언 (2002) | → | 김형철 (2003~2008.5.4.) | → | 김연훈 (2008.5.5.~2008)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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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훈 (2007~2008.5.4.) | → | 김형철 (2008.5.5.~2010) | → | 김주형 (2011~2012) |
김형철 金炯哲 | Kim Hyeong-Cheol | |
출생 | 1980년 5월 26일 ([age(1980-05-26)]세) |
서울특별시 | |
국적 |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 |
학력 | 장안초 - 건대부중 - 덕수정보고 - 성균관대 |
신체 | 170cm, 83kg |
포지션 | 내야수 |
투타 | 우투좌타 |
프로 입단 | 1999년 2차 4라운드 (전체 27번, 쌍방울) |
소속팀 | SK 와이번스 (2003~2008) KIA 타이거즈 (2008~2010) |
지도자 | 홍익대학교 야구부 코치 (2012) 홍은중학교 야구부 코치 (2013~2021) 서울동산고등학교 야구부 감독 (20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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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前 야구 선수.2. 선수 경력
2.1. SK 와이번스
덕수정보고를 졸업하고 1999년 드래프트에서 2차 4라운드에 쌍방울 레이더스에 지명되었으나, 성균관대로 진학했다. 2002년 대통령기 전국대학야구대회에서 성균관대의 37년만의 대통령기 우승에 기여하며 최우수선수상을 받았다.대학 졸업 후 2003년에 쌍방울의 지명권을 계승받은 SK 와이번스에 입단했고, 그해 10월 1일 롯데 자이언츠와의 경기에서 이호준의 대수비로 투입되며 데뷔전을 치렀다.
그러나 그 후로는 1군에서 그닥 좋은 성적을 올리지 못했고, 기회도 대수비/대주자 요원으로 제한적으로 받았다. 아무래도 2루수는 정경배, 유격수는 김민재라는 확고한 주전이 있는데다, 3루수의 경우 2004년에는 틸슨 브리토가, 그 후로는 김태균이 주전 자리를 가져가면서 그다지 기회를 얻지 못한 것. 콜업 후 본인이 잘한다면야 김민재도 노쇠하고 김태균도 부진한 상황에서 기회를 잡았을 법도 했지만, 정작 김형철 본인도 1군에서는 썩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특히나 김태균의 성적 부진이 심해진 2006년이 결정적이었는데, 1군에서 조금씩 기회를 받았지만 60경기 47타수 7안타에 그쳤다. 여기에 2006년 정근우의 등장과 이대수의 발전, 2007년 최정의 3루 정착 등 김형철 입장에서는 부정적인 상황들만 이어졌고, 결국 2007년에는 1군 2경기 출전에 그쳤다. 2007년에는 신고선수로 전향되었다가 정식 등록되기도 했다.
2.2. KIA 타이거즈
2008년 5월 4일, 3:2 트레이드의 칩으로 KIA 타이거즈로 트레이드 되었다. 김형철과 함께 채종범, 이성우가 기아로 넘어갔고, 기아에서는 김연훈과 전병두가 SK로 이적했다.기아 이적 후 조금씩 기회를 받으며 친정팀 SK를 상대로 결승타를 치기도 했으나, 여전히 좋은 모습은 보여주지 못했다. 결국 2009년에 박기남이 김상현, 박기남 ↔ 강철민 트레이드로 합류하자 1군에서 밀려났고, 2010년 시즌 종료 후 방출되었다.
여담으로 희대의 막장경기인 KIA 타이거즈/2009년/6월/25일의 마지막 타자이다. 그러나 끝내기 포일로 경기가 끝나 포카리박 선생의 포카리를 맞지는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