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21 23:10:30

네빌 체임벌린 내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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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빌 체임벌린 내각
Neville Chamberlain Cabinet [1]
{{{#!wiki style="margin: -16px -11px" 1937년 5월 28일 ~ 1940년 5월 10일
출범 이전 이후
3차 국가연립 내각 윈스턴 처칠 내각
(1차 내각)
}}}
<colbgcolor=#808080> 총리 네빌 체임벌린 / 제60대
여당
연립여당


1. 개요2. 4차 국민정부
2.1. 배경2.2. 무르익는 전운2.3. 우리 시대의 평화2.4. 대 독일 선전포고
3. 체임벌린 전시내각4. 내치 분야

[clearfix]

1. 개요

영국의 제60대 총리를 지낸 네빌 체임벌린이 이끈 내각. 전전임 총리였던 램지 맥도널드 총리 때부터 이어진 국민정부라는 거국내각 기조를 유지했다.

체임벌린이 총리직에 취임한 1937년 5월 28일부터 1939년 9월 3일까지를 4차 국가연립 내각(국민정부), 1939년 9월 3일부터 체임벌린이 총리직에서 물러나 윈스턴 처칠에게 전시총리 직을 넘긴 1940년 5월 10일까지를 전시내각으로 구분한다.

2. 4차 국민정부

2.1. 배경

스탠리 볼드윈 총리가 조지 6세의 대관식이 끝난 1937년 5월 12일 사임을 선언하면서 조지 6세에게 후임 총리로 3차 국가연립 내각에서 재무장관을 지낸 체임벌린을 후임 총리로 추천했다. 사실 에드워드 8세 퇴위로 연결된 1936년 정치 위기에서 볼드윈 총리와 손잡고 중요한 역할을 맡으면서 이미 이름값을 높인 상황이었고, 앤서니 이든 등 보수당 신진주자들이 성장할 때까지 총리직을 인계해줄 교두보로 이미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있었기 때문에 체임벌린의 총리직 취임은 시간문제일 뿐이긴 했다.

1937년 5월 28일, 조지 6세는 볼드윈의 요청을 받아들여 체임벌린을 버킹엄 궁전으로 불러 신임 총리로 임명했으며 3일 뒤 볼드윈이 보수당 당대표직도 체임벌린에게 인계하면서 공식적으로 체임벌린은 보수당 내 1인자이자 실권 총리가 되었다.

2.2. 무르익는 전운

하지만 체임벌린이 총리직에 오른 국제적 상황은 결코 만만하지 않았다. 볼드윈 총리때부터 본격적으로 세력을 키운 나치 독일라인란트 재무장(1936)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무력 도발을 시작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이를 어떻게 억제할 것인가라는 과제가 시작부터 체임벌린의 발목을 잡고 있었다.

체임벌린은 이 문제를 외교적으로 해결하고자 했는데 그 첫 걸음은 대독 유화정책이었다. 당시까지는 나치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가 아직까지는 대화가 가능한 상대로 여겨지고 있었기 때문에, 체임벌린은 당시까지는 나치 독일에게 제1차 세계 대전 때 상실한 일부 식민지를 양보하고 대신 국제 질서로 편입시키면 전쟁을 다시 일으키진 못할 것이라고 판단했고 이를 나치 독일에 공식 제안하기도 했다.

추밀원 의장으로 있었던 핼리팩스 경까지 비공식 파견하며 나치 독일과의 접촉에 공을 들였지만, 정작 나치 독일에서 미온적이었고 오히려 외무장관이었던 앤서니 이든을 비롯한 외무부 관료들은 지나친 저자세 외교라고 이를 비판했다.

결국 1차적으로 나치 독일과의 접촉에 실패한 체임벌린은 다음 단계로 이탈리아와 독일, 두 파시스트 국가의 사이를 떨어뜨려놓는 것으로 발을 옮겼는데 이런 노력의 일환으로 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에서의 이탈리아와의 승전과 이탈리아령 동아프리카 수립을 묵인하려고 했다. 이에 대해 이든은 다시 한번 강력히 반발했고, 내각은 투표 끝에 체임벌린 쪽의 의견을 따르기로 했고 이든은 결국 사임을 선택했다. 체임벌린은 다른 내각원들의 만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이든의 후임으로 핼리팩스 경을 임명했다.

체임벌린은 이 시기 스트레사 체제의 복원을 꿈꾼 것으로 보였지만, 나치 독일은 체임벌린의 어설픈 구상을 손놓고 기다려줄만큼 바보같은 나라는 아니었다.

