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24 04:15:17

대니 에인지

파일:대니 에인지.jpg
대니얼 레이 에인지
(Daniel Ray Ainge)
생년월일 1959년 3월 17일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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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오리건유진
종교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
193cm (6' 4")
체중 79kg
출신학교 브리검 영 대학교
포지션 슈팅 가드
드래프트 1981년 드래프트 2라운드 31순위
보스턴 셀틱스에 지명
역대 소속팀 MLB
토론토 블루제이스 (1979~1981)
NBA
보스턴 셀틱스(1981~1989)
새크라멘토 킹스(1989~90)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1990~1992)
피닉스 선즈(1992~1995)
지도자 경력 피닉스 선즈 감독 (1996~1999)
프런트 경력 보스턴 셀틱스 운영부사장 (2003~2008)
보스턴 셀틱스 단장 (2007~2021)
보스턴 셀틱스 운영사장 (2008~2021)
유타 재즈 CEO (2021~)
등번호 44번 (보스턴 시절)
7번 (새크라멘토 시절)
9번 (포틀랜드 시절)
22번 (피닉스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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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선수 경력
2.1. NBA 입성 이전2.2. 보스턴 셀틱스 입단, 그리고 전성기2.3. 셀틱스 이후
3. 플레이 스타일4. 깡다구5. 감독과 경영자로서
5.1. 운영에 대한 평가
6. 기타

1. 개요

미국의 농구인으로, 전 NBA 선수이자 전 보스턴 셀틱스의 사장, 단장. 현 유타 재즈의 CEO.

2. 선수 경력

2.1. NBA 입성 이전

오리건 주 유진이란 도시에서 태어난 대니 에인지는 고등학교 시절 그야말로 슈퍼스타였다. 당시 그는 3,4학년 시절이던 1976년과 1977년에 2년 연속 농구팀을 주 챔피언 자리에 올렸으며, 농구/야구/풋볼에서 전부 올아메리칸 퍼스트팀에 오른 역대 유일한 고등학생이었다.[1]

한편 1977년 여름에 고등학교를 졸업한(미국은 가을에 학기가 시작해 여름에 끝난다) 대니 에인지는 놀라운 행보를 보인다. 1977년 메이저리그 드래프트에서 15라운드 389순위로 토론토 블루제이스의 선택을 받은 것. 그는 대학교 2학년 플레이오프를 마친 1979년 5월에 메이저리그 선수로서 데뷔하게 된다. 당시 그는 주로 2루수와 3루수로 뛰었으며 외야에서도 종종 뛰엇는데, 야구선수로서는 그다지 훌륭한 기량을 보이진 못했다. 79년에 그는 87경기 331타석에 나서며 2할 3푼7리를 기록, 토론토 역사상 가장 어린 나이인 만 20세 77일의 나이로 홈런을 때려내는 등 가능성을 보였다.[2] 하지만 3년동안 통산 장타율이 2할6푼4리에 그칠 정도였고 2년차 때 약간 올라가는 듯했던 타율이 3년차가 되니 1할8푼7리에 그치고 장타율이 2할2푼대에 그치는 등 지지부진한 모습을 계속 보여주게 된다. 당시 그의 Wins Above Replacement[3]가 통산 마이너스에 그치는 등 좋은 선수라 보기 힘들었다.

그러나 그에겐 야구만 있는게 아니었다. 당시 그는 프로야구선수로 뛰면서 동시에 농구부에서도 선수로 뛰면서 굉장한 기록들을 내고 있었다. 그는 프랭크 아놀드[4] 감독의 가르침을 받으며 4학년 때인 1980-81 시즌엔 후배 그렉 카이트, 프레드 로버츠와 함께 NCAA 전국대회 때 8강까지 진출시켰다. 이 공로로 대학 최고의 선수들만 받을 수 있는 존 우든 상을 수상하고 두자리수 득점을 당시 최다기록이던 112경기에서 기록하는 등 슈퍼스타였다.

야구선수로 지지부진하고 있던[5] 에인지에게 주목한 것은 바로 보스턴 셀틱스. 이미 대학에서 뛰고 있는 래리 버드를 룰의 허점을 이용해 기습지명하는 등 탁월한 경영센스를 보여주던 레드 아워백은 당시 1983년까지 계약이 남아있었고 그를 방출하고 싶지 않았던 토론토와의 끈질긴 줄다리기 끝에 1981년에 그와 다년계약을 하는데 성공한다.

당시 블루제이스의 부사장 팻 길릭은 "만족합니다. 비록 3루수 하나를 잃고 나왔지만, 그(에인지)가 정말 농구선수가 되고 싶다는 걸 받아들여야죠"라고 말했다. 농구선수가 되고 싶었던 에이지는 토론토에게 받은 보너스를 반납하겠다는 의사를 밝혔지만, 길릭은 "보상은 셀틱스로부터 다 받았다"며 이를 거절했다고 한다.

대학에서 슈퍼스타였던 에인지가 2라운드까지 미끄러진 이유 또한 다른 팀들이 프로리그에서 뛰고 있는데다 계약기간이 2년이나 남은 그를 외면했기 때문인데, 아워백은 6번 지명권으로 올타임 톱10급 레전드를 주워온데 이어 2라운드 지명권 하나로 1라운드 상위권급 선수를 거의 공짜로 주워온 셈이다.[6]

당시 계약을 둘러싸고 해프닝이 있었는데, 당시 길릭과 에인지에 따르면 토론토가 요구하던 1백만 달러를 주고 바이아웃을 하려는 다른 NBA팀은 없었다고 한다.[7] 그러나 보스턴의 최대 라이벌인 LA 레이커스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가 둘 다 이 바이아웃 액수를 맞춰주겠다는 보도가 났고, 이를 두고 아워백이 이 두팀이 계약을 사보타주하려고 수작을 부린게 아니냐며 NBA에 수사를 요구한 것이다.

2.2. 보스턴 셀틱스 입단, 그리고 전성기

우여곡절 끝에 셀틱스의 합류한 에인지는 그다지 활약하지는 못했다. 첫 연습에서 그의 장점인 슛은 족족 다 빗나갔으며 이에 대해 버드는 자서전에서 "녀석의 슛 성공률은 0-2547(2547개 쏴서 다 놓쳤다는 뜻)이었다"고 놀렸으며, 셀틱스 감독 빌 피치는 슛성공률이 타율보다 안 좋다며 마구 혼을 냈다.

