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27 18:05:42

북한군 노크 귀순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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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보병사단 주요 사건 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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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 일자 사건명
<colcolor=#000,#fff> 1984년 06월 26일 조준희 일병 월북 사건
1998년 12월 4일 제22보병사단 불발탄 폭발 사고
2012년 10월 2일 북한군 노크 귀순 사건
2014년 6월 21일 제22보병사단 총기난사 사건
2019년 4월 4일 2019년 고성-속초 산불
2020년 5월 1일 2020년 5월 고성 산불
2020년 11월 3일 북한이탈주민 철책 훼손 귀순 사건
2021년 1월 5일 제22보병사단 병사 폭행 사건
2021년 2월 16일 2021년 동해 민통선 무단침입 사건
2022년 1월 1일 귀순 탈북자 2022년 월북 사건
2023년 6월 25일 고성 제진검문소 민간인 무단침입 시도 저지사건
2023년 10월 24일 2023년 속초 목선 귀순 사건
2024년 8월 20일 2024년 북한군 하사 귀순 사건
† 동일 인물에 의한 사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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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사건 전개3. 사건 이후 여파4. 기타5.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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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012년 10월 2일 북한 조선인민군 육군 중급병사 한 명이 대한민국 육군 제22보병사단 제56보병연대가 관할하는 동부 전선의 군사분계선과 철책 경계를 넘어와 남측으로 귀순한 사건.

언뜻 보면 북한 군인이 자유를 찾아 월남해온 사례들 중 하나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엄연히 적군인 북한군의 병사가 남측으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아무런 방해나 저지 없이 도중에 발각되지도 않고 무사히 철책을 넘어 우리 측 군사 기지 내에 멀쩡히 들어온 것도 모자라 직접 우리 군 경비대 건물에 노크를 할 정도로 코앞까지 다가와 귀순 의사를 밝혔다는 점에서 대한민국 국군 부대가 북한 군인 한 명을 무혈입성시킨 셈이라며 큰 파장이 일었다.

2017년 판문점 귀순 북한군 총격 사건 당시 귀순한 병사는 총알을 5발이나 맞아 생명이 위중했던 데 비해, 이 사건은 매우 순조로운 귀순이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그 북한 병사가 귀순자였기에 천만다행이었다는 점은 주지의 사실이며, 대한민국 국군 입장에서는 처참한 수준의 경계 실패 사례로 남게 되었다. 해당 병사가 공격 의사 없이 그저 귀순을 위해 넘어온 탈북자였기에 망정이지, 작정하고 대남 군사 작전을 위해 침투한 무장 군인이었다면 22사단은 아무런 경계도 저항도 없이 손쉽게 뚫려버린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 만약 그랬다면 22사단과 그 지휘부는 최고 수위의 징계와 처벌을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2. 사건 전개

상황근무를 서던 전투분대장 모 하사가 소초 주변 순찰을 목적으로 소초 밖으로 나왔는데, 순찰을 마치고 들어가려다가 동해선 경비대 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져 돌아보니 아무리 보아도 아군으로는 식별되지 않는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그는 일단 소초 문을 잠그고 황급히 소초장을 깨웠다. 잠에서 깬 소초장 중위는 대략적인 상황을 파악하고는 문을 직접 열어 귀순자의 신병을 인도하였고, 이윽고 근무 중이던 부소초장이 급히 소초로 복귀하여 귀순 경위 및 경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귀순자가 먹을거리를 요구하자 당시 후반야분대장이 관물대에 있던 크라운산도 크림맛 과자 하나를 꺼내 건네주었으며, 그것을 처음 보는 귀순자는 과자 비닐을 뜯을 줄 몰라 "가위를 달라"고 했다고 한다. 부소초장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본인이 직접 비닐 포장을 뜯어주었고[1] 귀순자는 그것을 다 먹고는 맛있었는지 하나 더 먹었다고 한다. 이후 A형 경계태세가 발령되었고, 취침 중이던 소초 조리병이 일어나서 삼양라면을 끓여줬다고 한다. '북한 병사가 귀순했다'는 소식은 6일 뒤인 10월 8일에야 민주당의 김광진 의원에 의해 수면 위로 떠오르면서 비로소 기사화되었다. 기사 크라운산도와 라면 이야기는 기사화되지 않았다.

