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23 09:39:09

노동가치론

노동가치설에서 넘어옴

1. 개요2. 역사
2.1. 서설2.2. 고전경제학의 노동가치론2.3. 마르크스 경제학의 노동가치론2.4. 주류경제학의 노동가치론
3. 산업혁명 이후에도 성립할 수 있는가?
3.1. 보론(초과잉여가치 설명)
4. 전형문제5. 비판
5.1. 반박
6.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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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 Labor theory of value(LTV)

상품의 가치는 그 상품을 생산한 노동'만'이 만들어내고, 가치의 크기는 상품을 생산하는 데 필요한 평균적인 노동시간이 결정한다는 학설. 인간의 주관적 만족도가 상품가치의 기준이 된다는 효용가치설과 대립되며, 객관적인 가치가 존재한다는 객관가치설의 입장 가운데 하나이다. 마르크스 경제학의 가장 밑바탕이 되는 이론이다.

2. 역사

2.1. 서설

상품의 가격은 '생산비'라는 점에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생산비에는 원자재와 임금(노동자의 노동력 사용에 대해 자본가가 주는 대가) 기타 제반 요소를 포함한다.
이러한 노동력 사용으로 상품을 생산하면서 "이윤"이란 게 어디서 발생하는지 문제된다.

2.2. 고전경제학의 노동가치론

사실 의외로 그 내력을 찾자면 굉장히 오래된 개념이다. 그 원류는 심지어 일설에 따르면 토머스 아퀴나스로 이어진다.

역사적으로 토머스 홉스, 윌리엄 페티, 존 로크 등을 비롯한 많은 학자들이 노동에 의한 가치의 규정을 논의했다. 하지만 이론적 체계를 갖춘 노동가치론은 애덤 스미스가 처음으로 제시했다.

스미스는 〈국부론(An inquiry into the Nature and Causes of the Wealth of Nations)〉에서 교환의 매개물인 화폐는 가치라는 관념이 부여된다고 주장하며, 가치를 사용가치와 교환가치로 구분했다. 그리고 교환가치의 척도는 노동이 된다고 주장하며, 가격은 이 교환가치를 화폐로 나타낸 것이라고 정의했다. 그러나 스미스는 자본가도 노동자도 없는 자본주의 이전의 경제에서만 노동이 교환가치의 결정요인이라고 주장했다. 스미스는 자본가가 생산수단의 지배를 획득하고 영주가 토지 와 자연자원을 독점화했을 때 교환가치, 즉 가격은 세 부분—임금⋅이윤 ⋅지대—의 합으로 되었다고 믿었다.

데이비드 리카도는 보다 적극적인 노동가치론을 주장했다. 리카도는 시장에서 희소재(稀少財)를 제외한 상품의 가치는 상품을 생산하기 위해 투하한 노동의 양에 따라 결정되며, 노동의 양은 가격 기구로서 자동적으로 조정되고, 기계도구 등의 고정자본에 투하된 간접노동도 직접노동과 함께 상품가치에 포함된다고 분석해서 스미스의 이론을 보완했다. 그러나 그 역시 불변자본과 가변자본의 구성비, 불변자본의 내구력, 자본의 회전속도 등의 영향을 설명해내지 못해서 이윤의 근거를 도출하지 못하는 한계를 드러냈다.

2.3. 마르크스 경제학의 노동가치론

이와 같은 고전학파의 노동가치론은 카를 마르크스에 의해 비판적으로 계승되어 마르크스 경제학의 노동가치론과 그에서 이어지는 잉여가치론(剩餘價値論)으로 발전되었다.

마르크스는 먼저 상품은 사용가치를 갖는다고 정의하며, 물적 재화 및 육체 노동에 해당하는 서비스 등의 경우에는 사용가치의 근원이 자연이라고 주장했다. 노동은 자연의 사용가치를 특정한 상품의 사용가치로서 발현시키는 수단으로, 마르크스에 의하면 가치는 어떤 상품을 생산하는데 사회적으로 필요(해당 생산물의 생산에 필요한 해당 사회의 평균적인 기술력 수준, 해당 사회의 노동자들의 평균적인 노동 숙련도 등)하다고 여겨지는 노동 시간, 즉 사회적 노동 시간에 의해 그 크기가 결정된다.[1] 예를들면 연필의 가치의 크기는 해당 연필의 생산에 필요한 기계, 공장 등의 평균적인 성능, 노동자들의 평균적인 노동 숙련도, 원료 가공 등 노동 대상에 대한 사회적 노동 시간까지 모두 더해 결정되는 것이다. 상품의 가격은 사회적 노동에 의해 발현된 사용가치에 대한 수요와 공급이 결정하며, 이때문에 가치의 비율과 가격의 비율은 다를 수 있다.

마르크스는 이 노동가치론을 토대로 한 잉여가치론(剩餘價値論)을 자본주의 경제에 대한 분석장치(分析裝置)로 삼아 자본주의의 경제적 운동법칙을 밝히는 한편, 자본주의의 착취적 본질 및 그 멸망의 필연성을 주장했다. 《자본론》에서 제시된 마르크스의 경제학은 공산주의 경제학의 기반이 되었으며, 그 전반부인 이른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론(生産樣式論)을 이룬다.

