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東電OL殺人事件1997년 3월 19일 일본에서 발생한 살인사건. 사건의 실체를 두고 큰 논란이 일었던 사건이다. 범인은 [age(1997-03-19)]년째 잡히지 않고 있다.
2. 시신으로 발견된 여직원
1997년 3월 19일 도쿄도 시부야구 마루야마쵸(円山町)[1]의 한 아파트의 1층 빈 방에서 한 여성의 시신이 발견되었다. 시체를 발견한 사람은 그 아파트의 소유주인 네팔 요리점의 주인이었다.[2] 그는 아파트 옆을 지나다가 열린 창문 사이로 옷을 입은 여자가 누워 있는 걸 목격했는데 단순히 자는걸로 생각하고 지나쳤지만 다음날에도 여자는 그 자리에 누워 있었고 심지어 어제와 자세도 똑같은 것을 보고 경찰에 신고했다.
경찰 조사 결과 사망자는 도쿄전력의 간부급 직원 39세 와타나베 야스코(渡辺泰子)라고 드러났다. 그런데 자기 집도 아니고 남의 아파트 빈 방에서 시체로 발견되다니 의아한 일이었다.
와타나베 야스코의 집은 고급 주택가로 유명한 도쿄도 세타가야구였기 때문에 시신이 시부야구에서 발견될 이유가 전혀 없었다. 경찰은 이에 의문을 품고 조사를 시작했는데… 와타나베가 낮에는 도쿄전력의 전도유망한 간부급 직원으로, 밤에는 매춘부로 살아 왔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시부야의 아파트에서 시신이 발견된 것도 이곳에서 매춘을 했기 때문이다. 이런 피해자의 이중적 모습에 일본 언론들은 앞다투어 이 사건을 대서특필했다.
시신의 부패 등의 정도로 보아 와타나베 야스코는 시신이 발견되기 10여 일 전인 3월 8일 밤~3월 9일 새벽에 누군가에게 교살되었다고 추정되었다. 경찰은 수사를 진행한 끝에 그해 5월 20일 네팔인 불법체류자 고빈다 프라사드 마이나리를 유력한 용의자로 체포했다. 이때부터 고빈다와 일본 사법부간 치열한 공방전이 15년간 벌어졌다.
3. 법정 공방
체포된 고빈다 프라사드 마이나리는 일본에 불법체류하던 네팔인으로, 와타나베 야스코가 시체로 발견된 아파트 인근에서 다른 네팔인들과 함께 살고 있었다. 경찰의 조사 결과 고빈다는 야스코와 매춘을 한 사실이 있었고 고빈다도 그 사실은 시인했다. 당시 네팔에서 친척을 데려오면 살게 하려고 빌린 아파트 빈방이 있었기 때문에 거기에 와타나베를 데려가 매춘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고빈다는 자신이 와타나베를 죽일 이유가 전혀 없다면서 범행을 완강히 부인했다.사실 문제는 고빈다가 범인임을 증명할 직접적인 물적 증거는 전혀 없었다는 점이다. 단지 여러가지로 해석될 수 있는 정황증거들만 있을 뿐이라서 사건의 진상을 그려내는 데 어려움이 많았다. 검찰이 제시한 정황증거는 다음과 같다.
- 살해현장에서 체액과 체모가 담긴 콘돔이 발견되었는데 조사 결과 고빈다의 것
검찰은 "고빈다가 살해현장에 있었고 성행위 후에 야스코를 목졸라 살해한 것"이라고 주장했으나 고빈다는 매춘 사실만 시인했을 뿐 살인은 부인했다. 변호인 측은 "고빈다의 체액과 체모가 담긴 콘돔은 매춘의 증거일 뿐 살해의 직접적 증거는 아니다"라고 맞섰다.
- 고빈다가 피해자와의 관계를 부인하다가 말을 바꾼 점
고빈다는 처음에는 "야스코를 모른다"고 부인했다가 야스코와의 매춘 증거가 나오자 말을 바꾸었다. 검찰은 이를 "고빈다가 살인한 것을 숨기려는 의도"라고 주장했고 변호인 측은 "불법체류자 신분이라 사건에 연루되는 것을 피하고 싶었기 때문에 실수한 것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 사건 직전 현장 근처에서 야스코와 한 남성이 목격된 점
검찰은 "사건 직전 현장 근처에서 목격된 야스코와 함께 있던 남자의 정체는 고빈다"라고 주장했고 변호인 측은 '고빈다가 아닌 다른 남자'라고 맞섰다.
