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7-20 08:38:23

누누 알바레스 페레이라

파일:누누 알바레스 페레이라.jpg
이름 누누 알바레스 페레이라
Nuno Álvares Pereira
출생 1360년 6월 24일
포르투갈 왕국 세르타 지방 세르나슈 두 본자르딤
사망 1431년 11월 1일
포르투갈 왕국 리스본
아버지 알바루 곤살베스 페레이라
어머니 이리아 곤살베스 두 카르발할
형제 페르낭, 로푸, 곤살루, 바스쿠, 레오노르, 테레사
아내 레오노르 드 알빙
자녀 유년기에 사망한 두 아들, 베아트리스
직위 포르투갈 무관장, 도모 소령, 바르셀로스 백작, 우렘 백작, 아라이올로스 백작

1. 개요2. 생애3. 가족4. 포르투갈의 성인이 되다

[clearfix]

1. 개요

포르투갈 왕국의 귀족이자, 군인.

주앙 1세의 왕위 등극을 지지하고 카스티야 연합 왕국의 침공을 모조리 물리쳐 포르투갈을 수호한 명장이다. 포르투갈 보병대 및 가톨릭 스카우트의 수호성인이기도 하다.

2. 생애

1360년 6월 24일 포르투갈 왕국 세르타 지방 세르나슈 두 본자르딤에서 포르투갈의 구호 기사단 그랜드 마스터 알바루 곤살베스 페헤이라와 이리아 곤살베스 두 카르발할의 아들로 태어났다. 당대 기록에 따르면, 알바로 곤살베스 페헤이라는 구호 기사단의 그랜드 마스터로서 평생 결혼할 수 없었지만, 여러 정부를 두면서 32~33명에 달하는 자녀를 두었다고 한다. 형제로 페르나오[1], 로포[2], 곤살루[3], 바스쿠[4], 레오노르[5], 테레사[6]가 있었다.

1361년 7월 24일 포르투갈 국왕 페드루 1세에 의해 합법적인 자식으로 공표되었다. 16살 때인 1376년, 레오노르 데 알빔과 결혼했다. 레오노르는 그보다 4살 위로, 성명 미상의 남성과 일찍이 결혼했지만 자녀를 낳지 못한 채 남편과 사별한 후 그와 재혼했다. 두 부부는 레오노르 데 알빔이 소유한 부동산인 미뉴에 정착했다. 1381년 페르난두 1세가 카스티야 연합 왕국과 전쟁을 벌이는 걸 돕기 위해 리스본으로 향하던 중 산타렝을 통과하던 카스티야군을 정찰한 뒤 왕에게 달려가서 이 소식을 전하면서, 카스티야군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
"그들의 규모는 큽니다. 하지만 제대로 지휘되지 않아서, 소규모의 잘 지휘되는 군대에 의해 패배할 수 있습니다."

이에 페르난두 1세는 그에게 기사 작위를 부여했으며, 아비스 기사단장 주앙이 그에게 갑옷을 빌려줬다. 그는 이때부터 주앙과 절친한 사이가 되었다.

1383년 포르투갈 국왕 페르난두 1세가 사망한 뒤, 페르난두 1세의 외동딸인 베아트리스가 포르투갈 여왕이 되었고, 베아트리스의 어머니 레오노르 텔레스섭정을 맡았다. 카스티야 연합 왕국 국왕이자 베아트리스의 남편인 후안 1세는 베아트리스와 자신을 포르투갈의 통치자로 선포하는 내용의 선언서를 포르투갈 전역에 보내고 알폰소 로페스 데 테하다를 포르투갈 총독으로 선임해 리스본으로 파견했다. 그러나 자신들의 기득권이 훼손될까 두려웠던 포르투갈 상인 계급은 자국이 카스티야 왕국에 병합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 백성들을 선동해 11월 말부터 반란을 일으켰다.

