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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7대 혁명2. 세계 7대 불가사의3. 7가지의 겨울 전쟁 스토리
3.1. 야생 생존3.2. 크리스마스 휴전3.3. 해엽 횡단 행군3.4.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 / 나폴레옹의 침공3.5. 워싱턴, 델라웨어를 건너다3.6. 얼음 위에서의 전투3.7. 겨울 전쟁

1. 7대 혁명

7 Revolutions

1.1. 아테네 혁명

Athenian Revolution
기원 전 508년에 발생한 아테네 혁명은 평범한 사람들이 독재 통치에 맞서 봉기해 권력을 잡은 역사 상 첫 번째 혁명입니다. 혁명 전 아테네는 과두정 형태로 통치되었습니다. 기원 전 510년에 스파르타의 왕인 클레오메네스 1세는 아테네 침략에 성공했습니다. 그는 과두정의 아테네 귀족이 스파르타에 충성하거나 동조하도록 했으며, "저주 받은 이들"로 불린 비동조 세력을 추방했습니다. 과두정의 우두머리인 이사고라스는 아테네의 시민 협의회의 해산 등을 시도하며, 국가를 개혁하려고 했습니다. 이로 인해 아테네 시민들은 한계에 다다랐고 봉기를 일으키며 이사고라스와 그의 지지자들을 이틀 간 포위했습니다. 세 번째 날에 이사고라스는 항복했고 시민들이 승리했습니다. 아테네 민주주의의 아버지로 알려진, 추방 상태였던 클레이테네스는 아테네로 돌아와 통치권을 맡게 되었습니다. 그는 세습 권력을 제한하는 개역을 입안 했고 시민이 시민을 다스리는 최초의 정부를 세우며 모든 시민이 법 앞에서 평등하도록 했습니다.

1.2. 산업 혁명

Industrial Revolution
1차 산업 혁명과 2차 산업 혁명의 특징은 광범위한 신기술의 개발입니다. 1차 혁명은 1760년부터 19세기 초까지 진행됐으며, 수작업 생산이 물과 증기를 동력으로 한 기계 생산으로 대체되었습니다. 오늘날 자동화나 신기술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일컫는 러다이트라는 용어는 이 시대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러다이트는 자신들의 일자리를 대신한 기계를 파괴한 영국 직공단원으로 구성된 기밀 급진 조직이었습니다. 기술 혁명이라고도 불린 2차 산업 혁명은 1870년 무렵에 시작되어 1914년까지 지속되었습니다. 이 시기 동안 세계 대부분의 지역에서 인구 수와 삶의 기준이 폭발적으로 높아졌습니다. 과학 발전으로 쇠와 철이 대량 생산될 수 있었으며, 전화기, 철도망, 전력과 같은 새로운 발명품으로 세계는 작아졌고, 사람들과 아이디어가 전례 없는 수준으로 이동했습니다.

1.3. 미국독립혁명

American Revolution
1775년에 13개 주 식민지가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위해 투쟁하며 세계의 미래를 바꾸어 놓았습니다. 모든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작은 신생 국가가 당재 가장 강력한 군으로부터 자유를 얻었습니다. 3개 주 식민지가 추가로 독립을 이루었고 미합중국을 결성했습니다. 영국이 식민지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려 하면서 10년 동안 영국과 식민지 간 긴장이 높아졌습니다. 전쟁 중 처음 몇 년은 영국 안에서의 내전이었습니다. 전쟁의 판도를 장악하기 위해서는 해군력이 매우 중요했습니다. 1778년에 프랑스는 식민지를 지원했고, 스페인도 1년 뒤 식민지의 편에 섰습니다. 곧 미국독립혁명은 국제 전쟁이 되었습니다. 1781년에 요크타운 전투 후 콘월리스 장군은 조지 워싱턴에 항복했습니다. 이로써 미국독립혁명의 지상전이 끝났으나, 영국과 미국의 동맹국은 1783년 파리조약으로 전쟁이 공식 종료될 때까지 해상 전투를 계속했습니다.