스미스나 리카도 같은 경우는 후대의 마르크스 등과는 달리 노동가치론을 그냥 일종의 가정으로 활용하거나 말년에 들어 노동가치론 특유의 비실증성이나 당위지향적 경향을 인지하고 이를 포기하거나 무시했지만 마르크스는 이를 자신의 경제학의 핵심 토대로 활용했다.

2.4. 주류경제학의 노동가치론

현대 주류경제학에서는 그 존재가 등한시된다. 물론 개론에서 배우긴 한다. 주류경제학에서 널리 인정받는 한계효용학적 관점에서 보면, 상품가치는 그 상품소비자에게 줄 수 있는 한계효용에 따라 결정된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상품가치는 상대적인 것이고 내재적인 노동시간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상품 생산에 들어가는 노동시간은 생산의 요소로 상품의 희귀성에 영향을 미쳐 결국 한계효용에 영향을 미치는 수많은 요소일 뿐 가치의 절대적 척도는 아니다. 굳이 따진다면, 위에서 말한 리카도가 제시한 비교우위 모형의 경우 고전파경제학자로부터 주류경제학이 계승하다시피 한 몇 안 되는 것 중 하나인데, 저 리카도 모형에서 가정 중 하나로서 쓸 때 잠시 언급하는 정도다. 다만 어차피 자본, 노동의 2요소 모형을 상정해도 특화는 나타난다. 굳이 노동가치설처럼 1요소를 상정하는건 그게 더 단순하고 편해서 그러는 것에 불과하다.

최근 학계에서는 한계효용학적 관점을 보다 발전시켜 심리학과 경제학을 결부하는 미시적 접근이 유행이다.

3. 산업혁명 이후에도 성립할 수 있는가?

노동가치론은 농업수공업이 지배적 생산방법이었던 17세기 전반기 산업혁명 이전의 농업경제단계의 생산과정에 바탕을 둔 가치학설이라는 비판이 있다.

농업 및 수공업이 중심이 된 상황에서는 당연히 노동자의 육체적 노동이 생산의 중심요소가 되어 있었다. 노동가치론은 실제로 이 단계의 경제를 잘 보여주고 있으며, 번역체 중 가운데 남아 있는 하루 품, 이틀 품, 하루갈이, 이틀갈이 등의 표현이 이 사실을 잘 보여 준다고 하는 견해가 있다.

3.1. 보론(초과잉여가치 설명)

차설 상술한 노동가치론이 농경사회에서 도출된 개념이라 한계가 존재한다는 주장은 19세기 산업 구조를 몰각한 경우이다. 마르크스 생존 당시에도 목가적 사회는 분명 존재하였지만 도시-농촌간의 현격한 차이가 존재하였고 마르크스 본인도 맑시즘을 목가사회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고 밝혔다(공산당선언, 정치경제학 비판 外). 또한 상기 가치와 생산 간에 모순이 존재한다는 주장은 하단의 속칭 '전형문제'의 주관적 해석에서 나온 오류로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사회의 산업구조는 필경 마르크스 생존 당시랑 다름은 분명하다. 예컨대 금융시장에서 일확천금을 벌어가는 브로커라던가, 이른바 귀족노조라고 폄훼받는 임노동제하의 부유한 노동자의 경우처럼 투입노동 대비 산출 가치가 비대하다는 것이 그러하다고 한다.

그러나 이 역시도 마르크스는 설명한 바가 있다.

자본주의의 초과잉여가치에 대한 마르크스 경제학에서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초과잉여가치란 그 상품의 사회적 가치와 비교했을 때 어떤 기업에서 생산한 상품의 개별가치가 낮지만 수량은 더 많음에 인하여 그 자본가가 전유하게 되는 잉여가치의 의 초과분을 말한다. 양자[2] 모든 높은 노동생산성에 기인하기 때문에 초과잉여가치는 상대적 잉여가치의 한 형태이다. 그러나 높은 사회적 노동생산성으로부터 얻어지는 상대적 잉여가치와는 달리, 초과잉여가치의 원천은 새로운 기법, 진보적 기술 그리고 개선된 생산조직방식으로 인해 어떤 기업이 성취한 높은 개별 노동생산성이다. 어떤 상품의 개별가치가 사회적 평균생산조건에 의해 결정되는 사회적 가치 이하로 떨어지면, 자본가는 그 상품을 상대적으로 높은 사회적 가치로 팔 수 있게 된다.

그 결과 사회적 가치와 개별가치 사이에 격차가 생기고, 이 때문에 자본가는 일반적 잉여가치율에 따라 획득하는 정상적 잉여가치를 초과하여 부가적인 소득을 얻을 수 있게 된다. 초과잉여가치를 만들어내는 것이 가능해짐에 따라 자본가들은 과학기술이 이루어낸 발명들을 생산에 도입하고 기술공정을 향상시키며 생산과 노동을 더욱 합리적으로 조직하고자 한다. 초과잉여가치의 생산과 전유는 일시적으로만 존재한다. 일정 산업에서 대부분의 생산자들이 과학기술성과들을 흡수하자마자 그곳 상품의 사회적 가치는 하락하고 이에 따라 초과잉여가치는 사라진다.