누누는 이 상황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아비스 기사단장 주앙이 전임 포르투갈 국왕 페드루 1세사생아로서 포르투갈 왕위에 올라야 카스티야의 간섭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는 리스본에서 주앙을 만나 포르투갈의 섭정 레오노르 텔레스의 애인인 주앙 페르난데스 안데이루를 암살하자고 제안해 동의를 얻어냈다. 1383년 12월 6일, 그를 비롯한 포르투갈 귀족들은 주앙 페르난데스 안데이루를 리스본 거리에서 암살했다. 이후 백성들이 리스본에서 대대적인 봉기를 일으켜 카스티야의 앞잡이로 간주된 리스본 주교 마르티뉴 아네스(Martinho Anes)를 살해한 뒤 주앙 왕자를 지도자로 옹립했으며, 포르투갈 제독 란사로테 페사냐도 베자 시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일으키고 포르투갈 국왕을 자칭했다. 레오노르 텔레스가 산타렝으로 도주한 뒤 도움을 요청하자, 후안 1세는 포르투갈을 정벌하기로 결심했다. 이때 누누가 주앙 편을 든 것과 달리, 이복 형이자 포르투갈의 구호 기사단 그랜드 마스터 페드루 알바레스 페헤이라는 후안 1세를 지지했다.

아비스 기사단장 주앙은 포르투갈의 섭정으로 군림한 후 누누를 포르투갈과 카스티야의 국경 요새인 아르테호의 지휘관에 선임했다. 그는 석궁병 100명과 잉글랜드 창기병 300명을 포함한 1,400명을 모은 뒤 아르테호로 이동했다. 그러던 중 보병 3,000명, 기병 2,000명으로 구성된 카스티야군과 아톨레이로스에서 마주쳤다. 카스티야 측은 그에게 사절을 보내 항복을 권유했지만 거절당하자 포르투갈군을 섬멸하려고 진군했다. 누누는 적이 진군하기 전에 방어에 유리한 고지를 선점한 뒤 베테랑 잉글랜드 창병이 선봉에 있는 직사각형 전투 대형을 결성했으며, 양익과 후위에는 기병대를 배치했다. 이후 1384년 4월 6일에 벌어진 아톨레이로스 전투에서, 카스티야군은 방어 대형을 결성한 적을 얕보고 무작정 돌진했다가 누누의 지휘를 받은 적 창병대의 결사적인 항전과 지형의 불리함으로 인해 제대로 된 전투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무너졌다. 누누는 적을 온종일 추격해 많은 적병을 사살했다.

1384년 5월 29일, 후안 1세가 이끄는 카스티야 대군이 리스본을 포위했다.(리스본 공방전) 주앙이 리스본에서 항전하는 동안, 누누는 팔멜라 성 꼭대기에 큰 불을 피워서 수비대를 격려했고, 적과 정면 대결을 회피하는 한편 보급로를 지속적으로 습격하고 포위망 외곽에 배치된 적군 기지를 꾸준히 공략했다. 그해 9월 3일, 전염병이 창궐하면서 수많은 지휘관과 병사가 죽자, 후안 1세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본국으로 철군했다. 1385년 4월 6일, 주앙은 코임브라에서 누누 등 포르투갈 귀족들의 추대를 받고 포르투갈 국왕으로 즉위했다. 이후 누누는 포르투갈 무관장과 우렘 백작에 선임되었고, 후안 1세에게 여전히 충성하는 포르투갈 북부 도시들에 대한 일련의 공방전을 벌여 하나둘씩 굴복시켰다.

후안 1세는 주앙 1세가 포르투갈 국왕을 칭했다는 소식을 듣고 분노해 원정군을 파견했다. 이들은 비세우를 철저하게 약탈하고 포르투갈인들을 상대로 잔학 행위를 저질렀지만, 1385년 5월 29일 트랑코소 전투에서 대패해 지휘관 7명 중 6명이 사망할 정도로 막심한 피해를 입었다. 이에 후안 1세는 6월에 대군을 일으켜 셀로리코 다 베이라에서 코임브라와 레이리아에 이르는 포르투갈 중북부로 진격했다. 원정군 규모는 32,000명에 달했는데, 그 중엔 프랑스 중기병들도 있었다. 주앙 1세와 누누는 이에 맞서 6,500명 가량의 병력을 일으켜 토마르 시에 집결했다. 이후 적을 어찌 맞서 싸울 지 논의한 끝에, 리스본에서 또다시 농성한다면 이번에는 버티기 어려우니 알주바호타 마을 인근에서 적을 물리치기로 결의했다.