- 피해자 수첩에 마지막으로 적힌 고빈다의 이름
와타나베는 자신의 매춘 상대들을 상세히 적은 수첩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녀의 수첩에 마지막으로 적혀있는 인물이 고빈다였으므로 검찰은 고빈다가 와타나베를 살해했을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변호인 측은 '고빈다가 수첩에 마지막으로 적혔다고 해서 고빈다가 범인이라면 비약'이라고 맞섰다. 성관계 중 범인이 교살했을 수도 있고 고빈다를 만난 후 다른 남자를 만나 매춘을 하려다가 살해되었을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다는 것이다. - 사건전후 달라진 고빈다의 금전 관련 문제
고빈다는 사건 이전에 7만 엔밖에 소지하지 않았으나 사건 이후 지인에게 빌린 돈 10만 엔을 갚은 것으로 드러났다. 검찰은 "사건현장에서 와타나베가 소지하고 있던 4만엔이 사라진 걸로 볼 때, 고빈다가 야스코와 매춘 후에 야스코의 돈을 노리고 살인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 고빈다의 알리바이 문제
고빈다의 직장은 카이힌마쿠하리역(海浜幕張駅) 근처에 있었는데 고빈다는 자신이 일하던 식당의 근무시간이 22시까지라고 밝혔다. 마쿠하리에서 도쿄도 시부야구까지 지하철을 타고 간다고 해도 노선에 따라 1시간 10분에서 30분까지 소요되는데[3] 야스코가 살해되었다고 추정되는 시각은 23시 30분 전후였다. 검찰은 "충분히 범행이 가능하다."고 주장했고 변호인 측은 "아슬아슬한 시간이며, 매춘 후 살해했다면 시간이 맞지 않는다."고 맞섰다.
- 와타나베의 정기권
나중에 경찰의 조사 결과 와타나베의 지하철 정기권이 토시마구에서 발견되었다. 토시마는 고빈다가 살던 시부야구와는 신주쿠구를 거치면 올라갈 수 있는 곳이긴 하지만 고빈다는 "마쿠하리-시부야를 오갔을 뿐 다른 데는 잘 모르는 곳"이라고 맞섰고 검찰은 "고빈다가 용의선상에서 벗어나기 위해 와타나베의 정기권을 토시마에 버린 것"이라 주장했다.
이렇게 논란이 많은 정황 증거들을 놓고 설왕설래한 끝에 2000년 4월 14일 1심 재판부의 오부치 토시카즈 재판장은 "현장에서 제3자의 체모가 발견된 이상 현장에 고빈다 외에 제3의 인물이 있었을 개연성이 있으므로 고빈다를 범인으로 확정하긴 어렵다."는 점을 들어 고빈다에게 무죄 판결했다. 검찰은 바로 항소했는데 이후 고빈다에게 무죄 판결을 내린 오부치 토시카즈 판사는 하치오지 지원 총괄판사로 옮겼다. 이를 두고 이 사건을 오랫동안 추적한 논픽션 작가 사노 신이치는 "오부치 판사는 좌천되었다."고 주장했다.[4]
도쿄고등법원에서 열린 2심 재판 끝에 2000년 12월 22일 2심 재판부 타카기 토시오 재판장은 "현장에서 발견된 콘돔의 체액과 체모가 고빈다의 것과 일치하므로 현장에 있었던 것이 확인되고, 사건 이후 갑자기 지인에게 10만 엔을 갚은 것 등"을 이유로 1심의 무죄 판결을 뒤집어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이에 고빈다는 "신이시여, 전 하지 않았습니다!"라고 울부짖었다고 한다.
변호인 측은 다시 최고재판소에 상고했으나 최고재판소는 "2심 판결에 문제가 없다."면서 무기징역을 선고한 2심 판결을 확정했다.