루키로서 에인지는 53경기에서 평균 10.6분만을 뛰었으며 단 1경기만 주전, 평균 4.1점에 1.1리바운드 1.6어시스트 야투율 35.7%에 그치는 형편없는 시즌을 보낸다. 82-83시즌을 앞두고 셀틱스는 노쇄화가 역력하던 가드진에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노장 슈팅가드 크리스 포드가 은퇴하고 포인트가드 타이니 아치벌드가 66경기 중 19경기만 주전출장하는 가운데, 대니 에인지(76경기 주전/25.6분), 퀸 버크너 (56경기 주전/21.7분), 제럴드 헨더슨(9경기 주전/18.9분) 등이 로테이션 출장을 하며 가드진을 담당한 것. .
그러나 83-84시즌엔 훗날 명예의 전당에 오르는 명 포인트가드 데니스 존슨이 이적해와 풀타임 주전을 당연히 차지하고 백업 PG였던 헨더슨이 주전으로 올라서서 두명의 PG를 돌리는 시스템을 돌리는 바람에[8] 에인지는 다시 백업으로 주저앉고 출장경기수도 16.3분에 그치게 된다.

변화가 온 것은 그 다음 시즌. 셀틱스는 전 시즌 파이널 2차전에서 결정적인 스틸과 레이업을 한 헨더슨을 현금을 덧붙혀서 시애틀로 보내고 1라운드 지명권을 받아오며[9] 존슨-에인지의 가드라인업을 구축하게 된다. 그리고 데니스 존슨-대니 에인지-래리 버드-케빈 맥헤일-로버트 패리시로 이어지는 80년대 최고 황금기를 장식하는 주전 라인업을 처음으로 완성하게 된다.[10]

붙박이 주전으로 우뚝선 에인지는 평균 34.2분을 뛰며 생애 최초로 두자리수 득점 (12.9점), 5할 야투성공률 52.9%와 5.3어시스트를 겻들인다. 이후 85-86시즌에도 두 자리수 득점과 함께 팀의 우승에 든든한 조력자로서 공헌한다.

이후 86-87시즌부터 그는 3점슈터로서 모습도 보여주기 시작한다. 사실 초창기 그는 성공률이 1,2할에 그쳤지만 이는 삼점슛을 거의 쏘지 않았기 때문에 (3년차까지 0.3~0.4개 시도) 유의미한 성공률이라고 보기 힘들었다.그러나 경기당 0.9개를 쏘던 86시즌에 35.6%를 기록하더니 경기당 2.7개를 쏴서 1.2개를 성공시킨 86-87시즌엔 무려 44.3%의 성공률, 통산 37.8%의 성공률을 기록한다. 에인지는 3점슛의 비중이 극히 적었던 80년대에 리그에서 손꼽히는 3점슈터 중 하나였는데 그가 41.5%를 기록한 87-88시즌에 그는 148개를 성공시켰다. 오늘날 기준으론 별거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이는 당시 NBA 전체 1위였다.

87-88시즌은 사실상 그의 최고 시즌으로서 15.7점 6.2어시스트 3.1리바운드 1.4스틸 야투율 49.1% 3점슛 41.5% 자유투 성공률 87.8%를 기록하며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 올스타전에 출전한다.

사실 까놓고 말해 당시 그는 준수한 주전 ~ 올스타 언저리급 정도의 선수였지 딱 잘라서 '스타급'이라 할만 한 플레이어는 아니었다. 그러나 당시 동부 가드진은 유독 약한 편이었고[11] 이 때문에 마찬가지로 올스타치곤 기량이나 기록이 좀 아쉬운 닥 리버스도 처음이자 마지막 올스타 출장의 기쁨을 누렸다.

그러나 보스턴에서 행복한 날들은 오래 가지 못했다. 88-89시즌 당시 루키 가드 브라이언 쇼가 1월 중에 무려 31점을 넣기도 하는 등 점점 괜찮은 활약을 해주면서 비슷한 롤을 갖고 있는 대니 에인지의 입지가 점점 줄었다. 그는 45경기 중 28경기를 뛴 후 결국 트래이드 데드라인 직전에 새크라멘토 킹스로 트레이드 되고 만다.

2.3. 셀틱스 이후

한때 리그 최고의 팀 중 하나에서 (물론 89시즌 셀틱스는 버드와 맥헤일의 부상으로 이전의 강력함을 잃었었다) 리그 최악의 팀 중 하나로 옮긴 에인지는 잔여 28경기동안 커리어에서 가장 높은 20.3점 6.7리바운드를 기록하고, 89-90시즌엔 풀시즌 기준 커리어하이인 17.9점 4.3어시스트, 그리고 88시즌 이후 가장 높은 6리바운드를 기록한다. 또한 그의 커리어 하이 득점인 45점, 커리어 하이 리바운드인 11리바운드 모두 킹스 소속으로 기록한 것.

이 와중에 그는 킹스 소속으로 친정팀을 상대하는 첫 경기였던 1989년 12월 27일 경기에서 무려 39점 6리바운드 9어시스트를 폭발시키는 대활약을 했다. 그러나 셀틱스는 37점을 기록한 버드의 활약으로 115대 112로 승리한다.

에인지의 말에 따르면 케빈 맥헤일, 버드, 로버트 패리시, 데니스 존슨을 상대하는 것은 마치 형들을 어렸을때 상대하는 것과 같이 뭔가 증명해야 한다는 동기부여가 있었다고 한다.

여담이지만 에인지가 킹스에 있던 시절에 새크라멘토는 케니 스미스, 퍼비스 엘리슨 등 젊고 유망한 선수들이 많은 팀이었으나 스미스는 얼마 후 애틀란타 호크스로 트래이드 되고 엘리슨은 20세기 최악의 전체1번픽 중 하나로 꼽히는 선수가 된다.

당시 바닥을 기던 킹스는 90년에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로 트레이드하게 된다. 고향팀으로 간 그는 백업멤버로 클라이드 드렉슬러의 뒤를 받혀주게 된다.

1992년에 그는 1987년 이후 5년 만에 파이널 무대를 밟게 되지만 마이클 조던의 전설적인 퍼포먼스와 함께 우승을 내준다.

1992년에 그는 자유계약 선수가 되고, 슈퍼스타 찰스 바클리를 영입하면서 팀 칼라를 완전히 바꾸려고 했던 피닉스 선즈는 그의 경험을 높이 사 에인지를 영입한다.에인지는 이와 같은 믿음에 부함해 전경기를 벤치에서 나오면서도 벤치멤버치고 상당히 많은 27분을 소화하며 11.8점을 기록, 특유의 터프한 살림꾼 스타일을 선즈에서 보여주게 된다.