2.3. 우리 시대의 평화

1938년 3월, 나치 독일이 안슐루스를 강행해 오스트리아를 합병했다. 이 시기 오스트리아가 내부적으로 영국에 도움을 요청했는데 체임벌린과 영국은 공식적인 지원은 하지 않고 3월 14일, 하원에서 나치 독일의 야욕을 강력하게 비판한 뒤 안슐루스를 규탄하는 결의문을 채택하는 수준에 그쳤다.

안슐루스 이후 영국과 프랑스의 반응을 관망하던 나치 독일은 한발 더 나가 체코슬로바키아에 독일 출신 거주민이 많다는 이유로 주데텐란트를 할양할 것을 요구했다. 문제는 체코슬로바키아가 이 시점에서 프랑스와 군사협정[2]을 맺고 있었다는 점. 체코슬로바키아가 나치 독일의 요구를 거부하면 그 핑계로 나치 독일은 체코슬로바키아를 전격 침공할 것이고 이에 따라 프랑스, 소련이 연쇄적으로 전쟁으로 끌려들어가는 영락없는 제1차 세계 대전의 재판이 될 상황이었다.

이때 체임벌린이 직접 나서 전격적으로 뮌헨을 방문하여 히틀러와 회담을 진행했는데, 회담 후 체임벌린은 프랑스에 양해를 구한 뒤 체코슬로바키아에는 주데텐란트를 포기하면 영국과 프랑스가 함께 독립을 보장하겠다고 제안한다. 사실상 영-프에게 외면당한채 손쓸 방도가 없어진 체코슬로바키아는 눈물을 머금고 주데텐란트를 포기하기로 결정했으며 이 책임을 지고 내각 전체가 사임했다.

하지만 체임벌린으로서는 체면을 구길수 밖에 없는 상황이 생겼는데, 나치 독일은 체코슬로바키아가 이 제안을 받아들이자 흥분해 협상 허들을 더 높여 주데텐란트를 단계적이 아니라 즉시 양도하고, 폴란드와 헝가리와 얽힌 문제도 조정할 것을 요청했다. 사실상 히틀러와 나치 독일은 협상으로 문제를 해결할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체임벌린으로서는 자존심이 제대로 상한 상황인지라 처음에는 전쟁까지 결심했던 것으로 보이지만, 결국 미국과 소련, 이탈리아의 중재를 받아들여 1938년 9월 30일, 뮌헨 협정을 체결해 당장의 전쟁 위기를 넘긴다. 물론 체임벌린으로서도 1차 대전의 후유증이 끝나지 않아 여전히 전쟁을 두려워하던 자국의 여론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다.
뮌헨 협정문을 대중 앞에서 공개하는 체임벌린 총리

문제는 이 협정이 나치 독일의 지키지 않을 약속을 형식적으로 받아주는 대가로 체코슬로바키아를 사실상 나치 독일에게 바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는 것. 또 체임벌린이 이 협정문을 들고 복귀한 뒤 다우닝 가 10번지 앞에서 한 연설에서 독일에서 명예로운 평화를 들고 왔다고 이를 포장하고 자찬하는 과정에서 우리 시대를 위한 평화(Peace for our time)라는 역사에 남을만한 망언을 하면서 문제를 키웠다.

2.4. 대 독일 선전포고

물론 아돌프 히틀러는 현대의 모두가 알고있다시피 '우리 시대의 평화' 따위에 동의할 생각이 없었다. 주데텐란트 병합이라는 무리수를 띄웠음에도 영-프가 전쟁에 나서지 않은 사실은 히틀러에게 엄청난 자신감을 줬고, 나치 독일은 주데텐란트뿐만 아니라 1939년 3월 15일 체코슬로바키아 전역을 무력 병합해버린다.

이에 체임벌린은 서서히 전쟁 동원 준비를 하는 동시에 폴란드, 프랑스, 소련과 방위협정을 시도했지만 폴란드와 소련 간의 갈등으로 무산되었다. 결국 체임벌린은 폴란드에게 독일이 침공할 경우 영국과 프랑스가 동시 개입할 것이라는 정도의 약속을 해주는데 그쳤다. 결국 오스트리아, 주데텐란트, 체코슬로바키아에서 대형 성공을 거둔 나치 독일은 영-프가 움직이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친채로 폴란드를 침공해 제2차 세계대전의 문을 열었다.