1.4. 프랑스 혁명

French Revolution
프랑스 혁명은 정치적 격변의 시기이었습니다. 프랑스 혁명에서 유래된 자유, 평등, 박애는 오늘날에도 프랑스의 국가 모토로 남아 있습니다. 혁명 이전에 프랑스는 삼부회인 귀족층, 성직자층, 평민층으로 나뉘어져 있었으며 평민층은 인구의 97%를 차지했습니다. 1789년 6월에 제 3신분의 의원들이 헌법이 제정될 때까지 물러서지 않겠다고 테니스 코트 서약을 했습니다. 이들은 성공했으나, 나머지 2개 신분의 저항으로 한 달 뒤 바스티유 습격이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프랑스의 입헌군주제는 1792년 최초의 프랑스 공화국이 수립될 때까지 지속되었습니다. 1793년 루이 16세는 대역죄로 처형되었습니다. 동일한 해에 공포 정치 시대가 시작되었으며, 더 많은 동요가 발생하며 16,000명이 넘는 시민들이 사망했습니다. 1795년에는 공포를 해결하기 위해 또 다른 정부인 총재 정부가 들어섰습니다. 1799년에는 브뤼메르 무혈 쿠데타가 발생해 총재 정부가 전복되었습니다. 나폴레옹이 집정제의 첫 통령이 되면서, 프랑스 혁명은 막을 내렸습니다.

1.5. 아이티 혁명

Haitian Revolution
18세기에 프랑스의 가장 부유한 해외 식민지인 생도맹그는 세계 설탕의 주요 공급 지역이 되었으며, 아프리카 노예들이 노동력을 공급했습니다. 1791년까지 몇년에 걸쳐서 생도맹그에서 수 차례의 노예 반란이 있었으나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이 섬의 최초의 성공적인 반란인 아이티 혁명은 1791년 8월에 투생 루베르튀르가 흑인과 아프리카 노예를 이끌고 프랑스의 플랜테이션 농장주에 반기를 들면서 시작되었습니다. 루베르튀크는 1790년대에 걸쳐 생도맹그를 성공적으로 지켜냈으며, 1802년 5월에 프랑스와 정전 협정을 체결해 냈습니다. 하지만, 프랑스에서 이 협정을 깨고 루베르튀르를 1803년 4월에 사망할 때까지 프랑스에 투옥했습니다. 루베르튀르의 부관 장자크 데살린은 1802년에 프랑스와의 전쟁을 다시 시작했습니다. 데살린은 1803년 11월에 베르티에르 전투에서 생도맹그의 프랑스의 마지막 남은 중요 거점을 차지했습니다. 1804년 1월 1일, 아이티라는 이름으로 섬 전체의 독립이 선언되었으며, 세계에서 최초로 흑인이 이끄는 공화국이 되었습니다. 미국에서는 유사한 반란에 대한 우려로 남부 전역에 걸쳐 노예를 더 압박하는 정책을 펼쳤습니다. 흑인 주도의 정부 수립에 대한 우려로 토마스 제퍼슨은 금수령을 내렸고, 이는 1862년까지 지속되어 당시 거의 100년 간 경제 성장이 저해 되었습니다.

1.6. 한국 독립

Korean Independence
광복절은 매해 8월 15일로 35년 간의 일본 점령의 종식을 기념하는 한국의 국경일입니다. 1910년 한일 조약으로 한국은 공식적으로 병합되었습니다. 병합 전의 한국은 1905년 러일 전쟁 이후부터 보호국의 상태였습니다. 병합 기간 동안 한국의 지도자들은 중국으로 떠났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망명 정부의 역할을 했습니다. 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중국은 연합국이 임시정부를 인정하도록 노력했습니다. 1943년 카이로 선언에서 연합국은 무력으로 점령한 모든 다른 영토로부터 일본은 추방되어야 하며 한국은 자유 독립 국가가 되어야 한다고 합의하고 선언했습니다. 전후 한국 정부는 소련-일본 전쟁으로 오늘날의 남한과 북한으로 분단될 때까지 지속되었습니다.