4. 재심청구, 반전되는 사건
고빈다는 2005년 도쿄고등재판소에 재심을 청구했다. 일본변호사협회, 일본국민지원회 등의 단체들이 "고빈다는 무죄"라고 주장하면서 재심을 강력하게 주장했고 2011년 도쿄고등재판소는 변호인 측의 요청으로 이 사건의 증거물들을 심의하던 중 현장에서 발견된 DNA를 검찰 측에서 감정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에 도쿄고등검찰청에 DNA 감정을 요청했고 검찰은 DNA 감정에 나섰다.그런데 이 DNA 감정으로 놀라운 사실이 드러났다. DNA 감정 결과 현장에서 발견된 체모의 DNA와 일치했으나 고빈다의 DNA와는 일치하지 않았다. 즉, 현장에 고빈다의 것 이외에 다른 DNA가 있고 이는 현장에 알려지지 않은 제3의 인물이 존재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에 당황한 검찰은 "2가지 가능한 시나리오가 있다."고 변명했는데 첫째는 고빈다가 사건 전날에 있었고 피해자는 다음날 제3의 남성과 매춘을 하다가 살해되었을 가능성, 둘째는 반대로 제3의 인물과 먼저 매춘을 하고 이후 고빈다가 피해자를 살해했을 가능성이 있었다는 것이다. "피해자가 언제 성관계를 했는지는 알 수 없는 이상, 고빈다의 무죄를 증명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검찰은 주장했다.
그러나 사건은 점점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2011년 10월 21일, 제3자의 DNA가 발견된 체모가 피해자의 체내에서 발견된 정액의 DNA와 일치한다는 결과가 나왔다. 변호인 측은 "고빈다의 DNA는 쓰고 버린 콘돔에서 나왔지만, 제3자의 DNA는 피해자의 체내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에, 고빈다보다는 제3자가 더 범인일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했다. 여러모로 DNA적 증거로 보면 고빈다보다는 제3자의 범행가능성이 더 높아 보였다.
결국 2012년 6월 11일 도쿄고등재판소는 고빈다에 대한 재심청구를 받아들였다. 도쿄고등재판소는 제3자의 범행가능성이 나온 반면 고빈다의 유죄 인정에 도달할 요건이 떨어지기 때문에 고빈다가 무죄일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하여 재심청구 수용과 더불어 고빈다의 형집행을 정지하는 결정도 내렸다. 검찰은 이에 이의를 제기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최고재판소 특별항고를 고려했으나 결국 포기하여 고빈다의 재심이 개시되었다.
형이 정지된 고빈다는 불법체류자이기 때문에 일본에서 추방되어 고국 네팔로 돌아갔다. 이후 재심 과정에서 검찰은 처음에는 고빈다의 유죄를 주장했으나 추가로 진행된 조사에서 피해자의 손톱에서 DNA가 검출되었는데 이 DNA는 고빈다가 아닌 제3자의 DNA와 일치한다는 결과가 나오면서 더 이상 고빈다의 유죄를 주장할 수 없게 되었다. 피해자의 체내는 물론 손톱에도 제3의 DNA가 있다면 제3자의 범행 가능성이 더욱 높다고 볼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피해자의 가슴에서 타액이 발견되었는데 타액의 혈액형 조사를 한 결과 O형 남성이라고 판명되었다. 문제는 고빈다의 혈액형은 B형이라는 것이었다. 검찰은 고빈다에게 유리한 증거임에도 타액을 증거로 제출하지 않아서 변호인 측으로부터 '증거를 은폐하려 한 게 아니냐.'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결국 2012년 10월 29일 재심 첫 공판에서 검찰은 '고빈다의 범행 가능성이 없다.'고 무죄를 주장했고 11월 7일 도쿄고등재판소는 고빈다에게 무죄 판결을 내렸다. 이후 고빈다는 그동안의 수감 생활에 대한 배상 청구를 했는데 수감 기간을 하루당 1만 2500엔으로 쳐서 배상금 6800만 엔을 지불하라는 판결이 내려졌다. 고빈다는 고국으로 돌아갔으나 아버지는 귀국하기 5년 전에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고빈다의 무죄는 밝혀졌으나 누가 와타나베를 살해했는지는 여전히 의문에 싸였다. 재심 과정에서 드러난 제3자의 DNA가 있었기 때문에 진범을 밝혀낼 수만 있다면 DNA 대조로 잡을 수 있겠으나 [age(1997-03-19)]년째 와타나베를 살해한 진범은 드러나지 않고 있다.