독일의 폴란드 침공(1939년 9월 1일)으로부터 이틀 뒤 체임벌린 총리는 대독 선전포고를 하면서 참전했지만 실제로는 폴란드가 무너질 때까지 병사를 보내지 않았다. 체임벌린으로서는 폴란드가 좀 더 버텨주면 이를 지원하면서 소모전으로 전쟁을 끌고갈 생각이었지만, 폴란드는 한달만에 나치 독일의 침공에 무너지고 말았다.

3. 체임벌린 전시내각

체임벌린은 제1야당인 노동당과 제2야당 자유당에 거국내각 참여를 제안했지만 당시 노동당과 자유당은 이를 거부했다. 대신 대독 강경파로 그동안 내각에서 배제하고 있었던 윈스턴 처칠을 해군장관으로 임명하고 이든에게도 재입각을 제안했다. 하지만 이든은 이를 거부하고 소령의 신분으로 군대에 복귀에 참전을 준비했다.

체임벌린은 바로 군대를 동원하기보다는 재무장을 하는 동시에 경제 제재를 통해 나치 독일을 압박하는게 더 효율적이라고 판단했고, 재무장에 필요한 비용보다 훨씬 적은 전쟁 예산안을 의회에 제출하면서 "전쟁에서 이기는 것도 중요하지만, 파산은 더욱 안된다."고 강조했다. 이렇게 소위 가짜 전쟁이라고 불리는 기간을 맞이하게 됐다.

가짜 전쟁 기간에 대한 평가는 현재도 엇갈리는데, 나치 독일이 폴란드 침공에서 상당 부분 전력을 소모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이때 영-프가 공격했다면 전쟁을 훨씬 빨리, 적은 피해로 끝낼 수 있었다는 분석이 있는 반면, 연합국 각국의 전쟁 의식이 고조되어 있지 않은 상황에서 무리하게 동원 체제를 가동했다간 각국 정권 붕괴로 전황에 훨씬 악영향이 있었을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여튼 이 시점까지는 체임벌린은 68%라는 높은 지지를 받으면서 국민들의 신임을 받고 있었다. 하지만 1940년 4월 처칠이 주도한 노르웨이 전역 실패로 상황이 뒤바뀌게 되었다. 노르웨이 전역 실패의 주범인 처칠이 이 책임을 체임벌린에게 뒤집어씌우면서[3] 반대자로 나서 보수당 내 반란군을 규합했고, 이어진 재신임 투표에서 고작 81표로 승리하면서 전쟁을 이끌만한 힘을 잃게 됐다.

체임벌린 총리는 마지막 희망을 잡기 위해 노동당의 클레멘트 애틀리 대표를 만나 전시내각 참여를 다시 제안했지만, 애틀리는 노동당이 거국내각에 참여할 생각이 있지만 체임벌린 밑에서는 없다고 사퇴를 요구했다. 결국 체임벌린은 1948년 5월 10일, 총리직에서 사임하고 노동당과 자유당을 포괄하는 거국내각 수립을 이유로 처칠에게 총리직을 넘겼다.

4. 내치 분야

사실 제2차 세계 대전과 직접 연관되는 총리와 내각이다보니 외교적 부분, 특히 그 실책에 대해서 많이 다뤄져 저평가되는 부분이 많은데 체임벌린 본인은 원래 외교보다는 일국 보수주의자로서 내치 분야에 대한 관심이 더 많았다. 1937년에는 공장법을 통과시켜 여성과 아이의 근로시간을 제한했고, 1938년에는 유급휴가법을 제정해 고용주가 노동자에게 유급휴가를 주도록 권고했다. 비록 강제력이 없긴 했지만 이 법의 통과 후 노동자들의 여가 조건이 크게 개선된 것으로 드러났다.

그 외에도 석탄 국영화, 빈민가 철거 및 주택 보조금 제공, 임대 규제 등 마치 노동당 정권에서 추진했을 법한 법안을 대거 통과시켰다. 하나 아쉬운 점은 1939년 참전으로 인해 마지막으로 체임벌린이 통과시키려던 지방 정부 개혁은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것. 어떻게 보면 체임벌린 내각의 재평가는 외교 분야를 놓고가 아니라 내치 분야를 놓고 이루어져야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1] 1937~1939년까지는 4차 국가연립 내각(National Government), 2차 세계대전 개전 이후인 1939년 9월 3일부터는 체임벌린 전시내각으로 간주된다.[2] 로카르노 조약[3] 물론 전쟁 동원 체제를 늦게 발동해 영국 육군이 노르웨이에 제대로 투사될 수 없게 된 것이 노르웨이 전역을 망친 결정적인 이유였기 때문에 전시수상으로 체임벌린의 책임은 결코 없다고 할순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