1.7. 러시아 혁명

Russian Revolution
20세기 초 러시아는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소작농과 증가하는 가난한 산업 노동자를 보유한, 유럽에서 가장 빈곤한 국가 중 한 곳이었습니다. 러시아는 인구 과밀, 열악한 주거 환경, 식량 부족 문제에 직면했으며,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면서 이 문제들은 악화되었습니다. 러시아는 산업화된 독일에 적수가 되지 못했으며, 1차 세계대전에서 최대 규모의 사상자를 기록한 국가가 되었습니다. 1917년 3월 러시아 내 긴장이 최고 수위에 다다르면서 시위자들은 페트로그라드 거리고 나서 빵을 달라고 외쳤습니다. 이 봉기를 진압하고자 투입된 군 중 일부는 시위대를 향해 총ㅇ르 쏘며 시위대를 죽음에 이르게 했습니다. 의회 두마는 3월 12일 임시 정부를 꾸렸고, 며칠 뒤 황제 니콜라스 2세가 폐위되면서 수 세기에 걸친 황제 통치가 막을 내렸습니다. 1917년 11월 볼셰비키 당수인 블라드미르 레닌은 임시정부를 상대로 쿠데타를 일으켰으며, 소비에트 정부 구성을 요구했습니다. 그 뒤 레닌의 볼셰비키 정부가 이끄는 적군과 반공산당 연합 세력이 이끄는 백군 간의 긴 내전이 이어졌습니다. 러시아의 내전은 1923년 레닌의 적군이 승리를 거두고 소비에트 연방을 수립하면서 막을 내렸습니다.

2. 세계 7대 불가사의

Seven Wonders

2.1. 기자의 대피라미드

Great Pyramid at Giza
인간이 만든 기념물 중 기자의 피라미드만큼 경외심을 불러 일으키는 것도 없습니다. 이 피라미드는 고대 이집트 왕국 제4왕조 시대의 세 명의 파라오의 유해를 보관하기 위해 지어졌습니다. 가장 큰 피라미드부터 가장 작은 피라미드 순으로 쿠푸왕, 쿠푸왕의 아들인 카프레왕, 카프레왕의 아들인 멘카우라왕의 피라미드가 있습니다. 한 때는 전체가 빛나는 흰 석회암으로 덮여 있었던 이 피라미드는 이제 중간 피라미드의 꼭대기 부분만 본래의 틀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학자들은 이 피라미드가 건설된 방식에 대해 오랫동안 논쟁해 왔습니다. 거대한 돌들을 끌고 와서 크레인, 도르레, 바퀴의 도움 없이 쌓아 올렸습니다. 현 이론에 따르면 이집트인들은 돌을 운송하고 들어 올리는데 수력을 이용했을 수 있습니다. 또한 고고학적 증거에 따르면 이를 건설한 이들은 보통 생각하듯 노예가 아니고 괜찮은 급여를 받는 숙련공이었다고 합니다.

2.2. 로도스 거상

Colossus of Rhodes
이 거상은 태양신인 헬리오스의 동상으로 높이가 30미터에 이릅니다. 로도스 시민들은 알렉산더의 후계자들의 전쟁에서 공성자로 알려진 디미트리오스를 물리친 후 버려진 공성 엔진에서 나온 재료를 팔았습니다. 그 수익금으로 자신들의 수호신에게 안전하게 지켜준 것을 감사해 하며 거상을 세웠습니다.

이 거상은 쇠와 돌로 된 지지 구조물에 청동을 입혔던 것으로 보입니다. 중세 기록에 따르면 이 거상은 두 다리로 항구의 입구를 걸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러한 극적인 자세는 불가능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아마도 항구의 받침돌이나 항구를 내려다 보는 언덕 위에 세워져 있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 거상은 자유의 여신상과 비슷한 뾰족한 왕관을 쓰고 횃불을 들고 있거나 한 손으로 눈을 가리고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7대 불가사의 중 이 거상은 가장 짧은 시간 동안 존재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는 기원 전 280년에 완성되었으나 60년도 채 안돼서 지진으로 무너졌습니다. 로도스 시민들은 자신들의 신을 화나게 했을까봐 두려워 하며 프톨레마이오스 3세가 복구 비용을 대겠다고 한 제안을 거절했습니다. 거상의 부너진 잔해조차도 방문객을 놀라게 했지만, 이 거상의 건축 비용을 댄 엔진이 그랬던 것처럼 이 동상의 잔해는 7세기에 팔아서 처분되었습니다.

2.3. 공중정원

Hanging Gardens
7대 불가사의 중 6가지 불가사의는 돌이나 금속으로 만들어졌습니다. 하지만, 공중정원은 고정된 기념물이 아니었습니다. 대신 메소포타미아의 사막에서 생명과 녹음으로 넘쳐 나는 울창한 오아시스입니다. 이 정원은 죽은 왕이나 멀리 떨어진 신을 기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왕이 향수병에 걸린 자신의 부인에 대한 사랑의 증표로 조성한 것입니다.