그는 2년 연속으로 다른 팀 소속으로서 파이널 무대를 밟게 되지만, 또 다시 마이클 조던 쇼의 조역이 되며 퇴장하고 만다. 이젠 전설이 된 4차전 당시 소소한 해프닝이 있었는데, 조던과 에인지, 바클리를 포함한 선즈 선수들은 상당히 친한 사이라 4차전 전날에 조던이 시카고에 있는 자기 식당에 이들을 초대해 식사대접을 했다. 그런데 조던은 홈에서 3차연장까지 가서 패배한 3차전에 조던치곤 다소 부진한 상태였고, 이를 두고 해설하던 매직 존슨은 "요새 선수들이 너무 친하게 지내는 것 같다"며 아쉬움을 표한다.[12] 그런데 경기 도중 에인지와 조던 사이에서 다툼이 일어나자 에인지가 신경질적으로 조던의 품에서 공을 확 뺏고 조던이 삿대질을 하며 싸움 직전까지 갔고, 해설하던 매직은 "이래야 파이널이지!"하며 너무 좋아한다. 조던은 이 이후에 말 그대로 폭발을 하며 파이널 한 경기 득점 2위인 55점을 기록한다.

에인지는 1994년에 역대 두번째로 통산 900개 3점슛을 성공시킨 선수가 되며, 1994-95시즌 이후 은퇴한다. 통산 기록은 1042경기 동안 평균 11.5점 4어시스트 2.7리바운드 1.1스틸, 3점슛 1002개.

3. 플레이 스타일

에인지는 80년대 기준으로 리그 수위급 외곽슛, PG를 봐도 될 정도의 패스실력과 시야를 바탕으로 득점지원을 해주던 슈팅가드였다. 상황에 따라 PG를 볼 수 있을 정도였고, 실제로 킹스 시절엔 장신 PG인 스미스와 더불어 콤보가드에 가깝게 기용되었다.

주로 캐치앤 슛이나 볼없는 상태에서 부지런히 움직이다가 컷인 등으로 득점했지만 1대1로 득점하는 능력도 있었고, 시야가 매우 좋은 선수라 막히면 잘 빼줬다. 어시스트는 전성기 때 5,6개 정도는 항상 해줬는데, 역대급으로 공이 잘 돌던 보스턴의 슈팅가드답게 포지션 대비 상위 수준의 리딩력을 갖고 있었다.[13]

다만 운동능력이 평이한 수준이라 돌파능력이 별로 뛰어나진 않고, 득점도 수비도 평범한 편이었다. 공격권을 많이 쓴다면 10점대 후반 정도는 올려줄 수 있었지만 그 정도 뿐. 한때 킹스에서 콤비를 이뤘던 케니 스미스와 마찬가지로 전성기 기준 리그 내 주전급~올스타급 사이의 선수라고 볼 수 있다.

사실 어느 팀에 가도 주전을 할만큼 실력이 있긴 했지만, 보스턴 왕조 당시 D.존슨-에인지-버드-맥헤일-패리쉬라는 역대급 주전 라인업에서 명예의 전당에 유일하게 헌액이 못 된 선수였다 보니 아이러니하게도 팀내 주전 중 최약체(...) 포지션이기도 했다. 데니스 존슨의 경우 전성기가 지나긴 했지만 여전히 뛰어난 선수였고 특히 수비력이 매우 뛰어났으며, 버드-멕헤일-로버트 패리쉬는 역대 최고의 프런트코트로 꼽힌다. 그러다보니 에인지는 슈팅력이 뛰어난 것 외에는 비교적 평범한 편이었고 올스타 1회를 제외하면 메이저 수상 이력이 없는 에인지의 네임벨류는 상당히 쳐지는 편이었던 것.

공격이야 준수했고 수비 역시 괜찮은 축에는 들었다. 우선 디펜시브 퍼스트~세컨드 팀을 수차례 수상한 장신 포인트가드 DJ가 수비코트에서는 1~2번을 가리지 않았고, 둘의 체격조건이 비슷하다 보니 상대팀 백코트 듀오 중 더 뛰어난 쪽을 DJ가 막고 다른 하나를 에인지가 막는 경우도 많았다. 당시에는 운동능력과 사이즈를 겸비한 스윙맨 타입의 슈팅가드가 많지 않아 에인지 역시 2번 수비에 특별히 애를 먹지는 않았던 편. 문제는 바로 포워드진과의 체격 차이였는데, 당시 보스턴의 프론트코트는 버드(206)-맥헤일(208)-패리쉬(216)라는 거구들로 구성되어 가드진과의 덩치 차이가 정말 컸다. 당장 3번인 버드가 맨발기준 206cm의 신장에 110kg라는 전형적인 빅맨의 사이즈를 가진 반면, DJ와 에인지는 190 초반대의 신장에 80kg 전후에 불과한 체중을 가져 매치업 견적이 간혹 애매해지는 경우가 있었다. 마이클 조던에게 엄청 털린 것도 이와 관련이 있는데, 물론 조던이 역대 최고의 스코어러라곤 하나 이 당시 조던은 돌파 위주 선수였고[14] 80년대는 골밑 밀집도가 엄청나던 시절이었기에 역대 최고의 프런트코트를 가진 보스턴이라면 오히려 저런 선수를 막기 유리한 환경이다. 그런데 앞선에서 DJ는 물론 함께 막아줘야할 에인지가 전혀 막지 못했기 때문에 미친듯이 털린 것이다.[15]

4. 깡다구

그러나 에인지가 가장 유명했던 것은 그 실력보다도 깡다구와 성깔이 그야말로 대단했기 때문이었다. 80년대 농구는 지금과 비교도 못하게 거칠었고 싸움도 자주 일어났는데, 에인지는 상대가 누구던 단 한번도 물러선 적이 없었다. 상대도 다양해서 마이클 조던, 아이제아 토마스, 데니스 로드맨, 마리오 엘리, 트리 롤린스 등 정말 다양하게 붙었다. 플레이도 거칠고 워낙 다혈질이라 (좋게 말하면 열정적, 나쁘게 말하면 성질이 더러워서) 충돌이 잦았다.

백미는 애틀란타 호크스의 센터 트리 롤린스(Tree Rolins)와의 싸움이었는데, 83시즌 당시 2년차로 입지를 조금씩 다져가던 에인지는 베테랑 센터 롤린스에게 "기집애 같은놈(sissy)"라고 조롱했고 롤린스가 이에 분개해 그를 팔꿈치로 타격한다. 그러자 193cm인 에인지는 216cm 거구인 롤린스를 테이크다운해 둘이 엉켜 싸우는데 이때 밀리던 롤린스가 하필 에인지의 가운데 손가락을 세게 깨물어서 꿰메야 할 정도의 부상을 입히는 해프닝이 일어났다. 이를 두고 당시 보스턴 헤럴드는 롤린스의 이름을 따 "나무가 사람을 물다(Tree Bites Man)"이란 제목의 기사를 내보낸다.