상부에는 허위 보고가 들어갔다고 한다.(기사) 게다가 밝혀진 바에 따르면, 처음에는 동해선 경비대를 노크했으나 응답이 없어 근처의 내륙 소초로 갔다고 한다.(기사) 이 정도로 무방비한 상황이었다면 북한군이 그동안 이쪽으로 무장공비를 침투시키거나 무력으로 국지 도발을 단행하지 않은 것에 감사해야 할 지경(...).

결국 22사단은 인적·물적 피해가 하나도 없었음에도 결과적으로 '사주 경계에 처참히 실패했다'는 상부의 거센 질책에 또 한 번 발칵 뒤집히고 말았다. 이미 2009년에 사단이 한 번 뒤집어지면서 물갈이 되었을 간부들이 2년 정도의 임기를 거치고 물갈이된 뒤 그 후임 간부들이 또 다시 사고를 친 셈.

3. 사건 이후 여파

이 사건으로 해당 관할 부대인 22사단에는 말 그대로 칼바람이 불었다. 사단장 조성직 소장과 휘하 관할 연대장, 대대장이 즉시 보직해임되었으며, 22사단의 직속 상급 부대인 제8군단제1야전군사령부, 합동참모본부에서 작전 관련 업무를 맡고 있던 고위급 장교들이 줄줄이 보직해임과 징계 및 수사 대상이 되었다. 이 일련의 처벌 결과 이 5개나 떨어지고, 대나무 9그루가 한방에 잘렸다. 기사 그냥 걸어들어온 것만으로 장교들 우수수 날려버린 타노스급 귀순병 당시 사단장이 해임 전날 해당 소초의 한 생활관에 소초원들을 모두 모아놓고 했던 훈시가 매우 인상깊다. 내용인 즉슨, "사단장은 황산벌 전투에 출전하는 계백장군의 심정으로 왔다"는 내용을 기반으로 한 훈시였다고 한다. 다만, 병사들은 규정대로 근무한 것으로 밝혀져 처벌이 없었다고 한다. 10월 14일 국방장관이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하여 재발 방지를 약속하였고, 이로 인해 1군 사령관, 제8군단장이 김관진 국방부 장관 명의의 엄중경고와 문책을 받았으며, 김관진 국방부 장관도 이명박 대통령으로부터 이 문제로 인해 문책을 받기도 하였다.

이 사건 이후, 전 22사단 GOP에 1일 1장성 방문 캠페인이 이어졌다. 다만, 이 사건 전후로 훈련 없이 비상대기태세가 유지되면서 유격 등의 훈련이 아예 취소되어서, 일부 예하 대대 장병들은 좋아했다는 말이 있다고 한다. 당시 합참의장이었던 정승조가 소초에 방문했을 때 귀순자가 귀순했을 당시의 상황을 재연했는데, 말출까지 채 2주가 남지 않은 말년병장이 귀순자 역할을 맡았다고 한다. 해당 병사는 생활관에서 근무 준비를 하던 중 중대장이 헐레벌떡 생활관으로 들어와, "너 빨리 나와봐"라는 말을 듣고 얼떨결에 나갔다가 이런 중책을 맡게 되었다고 한다. 합참의장이 방탄모를 착용하고 있었는데, 귀순자 역할을 맡은 병사가 '저 방탄을 벗으면 대머리가 나오겠지'라는 생각이 들어서 웃음을 참지 못할 뻔했다는, 그래서 군생활 최대 위기를 맞을 뻔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22사단 GOP는 제진 검문소 또는 마달리 검문소를 거쳐 GOP로 올라가는 구조라서 위병소는 없다.

사건이 발생한 2012년 10월경 병사들은 추석을 맞이하고, 진지공사를 준비하던 중 사단 내 훈련으로 부대의 전화와 사지방을 통제했다. 대부분의 병사들은 휴가 나갔다가 복귀하는 병사들을 통해 이 소식을 들었고, 사건으로부터 한 달 뒤인 2012년 11월에 22사단 포함 전 GOP 사단의 FEBA부대는 철책을 보수하러 올라갔다. 언론을 통해 귀순 병사가 넘어온 과정이 공개됐는데, 대략 철주를 잡고 철조망을 벌려서 틈으로 넘어온다는 방식이었다.