한 전설에 따르면 네부카드네자르 2세는 고국의 자연의 아름다움을 그리워한 메디아인 아내인 아미티스를 위해 바빌론에 공중정원을 지었습니다. 또 다른 이야기에 따르면 전설의 아시리아의 여왕 세미라미스가 공중정원을 지었다고 합니다. 이 정원은 물을 위로 끌어 올리기 위한 펌프 등, 독창적인 공학과 벽돌로 된 기반이 부식되지 않도록 하는 갈대로 된 덮개 덕분에 유지되었습니다.

오늘날 공중정원을 둘러싼 불확실한 점이 많습니다. 공중정원의 존재는 바빌론의 문서나 현대 고고학으로 확인되지 않지만, 완전히 가상일 가능성도 거의 없습니다. 공중정원은 실제 모습이 명성을 쫒아가지 못한 더 작은 구조물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또 다른 이론에 따르면 사실 아시리아의 왕인 세나케리브가 공중정원을 지었다고 합니다. 이 왕의 웅장한 정원에 대한 묘사가 공중정원과 많이 일치하기 때문입니다.

2.4. 알렉산드리아의 등대

Lighthouse of Alexandria
알렉산드리아는 그리스와 로마의 중심지이었습니다. 알렉산드리아는 다른 고대 도시에서 공통적으로 보이는 무계획적으로 뒤섞인 거리보다는 합리적으로 계획된 격자를 따라 조성되었습니다. 훌륭한 사상가들이 각지에서 모여 알렉산드리아의 대도서관에서 연구하고 작업했습니다. 이 도서관 위에 등대가 있었는데, 이 등대의 아찔한 높이는 인류 업적의 잠재력을 상징했습니다.

이 도시는 기원전 280년에 등대가 완공되었을 때 채 50년 밖에 되지 않았었습니다. 등대의 높이는 91미터에 달했으며, 피라미드를 제외하고 인류가 만든 가장 높은 건축물입니다. 이 등대 꼭대기는 원형, 중간 부분은 팔각형, 바닥은 사각형 모양이었습니다. 이 등대는 처음에는 비행사들을 도시로 안내하기 위한 랜드마크 역할을 했습니다. 이후 더 잘 보이도록 꼭대기에 불이 계속 타게 했고, 이로써 진정한 등대가 되었습니다.

이 등대는 등대가 위치한 작은 섬의 이름을 따 파로스라고도 불리었는데, 대표적인 건물이 되면서 많은 현대 언어에서 파로스는 등대를 뜻하는 단어가 되었습니다. 이 등대는 수 세기 동안 여러 번의 지진을 겪으며 손상되었으나, 번창하던 도시에서 계속 수리해서 관리했습니다. 1300년대에 와서 결국 이 등대는 영원히 없어졌습니다.

2.5. 마우솔로스의 영묘

Mausoleum at Halicarnassus
기원 전 4세기에 페르시아 왕국 중 가장 멀리 떨어져 있던 지역의 총독이 반자치적인 왕국을 다스렸습니다. 이 중 한 주가 현재의 남서쪽 터키인 카리아이었습니다. 카리아의 마우솔로스왕은 수도를 밀라사의 내륙 마을에서 할리카르나스의 오래된 연안 도시로 옮겼으며, 주변 지역에 대한 통제권을 확립했습니다. 그는 새로운 부유한 영토의 부를 활용해 영원히 남을 유산을 남기려고 했습니다.

이에 따라 왕은 웅장한 대리석 묘를 의뢰했습니다. 그 기초는 벽돌로 만들어졌습니다. 기초 위에 각 네개 면이 유명한 조각가가 만든 동삭으로 장식된 석축이 세워졌습니다. 꼭대기에는 피라미드 모양의 지붕이 있었으며, 아마도 마우솔로스 자신이 탄 네 마리 마차 조각상이 놓여져 있었습니다.

