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26 12:15:30

낙양지가귀

1. 개요2. 유래3. 여담

고사성어
서울 낙[1] 볕 양 종이 지 값 가 귀할 귀

1. 개요

낙양의 종잇값이 비싸졌다는 뜻으로, 베스트셀러를 뜻하는 고사성어. 줄임말인 낙양지귀(洛陽紙貴)라고도 불리며, 이 문서 또한 낙양지귀로도 들어올 수 있다.

2. 유래

후한 말부터 시작되어 혼란스러웠던 삼국시대를 지나 삼국을 통일한 서진(西晉) 시대에 좌사(左思)라는 인물이 있었다. 좌사는 부지런히 공부하고 음양술(陰陽之術)을 좋아했다. 용모가 추하고 말주변도 없어 존재감이 없는 인물이었는데 서로 사귀어 왕래하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그나마 자신이 있는 것이라면 문장력이었다. 그가 가진 문장의 재주는 장엄하고 화려했다. 당시에는 부(賦)라고 해서 사물의 화려함을 묘사하는 글이 유행했는데, 좌사는 우선 1년에 걸쳐 춘추시대 제나라의 수도였던 임치를 노래한 『제도부(齊都賦)』를 1년에 걸쳐 집필했다. 그리고 다음 작품인 『삼도부(三都賦)』를 지을 생각을 하게 된다.

이후 좌사의 누이동생 좌분이 궁에 들어가자 좌사는 낙양으로 옮겨왔다. 이후 진무제 태시 8년(272년)에 좌사의 누이동생 좌분이 수의로 책봉되었으므로 좌사가 낙양에 온 것은 272년 이전임을 알 수 있다. 어쨌거나 『제도부(齊都賦)』에 자신감을 얻은 좌사는 이때부터 바로 직전 시대인 삼국시대, 위나라, 촉한, 오나라의 수도인 업(?), 성도(成都), 건업(建業)의 화려함을 노래하고, 실제로 세 개의 도성만을 쓰는 것이 아니라 위, 촉, 오 세 나라의 개황(대략의 형편과 모양, 형세, 풍토, 지리, 인정 및 생산물 등)을 적은 『삼도부(三都賦)』의 집필에 착수한다. 좋은 글귀가 떠오를 때마다 기록하기 위해 대문과 집안의 뜰, 울타리, 뒷간에 집안 곳곳 화장실이나 밥상머리까지 지필묵을 놓아뒀고, 우연히 한 글귀를 얻으면 즉시 익히고 새겼다. 자신의 소견이 넓지 않다는 이유로 (책을 읽기 위해) 비서랑(秘書?, 도서를 관리하는 관직)이 되었다. 좌사는 비서랑으로서 배경이 되는 삼국에 관한 다양한 도서를 읽으며 집필에 착수했고 10년이나 걸려 『삼도부(三都賦)』를 완성했다.

『삼도부(三都賦)』는 작품 안에 등장하는 이야기도 구 삼국 세 나라 각각을 대표하는 화자들이 이야기를 나누는 방식으로 진행되기에 사실상 서진 시기를 다룬다기보단 그 이전인 삼국시대를 다룬다는 느낌이 더 강하다. 좌사는 이 세 도읍의 웅장함과 화려함을 묘사할 뿐만 아니라 그곳의 민심, 풍물, 상황 등까지 망라하여 각자 서촉공자, 동오왕손, 위국선생이란 가상의 세 인물이 저마다 나열식으로 수사적인 문장을 사용하여 각자 세 도읍을 자랑하는 방식으로 표현하는 참신한 방식을 보여주었다.

워낙 인기가 떨어졌던 좌사였던지라 기껏 글을 쓰고도 '나님이 이런 명문장을 지었음'이라고 다른 사람에게 알릴 방도가 없었다. 당시가 광고나 출판이 성했던 시대도 아니고...좌사는 이 부에 서문을 써줄 고명한 인사를 찾았고 '고명한 인사'로 당첨된 인물이 바로 황보밀. 황보밀은 삼도부를 한 번 읽어보더니 칭찬하여 좋게 여겨 단숨에 서문을 써주었고, 저작랑 장재(張載)가 「위도부(魏都賦)」에 주석(註)를 쓰고 중서랑 유규(劉逵)가 「오도부(吳都賦)」, 「촉도부(蜀都賦)」에 주석(註)를 붙이고 위관이 약해(略解)를 써주었다. 그리고 이것을 당시 문단의 영수였던 사공(司空) 장화가 "이 글은 반고, 장형의 부류이다. 읽는 이가 책을 덮어도 여운이 남고, 오래 읽어도 새롭다." 라고 절찬하여 일약 유명해졌다.