그러나 좀 더 개선된 노동수단과 기술공정 들을 이용하는 다른 자본주의적 기업이, 그렇게 생산한 상품의 개별가치를 재차 낮춤으로써 초과잉여가치를 얻을 수 있다. 거대기업이 되면 모든 과학기술성과들을 생산에 이용할 수 있기 때문에 초과잉여가치를 전유하고자 하는 욕구는 생산의 집적으로 귀결된다. 경쟁과정에서 거대자본가는, 초과잉여가치의 일부를 포기하고 그럼으로써 경쟁자들을 파산시키기 위해, 자신의 재화 가격을 사회적 가치보다 낮게 설정 할 수 있다. 제국주의단계에서는 초과 잉여가치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거대 독점체들은 높은 독점가격을 유지함으로써 초과이윤을 획득할 뿐 아니라, 또한 중소자본가에 대한 우위를 점하기 위해 과학기술성과를 생산에 도입하기도 한다.

이 때문에 초과잉여가치는 독점적 초과이윤의 안정적 원천이다. 현재 과학기술혁명이 진행되면서 과학기술진보가 급속도로 이루어짐에 따라, 거대독점자본은 커다란 초과이윤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4. 전형문제

마르크스의 노동가치론에 따르면 모든 종류의 형태의 노동을 어떻게든 단일한 기준으로 측정할 수 있도록 하는 절대적인 노동가치라는 개념이 존재한다고 하는데 이에 관한 실증은 처음부터 불가능하다고 많은 비판을 받은 바 있다. 이에 대해 마르크스 경제학자들은 중력이라는 개념이나 각종 자연과학계의 애드혹 논리처럼 노동가치론을 활용해 자기들의 이론을 활용할 수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현실을 예측하기 위해서는 이론이 논리적으로 엄밀성, 일관성을 갖춰야 한다. 그러나 새뮤얼슨 등의 비판에 따르면 노동가치설부터 시작해서 마르크스의 이윤율 저하 경향, 잉여가치론, 착취론 따위의 이론이 수학적으로 전혀 일관되지 않는다. 이 경우 마르크스 경제학은 비과학적이라는 비판은 물론 경우에 따라 과학이라기보다 그냥 이데올로기, 유사과학에 불과하다는 비난으로까지 비약한다.

이로 인해 소련이 해체되기 이전에 이미 주류경제학자들은 마르크스경제학은 사이비라면서 배척하였다. 물론 일군의 마르크스 경제학자들이 노동가치론 등을 어떻게 수학적으로 일관되게 전개해야 하는지 여태까지 고생을 해오고 있고, 그 시도 중 하나가 제라르 뒤메닐, 덩컨 폴리 등의 신해석이다. 그러나 신해석도 단편적으로 접근해보았을 때, 노동가치에 대해 답을 미리 정해놓고 수학 문제를 푸는 식이라는 비판도 있긴 하다. 사전에 가치가 객관적으로 존재한다고 정답을 정해두고 가설을 정하는 것과 경제학의 일반적인 논리 전개 방식인 가설을 정하고 현실에서 답을 찾아가는 귀납적으로 검증하는 건 다른 문제이다.

그리고 위의 비판은 마르크스 경제학이나 혹은 마찬가지로 비주류에 속하는 경제학파인 신리카도 학파로부터 제기된 것이고 주류 경제학은 폴 새뮤얼슨 등을 끝으로 관심을 접다시피 했다.

앤와 샤이크(1984)를 비롯한 뉴욕의 뉴스쿨 대학의 일군의 학자들과 글래스고 대학의 폴 콕숏, 웨이크 포레스트 대학의 앨린 코트렐, 웁살라 대학의 데이브 자카라야와 같은 학자들은 귀납적, 통계적 방법으로 노동가치론에 기여한 바 있다. 이는 전형문제의 실증적 해결이 불가능하다는 논자들의 주장과 반대로 투입산출표를 이용해 노동시간과 가격의 밀접한 관계를 도출한다.[3] 이들의 방법은 가격과 가치 체계가 이윤율을 거치지 않은 하나의 체계임을 보이는 것으로 애초에 노동가치에서 생산가격으로 전형을 "할 필요가 없다"라고 주장하며 전형문제를 해결한다[4]. 이들은 신해석 학자들과는 다른 조류를 형성하고 있으며 이들에 대한 주류경제학계의 실증적 반박은 나오지 않고 있다. [참고]

전형 논쟁에 대해 노동가치론을 방어하는 학자들은 전형문제가 노동가치론에서 필연적으로 수반하는 문제이지만 이것이 이론으로서의 노동가치론을 완전히 폐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주장한다. 이들은 주류 경제학 역시 생산함수 논쟁으로 인해 논리적 정합성은 회의되지만[6] 이론의 지위는 유지되는 것에 비교하며 공황, 금융위기, 실업, 이윤율 하락 등 현실에서 노동가치론으로부터 예측할 수 있는 현상들을 계속해서 보여주는 한 명맥을 유지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5. 비판