1385년 8월 14일, 험준한 산악 지형을 통과해야 하는 데다 숫자가 워낙 많아서 매우 느린 속도로 진군하던 카스티야군은 알주바호타 고지에서 포르투갈-잉글랜드 연합군을 발견했다. 후안 1세는 즉각 돌격 명령을 내렸지만, 무더운 날씨에 오래도록 행군하느라 지칠대로 지친 기사들과 장병들은 전투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다. 반면에 시원한 고지에서 기다리고 있던 포르투갈-잉글랜드 연합군은 전면에 마름쇠 등 대기병 방어 구조물을 세우고 장궁병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적 기병대를 물리쳤다. 카스티야군은 축차투입을 반복해봤지만 하루종일 적의 전열을 뚫지 못하다가 제풀에 지쳐 퇴각했다. 이에 포르투갈-잉글랜드 연합군은 도망치는 적을 추격해 카스티야군은 막심한 피해를 입었다.

알주바호타 전투에서 포르투갈-잉글랜드 연합군이 천 명 이하의 손실을 입은 것에 비해, 카스티야군은 5천 가량의 손실을 입었다. 게다가 카스티야군은 본국으로 철수하는 과정에서 포르투갈인들의 연이은 습격으로 인해 5,000명을 추가로 상실했다. 누누는 여세를 이어가 1385년 10월 카스티야 영토에 있는 메리다를 공격했고, 발베르데 전투에서 카스티야군 2만 명을 격파하고 적장 페드로 무네스 데 고도이 이 산도발을 주살했다. 그 후 누누는 바르셀로스 백작과 아라이올로스 백작에 선임되었으며, 1385년부터 1390년까지 카스티야 국경지대를 습격하는 데 전념했다.

누누는 카스티야와의 전쟁에서 단 한 번도 패배하지 않았고, 포르투갈의 독립에 결정적으로 기여하면서 백성과 군대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다. 1393년 양국의 휴전이 성립되자, 그는 무장한 동료들에게 보상하기 위해 재산을 분배하려 했다. 이에 그의 권세를 두려워한 신하들이 주앙 1세에게 그가 동료들을 가신으로 삼으려 한다고 주장했다. 주앙 1세는 누누를 의심했고, 그의 권력을 약화시키려 했다. 누누는 이 상황에 좌절해 포르투갈을 떠나는 걸 진지하게 고려했다. 그러다가 카스티야 측이 휴전을 파기했다는 소문이 퍼지자, 그는 휘하 부대를 이끌고 가장 먼저 주앙 1세에게 합류했다. 이에 주앙 1세는 그가 자신에게 충심을 품고 있다는 걸 깨닫고 오해를 풀었다. 그 후 두 사람은 합의했다. 누누는 동료들에게 재산을 선물할 수 있었지만, 오직 왕만이 가신을 가질 수 있고 그 외의 어떤 이도 가신을 둘 수 없었다.

1415년 주앙 1세의 세우타 원정에 참여했다. 주앙 1세는 세우타를 공략한 뒤 그에게 세우타 수비대를 이끌어 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누누는 군대를 이끄는 걸 그만두고 종교인이 되고 싶었기에 거절했다. 일찍이 아내가 사망한 뒤 갈멜산 수도회 회원이 되었던 그는 자신의 자산을 손주들에게 분배한 뒤 1423년 카르모 수도원에 들어갔다. 그는 리스본 거리를 거닐며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구호품을 나눠주었으며, 수도원에서 군사 작전에 사용하는 큰 가마솥을 두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음식을 만들어 분배했다.

