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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아 왕국 13대 군주 서부 조지아 왕국 초대 군주 დავით | 다비트 6세 | ||
제호 | 한국어 | 다비트 6세 |
조지아어 | დავით | |
라틴어 | David VI | |
이름 | 다비트 나린(დავით ნარინი) | |
가족 | 기아스 앗 딘(아버지) 루수단(어머니) 구르주 카툰(여동생) 타마르 아마넬리스제(첫째 아내) 테오도라 두케나(둘째 아내) 팔레올로기나(셋째 아내) 콘스탄틴 1세(장남) 미하일(차남) 바크탕 2세(삼남) 알렉산드레(사남) | |
생몰 년도 | 1225년 ~ 1293년 | |
재위 기간 | 1245년 ~1259년(조지아 군주) 1259년 ~ 1293년(서부 조지아 군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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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지아 왕국 13대 군주. 몽골의 지배에 저항하다가 서부 조지아로 후퇴한 뒤 다비트 7세와 함께 조지아를 양분했다.2. 생애
룸 술탄국의 왕자이자 에르주룸의 통치자였던 기아스 앗 딘과 조지아 왕국 12대 여왕 루수단의 아들이다. 여동생으로 구르주 카툰이 있었다. '나린(ნარინი)'은 현명한 자라는 의미의 이름이다. 1230년 조지아 동부 일대가 몽골군에게 잠식되고 왕실이 트빌리시에서 쿠타이시로 이전되었을 때, 그는 어머니에 의해 공동 통치자로 지명되었다. 1242년 루수단이 몽골과 평화 협정을 맺은 뒤, 어머니와 함께 트빌리시로 돌아갔다.루수단은 전왕 기오르기 4세의 아들이며 자신의 조카인 다비트 7세가 왕위를 갈망할 것을 두려워해 사위인 술탄 카이쿠스로 2세의 궁정에 그를 보내 억류하게 하고, 자신의 아들을 바투 칸에게 보내 공식적인 후계자로 인정해달라고 청원했다. 그러나 그가 몽골에서 좀처럼 돌아오지 않던 1245년경 루수단이 사망했다. 귀족들은 2년 더 기다려봤지만 여전히 돌아오지 않자 그가 사망했다고 여기고 1247년 다비트 7세를 조지아로 소환한 뒤 왕으로 추대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그는 지지자들을 끌어모아 반기를 들었다. 그는 전통적인 조지아 왕실법에 따라 왕권은 자신에게 속하며 사생아인 다비트 7세는 왕이 될 자격이 없다고 주장했다. 다비트 7세 지지자들은 이에 맞서 기오르기 4세는 다비트 7세를 왕으로 세울 의사가 있었다며 선왕의 유지를 받든 것뿐이라고 주장했다. 논쟁이 좀처럼 끝나지 않자 양측 모두 몽골에 분쟁을 해결해달라고 호소했다. 몽골의 계승법은 적법한 자녀와 사생아를 구별하지 않았다. 귀위크 칸은 이에 의거해 두 사람이 조지아를 동시에 다스리되 나이 많은 사람이 더 높은 권위를 가지라는 판정을 내렸다. 이리하여 그와 다비트 7세는 1247년부터 1259년까지 함께 조지아를 다스렸다.
1259년, 과중한 공물 납부와 몽골의 지나친 간섭으로 민생이 파탄나고 국정 운영에 차질이 생기자 몽골을 상대로 반기를 들었다. 이 사실을 전해들은 일 칸국의 훌라구 칸은 아르군노인에게 대군을 맡겨 그를 토벌하게 했다. 그는 승산이 없다고 여긴 뒤 서부 조지아로 후퇴해 쿠타이시를 요새화했다. 아르군노인은 동부 조지아 일대를 장악한 후 서부 일대마저 공략하려 했지만, 험준한 산악 지대에 버티고 있는 그를 상대로 고전을 면치 못했다. 그러다 1261년 조지아 동부를 다스리던 다비트 7세가 몽골의 지배에 반기를 들었다가 축출된 뒤 그에게 망명했다. 1262년 다비트 7세가 몽골의 종주권을 받아들이고 조지아 동부로 돌아갔지만, 그는 몽골의 지배를 거부하고 서부 조지아에서 국가를 독자적으로 통치했다.
그는 일 칸국의 위협에 맞서 주변 국가들과 유대를 강화하고자 했다. 1264/1265년 맘루크 왕조에 사절을 보내 우호 관계를 맺었으며, 킵차크 칸국과도 우호 관계를 맺었다. 이와 동시에, 그는 일 칸국의 내부 갈등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이용하려고 했다. 1269년, 그는 바라카 칸과 함께 아바카 칸에 대항했던 테구데르에게 피난처를 제공했다. 하지만 테구데르의 군대가 조지아의 주권을 위협하자, 그는 아바카 칸의 장군 시라문 노얀의 편을 들어 데구데르를 물리쳤다. 그러나 아바카 칸은 자신에게 반기를 들었던 자들을 도와줬던 걸 용서하지 않고 1270년대에 그를 징벌하고자 원정군을 두 번 파견했다. 그는 이에 맞서 산악 지대에서 유격전을 전개해 몽골군에 상당한 피해를 입혔고, 결국 몽골군은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되돌아갔다.
1282년 4월, 트라페준타 제국 황제 요안니스 2세가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가 있는 틈을 타 트라페준타로 쳐들어가 도시를 포위했지만 공략에 실패했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고 마누일 1세의 딸이자 요안니스 2세의 이복 여동생인 테오도라를 후원하여 제위를 찬탈하게 했다. 그러나 요안니스 2세가 1285년 트라페준타로 돌아온 뒤 테오도라를 조지아로 축출하면서, 트라페준타 제국을 조지아의 속국으로 삼으려던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그는 생전에 타마르 아마넬리스제, 테오도라 두케나, 팔레올로기나를 아내로 두었고 콘스탄틴 1세, 미하일, 바크탕 2세, 알렉산드레를 낳았다. 1293년 사망 후 장남 콘스탄틴 1세가 왕위를 물려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