자본가는 노동자에게 임금을 지불하고 노동력을 사들여 제품을 생산한 뒤 이 제품을 자기가 지불한 임금보다 훨씬 비싸게 판다. 이때 임금과 판매가 사이에 발생하는 차이가 잉여가치다. 즉 자본의 이윤이다. 자본가는 노동자에게 지불하지 않은 이 가치를 자기 것으로 가로챔으로써 부자가 된다. 이것이 착취 이론이다. 이 개념의 근저에는 자본보다 노동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깔려 있다. 그러나 집에서 내가 뜨개질한 한 켤레의 장갑, 내가 구운 한 덩이의 빵은 내 가족에 대한 사랑일지언정 거기서 잉여가치는 발생하지 않는다. 따라서 자본도 형성되지 않는다. 그러나 빵 기계를 도입하고 종업원도 채용하여 노동을 조직했을 때 비로소 시골 빵집 주인도 빵을 굽게 되는 것이다. 노동은 그 스스로 가치를 발생시키는 존재가 아니다. 그것을 조직하고 사회화하는 자본이 있을 때에만 가치가 발생한다. 다시 말해 노동보다 자본이 우위에 있는 것이다. 자본가의 지위가 고정돼 있는 것도 아니다.

노동가치론, 특히 마르크스주의가 견지하거나 표방하는 노동가치론은 오컴의 면도날에 위배되거나 저촉된다고 비판될 수 있다. 왜냐하면, 마르크스의 방법은 시장에서 책정되는 재화와 서비스들의 가격의 '배후', 혹은 '이면'에 '객관적 노동가치'라는 형이상학적 실체가 존재하며, 상품의 가격은 궁극적으로 이에 의해 좌우된다고 상정하기 때문이다.[7] 그러나, 오스트리아학파나 주류 경제학이 '주관적 가치이론', 혹은 한계효용이론을 정립한 이후에 노동가치론을 역설하거나 노동가치론에 의거하여 가격을 해명하려는 시도는 오컴의 면도날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이 목적을 견지하며 그 목적을 이룩하기 위해 수단을 기용하거나 투입함으로써 행동한다'라는 지극히 자명한 사실로부터 필연적이며 선험적으로 도출되는 형식논리적 함의들의 집적[8]만으로 시장에서 책정되는 상품들의 가격이 해명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그 배후에 '객관적 노동가치'라는 형이상학적 실체가 존재하는 것으로 상정할 필요가 전무하기 때문이다.

물론, 만약 한계효용의 법칙이나, 혹은 주관적 가치이론만으로 시장에서 책정되는 상품들의 가격을 해명할 수 없는 현상이 존재하고, 그 배후에 '객관적 노동가치'가 존재하는 것으로 상정함으로써 현상이 더 논리정연하게 해명될 수 있다면 노동을 통해 창출된 실존적인 가치라는 가정의 도입은 용인될 수 있으며, 명백히 오컴의 면도날에도 배치되지 않는다.

가령 고전 경제학은 주관적이고 합리적인 인간의 경제행동을 가정한다. 그러나 합리성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경제적 행동이 관찰되며 비합리적인 경제적 행동에는 인간의 심리적 요인이 작용한다. 이를 다루는 학문분야가 행동경제학이다. 경제행동의 합리성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경제행동이 관찰되었기 때문에 경제행동의 합리성이 일부 타격을 받은 것과 똑같은 방법을 노동가치론의 지지자도 사용해야 한다. 주관적 가치이론의 수정을 요구하는 인간의 경제행동이 관찰되지 않은 상황에서 노동가치론을 아무리 주장해보아야 자기들 커뮤니티 안의 놀음일 뿐, 그 커뮤니티 밖의 다른 학자들이 학문적으로 진지하게 고려할 이유가 없다.