5. 피해자 와타나베 야스코
5.1. 생애
와타나베 야스코는 1957년 6월 7일에 태어났으며 지역 중학교와 게이오기주쿠대학부속여자고등학교[5]를 거쳐 게이오기주쿠대학 경제학부를 졸업했다.1980년 3월 업 이후 도쿄전력에 입사했는데 당시는 여성들은 거의 다 OL[6]로 입사하던 시절이었지만 와타나베는 도쿄전력 최초의 여성 종합직[7]으로 채용되었다. 1993년 7월에는 도쿄전력 기획부 경제조사실 부(副)장으로 승진했다. 당시 직속상사인 기획부장이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고 당시 도쿄전력 회장 카츠마타 츠네히사, 기획부 관리과장이 사고 당시 부사장 후지와라 마키오인 등 기획부는 도쿄전력 최고의 엘리트가 모이는 부서였다. 와타나베는 국가경제가 전력사업에 미치던 영향을 연구하던 경제조사실에서 국고 국가 재정과 전력 사업에 관한 연구를 주업무로 진행하여 우수한 성과를 보인 엘리트였으며 논객으로도 유명해서 경제지와 주간지 등에 경제 관련 논문이나 칼럼을 연재하기도 하는 등 상당한 재원이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남들이 모르는 비밀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퇴근 후에는 전혀 다른 삶을 산다는 것이었다. 와타나베는 근처 러브호텔 거리에서 매춘을 해 왔다.집안은 유복한 편이었으며 도쿄전력의 간부급 직원으로 1,000만엔 이상의 연봉을 받는 등 금전적인 문제는 전혀 없었고 사치나 도박 같은 행위도 일체 하지 않았으나 피해자는 매일 4명의 남자를 상대하는 것을 목표로 1997년 사망할 때까지 무려 6년간 매춘을 해 왔다. 주말이나 휴일에도 시나가와의 SM 클럽에서 일했고 저녁에는 시부야의 러브호텔 주변으로 가서 남성 4명을 상대한 뒤에야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그녀는 성격적으로도 강박증이 심했는지[8] 매춘 날짜와 고객정보, 화대를 수첩에 빠짐없이 기록해 뒀는데 사후 그녀의 비밀을 수사하는 중요한 증거가 되었다. 아버지의 죽음이나 회사에서의 스트레스로 거식증에 여러 번 크게 걸리기도 했고 병원 치료를 받기도 했다. 그래서 키가 169cm로 일본 여성치고는 상당히 장신인데도 불구하고 몸무게는 45kg인 심각한 저체중이었다고 한다.
성적 최우수에 유능하고 일 잘하는 훌륭한 인재였지만 교우관계는 거의 없는 아주 조용한 성격이었다. 학교에서 수업 외에는 도서관에서 거의 지냈고 직장에서도 업무 외에는 딱히 대화를 하거나 친분을 쌓는 일이 전혀 없었다고 한다. 좀 더 사적인 관계는 오히려 매춘 고객 중에 있었다.
그녀는 겨울이 되면 매춘을 마치고 편의점에서 오뎅을 자주 사먹었는데 다른 건 일체 먹지 않고 오직 곤약 건더기 하나에 국물만 잔뜩 담아 먹었다는 편의점 직원의 증언이 있었다. 강박증이나 거식증으로 인한 섭식장애의 흔한 증세다. 워낙 특이한 식성이라 오뎅을 보면 이 사건을 떠올리는 일본인도 꽤 있다.
범인으로 몰렸던 고빈다는 시부야구에서 와타나베가 매춘 제안을 하며 다가오자 "돈이 없다"며 거부했지만 "화대를 반값만 받겠다"는 와타나베의 말에 관계를 가졌다고 한다. 애초에 돈이 목적이 아니었던 그녀는 이런 식으로 소액을 받더라도 매춘에 응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5.2. 매춘에 대한 분석
와타나베가 이중생활을 한 이유는 알 수 없다. 많은 추측이 있으나 이 사건을 추적한 논픽션 작가 사노 신이치는 '어머니에 대한 복수심 때문'으로 분석했다. 와타나베의 집안은 유복하긴 했으나 아버지[9]는 야마나시현의 몰락한 가문 출신인 반면 어머니는 도쿄의 명문가 출신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어머니는 늘 아버지를 무시하며 비웃었고 와타나베가 대학 2학년 때 아버지가 병으로 급사하자 그 죽음이 아버지를 무시한 어머니 탓이라 여겨 복수를 다짐했다는 것이다. 그런 복수심은 자신을 파괴하는 행위로 나타났고 명문가 출신 어머니를 경악하게 만들 방법을 찾은 끝에 매춘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는 주장이다. 작가는 "와타나베의 어머니와 여동생이 이런 생활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본인은 가족들에게 이를 숨기지 않았을 것"이라고 밝혔고 이것을 "어머니에 대한 증오와 복수심 때문"이라고 보았다.그러나 와타나베는 아버지가 죽은 지 한참 뒤인 30대부터 매춘을 시작했기 때문에 시간적으로도 맞지 않고 억측에 가깝다. 전문가들은 대부분 '복수보다는 도쿄전력에 입사한 후 받은 스트레스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워싱턴포스트는 이 사건에 대해 '와타나베는 도쿄전력에서 일하며 받은 남성 직원들의 견제와 멸시가 고통스러웠을 것이고, 관료주의가 강하고 보수적인 일본 조직에서 성차별과 유리천장의 한계를 느꼈을 것이며, 남성 중심적인 회사에서 받은 압박감을 해소하기 위해 이런 일을 벌였다.'는 추정을 내놓았다. 실제로 와타나베가 근무할 당시 도쿄전력에는 8명의 여직원이 더 있었지만 모두 결혼이나 승진의 한계로 퇴사했고 와타나베만 남은 상태였다.
