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8 13:24:35

김호의 아이들


1. 개요2. 김호의 아이들 명단3. 당시 코칭스태프4. 애증의 관계5. 관련 문서

1. 개요

K리그 수원 삼성 블루윙즈의 전임 감독이었던 김호 감독이 2000년 이후 영입해 육성했던 유망주(양아들)들을 일컫는 말. 유사품으로 안양 LG 치타스조광래의 아이들이 있다. 이후 조광래 감독이 경남 FC의 감독을 맡고나선 경남 FC를 조광래 유치원이라 부르기도 했다.

야구 버전도 있는데, 이른바 강병철의 양아들이다.

1990년대 중-후반 데포르티보 팀을 이상형으로 삼아 스타가 없어도 조직적으로 움직이고 쉽게 지지않는 풍부한 재미가 있는 축구를 추구했던 김호 감독은 장기적인 관점에서 젊은 선수들을 육성해 수원의 축구를 완성하려 했다.

하지만 2003년 10월 김호 감독이 물러나고 차범근 감독이 영입되면서 이 구상은 통째로 어그러졌고, 김호의 아이들은 중용되지 못한채 뿔뿔히 흩어졌다. 차범근 감독의 가장 큰 실책으로 김호의 아이들을 통째로 날려먹은걸 드는 사람도 있을 정도. 비록 차범근 감독은 재임기간(2004~2010) 동안 2차례 리그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리긴 했지만 즉시 전력감을 중시하고 신인 육성을 등한시했고 이는 모기업 투자가 줄기 시작한 윤성효 때 맨땅에서 다시 키우는 결과를 가져왔다.[1]

김호 감독이 2007년 대전 시티즌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권집, 이여성, 고창현 등 옛 제자를 끌어모으고 새로 2군을 육성해 김호의 아이들 시즌2를 만들려 했으나 대전 전력이 워낙 약해 여의치 않았을 뿐더러, 이와중에 대전팬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았던 김형일을 비롯한 베테랑들을 상당수 방출하고 지나치게 어린 선수들 위주로 선수단을 꾸리고 무의미하게 선수단의 몸집을 키우는 초무리수를 두었으며, 각종 사건사고에 휘말리던 김호 감독은 2009년 시즌 도중 경질되었다.

이들을 명단을 하나하나 살펴보면 해외에서 크게 성공한 선수는 없어도 K리그 팬이라면 누구나 알고있는 톱 플레이어들이 많다. 이들의 특징이라면 수원에서 포텐 터진 선수가 몇 없다는거... 고종수, 곽희주만 수원에서 포텐이 터졌다. 조병국과 조성환을 여기에 넣기도 하는데 조병국은 성남에서, 조성환은 포항과 전북에서 맹활약했고 이를 바탕으로 해외 진출까지 했다. 나머지는 플레이스타일도 안맞는데다 유망주를 기다려주지 않는 차붐시절을 거치며 죄다 방출, 타 팀에서 포텐이 터지거나 만년 유망주로 끝났다. 그리고 고종수도 전성기가 워낙 화려해서 회자되지만 전성기가 너무 짧았고 수원에서 은퇴하지도 않았다. 수원에서 길게 활약했고, 마지막까지 함께한 선수는 곽희주 딱 한명 뿐이다.

한편 2018년 김호가 대전 시티즌의 대표 이사로 부임한 이후 고종수를 비록해서 지나치게 수원 삼성 출신의 김호의 아이들로만 감독, 코치 등의 내부 인사를 내정하며 대전 시티즌을 수원 삼성화 시킬 생각이냐면서 대전팬들로부터 큰 비난을 받아야만 했으며, 이외에도 자기 사람 심리를 내세웠고, 이는 이에 반발한 대전팬들이 대전 시티즌 비상대책위원회를 결성을 야기하였다.[2]

2. 김호의 아이들 명단

3. 당시 코칭스태프

수원 삼성 블루윙즈 시절 보좌하던 코치들 면면도 화려하다. 선수들과는 달리 코치들의 경우 상당수가 감독으로 성장해서 활약하고 있다. 다만 이 사람들이 전부 한 때 모여서 김호 감독을 보좌한 것은 아니다.