그의 거친 성깔을 보여주는 것이 3년차인 1984년 파이널 당시 일화인데, 이때 4차전에서 멕헤일이 레이커스의 커트 램비스에게 마치 프로레슬링의 크로스라인을 연상케하는 매우 거칠고 더티한 파울을 해 패싸움이 일어날 뻔한 적이 있었다. 문제는 멕헤일이 당시 더티플레이어는 커녕 평상시 상당히 얌전한 선수였다는 것. 이때 팀에서 가장 악바리였던 에인지의 말이 영향을 미쳤을 수도 있는데, 당시 셀틱스는 3차전에서 레이커스에게 참패를 당한 후였고 팀 연습에서 "더 열심히 뛰어야 한다"는 말이 나오고 있었는다. 여기서 에인지는 팀에게 "이봐. 우리 팀에서 하드파울하는 사람이 나밖에 없으니까 내가 가는 경기장마다 야유받잖아. 니들도 좀 하드파울하란 말이야!"라고 악을 썼다고 한다. 에인지는 훗날 멕헤일의 파울에 대해 "달콤했다"고 평했다.[16]

실제로 당시 에인지의 악명이 워낙 높았기 때문에 88년에 LA타임즈가 NBA의 깡패들(Thugs of the NBA)란 기사를 냈을 때 빌 레임비어, 릭 마혼, 모리스 루카스, 엑제비어 맥대니얼과 함께 거론되기도 했다. 대단한 건 저 다섯명 중 레임비어, 마혼, 루카스는 빅맨이고 맥대니얼은 2미터 정도 키에 엄청난 근육질인 포워드였는데, 에인지만 190 좀 넘는 키의 슈팅가드로 압도적으로 덩치가 가장 작았다는 것. 어쨌거나 실력도 실력이지만 팀에 활기를 불어넣는 감초같은 역할을 하던 선수. 베테랑이 됐을때 라커룸 리더로서 역할을 톡톡히 했다.

5. 감독과 경영자로서

선수 은퇴 후 1995년부터 TNT 해설위원을 맡다가 1996년에 피닉스 선즈에 감독으로 부임했으나 이 기간 별 성과는 못 내고 오히려 경기 도중 로버트 오리에게 수건을 얻어맞은(...) 사건만 제일 유명하다. 이 직후 오리는 당연히 LA 레이커스의 세드릭 세발로스와 트레이드. 당시 선즈는 11연패로 시즌 스타트를 끊었고, 오리는 주전과 벤치를 오가면서 극단적인 부진에 시달리고 있었다. 사건이 일어난 경기에서 오리는 또 다시 부진에 빠졌고 에인지가 그를 교체하자 오리가 항의하며 에인지가 이에 받아치면서 말싸움이 수건 던지기로 이어진것.

1999년에 감독직을 관두고 TNT 해설위원으로 복귀했다가, 2003년에 셀틱스 운영부사장 자리에 앉아 친정팀에 돌아왔다.

다만 초기에는 수많은 논란에 휩싸였다. 그가 최초로 벌인 일 중 하나는 2003-04시즌 당시 폴 피어스와 더불어 팀을 이끌고 있었으며 팀 내에서 가장 인기가 많고 3회 올스타였던 앤트완 워커를 트레이드 한 것이었다. 당시 워커는 3점에 맛을 들여서 32.3%의 성공률에도 무려 경기당 7.5개나 던져대는 통에 필드골 성공률이 많이 떨어지고, 팀내 득점에서 피어스에게 역전된 (25.9점 vs 20.1점) 상태긴 했지만 보스턴에서 데뷔해 꾸준히 기록을 좋은 활약을 보여준 그를 트레이드한다는 것은 팬들에게 받아들이기 힘든 결과였다. 이로 인해 멸칭에 가까운 "트레이더 댄"이란 별명을 받기도 했다. 또한 그는 감독 짐 오브라이언과 끝없는 마찰 끝에 오브라이언이 결국 필라델피아로 이적하게 만든다.

2003-04시즌을 사실상 포기한 셀틱스는 2004-05시즌 도중 앤트완 워커를 거의 꽁짜로[17] 데려오며 한시즌만에 반동에 성공해 애틀란틱 디비젼 1위를 기록한다.

그러나 05-06시즌 그가 보여준 행보는 의이할 정도였는데, 동부 3위를 기록한 팀이 워커와 페이튼을 둘 다 포기하고[18] 어린 선수들인 달론테 웨스트, 라이언 곰즈, 켄드릭 퍼킨스에게 주전 출장의 기회를 주고, 고졸로 2년차였던 알 제퍼슨의 출장시간을 점점 늘린다. 또한 고졸신인 제럴드 그린에게도 꾸준히 시간을 준다.

충분히 플레이오프 경쟁력이 있는 팀을 해체하고 리빌딩을 하는,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그의 행보에 팬들은 온갖 욕을 퍼붓고, 이는 결국 06-07시즌 팀 역사상 최악의 시즌으로 이어진다.[19]

그러나 이는 모두 에인지의 큰 그림이었던 것. 에인지는 비지니스 마인드로 똘똘 뭉친 자로 선수들의 한계와 가치를 냉정하게 계산하고 있었다. 포워드인 워커는 2003년 당시 올스타로 뽑히고 기록도 그만큼 내고 있었으나 선수로서 3점슛에 지나치게 맛이 들리고 외곽을 도는 바람에 효용성이 점점 떨어지고 있었다. 실제로 그는 96년에 데뷔한 선수였으나 만 26세 이후 올스타 출전이 딱 끊기고 계속 내리막을 걷는다. 사실상 2000-01시즌 이후로 계속 기량이 하락한 선수.

또한 04-05시즌 셀틱스는 1-3-4번을 중심으로 이뤄진 팀이지만, 파워포워드인 워커가 골밑에서 존재감이 높지 않고 1번 페이튼은 노장이기 때문에 더 이상 성장하기 힘든 팀이었다. 이 팀으로 계속 중위권을 가느니 차라리 처음부터 판을 짜려고 한 것.

문제는 셀틱스에 그동안 거물급 신인이 들어오지 않았던 것. 결국 그는 2006-07시즌을 홀라당 바쳐서 어린 선수들의 주가를 있는데로 끌어올려서 이들을 매물로 로스터를 완전히 갈아엎게 된다. 같은 해 크리스 월러스 단장이 멤피스 그리즐리스로 떠나자 단장까지 도맡아가며 당시 그나마 비중이 있는 선수들 중 팀에 남은 선수는 라존 론도와 켄드릭 퍼킨스 뿐이었으며, 그 밖의 선수들은 07시즌 에이스급으로 거듭난 제퍼슨부터 덩크왕을 넘어 쓸만한 스윙맨으로 인정받던 제럴드 그린까지 싹 다 팔았다.

에인지의 안목이 빛나는 부분은 끝까지 론도를 지킨 부분인데 당시 그는 보스턴 PG 중 가장 실력이 쳐졌다. 달론테 웨스트는 당시 주전급이었으며, 고졸 출신 세바스찬 텔페어도 경험이 쌓여 론도보단 안정감이 있다고 평가받았다. 론도는 당시 폭발적인 운동능력만 돋보일뿐 지나친 공격 욕심에 공격을 그르칠 때가 많았으며[20] 그렇게 크게 될 거라는 기대도 없었다. 그러나 에인지는 고집스레 론도를 지키고 주전 PG인 웨스트를 시애틀로 보낸다. 심지어 케빈 가넷과의 7대1트레이드(지명권 두장 포함)는 "너무 퍼준게 아니냐"는 평이 많았다.