일설에 따르면, 한 번은 카스티야 대사가 카르모 수도원에 가서 누누에게 카스티야가 포트루갈을 다시 침공한다면 어쩔 건지 물었다. 이에 누누는 자신의 수도복을 살짝 벗겨서 그 안에 갑옷을 입고 있음을 보이면서, "카스티야 왕이 다시 포르투갈과 전쟁을 벌인다면, 나는 내 자신이 속한 땅을 위해 복무할 것이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또한 1425년 세우타가 무어인에게 함락될 위험에 처했다는 소문이 돌자, 사람들은 그에게 세우타를 구하기 위해 원정을 떠날 생각이 있는지 물었다. 그러자 그는 창을 집어들어서 수도원 발코니에서 집어던져서 반대편 문에 꽂히게 한 뒤, "내가 필요하다면 기꺼이 아프리카로 가겠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1431년 11월 1일 사망했고, 카르모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그의 묘비는 다음과 같이 기술되었다.
가장 고귀한 브라간사 가문의 창설자이자 훌륭한 장군이자 축복받은 수도사이자 무관장인 유명한 누누가 여기에 누워 있다. 그는 지상 생활 동안 사후 천국을 그토록 간절히 바랐고, 성도들과 영원한 동행을 누릴 자격이 있었다. 그의 세속적 명예는 셀 수 없이 많았으며 위대한 귀족이었지만, 겸손한 수도사가 되었다.

3. 가족

  • 레오노르 데 알빔(1356 ~ 1388): 미뉴 영주 주앙 피레스 데 알빔의 딸. 바스쿠 곤살베스 바로소와 먼저 결혼했지만 자녀를 두지 못했고, 바스쿠 사후 누누 알바레스 페헤이라와 재혼했다.
    • 유년기에 죽은 두 아들.
    • 베아트리스 페헤이라 데 알빔(1380 ~ 1414): 주앙 1세사생아인 브라간사 공작 아폰수 1세의 부인. 브라간사 왕조의 시조이다.

4. 포르투갈의 성인이 되다

1918년 1월 23일, 교황 베네딕토 15세는 <클레멘티시무스 데우스(Clementíssimus Deus)> 교령을 반포해 누누를 시복하고 11월 6일을 그의 기념일로 삼았다. 1921년 시성 절차가 시작됐다. 그러나 1940년, 포르투갈 독재자 안토니우 드 올리베이라 살라자르가 포르투갈의 주권 회복 100주년을 기념해 교황청에 교황이 직접 포르투갈을 방문해 복자 누누를 시성하는 행사를 거행해달라고 요청하자, 교황 비오 12세는 살리자르가 시성식을 토대로 권력을 다지려는 속셈인 것을 눈치채고 거부했다. 그 후 시성 절차는 오래도록 진행되지 않았다.

2004년, 리스본 총대주교 주제 다 크루즈 폴리카르포의 의사에 따라 시성 절차가 다시 시작되었고,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2009년 4월 26일 복자 누누와 다른 네 명의 신임 성인의 시성 의식을 거행했다. 이리하여 누누는 포르투갈의 성인이 되었고, 축일은 그대로 11월 6일로 정해졌다. 현재 그는 포트루갈 보병대 및 가톨릭 스카우트의 수호성인으로 간주되고 있다.


[1] ? ~ 1385, 1361년 7월 24일 포르투갈 국왕 페드루 1세에 의해 합법적인 자식으로 공표되었으며, 페르난두 1세로부터 엘바스 성의 영주가 되었다.[2] ? ~ ?, 1361년 7월 24일 포르투갈 국왕 페드루 1세에 의해 합법적인 자식으로 공표되었다.[3] ? ~ ?, 페르난두 1세에 의해 합법적인 자식으로 인정되었다.[4] ? ~ ?, 페르난두 1세에 의해 합법적인 자식으로 인정되었다.[5] 1372 ~ 1449, 페넬라 영주 주앙 멘데스 데 바스콘셀로의 부인[6] ? ~ ?, 엘바스 시장 곤살루 로드리게스 데 아브레우의 부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