이전까지는 사실상 철주와 윤형철조망이 맞닿는 부분만 고정되었고, 나머지 부분은 철책 위에 윤형철조망이 그냥 얹혀 있는 수준이었기 때문에, 막대기로 윤형철조망을 위로 밀어버리면 철책과 윤형철조망 사이에 큰 빈틈이 생기고, 이 상태에서 철책을 넘으면 이론상으로는 아무리 초병들이 규정대로 근무를 서도 경계병은 이상이 없어 보이고, 경계등이 안 비치는 곳에서 돌파를 시도한다면 이론상 들키지 않고 쉽게 돌파가 가능하다. 물론 한밤중이라면, 실수할 수도 있기 때문에 다치거나 옷이 찢어지든가 하겠지만, 목숨 걸고 귀순하는 사람들이 그게 무서울까... 게다가 북한군은 실제로 철책을 통과하는 훈련을 한다.

이에 대해 기둥을 잡지 못하게 하고, 철조망이 벌어지지 못하게 하는 등 약 한 달 간의 경계력 보강공사를 하였는데, 철조망을 옮기고 치다 보니 전투복이 찢어지는 경우도 많았다.

이때는 22사단 말고도 전방 GOP 부대 전체가 그야말로 지옥이었다. 전투복 찢어지는 건 약과였다. GOP 철책 길이가 얼마인데, FEBA 부대가 GOP 부대를 지원한다고 하루이틀만에 끝나는 공사가 아니다. 하지만 경계력 보강은 빨리 해야 하기 때문에, 이 공사에는 부대마다 다소 다르겠지만, FEBA부대 말고도 GOP 경계병들도 갈려 들어갔다. FEBA부대는 주말이나 일과 외 시간에는 쉬었지만, GOP 경계병은 그런 거 없고 계속 일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거기에 날짜를 잘 보자. 11월이다. 강원도 전방은 11월이면 눈이 내린다. 그야말로 이 기간에는 오전엔 보강작업하고 오후엔 눈 쓸고 밤엔 근무 나가고 수면은 2시간이 채 되지 않는 악몽 같은 일이 자주 벌어졌다. 여기에 FEBA 부대가 지원해주지 않는다든가, 안 그래도 작업에, 제설에, 격무에 시달리는데 훈련을 예정대로 진행한다든가 하는 경우까지 발생하기도 했는데, 그야말로 생지옥이었다.