그러나 이 선수들의 이후 행보를 보면 역시 에인지의 안목이 빛난다. 이때 대량으로 포기한 유망주들은 그린부터 곰즈, 웨스트 등 누구도 터지지 못했으며 유일하게 잘된 케이스가 20-10을 세번 기록하고 올NBA서드팀까지 오른 제퍼슨이나 가넷을 영입한 대가에 비하면 싸다. 당시 같이 트레이드된 선수들이 다 망했다는 걸 생각하면 제퍼슨+지명권 두장으로 영입한 셈. 무엇보다 당시 제퍼슨의 기대치는 이 정도가 아니었다. 그랬다면 MVP출신을 영입하는 트레이드의 핵으로 쓰이지도 못했을 것.

무엇보다 이 과감한 무브들로 결국 07-08시즌에 한 시즌만에 우승을 이뤄냈다. 게다가 셀틱스는 86년 우승 이후 계속해서 우승을 못하고 있었으나 03년 에인지 부임이후 5시즌만에 우승을 해낸 것이다.

2008년 사장 승진 뒤에도 신들린 듯한 경영을 하고 있는데 빅3가 노쇠해가자 이번엔 케빈 가넷과 팀의 심장인 폴 피어스, 노장 제이슨 테리까지 과감히 네츠로 보내 샐러리 문제를 덜면서 지명권까지 얻어왔다. 물론 받아온 선수들은 별 쓸모가 없었지만 늙어가는 가넷, 피어스, 테리도 네츠에서 별 기여를 못했으며, 가장 중요한 건 지명권 중 하나가 2017년 전체 1순위로 돌변했다.

셀틱스는 이 1순위 지명권을 트레이드해서 3순위 지명권 (제이슨 테이텀 지명)과 레이커스의 2018년 or 2019년 1라운드 픽을 얻어왔다. 그런데 테이텀은 신인왕 후보로까지 꼽히고 당시 1순위로 뽑힌 마켈 펄츠보다 훨씬 잘 성장하고 있으니 늙은 선수들은 다 내보내고 미래를 얻어온 셈. 심지어 가넷과 피어스를 보내고도 딱 한번 PO에 탈락하고 다시 PO 무대로 돌아왔다.

그리고 2016-17 시즌엔 동부 컨퍼런스 승률 1위를 기록했다. 심지어 동부 1위팀의 에이스였던 아이제아 토마스를 당시 주가가 좋았던 제이 크라우더와 함께 내보내고 카이리 어빙을 데려왔는데, 어빙이 MVP 후보로까지 꼽히며 지난 시즌에 비해 전력이 한층 더 업그레이드되었다.

쭉 보면 트레이드 당시에는 다소 손해인 것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가넷 트레이드 당시에도 너무 많이 퍼준게 아니냐는 우려가 있었다) 뚜껑을 열고 보면 아주 남는 장사를 해왔다는 걸 알 수 있다. 물론 이 과정에서 프랜차이저인 피어스를 냉정하게 트레이드해버려 팬들이 실망하기도 하지만, 결과는 아주 확실하다는 점에서 에인지의 능력을 알 수 있다.

종합해보면 경영진으로서 에인지는 뼛속까지 장사꾼이다. 철저하게 자신의 자산의 가치가 최고조에 있을 때 팔고, 한계가 보이는 선수들은 아직 가치가 있을 때 냉정하게 팔아치우며, 이 과정에서 프랜차이저라든지 그런 가치들은 무시하는 편. 그러나 그만큼 성과는 철저하다.

그러나 뜬금없이 제일런 브라운한테 4년 115M의 맥스계약을 안겨주며 치매 걸린 거(...) 아니냐는 소리가 나오고 있다..가 그 브라운이 19-20시즌 초반 켐바 워커와 함께 양대 메인 득점원 급으로 각성하면서 다시 한 번 그의 안목을 증명하는 중이다.[21] 거기에 스텝-업한 테이텀에게 5년 163M의 맥스계약을 안겨주면서 리그 최고의 영 코어 듀오를 구성하는데 성공했다는 평가이다. 그러나 4년 141M을 받는 켐바 워커가 샬럿 시절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면서 아쉬움을 사고 있다.

2021년 6월 2일자로 은퇴를 발표했다. 후임으로 감독이었던 브래드 스티븐스가 곧바로 임명되었다. 대니 에인지는 이미 발표 수개월전부터 은퇴를 생각하고 있었고, 스티븐스도 2020년 버블 시즌을 겪으면서 감독직에 염증을 느껴 단장직을 바로 수락했다고 한다.

향후 단장 커리어를 이어갈지는 불확실하나, 포틀랜드 트레일 블레이저스유타 재즈가 행선지로 언급되는 중.하지만 2년전에 심장마비로 입원했었다는 말이 나오면서 사실상 은퇴라는 말이 나오고 있다.

12월 16일 유타 재즈의 CEO로 임명되었다.[22] 유타가 미첼-고베어 코어의 한계를 1라운드 탈락으로 깨닫게 되자 NBA 공격 지표 1위 팀에 과감히 리셋 버튼을 누르고 미첼과 고베어를 비롯한 여러 주축 선수들을 트레이드해 1라운드 픽을 다발로 가져왔고, 향후 오클라호마시티와 함께 행사할 1라운드 픽이 가장 많은 팀들 중 하나가 되었다.[23] 에인지의 드래프트 안목이 좋은 만큼, 유타의 밝은 미래를 기대해봐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예상과는 다르게 22-23시즌이 시작된 이후 유타가 예상외로 호성적을 내기 시작하자 팀이 이겨도 웃지를 못 하는 모습이 자주 포착되기 시작했다.

5.1. 운영에 대한 평가

위의 글을 요약하면 에인지는 레드삭스 시절의 엡스타인처럼 프랜차이즈를 댓가로 한 건실한 운영방식을 취한다고 요약할수 있다. 그렇게 실리를 챙겨가며 운영을 한 결과가 한번의 우승과 한번의 준우승, 그리고 그 이후 3회의 컨퍼런스 파이널 진출.

냉철한 운영 자체는 호불호의 영역일 뿐 잘잘못을 따지기는 애매한 부분으로 둔다면, 일단 피어스&가넷 era의 해체 이후 토마스를 기반으로 다시한번 컨파급 팀을 만들어내는데 성공하고, 마커스 스마트 - 제일런 브라운 - 제이슨 테이텀으로 이어지는 코어 자원을 잘 뽑으며 빠르게 경쟁력있는 로스터를 완성하는 등 꾸준히 동부의 강호로 군림했다.

