ნიკო ფიროსმანი ნიკო ფიროსმანი, ნიკალა(니카라)
풀네임은 니콜라이 아슬라노비치 피로스마나슈빌리이다.
1862년 5월 5일 ~ 1918년 4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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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지아의 화가.
2. 생애
1862년 미르자니에서 작은 포도원을 소유 중이었던 농부 밑에서 태어나서 일찍 부모를 여의고 누이들과 함께 지냈다.1870년 트빌리시의 부유한 가정의 하인으로 일하면서 러시아어와 조지아어를 배웠으며 1876년 고향으로 돌아와 목동일을 하면서 독학으로 그림을 그렸다.
1882년부터 1918년 죽을 때까지 트빌리시에서 철도 노동자, 간판 제작자, 칠장이, 낙농 일 등 여러 일을 전전하며 살았고 도중에도 틈틈히 작품 활동을 계속했다.
그러다 1918년 스페인 독감에 감염되었고 영양실조와 간경변으로 독감이 악화하여 사망했다.
3. 여담
- 1905년 프랑스 출신의 한 여배우(이 사람도 피로스마니가 그린 그림 중 하나인 여배우 마르가리타의 주인공이라는 것 이외는 알려진 것이 없다.)와 사랑에 빠졌던 일화가 있는데, 이는 노래 백만 송이 장미의 러시아어 버전의 모티브가 되기도 했다. 그리고 그 여배우를 죽을때까지 잊지 못해서였는지 죽을때까지 결혼하지 않고 홀로 살았다. 그 외에도 앞의 일화에 비해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젊었을 때 하인으로 일하던 집의 과부에게도 청혼했던 적이 있다고 한다. 물론 이쪽도 잘 되지 않았고, 거기에 하인 일까지 그만두게 되면서 그 집을 떠나야 했다고 한다.
- 오늘날 조지아에서는 5라리 지폐에 그가 그린 그림이 도안으로 들어가는 등[1] 국민적 화가로써의 영예를 누리고 있지만 정작 생전에는 별다른 찬사를 받지 못했고 평생 가난하게 살다 세상을 떠났다. 물론 죽기 몇년 전부터 이름이 알음알음 알려지기는 했지만 그의 삶에 별 도움이 되지는 못했다. 심지어 죽기 전에는 집세를 내지 못해 노숙자가 되었을 정도로 가난하게 지냈으며, 상단의 생애 단락이 부실한 것도 니코 피로스마니가 본격적으로 재조명받기 시작한게 그가 죽고 한참 지난 1950년대부터인지라 그의 신상에 관한 정보가 대부분 유실되어 남아있는 정보가 별로 없어서이다. 심지어 죽어서 어디 묻혔는지도 몰라서 무덤도 없고, 그린 그림들도 정확히 언제 그렸는지 모르는 그림들이 태반이다.
- 생전에 자존심이 매우 강해서, 남들에게 도움을 좀처럼 받으려 하지 않았다고 한다. 죽기 2년 전인 1916년, 조지아 예술가 협회가 결성되어서 피로스마니에게 도움을 주고자 했는데, 피로스마니와도 친분이 있었던 화가 지고 자지아슈빌리가 신문에 게재한 피로스마니의 캐리커처 때문에 피로스마니가 분노해 조지아 예술가 협회하고도 교류를 끊어버렸다고 한다. 다만 자지아슈빌리도 딱히 악의가 있어서 그런건 아니어서, 피로스마니 사후 피로스마니의 그림들을 발굴하고 보존하는데 크게 기여했다고 한다.
[1] 과거에는 1라리 지폐에 그가 들어가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