4. 애증의 관계

그러나 이들 중 일부는 친정 팀인 수원 삼성 블루윙즈를 굉장히 싫어한다. 대표적으로 조재진과 조성환, 조병국. 묘하게 다 조씨들이다. 물론 수원 팬들도 이들을 굉장히 싫어한다.

조재진은 상무 전역 후에 차범근이 자신을 윙포워드 또는 No.3 스트라이커로 쓰는 것[4]에 불만을 가져서 이적요청을 했다. 전북에서 뛰던 2008년 5월 5일 K리그 8라운드에서 선제골을 넣은 수원 선수가 전북 서포터즈 앞에서 춤추는 세리머니를 했다는 이유로 동점골을 넣은 뒤 수원 서포터즈인 그랑블루에게 주먹 감자를 날려서 물의를 빚었다. 수원 서포터 그랑블루는 이 세레머니의 보복으로 20라운드 수원 홈경기에서 당시 조재진과 스캔들이 있었던 백지영을 거론했는데 춤추면서 도발이랑 욕은 다르다며 발끈한 주제에 자기들은 아무 상관도 없는 제3자를 끌어들여 욕을 진탕 먹었다.

조성환은 수원을 떠날 때 연봉 및 출전시간 문제로 직접 이적 요청을 하는 등 많이 시끄러웠다. 포항 뛰던 2007년 6강 플레이오프에서 2위팀 수원과 맞붙게 되었을때 수원 서포터즈석으로 공을 냅다 차버렸던 적이 있고 2008년 5월 24일 수원전에서 에두에게 결승골을 허용하자 웃통 집어던지며 강력하게 항의하다 경고 두장 연달아 받고 퇴장당했다.

조병국은 수원 팬들에게 욕을 너무 많이 먹어서 수원을 매우 싫어한다. 성남에 처음 왔을 때 성남 팬들도 못 믿었을 정도로 트라우마가 심했었다.

코치진의 경우 조광래김호와 불화를 겪고 나간 뒤 아예 최대 라이벌인 안양 LG 치타스의 감독으로 부임했다. 이 사건으로 시작된 게 지지대 더비였다.[5]

최강희의 경우도 역시 김호와 불화가 있다가 동계훈련 도중 느닷없이 쫓겨났다. 그리고 잠시 국대 코치를 맡다가 나왔는데, 그 무렵 수원 삼성에 김호의 후임으로 현역 시절에 개인적인 앙금이 있었던[6] 차범근이 부임하고, 설상가상 전북 현대 모터스의 감독을 할 때 염기훈이 수원으로 이적을 요구하며 팀 분위기를 흐리자 다른 팀은 몰라도 수원 블루윙즈한테는 절대로 지지 않으려고 했다.[7]

윤성효도 수원 블루윙즈 감독 시절 기대에 못미치는 성적으로 퇴진을 요구하는 팬들 때문에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았는지 부산 아이파크 감독을 할 때에는 수원 블루윙즈 팬들에 대한 섭섭함을 숨기지 않았다.

5. 관련 문서


[1] 차범근은 차범근 축구교실이라는 불멸의 업적을 세우며 유스육성에 많은 공을 들였지만 유소년 축구 운영하는거랑 우승이 목표인 프로팀 꾸려가며 차세대 키우는건 완전히 다른 영역이다. 전자는 차라리 데스크 업무에 더 가깝다. 차범근이 유소년 축구에 세운 업적으로 수원 시절 신인육성에 힘썼다고 주장하는건 둘의 차이를 완전히 간과한 주장이다.[2] 물론 김호가 자기 측근 인물들만 내부 인사로 내정한다는 것만이 이유는 아니다. 자세한 것은 김호/비판 및 논란 문서 참조[3] 에닝요가 전북 레전드이고 해서 이 사실을 잘 모르는 사람이 많은데 에닝요도 김호가 발굴한 선수다.[4] 당시 투톱은 그 시즌 K리그 최고의 용병 조합이던 나드손, 마르셀...지못미[5] 이 후 안양 소속인 서정원이 수원에 오면서 둘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다.[6] 1991년 차범근울산 현대의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당시 노장 선수였던 최강희와 불화가 생겼고, 결국 최강희가 1992년 시즌 후 은퇴를 선언했다.[7] 그 무렵 심판 매수 사건이 터진 이후 여러 변명과 솜방망이 징계로 인해 수원 뿐만 아니라 모든 팀들이 전북을 벼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