이러나저러나 성적은 잘 내준 셈이고, 보스턴 프론트 역사에서도 꽤나 굵직한 족적을 남긴 단장이라는 것은 부정하기 힘들다. 물론 그 과정에서 피어스와 가넷 등의 주축 선수들을 트레이드 에셋으로 활용한 부분에서 비판을 받긴 하나, 그 결과가 현 보스턴의 미래코어인 테이텀으로 이어진 것 역시 사실이니 판단은 알아서

드래프트 안목에 대해서는 긴 시간 좋은 평을 받아왔고, 특히 1픽이 걸렸음에도 마켈 펄츠를 거르는 픽다운, 거기에 입성 전까지의 평은 테이텀보다 근소하게 우위였던 조쉬 잭슨 역시도 거르며 테이텀을 획득한 것은 신의 한수로 평가받는다. 다만 최근의 경우 19년 랭포드, 에드워즈, 워터스, 20년 네스미스, 프리차드 등 자잘한 드래프트에 있어서 프리차드 정도를 제외하고는 평이 좋지는 않은 편. 더군다나 팀에 필요한 골밑을 책임질 빅맨보다 난쟁이들만 데려왔다는 점, 현재 팀 로스터가 엉망인것도 에인지의 책임도 피할수 없는 형편이다.

그러나 해당 픽들은 피어스, 가넷 트레이드로 얻어온 브루클린 네츠의 상위픽이 아닌 자체적으로 가지고 있던 하위픽이라는 점에서 기대치 자체가 낮을 수 밖에 없고, 스틸픽은 자주 일어나는게 아니라는 점에서 참작은 가능하다. 애시당초 그의 드래프트 이력을 살펴본다면 최근 하위픽 농사 좀 실패했다고 안목이 구리다는 것 자체가 억까식 논리에 가깝고, 차라리 저 픽들을 직접 행사할게 아니라 미리미리 트레이드 자원으로 사용했어야 했다는 지적이 더 많다.

오히려 컨텐더 팀이 가지게 되는 픽으로는 크게 기대할 것이 없는 드래프트와는 달리, 야심차게 데려온 대형 FA 계약들이 좋은 결과로 이어지지 못하는 것이 커리어 후반 평을 깎아먹은 원인이다. 헤이워드는 첫 시즌에 발목 골절로 시즌을 날린 이후 3옵션 이상은 못 해주는 상당히 아쉬운 모습만을 보이다가 샬럿으로 떠나버렸고, 팀케미 문제를 일으키던 어빙 대신 데려온 켐바 워커는 리더십에서는 비교적 평가가 좋지만 고질적인 무릎부상으로 인한 결장과 늘어난 슛 기복 때문에 먹튀에 가까워지고 있다. 물론 헤이워드의 부상은 어느 누구라도 예측할 수 없는 부분이었고, 켐바 역시 '영입 당시만 보면' All-NBA Team 선정에 철강왕급 내구성 및 영건들을 이끌어 갈 베테랑으로 좋은 영입이었다는 평이었기에 이 부분 역시 옹호측과 비판측이 갈린다.

다만 헤이워드를 트레이드 해서 마일스 터너와 맥더맛을 데려올수 있었음에도 그 자리를 제프 티그트리스탄 탐슨으로 채운건 확실히 실수라는 평. 이후 팬들을 놀라게 할 트레이드를 보여주겠다고 발언하며 21년 3월 27일 마감될 트레이드 데드라인까지 그 귀추가 주목되었으나, 제대로 된 트레이드는 실패한 상황. 결정적으로 예전처럼 패닉바이를 지르는 단장들이 줄어들기도 했고 에인지가 캠바의 무릎부상을 숨기고 트레이드를 시도했다는 말까지 나왔다.

즉, 위 냉철한 트레이드 부분을 제외하면 그의 운영상의 아쉬움은 대체로 보스턴 단장으로서의 커리어 중 후반에 나온 편이다. 유의해야할 부분은 에인지가 NBA 단장 중에서도 워낙 유명하고, 단장 커리어에 있어 안티들이 많다 보니 호평이나 옹호를 받을 부분은 거른채 비판측 내용만 나열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것이다.[24] 한명의 단장이 특정 구단을 20년 가까이 맡으면서 운영상 비판의 소지가 발생하지 않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에 가깝고, 적어도 에인지 휘하에서 보스턴은 우승을 챙겼음은 물론 우승&준우승 시즌 포함 다섯번의 컨퍼런스 파이널을 경험하며 강팀으로 군림했을 정도로 단장으로서의 이력 자체는 충분히 성공적이었다고 평하는 것이 적절하다.

6. 기타

프로에서 영구결번이 되진 못했지만 브리검 영 대학에서 영구결번이 되었다. 사실 명문구단치고 영구결번 기준이 상당히 후한 축에 드는 셀틱스에서는 결번이 되어볼 만 했는데도 되지 못 한 케이스. 보스턴에서 8시즌 활약하며 두번의 우승과 한번의 Finals MVP를 수상한 '세드릭 맥스웰'이 영구 결번이 되었는데[25], 에인지 역시 8시즌을 활약하며 두번의 우승을 함께한 점, 구단 역사상 최강의 팀이었던 86시즌 라인업의 당당한 주전 멤버였던 점[26], 맥스웰에게 없는 올스타 경력이 있는 점 등으로 인해 현지에서도 영결에 대한 논의 자체는 제법 있는 편이었다. 여기에 십수년간의 단장으로서의 이력까지 더해지고 있으니[27] 이러나저러나 셀틱스 역사에서 굵직한 부분을 차지하는 인물 중 하나로, 훗날 단장직을 내려놓고 은퇴를 한다면 영구결번이 될 가능성이 제법 열려있다고 볼 수 있다.

여담으로 그는 영화 스페이스 잼에도 찬조출연했는데, 외계인들에게 농구실력을 뺐긴 찰스 바클리가 삽질을 거듭하자 "수비하라고!"하면서 유니폼을 잡아당기고 타임아웃 이후 "뭐하는 거야 임마! 너 땜에 다 죽게 생겼잖아!"라고 뒷통수를 후려갈기며 갈군다. 본인의 성격에 정말 잘 맞는 연기라 매우 자연스럽다.

보스턴 GM 당시 성격 테스트를 받았을 때 ADHD가 있다는 진단이 나왔는데, 현역시절부터 유명했던 그 성깔을 생각해보면 의미심장하다.