착각하지 말아야 할 점은 주류경제학에서 가치가 실재하지 않고 주관적으로만 결정된다는 것이 '실제'라고 주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입자물리학에서 이야기하는 '모델'은 '이것이 실제로 타당하다' 라는 주장을 담지 않으며 오직 '주어진 데이터를 잘 설명하고 예측한다' 라는 주장만을 담는다. 이 때문에 양자역학에서 코펜하겐 해석다세계 해석이 공존할 수 있는 것이다. 코펜하겐 해석과 다세계 해석의 형이상학적 입장은 완전히 다르지만 두 해석은 모두 주어진 데이터를 동등한 정확도로 설명하고 예측한다. 같은 원리에서 관찰 가능한 인간의 행위에서 주관적 가치이론을 모델로서 사용해서 해명할 수 없는 데이터가 존재할 때에야 주관적 가치이론에 유효한 타격을 입힐 수 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가령 자동차의 가격이 수요와 공급이 아무리 시시각각 변화무쌍하더라도 특정한 가격대, 즉 예컨대 20원 이하로는 격감하지 않는다는 경험적인 증례나 실례를 근거로 노동가치설이 방증된다며 강변한다. 즉, 20원 이하로 결코 떨어지지 않도록 하는 소위 자동차에 내재된 '객관적 노동가치'가 그 배후에 존립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가? 이는 주관적 가치이론이 해명할 수 없는 난제이거나 반례이기는커녕, 오히려 한계효용이론이나 주관적 가치이론에 의해 지극히 명료하게 해명될 수 있다. 자동차의 가격이 아무리 떨어져도 20원을 하회하는 것으로 책정되지는 않는 이유는, 여전히 20원을 능가하는 금전을 지불하고서라도 자동차를 매입할 것을 희구하는 소비자들이 시장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즉, 그 최고구매가격이 20원을 능가하는 자동차의 소비자들이 여전히 존재하기 때문이라는 것. 만약, 그 누구도 자동차를 20원을 능가하는 금전을 지불하고서라도 매입할 용의가 전무하다면, 즉 그 어떤 자동차의 소비자들도 그들이 견지하는 최고구매가격이 20원에 미달된다면, 자동차의 가격이 20원대로 격감할 것이라는 것은 명약관화하며 심지어 돈을 얹어주고 줘야 하는 마이너스 가격조차 존재할 수 있을 것이다.실제로 2020년 4월 20일 국제 유가가 0원을 넘어 -42달러까지 하락하는 일이 발생했다. 뿐만 아니라 캘리포니아에서는 태양광 발전으로 인해 지나치게 많은 전력을 생산해서 전기료가 음수가 되는 상황도 발생한다. # 주관적 가치이론에서는 상품의 가격이 마이너스가 되는 현상을, 다르게 말해 내가 생산한 상품을 내가 돈을 줘서 남이 가져가게 해야 하는 현상을, 설명할 수 있다. 노동가치설이 타당하다면 노동을 투입해서 생산한 상품은 반드시 가치를 가지므로 가격이 음수가 되는 상황을 설명할 수 없다.

물론 이에 대해 노동가치설의 지지자는 '상품의 현재 가격이 상품의 실제 가치를 반영하지 않을 수 있다. 가령 상품의 실제가치는 투입된 노동의 가치이지만 자본가가 잉여가치를 붙여서 가격을 책정한다. 상품의 가치가 음수가 되는 경우도 그 상품에 가치가 없기 때문이 아니라 상품의 보관을 위한 비용이 문제가 되기 때문에 가격이 일시적으로 음수가 된 것일 뿐이다.'와 같이 반론을 할 수 있다. 그래서 대화가 되지 않는 것이다. 물건의 가격이 음수가 된 것은 관찰 가능한 현상이다. 이 관찰가능한 현상에 대해 주류경제학에서는 가치의 주관성을 가정하고 이 가정 하에서 한계비용 곡선이라는 모델로 설명한다. 이 모델은 단순히 음수의 가격만을 설명하는 모델이 아니라 다른 여러 가지 관찰 가능한 경제현상도 설명하는 보편적인 모델이다.

가격이 음수가 되는 관찰 가능한 현상에 대한 노동가치설 지지 입장의 설명 또한 타당하다. 문제는 그 설명이 타당한지 부당한지가 아니라 자기들이 원래 가지고 있는 모델에 대한 ad-hoc를 붙여서 설명했다는 점에 있다. 천문학에서 천동설은 천체들의 움직임을 예측할 수 없었기 때문에 폐기된 것이 아니다. 천동설로도 모든 태양계 천체의 움직임을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다. 마찬가지 이야기이다. 노동가치설의 지지자가 주관적 가치이론으로 설명할 수 없는 관찰가능한 현상이 있음을 보이거나 경제현상을 노동가치설이 주관적 가치이론으로 설명하는 것과 동등한 설명능력을 갖되 더욱 간단하고 일관적으로 ad-hoc을 줄이면서 설명할 수 있음을 보이려고 노력해야 대화가 가능하지만 그런 노력을 보이고 있지 않다.

한계효용학파라고도 불리는 신고전학파는 상품이 제공하는 ‘효용’이라는 측면에서 가치론을 정립했다. 이에 따르면 소비자의 특정한 선호 체계에 바탕을 둔 특정한 수요가 현재의 기술 조건과 현재의 토지, 노동, 자본에 바탕을 둔 공급과 만났을 때 가격이 형성된다. 현실에선 분명 끊임없이 자본이 축적되고 생산기술이 발전하기에 생산에 투입되는 기존 생산물의 수요·공급 패턴이 바뀐다. 다만 여기서 오해가 있다. 주류 경제학도 얼마든지 동태적 분석을 한다. 경제성장에 대한 제 이론은 물론이고 RBC나 DGSE같은 이론들도 따지고 보면 경기변동과 성장을 통합해서 설명하다시피 하고 있다. 이 외에 국제무역에서 비교우위 역시 경제발전에 따라 변화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그리고 균형은 단지 시대에 따라 변화하는 것 외에 동일 시점에서 복수로 존재할 수도 있다는 점 역시 퍼져있다.