일본 사회학자이자 페미니스트 우에노 치즈코는 여성혐오를 혐오한다에서 매춘의 원인을 자기파괴, 자기학대적으로 보는 남성들의 시각과 달리 여성의 입장에서 분석했다. 성적으로 주체가 되지 못하고 억압을 받는 여성이 매춘을 하는 순간 일시적으로 성적 주체가 되어 권력을 가질 수 있고 그런 문란한 행위를 통해서 자신에게 헐떡이는 남성을 조롱하며 사회에서 자신을 멸시하던 남성들을 역으로 멸시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되면서 느낀 쾌감 때문에 강박적으로 성매매에 탐닉했다고 분석했다. 실제로 이는 성매매 여성들의 경험담과 회고와도 일치하며 여성층에서도 공감대를 얻고 이해가 간다는 반응이었다고 한다. 더 자세한 내용은 여성혐오를 혐오한다 문서 참고.
6. 음모론: 반원전 때문에 살해되었다?
와타나베의 죽음에 대해 일각에서는 "와타나베가 반원전을 주장하다가 도쿄전력 측에 살해되지 않았느냐"는 음모론스러운 주장이 나오기도 했다. 그녀가 죽기 직전 직속상관인 기획부장로 모시던 사람이 하필이면 후에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고 당시의 도쿄전력 회장 카츠마타 츠네히사였으므로 와타나베가 반원전을 주장하자 카츠마타가 마뜩찮게 여겨 뒷조사를 지시했다가 시부야에서 매춘을 한다는 사실을 알자 야쿠자에게 청부해서 살해하지 않았느냐는 것이다.다른 음모론에서는 카츠마타가 와타나베와 내연관계였는데 도쿄전력 상층부는 와타나베의 반원전적 성향을 거북하게 여기고 카츠마타와 거래하여 살해하게 했고 카츠마타는 이 대가로 후에 승승장구하여 사장을 거쳐 도쿄전력 회장까지 되었다고 주장한다.
와타나베가 도쿄전력의 원전 관련 비리나 은폐된 위험사고를 알게 되어 내부고발자로서 폭로하려고 했고 이를 막기 위해 도쿄전력에서 야쿠자나 중국계 삼합회를 사주하여 살해했다는 음모론도 있고 와타나베가 원전의 위험성을 지적하는 내부 보고서를 상층부로 올렸기 때문에 주류에서 배제되어 승진길이 막혀 있었다는 주장도 있다.
게다가 이 음모론은 와타나베의 아버지까지 엮여 있는데 와타나베의 아버지 타츠오 역시 도쿄전력에서 근무했으며 도쿄대학 공학부 졸업 후 도쿄전력에 입사했고 공무부 부부장을 지낼 때 미래의 임원 후보였으나 원전의 위험성을 알리며 반대하는 보고서를 올렸다가 임원 코스에서 내려지고 와타나베가 게이오대학 2학년 시절 암으로 사망하였는데 와타나베가 이런 아버지의 뜻을 이어 원전의 위험성을 알리는 활동을 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물론 이 모든 주장이 사실인지는 전혀 알 수 없다.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고라는 엄청난 사건을 터트린 도쿄전력이기 때문에 이런 음모론이 돌 뿐인지도 모른다. 일본 음모론자들은 자민당과 도쿄전력, 원자력 발전의 커넥션을 심도 깊게 믿는다.
7. 기타
- 일본에서는 흔히 ‘도쿄전력 OL 살인사건’으로 보도되었고 명칭도 그렇게 부르고 있는데 ‘OL’은 ‘오피스 레이디’를 줄인 일본식 영어다. 오피스 레이디는 전문직 여직원보다는 사무보조 여직원 쪽에 가깝고 야스코처럼 간부급 고위직에는 어울리지 않는 명칭이다. 이 때문에 사건 명칭부터가 일본의 뿌리깊은 성차별을 상징한다는 평이 있다.