명사가 낸 소문에 당대의 부자와 귀족들이 너도나도 『삼도부(三都賦)』를 구하려고 애쓰기 시작한다. 그러나 인쇄술이 없던 시대라 『삼도부(三都賦)』를 받아보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바로 필사. 이 때문에 다투어 삼도부 필사 붐이 일었고, 필사하려면 종이가 있어야 하기에 종이의 수요가 폭증하여 낙양의 종잇값까지 폭등해버렸다. 이에 '낙양의 종잇값이 폭등했다'는 '낙양지가귀(洛陽紙價貴)'라는 단어가 베스트셀러를 의미하는 고사성어가 되었다.

좌사는 누이가 궁에 들어간 후 10여 년에 걸쳐서 『삼도부(三都賦)』를 썼고 좌사가 『삼도부(三都賦)』를 완성하고 이를 홍보(?)하기 위해 명성을 빌린 황보밀은 282년에 죽었다. 또 아래에서 나오듯이 육기가 낙양에 들어와 『삼도부(三都賦)』를 짓고 있던 좌사를 비웃다가 얼마 후 좌사의 『삼도부(三都賦)』가 출간되어 나오자 이를 보고 탄복했는데, 사실 오나라가 망한 후 육기는 포로로 잡혀 들어온 것으로, 육기가 지은 《형평원증(兄平原贈)》 서문에서는 '내 나이 20살에 일찍이 홀로 되어 아우 사룡(士龍, 육운)과 함께 부모를 잃고 가정을 잃었다네. 또 왕명에 쫓겨 포승을 받고 북쪽으로 갔다.'라고 하고 있다.

따라서 좌사가 『삼도부(三都賦)』를 지을 때인 280년에 육기가 포로로서 낙양에 들어왔음을 알 수 있고 『삼도부(三都賦)』의 완성 시점은 오나라가 멸망한 280년에서 황보밀이 죽은 282년 사이임을 알 수 있으므로 삼도부를 짓기 시작한 것은 270년부터 272년 사이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좌사가 『삼도부(三都賦)』를 쓰고 완성한 시기는 촉한 멸망 후~나라 멸망 전후, 삼국의 유풍(遺風)이 남아있던 시기이다.

3. 여담

당시 부가 유행했기에 『제도부(齊都賻)』비롯하여 고도(古都)의 화려함을 노래하려고 벼르는 인물이 많았다. 당연히 직전 시대인 삼국의 수도를 노래한 삼도부도 찜해놓은 사람이 많았는데, 어쭙잖은 실력으로 덤볐다 허접한 작품을 출간하면 평단에 가루가 되도록 발릴 것은 당연한 일. 이 때문에 저명한 작가들도 서로 눈치싸움만 벌이던 판이었다. 《진서》 <좌사전>에 따르면 당시 저명한 작가 중 한 명이었던 육기가 당초 낙양으로 들어가[2] 이 부( 『삼도부(三都賦)』)를 지으려 했으나 좌사가 『삼도부(三都賦)』를 짓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손뼉을 치며 웃었다. 동생 육운에게 편지를 쓰며 말하기를 '요즘 듣자하니 웬 시골뜨기 하나가 『삼도부(三都賦)』라고 깔짝인 모양인데, 틀림없이 술독을 엎어놓은 꼴이 될 것이다.ㅋㅋㅋ'라고 비웃었다가, 좌사가 부를 지은 게 나오자 육기는 직접 『삼도부(三都賦)』를 읽어보고 애타게 탄복하여 여기에 능히 (글을 더) 덧붙일 수 없다 여기며 붓을 내려놓았다고 한다.

[1] 물 이름 락으로 읽지만 여기에서는 서울 낙으로 읽어야 한다. 중국의 서도(西都)인 장안(長安=西安)과 함께 동도(東都)로 일컬어지는 낙읍(洛(雒)邑)을 가리킨다.[2] 위에서 언급하듯이 오나라가 멸망하고 포로로 잡혔을 가능성이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