신고전학파 경제학자들 중에도 노동만을 요소로 고려해 모델을 만든 이들도 있었다. 이건 순전히 연구자 편의나 상황에 따라 그냥 모델을 고려할 때 노동만 고려하느냐 자본만 고려하느냐 아니면 특정 다른 생산요소만을 고려하느냐의 문제다. 필요하다면 하나만 할 수 있고 아니면 여러 요소를 필요한대로 고려할 수 있는지의 문제다.[9]
따지고 보면 이는 주류경제학과 마르크스 경제학의 중요한 차이점 중 하나다. 주류경제학은 생산요소로 여러 가지를 고려할 수 있어도 그 자체로 논리적으로 말이 된다.[10] 반면, 마르크스 경제학에서는 생산요소로 노동을 배제하면 말이 안 된다. 그리고 마르크스 경제학에서는 이런 경우에 대한 고려를 하지 않는다.
주류경제학이 생산요소 측면에서 훨씬 유연한 것은 사실이다. 그 비유라면 이 쪽은 '언어 없이도 할 수 있는 문학이 있음'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주류경제학이 효용가치개념에 대해서 무비판적이라면 왜 주류경제학에서 행태경제학, 신경경제학 같은 효용가치와 충돌하는 개념에 대해 보이는 태도를 설명하지 못한다. 신경경제학은 모르겠지만 적어도 행태경제학같은 심리학적 연구방법론은 적어도 경제학계에서는 최소한 정신적으로는 주류경제학 대접을 한다.[11] 주류경제학에서도 적어도 언젠가는 행태경제학 같은 심리학적 개념에 기반한 경제학이 오늘날 경제학을 대체할 가능성에 대해 부정하는 것이 절대 아니다. 다만 오늘날은 아직은 그렇다고 보기 어려운 것이고 새로운 대안 경제학이 나타난다고 해서 그게 꼭 오늘날의 소위 비주류 경제학이어야 한다는 법은 더더욱 없을 뿐이다.

비판에 대한 반론 역시 형편 없는 것이 물론 학문이 완벽할 수 없고 한계는 존재하나 무엇이 더 현실을 잘 설명할 수 있는지는 분명히 존재한다. 그런데 노동가치설을 현실적 설명력이 주류경제학에 비해 더욱 결여되어 있다. 실증도 불가능하고 더 나가서 예측의 도구로서 사용하기도 힘든 문제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도 학문의 불완전성을 언급하며 이를 회피하려는 것은 학문적으로 타당하지 않다.

게다가 마르크스주의의 문제는 자신의 이론이 과학적이며 이를 기반으로 미래를 예측했고 이것이 도래할 것이라 주장했다. 단순히 학문적인 부분으로 노동가치설을 주장했으면 몰라도 이를 기반으로 예측을 넘은 예언에 가까운 주장을 했다면 이러한 노동가치설의 문제는 더욱 쉽게 넘어갈 문제가 아니다.

이 외에도 계량경제학적 관점에서의 비판도 가능하다. 노동가치설은 다른 의미로 말하면 '노동 외에 경제학적으로 유의미한 생산요소는 없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이는 주류 경제학도 독자적인 생산요소로서 노동의 가치 자체를 부인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더 그렇게 해설할 수 있다. 물론 마르크스 경제학이 자본의 가치를 완전히 무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자본을 투하된 노동의 산물로 다른 말로 '과거 노동의 또다른 형태'로 보는 것이지 노동과 별개로 자본의 그 자체로서 생산요소의 가치를 인정하지는 않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회귀분석을 통해서 그동안의 총생산(혹은 기타 경제적으로 의미있는 종속변수)와 노동만의 관계를 고려하는 회귀모형과 노동과 자본을 둘 다 고려하는 회귀모형의 설명능력(R^2)을 비교함으로써 자본이 노동과는 별개로 독자적인 의미가 있는지 여부를 검증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러한 통계학적 접근방법을 통해 독자적 생산요소로서 자본의 가치를 기각하기는 어렵다.

5.1. 반박

사실 노동가치론에 대한 주류경제학의 비판은 마르크스 경제학계의 입장에서는 어느 정도 억울한 면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사회과학으로서 경제학은 인간심리와 사회에 대한 특정한 모델을 정립한 뒤에 그를 통해 현상을 분석하고 예측하는 데 그 주안점을 둔다. 경제학은 그 중에서도 경제현상을 분석하고 예측하기 위해서 인간에 대한 특정한 모델을 구축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 예로, 주류경제학에서는 효용이론을 통해 '합리적 인간' 모델의 중추를 구축해낸다. 그러나 효용이론 항목에서도 제기된 비판이지만, 효용은 주관적이고 심리적인 개인의 선호도를 정량화할 수 있다는 가정 하에서 시작되었고 결국 아래와 같은 피할 수 없는 비판에 직면하게 된다.
인간은 항상 합리적 선택을 하는 것도 아닐 뿐더러 인간의 '선호'가 절대적이고 일률적으로 측정되지도 않는다.[12] 이에 대해 주류경제학의 태두인 폴 새뮤얼슨은 현시선호이론을 창안했다. 인간의 생각은 측정을 못해도 행동은 측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 현시선호이론조차도 철저히 비판받는다. 만약에 시장에서 상품이 A 또는 B만 있어 선택이 가능하다면 모를까 실제 소비자들의 선호는 서수적 효용이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13]

즉, 주관적인 심리를 정향화하고 모델화할 수 있다는 가정 하에서 진행되는 이론의 한계가 나타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효용가치론은 폐기되지 않았다. 이는 효용가치론이 경제현상을 규정하는 데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100%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현실과 들어맞았기 때문이다. 당연히 효용가치론은 위 문단에서 언급한 바와 달리 오컴의 면도날에 부합하는 명백한 진리도 아니며, 그저 편리한 가정에 불과할 뿐이다. 노동가치의 가정을 두고 형이상학 운운하기에는 주류경제학 자체가 실용학문으로서, 엄밀한 학문적 정의나 철학, 패러다임의 정립 없이 작동해온 역사가 길기에 제 얼굴에 침뱉기와 같다.