[1] 사실 대부분의 프로선수들은 초고교급이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괴랄한 기록을 낸다. 마이클 조던도 농구/야구/풋볼을 모두 잘했으며 앨런 아이버슨은 풋볼과 농구 두 분야에서 동시에 주 챔피언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아이버슨도 야구를 잘하진 못했으며 조던은 세 스포츠를 다할땐 잘하긴 하지만 프로유망주급까진 아니었다가 2학년때 농구부 1군에 탈락한 유명한 사건 이후 야구와 풋볼을 포기하면서 전국적인 유망주에 올랐다. 세 분야에서 전국구 거물이었던 에인지는 정말 대단했던 것.[2] 이 기록은 40년 뒤 블라디미르 게레로 주니어가 만 20세 55일의 나이로 메이저리그 첫 홈런을 때려내며 경신된다.[3] 대체선수보다 얼마나 더 많은 승수를 더해주는지 보여주는 것. 이게 마이너스면 교체되는게 좋은 레벨의 선수란 얘기다.[4] 1934년 10월 1일 유타 주 오그덴 출생. 1956년 아이다호 주립대학교 졸업 후 파예트 고등학교 코치로 지도자 생활을 시작, 1958년 브리검 영 고등학교에서 감독으로 데뷔했다. 이후 브리검 영 대학교 부속고등학교(1960~1962)를 거쳐 1962년 오리건 대학교 수습코치 부임 때 대학 무대를 처음 경험했다. 그 뒤 포카텔로 고등학교(1963~1964)와 클라크 주니어 칼리지(현 클라크 칼리지, 1964~1966)에서 감독을 하다가 1966년 오리건대 코치로 돌아와 스티브 벨코(1916~2000) 감독 곁을 보좌했고, 1971년 당대 대학농구계를 독주하던 UCLA로 전근가서 4년 동안 명장 존 우든(1910~2010) 감독을 보좌했다. 1975년부터 브리검 영 대학교 감독으로 부임하여 임기 8년 동안 에인지와 그렉 카이트, 프레드 로버츠 외에 데빈 듀란트(전 브리검 영 대학교 하와이 캠퍼스 제1부총장) 등을 육성했고, 1985년 하와이 대학교로 옮겼다가 별 성과 없이 1987년부터 애리조나 주립대학교로 옮겨 2년 간 코치로 일하고 지도자 일선에서 떠났다. 아들 깁(1968년생)은 2010년에 아버지가 맡던 하와이대 감독이 되어 2011 및 2013년 CIT 대회에 두 차례 진출시켰고, 2015년부터 5년 동안 보스턴 셀틱스 스카우터로 일했다.[5] 물론 늦게 터지는 선수들도 많고 선수수명 자체가 농구에 비해 비교적 긴 야구란 스포츠의 특성상 20대 초반이었던 에인지가 몇년 부진한다고 해도 그의 미래가 어둡다고만 볼 건 아니었다. 그는 고등학교 졸업 직후 메이저에 왔으며 어차피 몇년은 지켜볼 작정으로 데려왔으니...다만 본인의 의사도 그렇고 농구선수로 재능도 뛰어났기에 농구로 간 것.[6] 당시 그는 20위권 밖에서 뽑힌 선수 중 올스타전에 한번이라도 출전한 유일한 선수였다. 당시 드래프트에서 그보다 나은 커리어를 보냈다고 할 만한 선수는 마크 어과이어, 아이제아 토마스, 벅 윌리엄스, 톰 체임버스, 롤랜도 블랙맨, 켈리 트리퓨카, 래리 낸스 말고는 없었으며, 대학시절 기대치로 보면 선호도가 낮은 슈팅가드란 점을 감안하더라도 이들 중 몇명보다는 더 높은 순위에 뽑혔을 것이다. 톱10급의 선수를 31번 픽으로 뽑은 것.[7] 당시 1백만 달러는 어마어마한 액수였다. 래리버드가 1979년에 당시 신인으로선 역대 최고액인 5년 325만달러에 계약을 했으며, 1981년에 매직 존슨이 장기 계약을 하며 요구한 액수가 연간 1백만 달러였다. 이 정도 돈이니 선뜻 나설 팀이 없었던 것.[8] 이 경우 문제가 되는 것이 수비인데 존슨이 레전드급 수비수인데다가 덩치도 193cm로 커서 슈팅가드 수비도 무난히 가능했다. 참고로 불스와 붙을 때 조던을 주로 막은게 DJ, 데니스 존슨이었는데, 젊은 시절 조던은 체격에 비해 매우 빠른 선수라 비슷하거나 더 큰 선수가 막는 것보다 오히려 약간 작은 선수가 막을 때가 많았다. 실제로 디트로이트 피스톤즈에서 그를 주로 막은건 체격과 운동능력이 좋은 로드맨이 아니라 조 듀마스였다.[9] 여담이지만 이 지명권은 1986년 전체 2순위 지명권으로 둔갑해 셀틱스에게 또다른 대박을 안겨주나...싶었지만 안타깝게 이때 지명된 유망주 렌 바이어스가 드래프트 직후 코카인 과다복용으로 사망하는 비극으로 이어진다.[10] 맥헤일은 1984-85시즌엔 31경기만 주전으로 나섰지만 당시 주전으로 더 많이 뛰었던 세드릭 맥스웰(26.2분)을 출장시간에서 이미 압도하고 있었다. 게다가 플레이오프에선 완벽한 주전이 되어 21경기 모두 주전으로 나와 39.9분을 뛰는 등 초중반까지만 후보였을 뿐 완벽히 주전으로 발돋음한 해였다. 결국 셀틱스는 필요가 없어진 맥스웰을 샌디에이고 클리퍼스로 보내며 86년 우승에 큰 보탬이 되는 백업 센터 빌 월튼을 데려온다.[11] 당시 올NBA팀은 퍼스트/세컨팀까지 있었는데 퍼스트팀 멤버가 마이클 조던, 매직 존슨, 세컨팀이 클라이드 드렉슬러, 존 스탁턴 등 조던만 빼고 전부 서부였다. 물론 고려해야 할 것은 에이스로서 매직존슨과 대등하게 맞짱을 뜨던 아이제아 토마스가 동부에 있었으나 당시 피스톤즈는 극도로 팀플레이를 중시하는 팀이라 선수개인의 스탯이 적게 나왔다. 이 때문에 당시 토마스는 이때 아직 훌륭한 기량을 보이고 있었고 88년 파이널에서 전설로 남아있는 "부상을 입은 상태에서 한 쿼터 25점" 퍼포먼스를 보였음에도 87년 이후 올NBA팀 선정 이력이 없다. 또한 아직 조 듀마스의 기량이 올NBA팀급이 아니던 시절이기도 했다.[12] 사실 이와 같은 비판은 90년대 선수들이 2010년대 선수들에게 하는 비판이기도 하다. 그만큼 NBA에서 불같은 투쟁이 점점 적어지는 편인데, 80년대 당시엔 코트 위에서 정말 전쟁같이 싸워댔다면, 90년대에는 그 와중에 조던과 바클리같이 친한 선수들이 있었지만 이들도 코트 위에선 격렬히 싸웠고, 요새는 이런 전쟁같이 치열한 코트 위 투쟁 자체가 적은 편이다. 