이 카리아의 왕은 기원전 353년에 사망했으며, 이 묘는 미완 상태였습니다. 이 묘는 몇 년 후에 그의 누이이자 부인인 아르테미시아에 의해 완성되었습니다. 파라오의 경우처럼, 마우솔로스의 무덤은 매우 인상 깊었기 때문에 그 이름인 마우솔레움은 웅장한 묘를 일컫는 일반적인 단어가 되었습니다. 이 묘의 구조물은 중세시대까지 남아 있었으나, 1494년과 1522년에 성요한 기사단이 그 재료를 얻고자 이를 약탈하면서 황폐화된 것으로 보입니다. 운 좋게도 기사단은 몇 몇 동상을 남겨 놓았고 이 중 일부는 현재 대영 박물관에 있습니다.

2.6. 제우스 상

Statue of Zeus
고대 올림픽 게임은 체육 행사이었을 뿐만 아니라 신성한 의식이기도 했습니다. 올림피아의 종교적인 건물 중에는 위대한 아테네의 조각가인 피디아스의 걸작인 제우스 상이 있는 신전도 있었습니다. 높이가 12미터에 달한 제우스 신이 저욕하게 장식된 왕좌에 앉아 있었습니다. 제우스는 오른손에는 운동선수들에게 필요했던 승리의 여신 니케 상을, 왼손에는 독수리가 앉아 잇는 쇠 지팡이를 갖고 왕좌에 앉아 있었습니다.

피디아스가 앞서서 파르테논 신전을 위해 조각했던 아테네 상처럼 제우스 상도 나무로 된 본체에 황금과 상아를 씌워서 만들어졌습니다. 제우스 상의 상아의 건조와 균열을 막기 위해 계속 올리브 기름을 발라주었다고 합니다. 올림픽이 계속되는 동안에는 이 동상은 잘 수리되어 관리되었습니다. 하지만 기독교 황제인 테오도시우스 1세가 392년에 올림픽 게임과 모든 다른 이교도 의식을 금지했으며, 한 세기도 되지 않아 제우스 상은 파괴되었습니다.

언뜻 보기에는 제우스 상은 7개 불가사의 중 하나인 거상에 비교가 안 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헬리오스 신 거상의 높이는 제우스 상의 2배에 달합니다. 하지만 제우스 상은 흔한 청동이 아니라 귀중한 황금과 상아로 만들어졌습니다. 제우스 상은 내부 공간을 답도했기에 제우스의 위대함이 더욱 커 보였습니다. 또한 로도스 거상은 60년도 안 돼서 쓰러졌지만 제우스 상은 8세기를 버티어 냈습니다. 모든 것을 감안할 때, 늘 그렇듯 저울은 제우스의 편이었습니다.

2.7. 아르테미스 신전

Temple of Artemis
에페소스의 사람들은 아르테미스를 다른 그리스 신과 다르게 이해했습니다. 아르테미스에 대한 토착 신앙이 그리스 도시가 세워지기 전부터 존재했기 때문일지 몰라도, 에페소스인들은 그녀가 델로스 섬이 아닌 근처에서 태어났다고 믿었습니다. 이들은 아르테미스에게 아나톨리아의 토착 지모신의 성격도 부여했습니다. 에페소스의 아르테미스는 본토 그리스 조각의 이상화된 형태와는 꽤 거리가 멀어 보입니다.

이 독특한 여신을 숭배하기 위해 여러 신전이 이어서 지어졌습니다. 리디아의 크로이소스왕의 전설적인 부를 통해 처음으로 진정한 거대한 아르테미스 신전이 기원 전 6세기에 지어졌습니다. 각각의 신전은 인재 혹은 자연 재해로 파괴되었으며, 부유한 도시에서 이를 재건했습니다. 기독교가 들어서면서 이 순환의 고리는 결국 끝이 났고 신전은 기원 후 401년에 종교 무리의 손에 의해 영원히 파괴되었습니다.

아르테미스 신전은 겉으로 보기에는 다른 그리스 신전과 비슷해 보일지 몰라도 그 아름다움과 거대함에 있어서는 단연 두드러집니다. 이는 완전히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최초의 건물로 여겨졌습니다. 아름다운 예술 작품이 돌기둥을 채웠으며 이 신전이 차지한 공간은 파르테논 신전의 4배에 달했습니다. 7대 불가사의를 본 많은 고대의 작가들은 이 중 아르테미스 신전이 가장 위대하다고 평가했습니다.