행동경제학이 대두되어 왜 기존 경제학의 근본가정이 잘못되었는지를 조목조목 반박하더라도, 그것들이 폐기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어차피 사회현상과 인간심리를 분석하는 데 있어 어느 정도의 오차나 도식화는 감수할 수밖에 없고, 이론적 틀을 만들기 위해서는 그러한 도식화가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행동경제학이 기존 경제학에 대한 각주나 수정이 될 수 있을 망정, 그를 대체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행동경제학은 인간과 사회에 대한 새로운 모델을 제시하지 못하는 것이다.

마르크스 경제학계 또한 주류경제학과 마찬가지로 어떤 도식화의 위험을 감수한 채로 사회현상을 분석해나가는 것이라고 보면, 노동가치론이 비과학적이고 실증적이지 못하다는 비판은 사실 주류경제학계에도 해당되는 것들이다. 따라서 노동가치론의 반증 불가능성은 근거로 노동가치론을 부정하는 것은 동시에 그들의 뿌리인 효용가치론을 부정하는 것과 같다. 주류경제학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가정들을 마치 절대적 진리와 같이 다루면서 내적정합성의 문제 등을 회피하고자 주변 분야들로 스스로를 확장하며 각 분야가 자신들의 '옳은' 전제와는 다르므로 틀렸다고 주장하는 행위, 이른바 '경제학 제국주의'의 경향을, 비판 문단은 그 자체로 보여주고 있다.

더하여 위 항목에서 '내가 뜨개질한 한 켤레의 장갑, 내가 구운 한 덩이의 빵'에선 '잉여가치'가 발생하지 않으며 그를 조직하는 자본이 있어야 잉여가치가 발생한다는 주장은 마르크스 경제학이 주장하는 바와 '완전히 일치한다.' 비판항목에서는 잉여가치와 가치의 의미를 혼동하고 자본이 있어야만 노동이 조직화된다는 등의 비약까지 일삼는데, 마르크스 경제학에 대한 오해와 무지에서 비롯된 전형적인 허수아비 때리기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 마르크스 경제학에서 '가치'란 모두 다른 사용가치를 지닌 상품들에게서 찾을 수 있는 공통적인 특성, 즉 노동생산물로서 가지는 노동량의 크기를 의미한다. 따라서 노동이 효용가치를 갖기 위해선 자본이 필요하다 정정하더라도, 신고전학파의 콥-더글라스 생산함수 등에서도 볼 수 있듯, 이때 자본은 자본재, 즉 생산 수단을 의미한다. 마르크스 경제학에 의하면, 이 또한 자연과 노동의 결합으로서, 노동생산물로서의 '가치'를 가진다. 이것은 곧, 자본재 생산에 투입된 노동량(가치)과, 노동력이 추가적으로 제공한 노동량(가치)의 합이 곧 최종생산물의 가치라는 뜻이다. 이처럼 노동을 조직하는 방식이 오로지 자본뿐이라는 주장은 화폐자본, 생산자본, 상품자본으로 구성된 흐름으로서의 자본, 즉 M-C...P...C'-M'의 흐름으로서의 '자본'과, C의 일부에 해당되는 '자본재'로서의 자본을 혼동하고 있고, 이러한 흐름으로서의 자본으로 정정하더라도 경제인류학에 대한 몰이해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으며, 멀리 가지 않더라도 국가 행정 시스템이 엄밀하지 않았던 과거나 현재의 여러 사회에서는 대부분의 노동이 자치적인 공동체를 중심으로 운영되고 굴러갔다. 국가 행정은 여기에 보호세를 명목으로 세금을 떼어갈 뿐이었던 것이 인류 역사의 대부분이다. 오히려 이에 따르면 주류경제학이야말로 현대 서구사회를 벗어나서는 어떠한 이론적 효용성을 가지지 못한다는 결과가 나오게 된다.

그리고 비판 문단의 마지막 줄에 생산요소로서 노동을 배제하면 마르크스 경제학은 말이 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데, 당연한 얘기지만 애초에 생산과정에서 노동은 배제될 수가 없다. 노동없는 생산은 AI와 같은 수단을 통해 자동화된 생산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면 불가능하고, 마르크스 경제학과 주류경제학의 차이가 생산과정에 있어 노동을 핵심적 요소로 두느냐 아니냐에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왜 마르크스는 노동을 뺐을 때 설명을 못하나?'라는 말은 비판이라기보다는 '왜 문학은 언어 없이는 아무것도 못하나?' 수준의 트집잡기에 불과하다고 볼 수 있다. 비판 문단에서는 그러한 경우를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을 주류경제학의 강점으로 서술하였지만, 주류경제학의 지나친 물리학적 방법은 다른 경제학파들로부터 비판을 받았으면 받았지 옹호를 받는 경우는 드물다. 이는 앞에서 언급된 이른바 경제학 제국주의와도 궤를 같이한다.

