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5-22 15:40:21

낙상지

駱尙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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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1. 개요

명나라 후기의 무장. 호는 운곡(雲谷).

2. 생애

초당사걸(初唐四杰:당나라 초기 때 대표적인 시인 4사람) 중 한 사람인 낙빈왕(駱賓王)의 후예로, 절강성 소흥부(紹興府) 여요현(余姚縣) 낙가만촌(駱家灣村)[1]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이성량의 집안을 섬겼고 젊은 시절에 일본 사람에게 포로로 여러 차례 잡힌 적이 있다고 하며, 심유경과 함께 일본인에게 소문이 나있는 사람이었다. 용력이 뛰어나 천근(千斤)을 들어서 낙천근(駱千斤)이라 불렸다[2].

1592년에 조선이 일본군의 공격을 받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여송 휘하의 참장이 되어 조선의 원군으로 출정했으며, 남병을 이끌고 제4차 평양성 전투에 참가해 평양성을 공격했다. 조선의 이일, 김응서 등과 함께 평양성의 함구문을 공격해 긴 창을 휘두르면서 적이 던진 큰 돌을 발에 맞아 다쳤음에도 평양성의 성벽에 가장 먼저 오르는 용맹을 선보였다. 1593년에는 오유충, 마우경과 함께 경주에서 수십 명을 죽였지만 일본군이 칼을 휘둘러 돌진하자 당해내지 못하고 후퇴했으며, 냇물을 건너다가 후방에서 공격을 받아 200여 명이 죽는 피해를 입었다.

1594년에 사대수와 함께 군사를 이끌고 물러나면서 류성룡, 이덕형 등에게 여러 가지 조언을 했는데, 일본인이 조공 바치는 일을 허락받아도 반드시 곧 물러가지 않을 것이며, 강화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전라도를 침범할 것이라 경계했다.

조선 사람들에게 제독검법, 포술 등을 가르쳤으며, 조선에서 총검술, 염초 굽는 법 등을 가르쳐달라고 하자 부하를 남겨 가르치게 했다. 그 중에서 제독검법은 무예도보통지에 실리게 된다.

또한 "조선에서 공을 욕심내는 자가, 일본군에게 포로가 되었다가 나온 사람의 머리를 베어 바치는 바람에, 아군 진영으로 귀순해오는 길이 막혔다"면서 → ① 사실을 제대로 밝혀 이를 금지하게 했으며, ② "귀순하는 자에게는 상을 주어 격려하면서, 적을 유인하는 역할을 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③ 또한 "조선에서 법적으로 관노, 사노 신분으로 묶인 이들은, 벼슬길이 영원히 막히니, 이들에게 불평하는 마음이 없겠는가?"라며, "적에게 간 자들은 돌아오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니, 노비法의 폐단이 심하다!"는 요지로, 노비 신분에 묶인 유능한 인물들의 제약을 풀어줄 것을 주장하기도 했다.[3] 외국인 장군(明軍)답지 않게, 단순히 조선의 원군 수준을 넘어, 그 나라 국민들에게 도움이 될만한 일이 무엇인지를 깊이 고민하고, 자신이 제공할 수 있는 도움을 최선을 다해 제공한 인물. 1597년 정유재란에도 참전해 남원성을 수축했다.

이시발과는 병서에 대해 논하면서 이시발의 재주에 대해 감탄해 선조에게 그를 중용하는 것이 좋겠다고 했으며, 낙상지가 이시발에게 고서 수 천권을 줬다는 설이 있다. 윤근수는 낙상지에 대해 마음에 어떤 경계나 안팎이 없고 용력이 있다고 했다.


[1]중화인민공화국 저장성 닝보시 위야오시(余姚市) 뤄지아촌(駱家村).[2] 실제로 조선 측의 기록들에서도 혼자서 무거운 총통을 양 손에 1자루씩 쥐고 들어올렸다는 내용이 보일 만큼 힘이 장사였다.[3] 노비 출신의 한계를 딛고 활약한 정충신, 유극량, 천민 출신으로 조선軍 선봉으로 맹활약한 장군 한명련 등의 일화를 직접 보고 들은 일이,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