물론 NBA차원에서 싸움을 금지하는 영향도 있다.[13] 당시 보스턴에선 PF-C라인만 빼고 패스의 달인들이었다. 다만 멕헤일과 패리시는 주로 피니시하는 포지션이라 패스가 많이 요구되진 않았으며, 멕헤일은 패스보다는 어떻게든 우겨넣는 스타일이라 별명이 "블랙홀"이었다. 그러나 멕헤일도 어시스트 자체는 2.7개까지 하는 등 포지션 대비 적은 편은 아니고, 86,87시즌에 백업 센터를 맡은 빌 월튼의 패스능력은 빅맨치고 역대급이었다.[14] 물론 당시는 매우 피지컬했기 때문에 골대까지 돌파해서 자유투를 얻어내는게 육체적으로 매우 힘들었고, 그렇기 때문에 조던 역시 돌파 중 멈추고 풀업점퍼를 쏘는 등 미드레인지 게임이 비중도 높았다. 그러나 조던의 미드레인지는 커리어가 진행되면서 더더욱 그 비중과 완성도가 높아졌고, 80년대의 조던은 90년대의 조던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미드레인지의 수준이 떨어지는 편이었다. 돌파 의존도가 조던의 커리어를 통틀어 가장 높았던 시절이었던 셈.[15] 실제로 조던의 63점 경기 당시 DJ는 열심히 조던을 막다가 6반칙 퇴장당했다. 심지어 당시 불스에는 위협적인 득점원이 전혀 없어서 DJ와 에인지 뿐 아니라 버드, 멕헤일까지 달라붙었다. 단 한명만 막으면 되는데 단 한명을 막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셀틱스의 약점이 더욱 부각된 것.[16] 리더 버드는 이에 대해 "케빈이 별로 세게 때리지도 않았던데요"라고 평했다.[17] 게리 페이튼과 경기당 1.3점 기록하는 등 이미 퇴물이었던 톰 구글리오타와 1,2점 기록하던 마이클 스트워트란 듣보잡, 1라운드 지명권을 묶어서 워커를 데려왔는데 리빌딩에 목을 메던 호크스가 이후 페이튼을 방출해서 페이튼을 다시 데려온다(...) 사실상 지명권 하나로 준올스타급 선수를 데려온 셈.[18] 여담으로 여기서 포기당한(?)게 두 베테랑에겐 최고의 결과로 돌아왔다. 마이애미 히트로 팀을 옮겨 커리어 처음이자 마지막 우승을 거머쥔 것. 특히 페이튼은 당시 레전드급 커리어를 쌓은 상황에서 은퇴각을 재던 시점이었는데 (07년에 은퇴), 연봉을 대폭 할인하면서까지 우승하려고 스타들과 뭉친 03-04시즌에도 실패한 우승을 드디어 달성하면서 커리어에 화룡점정을 찍었으니 더 감격스러웠을 것이다. 심지어 페이튼은 팀이 0승2패로 몰리던 3차전에 게임위닝샷도 넣고, 이후 시리즈의 행방이 뒤집혔으니.[19] 단순 승수만 따지면 이때 24승으로 99시즌의 19승이 더 낮으나, 99시즌은 단축시즌이므로 승률로 따지면 07시즌이 훨씬 낮다.[20] 이 점은 첫 우승 당시에도 두드러졌다. 대표적으로 호크스와의 1라운드 6차전에서 종료 직전에 지고 있는데 레이 앨런을 두고 본인이 3점슛을 던졌다가 택도 없이 놓친 것.[21] 테이텀과 함께 보스턴 영 듀오이자 접전의 해결사 역할을 확실하게 해주고 있다. 운동능력을 활용한 돌파 밖에 없던 선수가 2년차에 점퍼와 3점을 장착했지만 3년차에 정체된 모습을 보여주며 우려를 샀는데 4년차에 결국 볼핸들링과 자유투를 개선해버리며 에인지의 안목에 감탄사를 연발하게 만들었다. 브라운의 팬들은 이 모습을 3년차에 보여주었으면 맥스였다며 안타까워하지만 오히려 테이텀과 연장 계약에 사용할 총알을 아끼게 된 상황이니 보스턴의 입장에서는 굉장한 혜자 계약이 될 확률이 높다.[22] NBA 구단에서 단장(General Manager)와 사장(President of Basketball Operation)의 역할은 다소 애매하다. 보통 영입과 방출, 트래이드 등 선수단을 꾸리는 것은 단장, 전체적인 구단 운영은 사장이 하는 경우가 많지만 사장 본인이 선수단 구성에 큰 영향을 주는 경우도 종종 있다. 또한 미네소타의 케빈 맥헤일처럼 단장이 부사장을 겸직하는 경우도 있다. 에인지처럼 CEO로 영입되는 경우 보통 선수단 구성을 총괄하는 역할보다는 비지니스 측면의 운영을 담당하는 경우가 많다. 건강 문제가 있는 에인지가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단장 역할을 하기 힘드니, 비교적 압박이 적은 역할을 맡았다고 볼 수 있다.[23] 2023년 2월 기준 유타가 가진 1라운드 드래프트 픽은 최근 5년 안으로 15장에 달한다(...)[24] 특히 국내팬들 사이에선 에인지가 쉴드를 받을 여지는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80년대와 90년대 초까지 활약한 롤플레이어인 에인지의 국내 개인팬이 있을리도 없고, 그렇다고 셀틱스 프랜차이즈 자체를 80년대부터 응원해온 Celtic Pride를 갖고 있는 팬도 많지 않을 터인데, 감독이나 해설자로서 딱히 팬들을 만들만한 거리가 있는 것도 아니니 결국 단장으로서 이미지가 가장 강하다. 그런데 '단장 에인지'는 위에 언급했다시피 프랜차이저 폴 피어스도 팔아버릴 정도로 철저한 비지니스 위주이니 팬들이 싫어하면 싫어했지 좋아할 껀덕지 자체가 거의 없다.[25] 당시 팀의 1옵션은 이견의 여지가 없이 래리 버드였고 맥스웰은 솔리드한 주전 정도의 선수에 불과했으나, 파이널에서 맥스웰이 개인 득점 측면에서 상당히 좋은 활약을 펼쳤다.[26] 래리 버드, 케빈 맥헤일, 로버트 패리쉬라는 빅3에 전성기는 지났지만 명전급 커리어를 보낸 데니스 존슨, 여기에 준 올스타급의 선수인 에인지가 스타팅5였다.[27] 최근 행보에 아쉬움은 있을지언정, 셀틱스의 85-86시즌 이후 유일한 우승을 일궈낸 단장이라는 점은 무시못할 메리트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