끝으로, 노동가치설에 대한 주류 경제학의 비판에는 몇 가지 오해와 무지가 있다. 첫째, 마르크스는 자본론에서 절대로 절대적이고 형이상학적인 '객관적 노동가치'를 주장한 적이 없다. 사회의 수많은 생산물들은 각각 다양한 사용가치를 가지고 있으므로 이로부터는 생산물들의 공통적인 특성, 즉 가치로서 측정될 수 있는 것을 찾을 수 없다는 점을 짚고, 사용가치를 무시한다면 일반적으로 생산물들은 '노동 생산물'이라는 점을 파악해, '사회적 노동 시간'으로서 그 크기가 측정되는 노동량에 의해 가치가 산출된다는 점을 주장했다. 그러나 가치는 가격의 경향만을 결정할뿐이지, 절대적으로 가격과 일치할 수 없다. 둘째, 시장영역에서 이루어지는 등가적 교환과 생산영역에서 이루어지는 노동(상품)의 소비는 분리되어 있다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된다. 한계효용은 주로 시장영역에서 이루어지는 가치에 대한 논의일 뿐이며, 생산영역에 대해서는 거론하지 않고 있다. 마르크스 경제학에서는 자본에 의한 상품가치 생산, 평균이윤 형성으로 인한 생산가격[14]의 형성까지를 다룬다. 시장가격의 구체적인 변동은 마르크스 경제학에 있어 기본적으로 논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셋째, AI와 로봇을 통한 생산조차 사실은 이미 수백년간 축적된 노동에 기반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즉, 이미 그것들은 근본적으로 사회적 노동에 의해 그 사용가치가 제한 혹은 발현된 자연의 일부이며, 따라서 사회적 노동 시간으로 가치의 크기를 측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노동가치설은 오직 자본주의를 분석하기 위한 기본적인 전제일뿐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공산주의 사회로의 이행을 비롯한, 사회 체제의 운동에 대한 마르크스주의 학파의 가정은 유물론적 변증법이다.

6. 같이 보기


[1] 마르크스는 모든 상품에 대하여 그들의 사용가치를 무시하면 이들에게 남는 공통적인 특성은 '노동생산물'임을 밝히며, 이러한 사실에 착안하여 가치의 크기는 노동량에 의해 결정된다고 주장했다.[2] 사회적 가치와 갸별가치에 내포된 각각의 잉여가치[3] Zachariah D. (2006) Labour value and equalisation of profit rates: a multi-country study . In : Indian Development Review[4] Cockshott P., Cottrell A. (1998) Does Marx Need to Transform?. In: Bellofiore R. (eds) Marxian Economics: A Reappraisal. Palgrave Macmillan, London[참고] 반박이 나오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 애초에 실증적으로 반박을 할 가치가 있는 주장이어야 실증적 반박을 위해 연구비를 소모할 수 있다. 업적으로 쳐주지도 않을 일에 귀한 연구비를 소모할 학자는 없다. 노동가치론을 지지하는 학자들이 자신들의 이론을 입증할 실증적 증거를 제시해야 학술적인 토론이 시작될 수 있다.[6] 다만 케임브리지 자본논쟁에 대한 평가는 정말 학자마다 다양하기 때문에 이런 회의론 역시 일부 견해라고 볼 수 있다.[7] 엄밀히 말하면 '좌우되어야 한다' 라고 말하는 게 정확하다. 상품의 가치가 객관적 노동가치와 다르게 매겨질 때 계급갈등과 혁명을 통한 역사발전의 필연성이 정당화되기 때문.[8] 오스트리아학파 경제학에서는 이것을 인간행동학(Praxeology)이라고 지칭한다.[9] 예를 들어 상황에 따라 저숙련노동, 고숙련노동의 2가지 요소만 고려한 생산함수 모델을 짤 수도 있고, 일반적인 노동과 자본 외에도 원자재같은 예시적인 생산요소를 고려한 모델을 짤 수도 있다. 이건 논리적 정합성의 문제가 아니라 그냥 상황 설명을 위한 가정의 문제다.[10] 물론 경험적인 이유로 노동과 자본을 가장 많이 고려하긴 한다.[11] 왜 '정신적으로'라고 하냐면 아직 행태경제학을 본격적으로 가르치는 인프라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특히 한국에서는.[12] 이는 비단 노동가치론자들의 비판이 아닌 오늘날 미시경제학 연구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비판이다.[13] 고전파 경제학자 스탠리 웡[14] 생산가격은 애덤 스미스가 제안한 것으로, 단기적으로는 시장가격이 수요ㆍ공급의 변동에 따라 변동하더라도 장기적으로 수렴하게 되는 값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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