4. 기타

  • 이 사건이 터진 지 얼마 뒤에 해당 연대의 수색중대에서 연대장이 방문해서 철책을 넘어 보라고 했더니, 한 병사가 몇 초만에 넘어서 연대장 포상을 받은 일도 있었다.[2]
  • 이 사건은 22사단에서 일어났지만, 2005년 제5보병사단에서도 이와 비슷한 사건이 일어나 발칵 뒤집힌 적이 있었다.
  • 이 사건이 터진지 얼마 되지 않아서, 10월 6일 경기도 파주시 경의선 남북관리구역에서 북한군이 자기네 소대장과 분대장을 향해 실탄을 발사하고, 남한으로 귀순하는 일이 발생했다.# 이때는 초동 대처를 잘 해서 무사히 끝났다. 비슷하게 휴전선으로 귀순해 온 보위지도원 출신 탈북민에 의하면, 북한 민경부대 보위부의 지침 같은 것에 있는 최후단계로, 귀순 병사가 한국군 소초와 접근하는 단계에서는 저격으로 귀순 병사를 사살하거나 혹은 초소째로 폭파시키라고 되어 있다고 한다. 그 때문에 귀순자는 무조건 북측에서 안 보이게 숨거나, 이 사례처럼 실탄을 발사하여 위협 혹은 조준사격을 하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 SNL 코리아 시즌 2에서 '무사고 1000일'이라는 스케치로 이 사건을 풍자했다.
  • 이 사건의 귀순자 임금학은 사건 당시 22세[3]로, 산간지대이자 군사 시설이 많아 북한에서도 폐쇄적인 자강도 출신인데[4], 통제가 심하여 탈북이 북한에서 가장 희귀한 곳 출신이 탈북한 것이다.
    • 탈북을 마음먹은 결정적 사건은 배고파서 중대 옥수수를 훔쳐 먹다 상관에게 따귀를 맞은 일이라고 한다. 그 때 억눌린 게 터져 상관을 장작으로 때린 후 싸웠고, 화가 가라앉지 않아 군대 밖으로 나갔는데 정신이 드니 군대나 집으로 돌아가지도 못하겠고, 그러다 본 남한 소초의 불빛을 보고 무작정 가게 되었다고 한다.
    • 임금학은 이후 기독교에 귀의하여 임바울로 이름을 바꾸고[5] 총신대학교에 입학해 전도사로 활동하기도 했고 2024년 기준으로 사랑의교회에서 목사로 활동하고 있다. 노크귀순 당시를 포함한 자신의 인생사에 대해 간증한 내용이 인터넷에 남아있다. 유튜브 영상 블로그 직접 언론과 인터뷰한 기사
  • 당시 1군사령부에서 근무한 병사가 '4성 장군이 우는 걸 봤다'는 썰이 존재한다. 처음엔 전군에 7명 뿐인 4성장군이 울 일이 뭐가 있냐며 무시하다가 노크 귀순 때라는 말에 모두 납득하는 게 압권.# 실제인지는 알 수 없지만, 당시 1군사령관이었던 박성규 대장은 이후 국정감사에서 실제로 울먹였다. 기사
  • 당시 인기에 힘입어 MBC에 시사만평 애니메이션을 올렸던 흥해라흥 픽쳐스 시사만평 8화 내용이 이것을 다루고 있다. 영상 이걸 보고 김정은이 미사일 개발을 중단시키고, 병사들한테 철책 뛰어넘는 훈련과 노크하는 법 가르친다는 드립이 나왔다.
  • 2008년에 파주에서 일어난 귀순 사건도 노크 귀순이라고 부르기도 하기 때문에, 2008년 사건을 가리키는 의미로 노크 귀순이라고 쓴 것을 2012년 일어난 당 사건으로 오해하는 일이 종종 벌어진다. 2008년 사건은 당시에 보도조차 거의 되지 않았고, 이후 이철호가 유명해지면서 같이 알려진 것데, 이러다 보니 '노크귀순 사건'으로서는 2012년의 당 사건만이 유명하고 반대로 '북한이탈주민'으로서는 이철호만이 유명하기 때문에 더욱 착각하기 쉽다.

5. 관련 문서



[1] 이는 상당히 현명한 대처였다. 아는 사람에게 하는 행동도 신중해야 하는 곳이 군대인데, 하물며 신변을 알 수 없는 귀순자에게 가위 같은 흉기를 쥐어줬다가는 참사가 벌어질 수도 있고, 그 참사로 가장 위험에 빠지는 사람은 본인이기 때문이다. 물론 상식적으로 가위를 찾아서 자르는 것보다 자기가 손으로 뜯어주는게 훨씬 간단하기도 하다.[2] 의외로 자주 있는 일로, 잘 훈련받은 특전사 병력은 3초만에도 넘어간다. 을지훈련 당시 모 시설 침투 때 윤형철조망 위에 담요 한 장 걸치고 도약해서 넘어가 버리는 사례를 직접 본 대항군이 있다.[3] 본인이 직접 그렇게 말하는데, 탈영 당시 군복무 4년차였다는 말과도 들어맞기도 하고, 북한은 만 나이만 쓰기 때문에 만 나이일 가능성이 높다. 2013년 5월 기사에 22세였으므로 역산하면 1990년 5-10월생이 된다.[4] 자강도는 그 북한 안에서도 상당히 낙후된 지역이라, 본인이 신검까지 다시 받아가며 입대를 한 이유도 자강도 시골에서 벗어날 유일한 방법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5] 현재 목사 활동은 임바울이라는 이름으로 하고 있지만, 총신대에서 공부할 때 임금학이라는 이름을 썼고# 2020년 기사에서 임바울은 가명이라고 하는 것#으로 보아, 정식으로 개명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별도로 탈북 후 개명하거나 가명으로 활동하는 일은 워낙 흔해서 특별할 것은 없다.[6] 이보다 남쪽인 23사단 지역에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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