3. 7가지의 겨울 전쟁 스토리

7 Winter War Stories

3.1. 야생 생존

Wilderness Survial
1940년 4월, 2차 세계대전의 노르웨이 전역 중에 독일의 하인켈 111 폭격기가 영국의 블랙번 스쿠어에 의해 격추되었습니다. 이후 블랙번 스쿠어도 곧 불시착 했습니다.

두 전투기의 생존 병력은 황무지에 둘러싸여 있었으며 이들은 결국 오래된 순록 사냥 오두막에 도착했습니다. 언어 장벽으로 의사 소통이 어려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쿠어 전투기의 캡틴 R.T. 패트리지는 독일 병력이 오두막에 남고 영국 병력은 다른 곳을 찾아보자고 제안했습니다. 오두막을 떠난지 오래 되지 않아 패트리지의 병력은 그로틀리 호텔을 발견했으며, 이 곳은 겨울 전쟁 동안 폐쇄되었지만 은신처가 되었습니다.

독일 폭격기에 탑승한 중위 호스트 스코피스와 생존 병력은 다음 날 아침에 호텔에 도착했고 이곳에서 모든 생존자가 아침 식사를 함께 했습니다.

나중에 두 명의 병력이 노르웨이의 스키 패트롤을 발견했습니다. 스코피스와 나머지 독일 생존 병력은 구금되어 영국군에게 전쟁 포로로 넘겨졌습니다. 패트리지의 병력은 풀려났고 올레순까지 걸어서 결국 안델스네스에 당도해 영국으로 가는 교통편을 이용하게 되었습니다.

3.2. 크리스마스 휴전

Christmas Truce
1914년 12월 25일 성탄절 아침에 1차 세계대전 일부 전선에서는 병사들이 참호에서 나와 서로 인사했습니다. 이 하루 동안 병사들은 담배, 식량, 옷을 선물로 주고 받으며 갑작스레 만든 축구공을 찼습니다.

양쪽 진영의 장교들은 향후 이러한 일을 엄격히 금지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가스, 전략적 도시 폭격, 무제한 잠수함전과 같은 새로운 기술 혁신으로 증가된 적대감을 감안할 때, 이러한 규정은 혼동의 여지가 있었을 수 있습니다. 산업화된 전쟁은 분명히 크리스마스 휴전 참여자의 많은 목숨을 앗아 갈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빅토리아 시대의 사교적 인사는 파괴되었을 터지만, 적어도 하루 동안에는 서부 전선의 대부분의 지역에서 평화가 군림했습니다.

3.3. 해엽 횡단 행군

March Across the Belts
1655년 찰스 왕 10세는 스웨덴 대홍수로 알려진 기습 군사 작전으로 바르샤뱌를 함락했습니다. 하지만, 찰스의 부대가 폴란드의 저항을 진압하느라 꼼짝 못하는 동안 러시아가 스웨덴을 침략했습니다. 왕은 후퇴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으며 떠날 구실이 필요했습니다. 1657년 덴마크가 스웨덴을 공격하자 찰스는 체면을 차리고 서서히 북쪽으로 돌아갈 기회를 발견했습니다.

그가 덴마크 섬의 수도로 이동할 준비가 될 시점에 이례적으로 추운 겨울이 닥치며 해협이 얼어 붙었습니다. 어떤 함대로 항해할 수 없었기 때문에 덴마크인들은 안전하다고 여겨졌습니다. 하지만 찰스는 그의 부대에게 해협을 건너가도록 명령했습니다. 가끔 얼음이 휘어지며 물이 병사들의 무릎까지 올라왔으나, 얼음이 부서지지는 않았습니다. 완전한 무방비 상태에서 덴마크의 왕은 항복해쏙, 현대 스웨덴의 가장 남쪽 지방을 양도하는 로스킬레 조약을 체결했습니다.