- 고빈다에게 2심에서 유죄 판결을 한 타카기 토시오(高木俊夫) 재판장[10]은 뒷말이 많은 사람으로 유명했는데 부라쿠민의 엔자이 사건으로 유명했던 사야마 사건의 2차 재심청구를 기각한 전력이 있고 아시카가 사건의 항소심도 기각했다고 알려져 지탄을 받기도 했다. 고빈다가 1심에서 무죄판결을 받았음에도 석방하지 않고 재구류를 명한 도쿄 고등법원 판사는 후에 미성년자 성매매 사건에 연루되어 법조인 자격을 박탈당하기도 하는 등 일본 사법부의 막장성이 드러나기도 했다.
- 고빈다는 2013년 부당하게 구류된 것에 대한 형사보상청구를 해 약 6800만엔(2023년 5월 환율 기준으로 약 6억 8천만원)의 보상금을 지급받았다. 2017년 11월 아내와 함께 다시 일본을 방문했고 일본 매체와 인터뷰도 했다. 취재에 의하면 고빈다는 일본 교도소 수감당시 겪은 끔찍한 생활[11]이나 인간들을 지금도 꿈에서 보며 그 악몽으로 잠을 설치곤 한다고 했다. 15년간의 수감생활로 인한 공백이 너무 컸기 때문에 네팔에서도 일을 찾지 못해 무직 상태라고 한다. 다행히 보상금으로 생활은 문제가 없지만 일본 정부에게 빼앗긴 소중한 자신의 인생 15년은 돈으로 살 수 없다고 호소했으며 잘못된 수사로 진범을 놓친 일본 경찰과 사법부에 대해서도 강하게 비난했다.
8. 관련 항목
9. 외부 링크
- 팟캐스트 프로파일러 배상훈의 CRIME - 칠순장 살인 1: 낯선 여인숙에서 발견된 도쿄전력 여직원의 시신
- 팟캐스트 프로파일러 배상훈의 CRIME - 칠순장 살인 2: 손톱 밑과 체내에서 발견된 DNA는 무얼 말하나?
[1] 메이지 시대부터 게이샤 등이 많은 환락가로 매우 유명한 곳이다. 2019년에는 도쿄도에서 이 일대를 폭력단배제특별강화지역으로 지정하였다.[2] 후에 범인으로 누명을 쓴 고빈다의 지인으로, 고빈다에게 그 방을 빌려준 상태였다고 한다.[3] 한국으로 따지면 인천광역시에서 서울특별시 중구 명동 정도의 거리다.[4] 보통 일본에선 지방의 고위직으로 영전시키는 식으로 좌천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사노 신이치의 주장을 무리라고는 할 수 없다.[5] 일본의 명문 사립학교재단은 유치원부터 대학까지 전 과정을 가지고 있어 한 번 입학하면 별도의 입시 없이 상급학교로 진학하여 대학까지 졸업할 수 있는 경우가 많다. 이를 일관제라고 하는데 일관제 유치원이나 학교에 입학하기 위한 경쟁도 치열하다. 다만 성적이 막장이면 내부진학이 불가능할 수도 있으며 의학부 같은 곳은 상위 몇% 이내에 들어야만 내부진학이 가능하다.[6] 즉 정규직 사원이지만 단순 업무만 맡는 일반직. 한국으로 치면 마치 무기계약직 비스무리한 개념이라고 보면 된다. 예나 지금이나 일반직은 남자 비율이 20%도 안 될 정도로 매우 낮고, 남자 취준생들은 대부분 생각하지도 않는 경향이 크다.[7] 간부로 승진할 수 있는 코스. 사실 그때나 지금이나 일반 남학생들은 종합직 취업이 일반적이다.[8] 6년 동안이나 매일 낮에는 직장에 근속하면서 밤에는 여러 명을 상대하는 성매매를 하고 귀가하는 극한의 생활을 반복하는 것은 강박증이라고 밖에 설명이 안 된다.[9] 딸과 똑같이 도쿄전력에 다녔으며 공무부 부부장을 역임했고 50대에 암으로 사망했다.[10] 2008년 사망[11] 일본 경찰에게 폭행도 많이 당했다고 한다.[12] 영문 제목은 <Guilty Of Romance>고 한국에선 <길티 오브 로맨스: 욕정의 미스터리> 라는 제목으로 소개되었다.