3.4.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 / 나폴레옹의 침공

Napoleon's Invastion of Russia / Napoleon's Invastion
1806년에 나폴레옹은 대부분의 유럽을 손에 넣었지만 영국은 여전히 난공불락의 적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영국의 왕립 해군에 도전장을 내밀 수 없었던 나폴레옹은 유럽 전역에 통상 금지 조치를 내렸습니다. 나폴레옹은 러시아에 전쟁을 선포하고 유럽에서 가장 큰 규모의 전투력을 결집했습니다. 이 군사 작전은 바로 문제가 되었습니다. 찌는 듯한 더위는 전염병과 탈진으로 이어졌습니다. 열악한 도로 상태로 짐을 나르는 열차의 발이 묶였습니다. 대규모 탈영과 큰 규모의 보급로를 공급해야 하는 필요성으로 인해 프랑스 군의 수는 줄어 들었습니다. 프랑스 군은 여전히 적의 수도를 함락하고 있었으나, 차르 알렉산더는 항복하기를 거부했습니다. 나폴레옹은 한 달 간 폐허에서 기다렷으나 겨울이 다가오자 10월에 철수했습니다. 나폴레옹의 대육군은 회복하지 못했으녀, 그의 협력자들은 그에게서 등을 돌려 그를 추방했습니다.

3.5. 워싱턴, 델라웨어를 건너다

Wasshington Crosses the Delaware
영웅 조지 워싱턴은 미국독립전쟁 중 1776년 12월 25일에서 26일에 대륙군을 이끌고 델라웨어 강을 건너 뉴저지 트렌톤의 헤센 용병을 상대로 기습 공격을 감행했습니다.

원래의 공격 계획에는 캐드월러더 대령과 제임스 유잉 장군이 이끄는 두 개의 다른 병력과 함께 세 개 병력이 강을 따로 건너는 것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워싱턴의 부대만 얼음 상태의 강을 성공적으로 건넜습니다.

트렌톤의 요한 랄 대령은 이 공격에 대해 영국 첩자로부터 정보를 입수했음을 시인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러한 거짓 경보와 태풍이 거세지며 랄 대령과 헤센 용병은 이 날 밤에는 어떤 공격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고 이것이 워싱턴의 역사적인 승리를 거둘 수 있는 요인이 되었습니다.

3.6. 얼음 위에서의 전투

Battle on the Ice
노브고르도의 알렉산더 네브스키 왕자는 1242년 4월 5일 20세의 나이로 얼어 붙은 페이푸스 호수가로 군인들을 모았습니다. 그를 맞선 상대는 독일의 튜튼 기사단과 그들의 스칸디나비아 동맹군이었습니다. 수적으로는 열세였지만 튜튼 부대는 잘 훈련되어 있었으며 중 무장을 한 상태였던 반면, 알렉산더의 병사들은 기마 궁수, 귀족 출신 기병, 농부 출신 의용병이 섞여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어린 왕자에는 영리한 전투 계획이 있었습니다. 그는 적군이 얼음을 건너 그의 경무장 보병대에 돌진하게끔 했고, 그의 보병대는 뒤로 물러나기는 했지만 무너지지는 않았습니다. 그동안 그의 기마 궁수들은 적의 측면을 공격해 적을 둘러싸기 시작했습니다. 튜튼 기사단은 러시아의 신입 기병대의 시의 적절한 돌격에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러시아의 승리를 계기로 기사단의 동쪽으로 확장이 항구적으로 좌절됐으며, 페이푸스 호수가는 오늘날까지 카톨릭교의 에스토니아와 정겨회의 러시아 사이의 경계가 되었습니다.

3.7. 겨울 전쟁

Winter War
소련은 1939년 11월에 핀란드를 침략했을 당시 빠른 승리를 기대했습니다. 이들의 보병대는 훨씬 우월했으며 수 천 대의 항공기와 전차는 핀란드의 수 십 대 뿐인 장비에 비할 규모가 아니었습니다. 해외로부터 동정 외에는 실질적 군사적 도움을 받지 못한 핀란드는 두 개 전선을 따라 방어 체계를 확립했습니다. 한 전선은 게릴라 작전에 적합한 숲이 있는 핀란드의 내륙지역이었습니다. 나머지 전선은 카렐리야 반도에 위치한 핀란드의 국가적 영웅이자 전쟁의 리더인 칼 구스타프 만네르헤임의 이름을 딴 전선이었습니다. 핀란드의 보병은 잔인한 폭격에 맞서 만네르하임 전선을 두 달 간 지켜냈습니다. 그 해가 끝나도록 붉은 군대가 이 작은 이웃을 정복하지 못하자 스탈린의 분노는 커져 갔습니다. 새로운 원수의 지도 아래 두 배의 공세를 퍼붓자 결국 지친 핀란드인들은 1940년 3월에 가혹한 평화 협정을 체결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